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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패러독스 - 시간이란 무엇인가
필립 짐바르도.존 보이드 지음, 오정아 옮김 / 미디어윌 / 2008년 10월
평점 :
절판


 

  자기 계발서에 머리 박고 살면 지옥 간다. 처음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자기 개발서는 멀리하니, 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다행히도 최근 그 이유를 깨달았다. 자기 계발서에 머리박고 있으면 지옥가는 이유는 바로 ‘적응’ 때문이다. 자기 계발서는 현실이 엿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파고들어, 바로 코앞에 희망을 들이밀며 적극적으로 적응할 것을 독려한다. 한마디로 희망고문. 여기서의 적응이란? 바로 지옥에 관한 적응이다. 세상, 그러니까 시스템이 후져 빌빌 기는 독자에게, 그 세상에 적응할 것을 독려하는 것이다. ‘내가 희망을 줄게, 그러니 그냥 처박혀서 내일을 꿈꾸렴.’ 그렇기에 수 많은 자기 계발서의 주요 모토,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나’다. ‘나’가 문제고 ‘나’를 바꿔야 한다. ‘아... 내가 문제구나’하며 적응 - 안주하는 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잠에 대한 욕구, 죽음 충동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니 지옥일 수밖에.

  타임 패러독스 역시 자기 계발서와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러니까 원제의 ‘Change Your Life’를 보듯 삶의 전환이지, ‘시간은 무엇인가?’란 질문은 하지 않고 있다고 보면 된다. 책 속 시간관들 중 미래지향적 시간관을 긍정하며, 미래지향적 시간관이 왜 긍정적이고 필요한지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 데서 볼 수 잇듯, 철저히 ‘Change Your Life’를 위해, 자기 계발서들이 반복하는 행로를 향한다. 어떻게 살아야, 시간을 실용적으로 활용하고, 안정된 삶을 살고, 행복할 수 있고, 잘 사랑할 수 있고, (가장 중요히 언급하는) 경제력을 키울 수 있는지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가히 자기 계발서 총집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앞서 말했듯 이 책은 미래 지향적 시간관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러면서 ‘미래’에 반대되는 시간관으로 ‘현재 지향적 시간관’을 들고 있는데, 이 시간관의 주요 문제는 미래에 대한 망각이라고 한다. 그 예로 ‘현재 지향적 시간관’에 속한 사람 대부분이 술, 마약, 섹스, 로큰롤에 ‘중독’되어 있다고 한다. 여기서 저자들이 무슨 태도를 지니고 있는지 볼 수 있다. 섹스까지는 너그럽게 마음먹으면 용인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계는 있는 법이다. 로큰롤에 대한 입장에서 저자들의 태도의 문제는 적나라하게 들어난다고 생각한다. 음악에 대한 중독도 아닌, 로큰롤(난 로큰롤 팬이 아니다)이라는 특정 장르의 부정에서 볼 수 있듯, 이 책은 철저히 기득권적 생활관에 의해 작성된 것이다. 그럼으로 저자들이 긍정하는 삶이란, 백인 중산층의 삶이다. 그런 환경에 가족의 결단력이 높은 집안일수록 미래 지향적이며, 대부분의 하류층과 사회부적응자들은 현재 지향적이라는 것이다.

  저자들은 미래 지향적 시간관과 현재 지향적 시간관을 이분하고, 미래 지향적 삶을 긍정하며 우위에 놓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책 속 시간관들의 우위를 결정하는 중요한 판단근거는 ‘경제력’이다. 미래 지향적 시간관과 현재 지향적 시간관 중, 미래 지향적 시간관을 긍정할 수 있는 이유는, 미래 지향적 시간관을 지닌 이들 대부분이 상류층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자들의 긍정할 만한 삶과 부정할만한 삶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은 경제력인 것이다. 그러한 시선이 가장 적나라하게 들어나는 부분이 있다.

300p - "'시간이 돈임을 기억하라' - 벤자민 프렝클린...(중략)... (이 말에) 3가지 지혜 덩이리가 있다. 1)시간은 소중하다. 2)시간은 근면한 노동을 통해 돈으로 바뀐다. 3)시간이 흐르면 투자한 것의 가치가 복리로 증가한다."

그러니까 저자들이 가장 긍정하는 삶이란, 미래 지향적 시간관을 가지고, 지금 당장 주는 쾌락에 목매달지 말고, 시간을 훌륭히 활용해 철저히 실용적 인간이 되어, 돈으로 전환되는 노동을 감사해 하며 백인 중산층 생활을 하는 것이다. 저자들이 시간을 그리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하나다. 바로 돈이기 때문이다.

