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되겠기에. 

-베르톨트 브레히트,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더 이상의 중재란 없는 것일까? 국가인권위를 비롯해 시민사회,종교단체가 '제2의 용산참사'를 우려하며 강경진압 자제를 요청했다. 경찰은 피에 굻주린 늑대처럼 마지막 먹이의 머리통을 눈 앞에 두고 숨을 고르고 있다. 새벽의 푸른 기운이 장미빛으로 바뀌어 가기전 그들은 숨통을 움켜쥐기 위해 도약할 지도 모른다. 살육과 전쟁의 신 아레스는 새벽의 여신 이오스의 커튼을 좋아한다. 

더 이상의 중재가 없다면 이제 이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자동차를 용접하던 불꽃이 지옥의 문입구를 막아버린다. 굵은 쇳물이 떨어지는 그곳에 땀과 눈물과 피가 얼룩졌을 것이다. 그 붉은 눈물 사이에 어린 아들의 해맑은 웃음과 목놓아 울던 아내의 모습이 어려있었을 것이다.  

나를 지나는 사람은 슬픔의 도시로, 나를 지나는 사람은 영원한 비탄으로, 나를 지나는 사람은 망자에 이른다. ... 여기에 들어오는 자 희망을 버려라.  

 -단테 <신곡> 중 지옥편 

평택에 눈물로 용접된 지옥문.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도 떨어지고 세상의 목소리로부터도 떨어져서 죽음을 배수진으로 하여 싸우고 있다. 누가 그들을 이지경까지 몰았는가? 누가 평범한 이들 가장들을 비정함을 유일한 양식삼아 그 처절한 곳에 고립되게 만들었는가?  

사실 세계 자동차 시장의 구조조정은 한 국가나 개인이 쉽게 거스를 수 없는 것이다. 한 두 해 이익이 났다고 한 두 해 성공적이었다고 그 거대한 흐름을 완전히 돌려놓긴 쉽지 않다. 난장법석 국회를 통과한 미디업법이 노리는 신문방송 산업도 자본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 그나마 후자는 '언론공공성'이라는 '공적담론'에 기대어 명분과 싸움의 동력을 얻을 수 있다. '여론을 반영하는 언론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동차 산업은 그런 힘 조차 없다. 누군가 은유적으로 '석탄산업'이라고 말했는데 적절한 비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한국경제의 희망이었으나 자동차 산업의 패권도 변하고 있다. 십 년 전인가 세계 자동차 시장이 향후 10여개 안팎으로 합병인수 될 것이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실제로 진행되었다. 현재 한국에서는 현대 자동차 이외에는 거의 다 넘어간 셈이다. 대우나 쌍용도 그런 거대한 흐름 속에 희생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거시적 조정'이 모든 것의 원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본의 거대한 물결은 큰 너울이지만 나라마다 또 개별 기업들마다 그 거대한 흐름을 유영하는 제나름의 방법과 방어책을 만들고 대응한다는 것이다. 쌍용자동차의 경우는 '상하이자동차'가 들어올 때부터 '먹튀자본'의 위험성이 심각하게 경고되었었다. 또한 기술 유출과 관련된 국부 손실도 심각하게 지적되었었다. 하지만 거대한 자본에 국가를 내놓은 나라에서는 -노무현 대통령 재임시절 '이미 권력은 시장에 있습니다'라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의미심장하였지만 또한 패배적이기도 했다- 이런 모든일들이 새로도입된 컨베이어벨트처럼 일사천리로 진행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제 그 '먹튀자본'이 빠져 나가고 난 남은 문제들은 땅에 붙어 살 수 밖에 없는 정착민들의 몫이자 눈물이 된다. (지그문트 바우먼은 <액체근대>에서 이를 '정착민에 대한 유목민들의 복수'라고 말했다. 서양에서는 역사적으로 유목민들을 죄의 온상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서양 역사에 유목적인 이민족들은 그 만큼 두려운 존재였다.) 

TV를 통해 바라본 평택은 전쟁터와 같다. 나는 마지막 중재와 성실한 협상을 가슴을 찟으며 간곡히 바란다. 그런 성실한 협상의 가능성이 거의 살아 있지 않더라도 그 작은 불씨 하나가 여럿을 살릴 수 있다면 거기에 희망을 건다.  

