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죽음을 보니 계속 눈물이 났다. 불법체류중이었던 중국 동포의 죽음과 남극에서 조난을 당한 젊은 연구원의 죽음. 그들의 생명의 기운을 뺏은 건, 차가운 밤공기와 남극의 바다가 아닐 지도 모른다. 그들 죽음은 원인은 외국인 노동자 문제의 제도적 허점 때문이고, 또 150억의 정치자금을 트럭에 싣고 다니는 와중에서도 예산이 없어 발생했다는 '예견된 인재'인 것이다. 중국 동포도 젊은 연구원도 돈을 벌기 위해 한국에 왔고, 남극으로 가야 했던 가난한 사람들이다. 사회의 악은, 이렇게 가장 가난한 사람,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미치고 그들을 고통스럽게, 때론 생명까지도 앗아가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우리의 냉대와 최소한의 윤리, 도덕도 지키지 못하는 우리의 일상으로 인한 희생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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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종강 뒤 회식 자리에서 사회복지학과의 어떤 아주머니가 밥을 다 먹을 무렵 말했다. "남은 음식을 보니 개가 생각나네" 그러면서 종업원에게 비닐을 달라고 하며 남은 걸 싸 갔다. 개는 양파를 먹으면 안된다고 하며 양파를 골라내서. 이왕 남긴 음식이니 버리는 것보다는 개가 먹는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집에 있는 '식구같은' 개에게 갖다 주려고 먹을 걸 챙기는 건 아주 자연스런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남은 음식을 보면 굶어 죽어가는 어린이들의 커다란 눈망울이 떠올라 위장에 탈이 나더라도 꾸역꾸역 음식을 먹어 치우는 나로서는 그 아주머니의 말이 거슬려 바로 옆에 앉아 있는 것도 불편할 지경이었다.
학교 앞 그 집은 음식의 양이 많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그릇을 남김없이 비우지 못했다. 그리고서 사람들은 또 케잌이며 아이스크림이며 '후식'을 시켰다. 식사 후 또 뭔가를 먹으며 입가심을 하는 '후식'이란게 그날 따라 참 역겹게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그 자리에 있다는게 싫었고 강사 수입으로 고단하게 살아갈 선생님에게 죄송했다. 물론 그 분들은 선생님께 대한 접대 차원에서 그런 것이었겠지만.
나는 맛있는 음식을 좋아해서 가끔 음식을 잘한다는 집을 찾아가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을 때가 있다. 이런 내가 때로 부끄럽게 여겨지고 이게 과연 옳은 일인지 반성도 하게 되지만 즐겁게 누릴 수 있는 것을 굳이 포기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날 회식 자리처럼 아무 생각없이 살고 싶지는 않고 그것을 경계할 생각이다. 이것 역시 내 이중적인 잣대이고 위선에 불과할 지 모르겠지만.
'잘 먹고 잘 사는 법'을 찾는 것이 인생 최고의 목표라 여겨지는 세상. 이러한 정보들은 출판, 방송, 언론을 통해 하나의 중요한 이슈로 이미 자리잡았다. 우리나라가 이제 어느 정도 먹고 살 걱정에서 해방되어 삶의 질 문제로 관심이 옮아가는 현상임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요즘의 실태는 자본주의적인 욕망과 맞물려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또다른 소비가 되어버렸고, 이기주의적인 욕망과 어울려 '나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이 성취의 기준이 되었다. 어떻게 하면 남들보다 맛있는 것을 먹을까, 멋지게 입을까, 좋은 집에서 살까, 잘 놀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하는데 재테크는 어찌 할까, 이 모든 것도 내가 죽으면 끝장인데 그렇담 건강 관리는 또 어떻게 해야 하나...
그 속에서 사람들은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최소한의 연대의식이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대한 배려는 잊은 듯 하다. 그런 건 이제 세상에 아예 없는 듯 보인다. 그래서 때론 사는게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