  저자들이 요구하는 삶은 무엇을 풍요롭게 하는가? 독자를? 책 속에 긍정하는 삶을 실천하는 이를? 아니죠. 시스템을 풍요롭게 하는 거죠. 그 시스템이란? ‘자본주의’지 뭐. 저자들이 요구하는 삶은, ‘자본주의’를 열렬히 긍정하고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자들이 요구하는 삶이란 철저히 자본주의형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들은 사활을 걸고, 노동과 소비 - 경제활동의 활성화를 깨뜨리는 마약, 술, 섹스 그리고 로큰롤에 대한 ‘중독’을 예방하고, 시간을 훌륭히 활용해 실용적 혹은 경제적 인간을 만들고, 미래 지향적 삶의 필수 요소 중 하나인 가족 결속력의 중요성을 통해 안정적 경제 활동의 기반을 다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의 구성이 시간 심리학의 이론을 굉장히 희박하게 다루며, 그 희박한 이론을 가지고 사랑, 행복, 비즈니스, 정치, 경제에 대입하여 풍요로운 삶을 그리기 위해, 그것을 주입시키기 위해 대부분을 할애하는 것이다.

  ‘저자가 긍정하는 삶’에 대한 주입이 가장 잘 들어난 것이 ‘나는 누구인가’ 테스트다. 이 테스트는 총 3번 등장한다. 테스트의 주요 목적은 내가 누구인지 적는 것이지만 3번의 테스트가 조금씩 다르다. 중요한 것은 왜 한번에 몰아서 질문하지 않고, 3번에 나누냐는 것이다. 테스트가 나누어진 것은, 독자 스스로 ‘책이 긍정하는 삶을’ 긍정했다고 여기게 하기 위함이다. 테스트의 과정을 보자. 테스트 사이사이 미래 지향적 시간관에 대한 긍정의 이유와 실례를 들어 미래 지향적 시간관의 중요성을 이해시킨다. 그러니까 1번 테스트와 2번 테스트 사이 미래 지향적 시간관의 긍정을 설명하고, 2번 테스트를 하게 하는데 그로인해 미래 지향적 시간관에 (자연스레) 좀더 치우친 생각을 가지고 작성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3번 테스트로 향하면 그 치우침은 더 늘 것이다. 테스트의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이고, 그것을 ‘내’가 적기에 주관적 작성이라고 여기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미래 지향적 시간관을 긍정했다고 여기게 한 후, 책은 철저히 자기 계발서들이 지니고 있는 컨벤션에 부합한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커피한잔을 마시며 지그시 눈을 감으니 희망이 코앞에 다가왔다고 느껴질지 모른다. 그렇게 희망을 부여잡고, 시스템에 적응하며 노력하겠지. 그러나 이상하게 이 구렁텅이에서 쉽게 빠져 나오질 못한다. 그럴 때마다 다시 책을 피며 이렇게 외친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자나!” 이게 바로 희망고문의 표본이다. 이렇게 모든 문제를 나로 돌리고, 그로인해 표출될 외침을 차단하고, 적응을 긍정하는 것은 스스로 지옥을 만드는 길이다.

  난 충분히 대한민국이 지옥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자기 계발서의 인기, 대중음악들이 곧장 hook으로 달려가는 모습(백지영의 ‘총 맞은 것처럼’), 개그 코너가 인기를 끌면 맥락을 자르고 웃음이 발생되는 요소만을 남기는 모습 등은 결국 철저히 하나를 외친다. 바로 ‘적응’. 애초에 창조를 거부한 것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 똑같은 구성이지만 하이라이트만으로 조합해 재미를 느끼는 건 적응인 것이다. 나아감이 없이 주저앉는 것, 그 안주하고 안일하려는 몸부림, 결국 자꾸만 잠에 빠져들려는 것, 바로 죽음 충동이다. 그렇기에 수많은 적응에 대한 외침들에 굳이 이 책을 더 보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보태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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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prtmtjs 2008-12-23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저도 자기 계발서 책들을 보면서 허전함을 느꼈던것에 대한 답을 찾은것 같네요... 여간 해선 답글은 안 쓰는 데;; 님의 말을 보고 많이 놀라고 감동 했습니다. 요즘 많이 힘들어서 책을 많이 보았는데, 책 보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은 아니다'라는 의견을 보니 기분이 많이 좋아 졌습니다. 많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분 같아요. 많은 도움이 됬습니다. 다음에도 좋은 글 많이 올려주세요.
 