그리고 만약 그 모든 것들이 끝났다면,  

이제 독재정권의 수하들이 폭력으로 지옥문의 입구를 여는 순간이 온다면....  ... ... 

나는 무릎을 꺽고 흐느끼며 바란다.  오욕의 무게가 그대들의 머리 위에 분뇨를 퍼붓고, 끌려나오는 걸음 걸음이 오줌구덩이를 맨발로 걷는 걸음이 될지라도, 그대들의 의기가 영원히 꺽이지는 않을 것임을 알리는 목소리로 다시 한 번 평택 하늘과 세상을 울리고,넘어가지 않을 분루를 목으로 넘기며 공장 밖으로 나와주길 바란다. 

나는 이명박 정권의 폭력성을 입증하기 위해, 블로거들이 그들이 개처럼 두드려맞는 동영상 하나를 캡쳐해서 의분을 공유하기 위해 그들이 화약고 앞에서 죽음과 대면하길 바라지 않는다. 그건 사실 참여를 가장한 관조에 지나지 않는다.  

이명박의 폭력성? 그것을 알고 싶은가? 

이미 우리는 '촛불집회','용산참사','여의도 국회','평택' 에서 충분히 목격했다. 더 이상 현정권의 폭력의 바로미터를 측정해보기 위해 실험을 감행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 그 이상의 폭력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고도 '심심한 유감'의 몇 마디나 몇 명의 '사직서'로 눈물을 웃음으로 감출 수 있는 무감할 수 있는 자들이다. 

400명의 쌍용차 동지들이 그곳에 있다. 그들 앞 뒤로는 20만리터의 인화물질이 있다. 진압과정 중 발생하는 작은 사고나 노조원 중 단 한 사람의 순간적인 울분에도 우리는 살아서 지옥의 불구덩이를 목도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수 백명의 살아 있는 목숨이 왔다 갔다하는 일이다. 그리고 바깥에서 이들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을 조합원들의 가족과 아이들을 생각해보자. 조합원들도 그렇고 전경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제 양측 모두 최악의 사태를 눈 앞의 현실로 직면하고 인명이 살상되는 파국은 막아야 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혁명의 불쏘시개로 그들이 사라지지 않고, 그들이 훗날 손자 손녀들에게 혁명과 투쟁의 전달자로 오래도록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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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1>에 실린 신형철의 글을 옮긴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내가 좋아한 두 시를 신형철이 동시에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문재의 <제국호텔>과 최근에 나온 송찬호의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최근에 송찬호의 시를 읽었기 때문에 그의 '소금창고'만 기억하고 있었다. 신형철이 인용한 <제국호텔>의 시를 보니 이 시를 본 기억이 남는다.  

 

 

 

 

 

  

 

(아래는 한겨레21에 실린신형철의 글이다) >>>

소금창고에 대해 말해도 될까. 염전에서 운반해온 소금을 출고할 때까지 보관하는 곳. 그중에서도 특히 폐염전에 남아 있는 소금창고에 대해서. 실제로 본 적은 없네. 그러나 사진으로 본 그것은, 사람이 아닌 것들에는 마음 흔들리는 일 별로 없는 이 무정한 사내까지를, 쓸쓸하게 했지. 물론 이런 시들이 아니었으면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테지만


 
 


» 소금창고에 대해 말해도 될까. 사진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늦가을 평상에 앉아/ 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 지그시 힘을 준다/ 시린 바람이/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 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 역광을 받아 한 번 더 피어 있다/ 눈부시다/ 소금창고가 있던 곳/ 오후 세 시의 햇빛이 갯벌 위에/ 수은처럼 굴러다닌다/ 북북서진하는 기러기떼를 세어보는데/ 젖은 눈에서 눈물 떨어진다/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소금창고’ 전문)

이문재의 네 번째 시집 <제국호텔>(문학동네·2005)에 수록된 아름다운 시. 한때 소금창고가 있었던 곳에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처럼 서서 시인은 제 나이를 되새기네. ‘마흔 살’은 어쩌면, 뭔지도 모를 어떤 것들을 떠나보낸 뒤, 문득 홀로 남아 버티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나이일까. 그래서 지금 그는 떠나보낸 옛날들의 자욱한 역류를 보고 있는 것일까.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이런 구절을 일러 ‘적중했다’고 하는 것이지. 제자리에 정확히 꽂혀 진동하는 아포리즘. 이 시를 다시 떠올리게 된 이유가 있네.

