별 기대 없이 봤는데 눈물을 줄줄 흘렸다. 아니 거의 엉엉 울었다고 해야겠다. 몇 년 전 시튼의 <동물기>를 찾아 헤맸던 때가 있다. 유년기에 읽었던 늑대와 곰의 이야기는 마치 우직한 사람의 이미지로 내게는 남아있다. 후각이 발달해 바람 결을 따라 먹이 냄새나 적의 냄새를 분간하는 것도 SF처럼 멋졌다. 배우자에 대한 정절과 사랑도 절절했다. 이 모든 게 말이 없는 동물이기에 상상의 여지가 있어서 내가 좋을대로 생각한 것 같다. 말하는 인간 세계에 말 없는 늑대소년은, 내 가슴 속 깊은 곳에 잠자고 있는 동화에 쌓인 먼지를 털어낸다.
이 이야기도 기본 플롯은 "세상에 없는 사랑"이므로 사랑의 삼각형이 등장한다. 순이를 좋아하는 두 인물이 있다. 말이 많아서 저렴해 보이는 지태와 말이 없어서 충직해 보이는 늑대 소년 철수. 철수한테 언어를 빼앗아 버린 건, 영리한 장치다. 말을 할 수 없어서 철수는 자신의 상황을 설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수난을 당한다. 근력이나 골밀도가 코끼리같아도 이건 동물 세계에서나 먹히는 수단이다. 말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인간 사회에서 과도한 물리적 능력은 괴물이다. 그러니 순이와 동네 사람들, 관객은 철수의 온순함을 알고 있기대 몇 몇 악당 혹은 그를 괴물 취급하는 사람들한테 보호해야한다는 정의감이 발동한다. 학대 받는 약자한테 동정심이나 애정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물며 충성을 하는 철수가 아닌가. 순이가 훈련시킨대로 기다릴 줄도 알고 글자도 배우고. 순이가 위험하면 변신해서 악당을 물리치기도 하고. 착한 철수가 받는 대가는 순이의 사랑이고. 이 사랑이 이성간에 일어나는 감정일 수도 있지만 청소년기의 순진한 이들로 설정되어 있어서 오히려 반려견과 주인의 애정같은 느낌도 있다. 내가 통곡을 하게 된 이유도 19년을 가족 구성원으로 함께 했다 결국 안락사를 당한, 우리 강아지가 생각나서다.
개를 키워 본 사람만이 아는 게 있다. 개도 눈빛으로 말하는 것을. 우리 가족도 개를 앉혀 놓고 말을 가리키곤 했다. 엄마, 아빠, 언니..물론 개는 입에서 멍멍 하는 개의 언어만 말할 뿐이다. 그러나 눈망울을 보면 곧 입에서 멍하는 소리 대신 언젠가 정말로 엄마, 아빠라는 단어를 말할 거 같은 확신이 든다. 순이가 철수한테 말과 글을 가르치는 게 욕심이 아닌 지극히 현실적 상황이다. 판타지는 상황이 만드는 게 아니라 그 상황에 있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거다. 모든 애견가들은 늘 판타지 속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내 개인적 경험 때문인지 이 영화를 지극히 있을 법한 이야기로 받아들였다. 생체 실험 실패로 변이된 늑대 소년, 악랄하고 찌질한 지태, 그리고 순이, 순자의 엄마. 이 분 아줌마 캐릭터 전문인가. <이웃사람>에서도 세상에 무서울 거 없는, 거침없는 아줌마로 등장해서 웃겼는데 여기서도 그 재밌는 캐릭터시다.
허구적이었던 건 47년 전 한 시골 마을을 무대로 벌어지는데 그 풍광과 햇빛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방식이, 마치 BBC 고전극에서 볼 수 있는 목가적 풍경이다. 부유한 성주 소유의 땅에서 벌어지는 유유자적해 보이는 부러운 풍경이다. 한국전쟁 직후라면 아이들도 좀 꼬질하고 해야하는 거 아닌가. 그 시대에 있을 거 같은 아이들과 시골 풍경이 동화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마음에 안 드는 엔딩 시퀀스. 엔딩 시퀀스 때문에 영화는 확 깼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순이란 할머니는 거울을 보며 자신의 얼굴 주름을 보고, 이런 괴물이 있나..하고 중얼거린다. 그리고 플래시백이 영화 내용이다. 그리고 엔딩은 다시 순이 할머니. 할머니가 늑대소년 철수를 다시 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