오즈 야스지로 컬렉션 4 - 명랑하게 걸어 + 그날밤 아내 + 동경합창 + 청춘의 꿈은 어디에 + 비상경계선의 여자
프리미어 엔터테인먼트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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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난 불현듯 존 포드의 영화를 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엄청나게 볼 것 같은 처음의 기분과 달리, 고작 3편을 보았다. 허나, 리오브라보와 조우하며, 내가 왜 존 포드를 ‘불현듯’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는지 깨달았다. 지금 존 포드를 보는 건, 상실에 대한 위안이다. 좀더 존 포드를 보려 했지만, 현실적인 제약과 게으름 탓에 미루어졌고 다시 시작하려던 중 ‘불현듯’은 다시 찾아왔다. 난 불현듯 오즈의 ‘그날 밤 아내’를 봐야겠단 생각이 든 것이다.

  살이 전부 발린 생선 위에 타이틀이 뜨고, 그 타이틀 롤을 지나 거대한 건물 앞 경찰이 보인다. 어두운 밤 (무성영화지만)구두소리 내며 걷는 경찰의 모습은 장르적 감성을 짙게 풍긴다. 그러한 감성에 대답하듯, 딸의 치료비를 훔친 슈지가 나타난다. 슈지를 잡으려는 경찰과 딸에게 향하는 슈지는 추격전을 벌인다. 영화 속 인물들은 (아마도) 도심지에서 추격전을 벌이고 있다. 그 도심지의 건물들은 죄다 서구식 건물들로 이루어졌는데, 그 건물들 앞의 일본인들은 과장되리만큼 왜소해 보인다. 거의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아니 그 부자연스러움이 폭력적이라고 느껴진다. 그 때문인지 슈지가 거대한 서구식 건물들에서 벌이는 추격전은 딸에게 도착하기 위한 도주라기보다, 거대한 서구식 건물의 숲에서 빠져나기 위한 절박한 몸부림으로 보인다. 이는 마치 근대화를 벗어나기 위한 절박한 몸부림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징후는 슈지의 집에서도 볼 수 있다. 벽에 적힌 영어, 외국 포스터, 서구 생활양식 등이 질서를 갖추지 못하고 얼룩처럼, 슈지의 집에 널브러져 있다. 영화 속 주요 공간인 집 안은 분열의 표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난 오즈를 순서대로 만나지 못하고, 후기 대표작들을 우선적으로 만났다. 이는 즉, 오즈의 인물들이 일본의 전통 건축물에 있거나, 근대화와 일본의 전통이 접점을 만나 정돈된 후의 건축물에 생활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익는다는 소리다. 그렇기 때문인지 ‘그날 밤 아내’의 슈지의 분열증적 성격을 띠는 집, 그러니까 일본 전통 건축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서구와 전통의 접점을 잡은 건축물도 아닌 곳에 있는 오즈의 인물들은 굉장히 낯설다. 그리고 그러한 건물 속 인물들 또한 굉장히 부자연스럽다. 의자에 앉아서 졸거나, 경직된 움직임이나, 침대에 기대어 조는 모습, 단 하나뿐인 침대 등을 보면 알 수 있듯, 인물들은 그 건물에서 한없이 부자연스럽다. 그러니까 인물들은 강제로 떠밀리거나 내던져진 상황에 놓인 듯, 안절부절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화가 발생시키는 부자연스러움이 배어 있는 이 영화에서 주목할 점이 있다. 바로 불가역성이다. 영화 속 인물의 동선이나, 카메라 무브는 불가역성에 갇혀 강제성이 느껴지는 움직임을 보인다. 인물들은 구도상 미장센이 만든 흐름과 숏이 바뀌어 마련한 빈 공간을 통해 끌려오듯 움직인다. 카메라 무브에서는 불가역성이 더 눈에 띈다. 특히 인물이 아닌 사물을 잡을 경우가 그러하다. 사물이 카메라에 잡힐 경우, 사물들의 배치나 그 생김새로 인해 생기는 선 또는 사물의 크기 차이로 인한 운동을 만들어 낸다. 카메라는 그렇게 생성된 운동에 종속된 것 같은 움직임을 보인다. 영화는 이렇게 불가역성을 짙게 배고 있는데, 이런 점에 근거할 때 아내의 존재는 의미심장해진다.



  영화에 제목에서 강조한 것치곤, 이야기 흐름상 아내의 비중은 그리 크다고 할 수 없다. 허나 이 영화의 불가역성이란 관점 하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아내가 맡고 있다. 슈지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집안에서, 아내는 남편을 기다리며 창밖을 내다본다. 남편이 오게 될 길을 바라보는 숏은 아내의 시점 숏이다. 이 시점 숏은 굉장히 중요하다. 이 숏은 영화의 마지막, 남편이 체포되어 끌려가는 숏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 숏 역시 위에 언급한 것처럼 구도상 미장센이 만든 흐름으로 남편이 체포되어 떠나갈 동선을 지목하고 있다. 불가역성을 내포한 숏 중 하나란 것이다. 그러니까 아내는 남편이 떠나가는 것이 불가역적인 것임을 목격한 것이다. 불가역성에 대한 유일한 목격자는 아내이다.