“돈 떼먹고 도망간 여자를 찾아/ 물어물어 여기 소금창고까지 왔네/ 소금창고는 아무도 없네/ 이미 오래전부터 소금이 들어오지 않아/ 소금창고는 텅 비어 있었네// 나는 이미 짐작한 바가 있어,/ 얼굴 흰 소금 신부를 맞으러/ 서쪽으로 가는 바람같이/ 무슨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온 건 아니지만,// 나는 또, 사슴 같은 바다를 보러 온 젊은 날같이/ 연애 창고인 줄만 알고/ 손을 잡고 뛰어드는 젊은 날같이/ 함부로 이 소금창고를 찾아온 것도 아니지만,”(‘소금창고’ 전반부)

송찬호의 새 시집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지성사·2009)에 수록된 같은 제목의 시. 이 시인 역시 이제는 “얼굴 흰 소금 신부”나 “사슴 같은 바다”에 마음 달뜨는 젊은이가 아니네. 아니지만, 아니기 때문에, 소금창고에 대한 소회가 없을 리 없는 것이지. 왜 어떤 소중한 것들은 나보다 먼저 사라지는 것인가. 그러다 이 시인도 앞사람처럼 그만 울고 마네. “여자의 머릿결 적시던 술”이나 “세상 어딘가에 소금같이 뿌려진 여자”가 생각나기라도 한 것인가.

“가까이 보이는 바다로 쉬지 않고 술들의 배가 지나갔네/ 나는 그토록 다짐했던 금주의 맹세가 생각나/ 또, 여자의 머릿결 적시던 술이 생각나/ 바닷가에 쭈그리고 앉아 오랫동안 울었네// 소금창고는 아무도 없네/ 그리고 짜디짠 이 세상 어디엔가/ 소금같이 뿌려진 여자가 있네// 나는 또, 어딘가로 돌아가야 하지만/ 사랑에 기대는 법 없이/ 저 혼자 저렇게 낡아갈 수 있는 건/ 오직 여기 소금창고뿐이네”(‘소금창고’ 후반부) 소금창고에 대해서 쓰면 다 좋은 시가 된다는 법이라도 있다는 듯 이 시도 앞의 시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아름답네.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소금창고에 대해 말한 것은 이런 아름다움들 때문이지만, 언젠가부터 이 지면에서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는 것이 마음 불편해졌지. “나무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그 많은 범죄행위에 관해 침묵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거의 범죄처럼 취급받는 이 시대는 도대체 어떤 시대란 말이냐!”(‘후손들에게’에서) 이를테면 브레히트의 이런 구절이 가시처럼 아프기 때문. 과연 그런 시대이기 때문. 

그러니 우리가, 반년 동안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채 거리에서 울부짖고 있는 용산 참사 유가족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무슨 소금창고 같은 것에 대해 말한다면, 이것은 범죄가 되는 것일까. 쉽게 부인해버리는 것이야말로 범죄가 될 테니 일단은 그렇다고 해야겠네. 그러나 끝내 그렇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도 해야지. 좋은 시가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아름답게 말할 때, 그것은 지금 이 세계가 충분히 아름답다는 뜻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들이 이 세계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뜻이므로.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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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 미학의 계승자로서, 당신은 비판이론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무엇보다 모든 합리주의와 철학적 낙관주의를 회의(懷疑)한다는 점이다. 그 회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니체가 공유하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서양철학을 규정하는 소크라테스적 동일화, 곧 덕과 앎의 동일화에 대한 비판이 있다. 그것은 주체가 자신의 이성적 능력을 통해 정의된다는 믿음, 주체의 이성이 보증될 수 있다는 믿음, 우리 활동이 성공하고 그것이 좋다는 믿음에 대한 비판이다. 곧 주체의 이성만이 아니라, 주체 내부에 있는 자연과 이성 사이의 해소 불가능한 변증법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비판이론은 보여준다.”  

