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 야스지로 컬렉션 4 - 명랑하게 걸어 + 그날밤 아내 + 동경합창 + 청춘의 꿈은 어디에 + 비상경계선의 여자
프리미어 엔터테인먼트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최근 난 불현듯 존 포드의 영화를 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엄청나게 볼 것 같은 처음의 기분과 달리, 고작 3편을 보았다. 허나, 리오브라보와 조우하며, 내가 왜 존 포드를 ‘불현듯’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는지 깨달았다. 지금 존 포드를 보는 건, 상실에 대한 위안이다. 좀더 존 포드를 보려 했지만, 현실적인 제약과 게으름 탓에 미루어졌고 다시 시작하려던 중 ‘불현듯’은 다시 찾아왔다. 난 불현듯 오즈의 ‘그날 밤 아내’를 봐야겠단 생각이 든 것이다.

  살이 전부 발린 생선 위에 타이틀이 뜨고, 그 타이틀 롤을 지나 거대한 건물 앞 경찰이 보인다. 어두운 밤 (무성영화지만)구두소리 내며 걷는 경찰의 모습은 장르적 감성을 짙게 풍긴다. 그러한 감성에 대답하듯, 딸의 치료비를 훔친 슈지가 나타난다. 슈지를 잡으려는 경찰과 딸에게 향하는 슈지는 추격전을 벌인다. 영화 속 인물들은 (아마도) 도심지에서 추격전을 벌이고 있다. 그 도심지의 건물들은 죄다 서구식 건물들로 이루어졌는데, 그 건물들 앞의 일본인들은 과장되리만큼 왜소해 보인다. 거의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아니 그 부자연스러움이 폭력적이라고 느껴진다. 그 때문인지 슈지가 거대한 서구식 건물들에서 벌이는 추격전은 딸에게 도착하기 위한 도주라기보다, 거대한 서구식 건물의 숲에서 빠져나기 위한 절박한 몸부림으로 보인다. 이는 마치 근대화를 벗어나기 위한 절박한 몸부림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징후는 슈지의 집에서도 볼 수 있다. 벽에 적힌 영어, 외국 포스터, 서구 생활양식 등이 질서를 갖추지 못하고 얼룩처럼, 슈지의 집에 널브러져 있다. 영화 속 주요 공간인 집 안은 분열의 표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난 오즈를 순서대로 만나지 못하고, 후기 대표작들을 우선적으로 만났다. 이는 즉, 오즈의 인물들이 일본의 전통 건축물에 있거나, 근대화와 일본의 전통이 접점을 만나 정돈된 후의 건축물에 생활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익는다는 소리다. 그렇기 때문인지 ‘그날 밤 아내’의 슈지의 분열증적 성격을 띠는 집, 그러니까 일본 전통 건축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서구와 전통의 접점을 잡은 건축물도 아닌 곳에 있는 오즈의 인물들은 굉장히 낯설다. 그리고 그러한 건물 속 인물들 또한 굉장히 부자연스럽다. 의자에 앉아서 졸거나, 경직된 움직임이나, 침대에 기대어 조는 모습, 단 하나뿐인 침대 등을 보면 알 수 있듯, 인물들은 그 건물에서 한없이 부자연스럽다. 그러니까 인물들은 강제로 떠밀리거나 내던져진 상황에 놓인 듯, 안절부절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화가 발생시키는 부자연스러움이 배어 있는 이 영화에서 주목할 점이 있다. 바로 불가역성이다. 영화 속 인물의 동선이나, 카메라 무브는 불가역성에 갇혀 강제성이 느껴지는 움직임을 보인다. 인물들은 구도상 미장센이 만든 흐름과 숏이 바뀌어 마련한 빈 공간을 통해 끌려오듯 움직인다. 카메라 무브에서는 불가역성이 더 눈에 띈다. 특히 인물이 아닌 사물을 잡을 경우가 그러하다. 사물이 카메라에 잡힐 경우, 사물들의 배치나 그 생김새로 인해 생기는 선 또는 사물의 크기 차이로 인한 운동을 만들어 낸다. 카메라는 그렇게 생성된 운동에 종속된 것 같은 움직임을 보인다. 영화는 이렇게 불가역성을 짙게 배고 있는데, 이런 점에 근거할 때 아내의 존재는 의미심장해진다.



  영화에 제목에서 강조한 것치곤, 이야기 흐름상 아내의 비중은 그리 크다고 할 수 없다. 허나 이 영화의 불가역성이란 관점 하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아내가 맡고 있다. 슈지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집안에서, 아내는 남편을 기다리며 창밖을 내다본다. 남편이 오게 될 길을 바라보는 숏은 아내의 시점 숏이다. 이 시점 숏은 굉장히 중요하다. 이 숏은 영화의 마지막, 남편이 체포되어 끌려가는 숏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 숏 역시 위에 언급한 것처럼 구도상 미장센이 만든 흐름으로 남편이 체포되어 떠나갈 동선을 지목하고 있다. 불가역성을 내포한 숏 중 하나란 것이다. 그러니까 아내는 남편이 떠나가는 것이 불가역적인 것임을 목격한 것이다. 불가역성에 대한 유일한 목격자는 아내이다.

  절박한 도피의 제스쳐에도 불구하고, 집안까지 침투해 생활양식에 혼란을 가져온 근대화는 불가역적인 위치에 놓여있다. 회피가 불가능한 것이다. 불가역적 근대화로 인해 경찰의 인정을 거부하고 슈지는 자수를 결심한다. 법 테두리 밖에 있는 인정으로 인해 도피의 기회를 얻지만, 슈지가 법에 순응하는 이유는 그것이 아버지의 자리를 상실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 테두리에 존속, 근대화에 대한 순응만이 딸의 인사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자리 잡게 하는 것이다. 수갑을 차고 경찰에게 연행되는, 근대화에 순응하는 남자를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 무기력하게 바라본다. 여인은 불가역성을 잘 알기에, 그녀의 시점 숏에 도래한 불가역성의 결과는 한없이 무기력하다.

  난 무기력한 여인을 바라보며, 아니 여인의 무기력한 시선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지금 한국에서 이 시선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지금 한국에서 ‘그날 밤 아내’에서 아내의 위치에 서 있는 이는 지금 무엇을 바라볼까? ‘우아한 세계’에선 밖으로 떠밀려 간, 하지만 그 영화 이후 나타났을 법한 혹은 나타났어야 될 이 시선은 어디에 있는가? 아니, 그보다 홈비디오 속 시선의 대상에서 나와 시선의 주인이 되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