  절박한 도피의 제스쳐에도 불구하고, 집안까지 침투해 생활양식에 혼란을 가져온 근대화는 불가역적인 위치에 놓여있다. 회피가 불가능한 것이다. 불가역적 근대화로 인해 경찰의 인정을 거부하고 슈지는 자수를 결심한다. 법 테두리 밖에 있는 인정으로 인해 도피의 기회를 얻지만, 슈지가 법에 순응하는 이유는 그것이 아버지의 자리를 상실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 테두리에 존속, 근대화에 대한 순응만이 딸의 인사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자리 잡게 하는 것이다. 수갑을 차고 경찰에게 연행되는, 근대화에 순응하는 남자를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 무기력하게 바라본다. 여인은 불가역성을 잘 알기에, 그녀의 시점 숏에 도래한 불가역성의 결과는 한없이 무기력하다.

  난 무기력한 여인을 바라보며, 아니 여인의 무기력한 시선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지금 한국에서 이 시선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지금 한국에서 ‘그날 밤 아내’에서 아내의 위치에 서 있는 이는 지금 무엇을 바라볼까? ‘우아한 세계’에선 밖으로 떠밀려 간, 하지만 그 영화 이후 나타났을 법한 혹은 나타났어야 될 이 시선은 어디에 있는가? 아니, 그보다 홈비디오 속 시선의 대상에서 나와 시선의 주인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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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조종법] 서평단 설문 & 리뷰를 올려주세요
인간 조종법 - 정직한 사람들을 위한
로베르 뱅상 , 장 레옹 보부아 지음, 임희근 옮김 / 궁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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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선택은 힘들다. 우리의 삶에 끝없이 다가오는 자잘한 선택들의 행렬을 보고 있으면, 이 수많은 선택들이 부디 옳게 행해져야 하기에 머리가 지끈 거린다. 또 그 머리 아픈 선택을 정치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옳은 결과를 맞이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그로인해 두통, 생리통에 효능이 있는 게보린의 섭취는 늘어만 간다. 그런 노력에도 선택이 실패하면, 그래도 ‘자의’라는 명분하에 위로하고 감내한다. 허나 실패한 선택에 위로를 건네는 ‘자의’가 ‘자의’가 아니라면? 아, 상상만으로도 내 손은 본능적으로 게보린에게 달려간다. ‘인간 조종법’은 우리의 선택들이 그리 자유로운 것이 아님을 밝힌다. 이 씁쓸함이여. 저자들은 ‘조종’이라는 선정적인 단어를 들이밀며 우리가 지니고 있던, 우리가 방어막으로 삼던 자유라는 것을 허무로 치환한다.


  자유를 허무로 치환하는 마술은, 그 이름도 찬란한 ‘딱지 붙이기’, ‘만간에 발 들여 놓기’, ‘문전 박대 당하기’ 등의 기법으로 이루어진다. 이 기법들을 통해, 어떻게  자유를 상실하고, 어떻게 타인의 자유를 상실시키고, 어떻게 자유를 지킬지 예비하게 한다. 아니, 애초에 자유란 위험하고 희박했음을 인지시킨다. 저자들이 말하듯, 책 속 기법들이 성립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롭다는 ‘느낌’이다. 이쯤 되니 유지태의 목소리가 아련히 떠오른다. “더 넓은 감옥에서의 삶은 평안한가요?”


  책 속 기법들은 여러 가지지만 원리는 결국 하나다. 한 개인이 세계를 인지하는 질서에, ‘자유로움’이란 탈을 쓰고 침범해, 그 질서를 조종자의 목적에 자연스레 연결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자유롭다는 ‘느낌’이다. 자유롭다고 생각해야만, 우리의 질서가, 조종자가 마련한 상황을 거부감 없이 수렴하여 질서 속에 존속시킬 수 있다. 재미있게도, 이 책에도 조종 기법이 사용되어 있다. 조종이란 달콤하고, 그만큼 윤리적으로 위악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조종이란 단어는, 자연스레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기에 ‘인간 조종법’이라는 책을 대하는 태도가 애초에 부정적으로 굳을 수 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저자들은 책속에서 잊을만하면 ‘독자 여러분은 조종법을 위악적으로 사용하지 않을 거라 믿는다’는 식의 ‘딱지 붙이기’를 시도한다. 여기서 사용된 딱지 붙이기는 철저히, 책 속에서 요구한 수위에 맞추어져 있다. 우리의 질서를 자극하지도 않고, 원론적인 이야기를 펼치며, 우리가 자연스레 책을 판별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수준에 맞추어진 것이다.


