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실미도'를, 그리고 어제는 '태극기..'를 보았다. 나도 한국영화 천만관객 시대에 일조한 셈이다. 두 영화 모두 완성도가 뛰어난 건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기대이상으로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이제 우리도 지난 역사에 대해 보다 유연한 시각으로, 자유롭게 말할 수 있게 되었구나... 하는 안도감에 뿌듯했다.

그런데 '실미도'를 보고 뒷 맛이 그리 개운하지 않은 찜찜함이 남아 있던 것이 '태극기...'를 보니 되살아났고, '태극기...' 역시 마찬가지인 부분이 있었기에, 그 이유를 좀더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거니 싶었다.

'실미도'는 "중앙정보부가 국가냐"라는 통쾌한 대사를 날릴 정도로 국가와 개인의 문제에서 국가의 무한 권력이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을 비판하고 나선다. 하지만 관객들은 인권을 짓밟힌 684부대원들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과정에서 결국 그들을 영웅시하고 더 나아가 "그 때 북한침투를 했더라면"하는 일말의 감정을 갖게 된다. 인권과 평화가 아닌 폭력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군대 훈련 과정을 통해 부대원들이 "인간병기"로 태어나는 과정 역시 폭력적, 비인간적으로 그려지지 않고 "인간승리"처럼 묘사된다.

"태극기..."는 이념 대립을 떠나 인간적인 관점에서 전쟁의 비참함을 묘사한다. 전후 세대들은 이 땅에서 불과 50년전에 일어났던 전쟁의 공포에 대해 끔찍한 화면들을 통해 보다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남는 것은 오직 "가족"외에는 없다. 가족이 왜 수난당해야 했는지, 625가 과연 어떤 전쟁인지에 대한 고찰에 대해 영화는 무관심하다. 공부잘하는 아들이 서울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가족의 꿈이었는데, 그 가족애와 개인의 일생이 무참히 짓밟혀 버린 것을 통해 관객들이 강요받는 것은 휴머니즘과 아울러 가족주의 아닐까? 이 영화가 지금 이라크에서도 그와 똑같은 일들을 일어난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할 수 있을까?

국가와 역사의 굴레에서 짓밟혀온 개인의 권리와 행복을 앞세우며 부당한 힘의 폭력을 말하려고 하는 두 영화는 그러나, 아쉽게도, 그 폭력의 테두리 안에 갇혀 버린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영화가 말하는 개인은 감상적 휴머니즘에 갇혀 그러한 폭력을 불러일으킨 역사적 원인과 개인들이 다시 꿈꾸어야 할 공동체의 밑그림에 대한 물음을 마비시킨다. 이 때 폭력적인 복수는 정당하다고 느끼게 되고 개인의 문제는 사회와의 연결고리 없이 오직 개인의 것으로 환원되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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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 2004-03-07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독일 신문에서 이스라엘 좌파들이 팔레스타인에 태도를 바꾸어 팔레스타인 축출에 가세한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 근거는 내 가족이 이대로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 는 것. "나는 정의를 옹호한다.그러나 정의를 옹호하기 전에 내 어머니를 지킬 거다." 폭력적인 복수를 정당화할 생각에서 토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다시 개인에게 사회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