[언제부턴가 나는 저 '회의(懷疑)'를, 그런 회의를 품고 더디게 내딪게될 '첫걸음'을 동경하게 되었다.](이건 이글을 퍼온 내외님의 코멘트이며 나 역시 동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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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여름 

            -김광규 

 착륙을 앞두고 고도를 낮추는 여객기의 동체가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모처럼 구름 한 점 없이 활짝 갠 여름날, 자기의 영공을 점검하려는 듯, 솔개 한 마리 하늘 높이 떠돌고 있다. 

 뒷마당 대추나무에서 매미와 여치가 주명곡처럼 동시에 또는 번갈아 울어댄다.(노래한다고 말해야 옳을까.) 참새, 까치, 비둘기, 뻐구기, 그리고 꾀꼬리 소리도 가끔 끼어든다. 

 방학을 맞은 동네 아이들이 골목에서 농구를 하거나,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느라고 떠들어대는 소리도 시끄럽게 한몫을 거든다. 

 그래도 창문을 닫을 수는 없다, 

 무더위 때문이 아니다. 

 이 모든 세상의 소리를 듣지 않고 창문을 닫아버린다면, 그리고 냉방기를 틀고 TV를 보거나 CD음악을 듣는 다면, 아무래도 한 생애의 늦여름을 놓칠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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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낮 아이가 어린이 집에서 조퇴를 했다. 열이 갑자기 높아져서 부랴 부랴 돌려보낸 것이다.  

불과 서너 주 전에 어린이 집에서 놀다가 잠시 힘들다며 누워있었는데 경련과 함께 흰자위가 휙 돌아가 버린 적이 있다. 아무리 경험이 많은 어린이집 선생님들이라지만 갑자기 그런 일을 당하면 놀라고 조심스러운 법이다. 그날 밤에도 열이 39도를 왔다갔다 하더니 동일한 경련이 왔다. 실제로 옆에서 보고 있으니까 두려운 마음이 들긴 하더라. 의학책에서는 오래지속되지 않으면 큰 문제가 아니니 부모가 먼저 당황하지 말고 침착을 유지하라고 씌여있다. 그 말을 되뇌이며 침착을 유지하긴 했으나 자식의 열경련을 보고 있으면 불안감과 안쓰러움이 양눈가를 어지럽힌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때문인지 최근 이 지역을 강타하고 있는 신종플루에 대한 우려 때문인지 어린이집에서는 열감기 기운이 있으니 바로 집으로 보냈다.  

일찍 아이와 잠들었다.  

자정을 넘기며 아이가 힘들어해서 열을 재어보니 39도다.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고 다리를 주물러 주고 물도 조금 먹였다.  

아이에게 아빠가 너를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를 한참 이야기해주고, 아빠가 지켜줄 거라고 부드럽게 이야기해주고, 열이 왜 생겼는지 이야기해주고...두런 두런  

아이가 힘겹지만 위축되지 않은 목소리로 이런다. " 예찬이가 몸에 있는 바이러스랑 싸우고 있는거지." 나는  "그래 맞아. 예찬이는 씩씩하니까 바이러스한테 이길꺼야. 지난 번에도 이겼지. 더 튼튼해질꺼야" 라고 맞장구친다. 

아이는 다시 잠들고 나는 똘망똘망해졌다. 오른쪽 바닥에서는 작은 열덩이 하나가 모로 누워 잠들어 있고 나는 등화관재때 혼자 불 켜놓은 집처럼 민망하게 모니터 앞에 숨죽이고 있다. 

"이 모든 세상의 소리를 듣지 않고 창문을 닫아버린다면, 그리고 냉방기를 틀고 TV를 보거나 CD음악을 듣는 다면, 아무래도 한 생애의 늦여름을 놓칠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한 생애의 늦여름'이다. 지금 내게 흘러가고 있는 시간의 계절이 그렇다. 또 지금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숭고와 추함의 변주곡들'이 모두 '늦여름'의 시간들이다. 

열에 상기된 아이의 끙끙거림을 들으며 나는 내게 묻는다. 

 과연 나는 '늦여름'의 살 속으로 들어가 그 뜨거운 기억의 정점에 촉수를 밀착하고 있는가? 뺨을 부비고 있는가? '늦여름'의 한 복판을 가르는 얼음처럼 차가운 생의 현현을 목격하고 있는가? 열길 낭떠러지 위에서 외줄타는 광대의 터질 것 같은 집중력과 예민함으로  생의 '외줄' 위를 처연하게 걷고 있는가?  