  저자들은 조종보다 자유를, 아니 자유로운 느낌을 더 위험하다고 주장한다. 실험환경이 아닌, 실제 삶 속, 예측 불가한 변수들이 한 가득인 실제 삶 속에서, 우리는 더욱 난해한 조종에 놓여 있다. 그런 수많은 변수 속에서, 자유롭다는 느낌 하에 수많은 위험과 실수를 멍청히 떠안는 것이다. 조종으로 촘촘히 엮어진 삶을 어떻게 방지해야 할까? 저자들은 크게 두 가지를 제안한다. 하나는 ‘책 속 조종기법을 잘 숙지하라’이고,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이다. 조종법을 숙지하고, 조종의 상황을 알아차리라는 것과, 타인들과 조우하여, 자신이 세운 질서를 끝없이 자극하고 재정립하여, 정말 자연스레 조종에서 해방하라는 것이다. 저자의 두 가지 제안은 결국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바로 ‘반추’다. 자기 자신에 대한 반추, 선택에 대한 반추, 결과에 대한 반추, 그 수많은 반추는 우리를 불편하게 할지 모른다. 허나 질서 속 안락이 주는 쾌감을 부수고, 수많은 조종을 맞서기 위해 생기는 불편함이기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불편함을 반갑게 맞이하라는 저자들의 제안으로 인해, 난 이 책이 단순히 실용서로 치부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질서를 부수는 것을, ‘자연스레’ 긍정하게 만드는 ‘조종’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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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8-12-16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도서였는데 리뷰를 보니 굉장히 신선한 시각과 견해를 담은 책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자유로운 느낌 조차도 조종이라는 거죠? 그래서 그 자유로운 느낌에 의존하기 보다는 불편함을 수용하고 재정립하는 용기와 반성의 필요성. 뭐 대략.. 이런 내용이 아닐지... 추측해 보았어요. 다음에 기회되면 꼭 읽어볼께요.

참. 전 게보린보다는 타이레놀을 찾는데 ㅋ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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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편지
정민.박동욱 엮음 / 김영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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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F가 함께한 지난날을 떠오르게 하는 요즘, 다시 유행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고개 숙인 아버지가 되겠다. 그러한 모습들에서 상기되는 추억 때문인지, 체감 온도는 그 추억의 시간에 비해 한결 따스해도, 사람들의 표정은 그 추억의 시간 못지않게 얼어 있다. 너무 얼어 있어서, 손이 시려워 꽁!을 외치고 싶을 정도다. 살려 주세요. 좀 살게 해주세요. 이 곡소리가 고막을 울리진 않지만, 머리에선 쉼 없이 울리고 있으니, 내가 미쳤는지 의심이 된다. 정신 질환이 의심되어 정신병원을 가니, 한 아이의 아버지인 의사 선생님은 한껏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냥 나올 수밖에. 이런 서늘한 시기 우리에게 도착한 편지가 있다. 누가 보냈는지 살펴보니, 편지가 무겁게만 느껴진다. 발신인은 ‘아버지’, 어~마나! ‘아버지의 편지’다. 오랜만에 받아보는 편지를 만지작거리며 생각한다. 이 편지가 ‘지금’ 도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편지의 존재를 누구에게 물어야 하나? 멘토를 잃은 지금, 아버지를 잃은 지금 누구에게 물으리. 숙고 끝에 다가간 아버지들은, 고개를 숙인 체 눈길을 피해버리니, 혼돈이 가중될 뿐이다. 아버지들은 유령이 되어버린 체, 유령처럼 가족이란 울타리만 침울히 떠다닐 뿐이다. 그렇다. 지금, 아버지란 존재들은 유령이 되어버렸다. 그 유령들은, 별말이 별로 없고, 자학적이며, 경쟁하듯 주름을 늘리고 고개를 숙이고, 조직 내의 자신의 위치를 미칠 듯이 부정한다. 이런 상황에서, 오이디푸스 같은 건, 잔인한 농담일 뿐이다. 프로이드가 무덤에서 나와 지금 남한으로 오면 미칠거야. 우린 죽일 아버지조차 없다. 유령이 되어버린 아버지들에게 우린 무얼해야 하나? 위로? 그들의 고개를 숙이게 한건 누구 혹은 무엇일까? 사라지듯 투명해져 버린 아버지란 존재는, 그러니까 유령이 되어버린 원인은 무엇 때문일까? 누구 때문일까? 그 범인은 바로, 유령이다! 즉, 아버지 자신들이 스스로 떠맡은 것이다.

  아버지들이 유령을 자처했다는 증거가 있다. 우리 남한 사회, 좀 산다하면, 운명처럼 내려 받는 작위가 하나 있다. 그 작위는 오직 한 종족만을 위한 것이니, 그 종족은 바로 아버지다. 그렇다면, 그 작위란 무엇일까? 바로 기.러.기. 그 장엄하게 돈 냄새 풍기는 작위는 오직 아비라는 자들만 받들 수 있다. 기러기 아빠란, 현 남한 사회의 아버지들의 실태를 고스란히 들어내는 칭호다. 그 칭호를 부여받음으로, 그들은 가장의 역할을 포기했다. 그 기러기 아빠들은, 통념적 아버지와 같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그들이 기러기 뒤에 ‘아빠’란 것을 다는 충족 조건은 오로지 ‘경제력’뿐이다. 거추장스러운 것 다 필요 없어! 돈만 있으면, 좋은 남편, 귀감이 되는 아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요상한 주문은, 그들이 조류임을 입증하듯, 조류독감 마냥 사방에 퍼져버렸다.

  아버지의 상징이 ‘기러기’인 요즘, 단언컨대 ‘경제’란 단어의 발음이 쉬웠더라면, 아버지들은 경제라 불렸을 것이다. 그것이 어렵다고 필사적으로 거부하는 아기들에게, 이 시대의 ‘아버지’들은 감사해야 한다. 그만큼 그들은 돈과 자신들의 물리적, 상징적 위치를 교환했다. 여기서 ‘부정’따위 언급하지 마시라! 이 모든 고통은 당신들이 선택 했으니. 그 선택을 행한 시간을 잊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바로 올해 초, 아버지란 이들은 ‘다’ 필요 없으니 경제‘만’ 살리라는 선택을 했다. 그 고귀한 선택을 한 뒤, 아랫 것들이란 소리를 하면 곤란하다. 우리도 돈을 아버지로 섬기기 싫었단 말이다. 허나 이건 돌연변이처럼 튀어나온 결과가 아니다. 현재의 아버지들의 모습을 예견한 영화가 있으니 바로 한재림 감독의 ‘우아한 세계’ 되겠다. 극 중 주인공 송강호가 결국 기러기 아빠의 위치를 선택한 후, 외국 유학 중인 가족들의 홈비디오를 보며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에서 우리가 눈물을 꾹 참고 웃음을 터뜨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자기 무덤 자기가 파는 삽질을 보고 웃지 않을 수 있으랴.

  아버지가 유령이나 기러기가 되어버린 지금 도착한 '아버지의 편지'는, 그 결여의 자리를 채우려 한다. 돈이 아닌 아버지라면 했을 법한 조언과 잔소리들이 몇백년의 시간을 거쳐 도착한 것이다. 그 몇백년의 간극은, 그만큼 참된 아버지의 소리를 찾기가 힘들었음을 뜻한다 생각한다. 참 된 공부를 해라, 남을 흉보지 마라, 자만하지 마라, 사람을 대할 때 항상 공손히 해라 그리고 돈에 홀릴 바에 차라리 배고프고 청렴하게 사라라 등, 우리의 아버지들에게 듣고 싶은 말들이 고스란히 적혀 있다. 너무도 당연한 소리들을 우리는, 아버지들에게 듣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책에 담겨있는 어른들의 편지가 한껏 무거워만 보인다. 그리고 값지다. 허나 이 값짐은 비극이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밝혔듯, 책 속 글들은 소박한 잔소리로 가득하다. 우리는 여기서 슬픔을 느껴야 한다. 우리가 왜 ‘잔’소리를 책 속에서 각 잡고 들어야 하나? 아무리 이황, 백광훈, 유성룡, 이식, 박세당 등이 굉장한 어른이지만, 그 어른들의 명성만큼 큰 깨우침도 아닌 소박한 잔소리를 ‘읽어야’할까? 왜 우리의 아버지들은 그 당연한 잔소리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체 돈을 내밀야만 하나? 왜 그 돈으로 '아버지의 편지'를 굳이 사서 읽어야만 하는 것인가? 아버지들이 제 역할만 했더라면 종이 낭비였을 책이 값지게 된 건 제 역할을 못하는 아버지들 탓이다. 변명처럼, 페이지를 채우고 있는, 편지들의 원문들은, ‘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좀 해’라고만 보인다.