나는 들어가기를 주저하는 압정을 모질게 부여 박는 마음으로 내게 다시 꼭꼭 눌러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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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 주기도문 

             -고정희 

권력의 꼭대기에 앉아 계신 우리 자본님 

가진자의 힘을 악랄하게 하옵시매 

지상에서 자본이 힘있는 것같이 

개인의 삶에서도 막강해지이다 

나날에 필요한 먹이사슬을 주옵시매 

나보다 힘없는 자가 내 먹이사슬이 되고 

내가 나보다 힘있는 자의 먹이사슬이 된 것같이 

보다 강한 나라의 축재를 북돋으사 

다만 정의나 평화에서 멀어지게 하소서 

지배와 권력과 행복의 근원이 영원히 자본의 식민통치에 있사옵니다.(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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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해남 너른 들녘을 가로지르다 '고정희 생가'라는 팻말을 보고 차를 세운 적이 있다. 예정에 없던 장소였는지라 머뭇거리다 팻말보다 조금 앞에 세웠다. 해는 지고 있었고 초행길이라 가급적 더 늦기 전에 다음 출발을 위한 숙소에 도착하고 싶었다. 잠시 들렀다가 갈까...아니 그냥 갈까...길 옆에 잠시 서서 고민하다가 지는 해의 재촉에 마음을 돌렸다. 

이 오래된 시집을 다시 꺼내드는 것도 모두 MB님의 혜안덕분이다. 이 시를 보고 있으면 91년 지리산에서 실족하여 세상을 떠난 시인이 그리 오래지나지 않은 미래의 한반도에 그분이 오실 걸 알고 있었는 듯 하다. 시인의 시대에도 이미 작은 적 그리스도들이 목청을 높이고 다녔으니 시대의 감성을 앞서 읽는 시인의 눈에는 코리아버전 대빵 적 그리스도가 외울 기도가 귓가에 들렷을 것이다. 지금 평택에서, 여의도에서 저들 모두 무릎을 끓고 '악령의 주기도문'을 외우고 있다. 

시인은 '악령이 시궁창 모습으로, 마귀 얼굴로 다가오지않으며 누추하거나 냄새나는 손으로 악수하지 않는다' 라고 말한다.  '악령은 무식하거나 가난하지 않으며/ 악령은 패배하거나 절망하지 않으며/ 악령은 성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으며 무례를 범하지' 도 않는다. 그는 '너그러운 승리자의 모습으로 우리를 일단 제압한 뒤/ 우리의 밥그릇에 들어앉는다'   

고정희를 다시 펴보고 싶은 시대란... 뭐랄까... 이것은? 

시인은 내게-난 '콕' 찍어 '내'게라고 만 했다. 당신들이 자신을 스스로 높여 평가하든 아님 낯춰 평가하든 자유다. 당신들이 새로운 발견에 흥분하여 듣보잡이 되든지 발견의 실타래들이 엃히기 시작하여 미망에 묶이든지 그것도 당신의 일이다. 모두 당신의 공덕일 뿐이다. - 이런 말로 자꾸 종아리를 친다. (판소리 아니리식으로 읽어야 한다.) 

이제부터 인생이 무어냐고 묻거든/ 허튼 삶 삽질하는 힘이라고 말해둬/ 이제부터 목숨이 무어냐고 묻거든/ 허튼넋 몰아내는 칼이라고 말해둬/ 대쪽 같은 사람들아/금쪽 같은 사람들아/ 각자 목숨에 달린 허튼밥줄을 가려내!/ 각자 연혁에 엃힌 허튼돈줄 잘라내!  <몸바쳐 밥을 사는 사람 내력 한마당> 

물론 세상에는 '함께 할 일과 혼자 할 일'이 각각 따로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숫타니파타>의 유명한 '무소의 뿔' 비유가 좋은 예일 듯 하다. 그 장은 '모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라고 끝난다. 가장 대표적인 구절이 이거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런데 오로지 단 한 구절만 예외다. 

"만일 그대가 지혜롭고 성실하고 예의 바르고 현명한 동반자를 얻었다면 어떠한 난관도 극복하리니, 기쁜 마음으로 생각을 가다듬고 그와 함께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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