  난 가부장을 혐오한다. 죽어라 목을 세우고, 가족의 희생을 담보한 체, 남자 놀이하는 놈들은 때려죽이고 싶다. 허나 자식들에게 윤리적 노선의 제시해야할 아버지는 존재했으면 한다. 귀감의 존재가 있으면 한다. 우리의 아버지들이 더 이상 돈을 내밀지 말고, 참된 꾸중과 격언을 내밀길 바란다. 아버지의 편지를 읽는 것이 아닌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그렇기에 난 진심으로 ‘아버지의 편지’가 무용(無用)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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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에로스] 서평을 올려주세요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 내 몸을 바꾸는 에로스혁명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6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 서점에 가면 온갖 설명서들이 판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놀랄 일도 아니다. 설명서들이 빼곡히 들어찬 서점의 모습에 놀라움이 들지 않는다. 다만 씁쓸할 뿐이다. 그만큼 설명서들이 점령한 서점은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부동산, 증권, 수능전략, 입시전략, 연애 등등, 서로들 이렇게만 하라며 난리를 친다. 자본주의의 패악이 극을 치닫는 지금, 사람마저 상품화 되었다. 서점을 메우고 있는 설명서들의 존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마저 상품이 되었기에, 그 상품 사용법을 설명해 주겠다며 교태를 부리며 진열되어 있는 것이다. 참혹한 광경이라 생각되는데 그나마 다행인 건, 그 책들이 끊임없이 출간 되어 자신들의 존재가 유능하지 못함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그 책들이 명쾌한 척 품고 있는 설명들이 쓸모가 없기에 그 책들의 수요가 끊이지 않는 것이다. 그럼으로 다행히도 인간은 상품이 아닌 것을 나타낸다. 역설적인 희망이라도 남아 있으니 다행이다.

  서점을 당당히 장악하고 있는 설명서들이 설명하려는 것은, 결국 현재 우리가 가장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욕망을 파고들어, 찬란한 환상을 서술하며, 그 환상이 현실로 치환할 수 있다며 주문을 거는 것이다. 숭그리 당당 숭당당. 이건 야동보고 자위하며, 눈앞에 그녀가 실재라고 믿는 것과 같다. 결국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녀는 ‘종료’되어 사라지고, 현실에 남는 건 발그레한 손과 구겨진 휴지 쪼가리뿐이다. 몰려드는 허무함이여! 백번 양보하여, 자기 계발서들이 주장하는 설명들이 현실에 발을 딛고 있다고 치자. 그래봤자, 그 책들이 주장하는 것은, 환경을 바꾸지 않고 그 환경에 ‘나’를 적응 시키라고 독려하는 것뿐이다. 명쾌하게 해결되었으면 좋겠다는 현재의 상황을, 품고 있는 환경이 변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주위가 시궁창인데 나를 시궁창에 적응시킨다고, 삶이 윤택해질까? 결국 위대한 쥐새끼일 뿐이지 않을까?

  시궁창 속에서 벗어나지 않고 적응하기 위해 설명서를 탐독하니 변화가 없다. 설명서가 제시하는 환상에 눈이 사로 잡혔기에, 코를 쑤시고 드는 악취에 골이 띵해도, 자신의 주위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궁창은 무엇이고, 그 시궁창 속 우리가 쓰고 있는 쥐의 탈은 무엇일까? 개인적인 생각에 시궁창은 경제에 미쳐버린 현재의 남한이고, 우리가 쓰고 있는 쥐탈은 상품화다. 경제적 가치로 모든 것을 제단하고, 그럼으로 사람 또한 경제적 가치를 매겨 상품화 하며, 그것이 곧 그 사람의 가치로 여겨지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그러니 우리가 설명서를 보며 꿈꾸는 환상 속에 있던 행복이, 이 땅위에 중력의 법칙을 받으며 우리 옆에 함께하기 위해선, 시궁창이 내세우는 실용성을 내다버리고, 탈을 벗고 인간으로써 존재해야 할 것이다.

  ‘호모 에로스’는 우리에게 시궁창에서 벗어나 인간으로서 우뚝 서서 사랑하자고 제안한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사랑을 위해 설명서가 필요하게 되었는지 밝히고, 시궁창을 인지하고, 탈을 벗자는 것이다. 우리의 주변에 널린 사랑들을 추적해가며, 그 환상의 껍데기를 뜯어내어 우리가 여태 꿈꾼 것이 무엇인지 들어낸다. 그 환상의 껍데기를 이루고 있는 것들은 차, 돈, 외모, 순정, 쿨, 통속 및 영원 등이다. 우린 그런 껍데기로 만든 모피를 입고 카페, 백화점, 차안, 모텔 등을 섭렵하며 데이트한다. 아니 저자의 표현대로 ‘쇼핑’을 한다. 그것이 우리가 아름답고 신성하다고한 데이트다. 그렇기에 우리의 사랑의 가장 큰 장벽은 돈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내가 주거나 받는 선물의 가치가, 거기에 투여된 돈으로 매겨지니 이 얼마나 분통 터질 일인가? 허나 이러한 메커니즘에 쉽사리 문제제기를 못한다. 브라운관에서 끝없이 터져 나오니, 또 그것을 선남선녀가 이상적인 것이라 주장하니,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 어머나! 저게 사랑이야. 그 브라운관 속 사랑들은 순정의 탈을 쓰고, 쿨의 탈을 쓰고 우리들의 감정을 파고들어, 그 잘난 사랑이 품고 있는 실체의 앙상함을 가린다. 우리는 신파에 펑펑 울며 눈물로 눈을 가리고, 쿨 한 원나잇이 제시하는 살갗에 눈이 가려져 핵심을 보지 못한다. 이러한 현대의 사랑을 정리하는 말이 책 속에 새겨져 있다. 그것은 바로 ‘둘이 대화하기 위해 돈을 써요’ 혹은 ‘돈을 쓰기위해 둘이 함께해요’ 펑펑 돈 쓰며 이야기하기. 이것이 우리의 사랑.

  책은 이런 우리의 사랑을 맑스, 니체, 스피노자, 에리히 프롬, 동의보감, 들뢰즈 등을 언급하며 얼마나 황량한지 증명하려 한다. 그 언급은 상당수 ‘아포리즘’으로 제시된다. 과정 없이 원론적인 것이 던져진다 할 수 있다. 물론 그 사이사이를 저자가 촘촘히 메우고 있다. 책의 가독성이 높음에서 알 수 있듯, 툭툭 내던지 듯 쓰여 있어, 원론적이고 저돌적인 모습 같아 보이긴 한다. 여기서 우리가 당연한 소리를 한다며 투정하는 것은 다소 성급하다. 자기 계발서들이 배설하는 정보들이 이상적이고 원론적이 되어 버린 지금, 진짜 원론적인 것들을 인지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원론인 척 하는 것을 없애기 위해 원론을 들어내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 책을 읽으며 ‘너무 원론적이다’라고 느낀다면 상당히 긍정할만한 것이다. 우린 썩지 않았어! 허나 책의 성격이 원론적인 것이 강하고 저돌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킴에 생기는 문제가 없지 않다. 특히 동의보감을 상당히 중요히 다루지만, 그 이론을 단도직입적으로 제시되어, 너무 허공에 뜬 느낌이 강하다. 저자에게는 당연할지 모르지만, 그러한 것들에 동의가 형성되지 않은 마당에 믿으라하니 가끔 당황스러움이 생길 수 있다. 다른 많은 철학자들의 아포리즘 또한 그들을 읽었다는 전제가 없으면 허공으로 떠버리는 경향이 발생하는 요지가 크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책에서 강하게 비판하는 ‘자기 계발서’들과 맞물리려는 지점이 발생하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짝사랑하는 자가 사랑에 성공하려면, 초월적 집중을 통해, 그 사랑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동의보감을 들며, 기를 거쳐 발원에 이르며 설명하지만 그 황당함을 해소 시키지 못한다.

  인간과 인간의 소통 중 가장 황홀한 사랑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에, 현재 남한 사회의 구조적 문제점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원론적 삶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에 온갖 문제점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나를, 너를, 사랑을 알지 못하니 사방이 막힌다. 사방이 막혀 원론적인걸 탄탄히 못하니, 외부에서, 감각적인 것에서, 단순 쾌락에서, 삶의 가치를 찾는다. 환경이 시궁창이니 그런 것이 탐이 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제대로 사랑하자. 이렇게 말하면 또 누군가 이렇게 말하겠지. "이상에 빠져 살지 말고 현실을 봐!" 그럼 난 이렇게 대답해야지. “그래.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시궁창에 처박힌 체 적응하려 애 쓰는게 더 이상 같아. 난 현실을 볼거야. 난 시궁창에서 나갈래.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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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미숙, 몸과 우주의 유쾌한 시공간 '동의보감'을 만나다
    from 그린비출판사 2011-10-21 11:57 
    리라이팅 클래식 15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출간!!! 병처럼 낯설고 병처럼 친숙한 존재가 있을까. 병이 없는 일상은 생각하기 어렵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나 역시 살아오면서 수많은 병들을 앓았다. 봄가을로 찾아오는 심한 몸살, 알레르기 비염, 복숭아 알러지로 인한 토사곽란, 임파선 결핵 등등. 하지만 한번도 병에 대해 궁금한 적이 없었다. 다만 얼른 떠나보내기에만 급급해했을 뿐. 마치 어느 먼 곳에서 실수로 들이닥친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