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시대 주기도문 

             -고정희 

권력의 꼭대기에 앉아 계신 우리 자본님 

가진자의 힘을 악랄하게 하옵시매 

지상에서 자본이 힘있는 것같이 

개인의 삶에서도 막강해지이다 

나날에 필요한 먹이사슬을 주옵시매 

나보다 힘없는 자가 내 먹이사슬이 되고 

내가 나보다 힘있는 자의 먹이사슬이 된 것같이 

보다 강한 나라의 축재를 북돋으사 

다만 정의나 평화에서 멀어지게 하소서 

지배와 권력과 행복의 근원이 영원히 자본의 식민통치에 있사옵니다.(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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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해남 너른 들녘을 가로지르다 '고정희 생가'라는 팻말을 보고 차를 세운 적이 있다. 예정에 없던 장소였는지라 머뭇거리다 팻말보다 조금 앞에 세웠다. 해는 지고 있었고 초행길이라 가급적 더 늦기 전에 다음 출발을 위한 숙소에 도착하고 싶었다. 잠시 들렀다가 갈까...아니 그냥 갈까...길 옆에 잠시 서서 고민하다가 지는 해의 재촉에 마음을 돌렸다. 

이 오래된 시집을 다시 꺼내드는 것도 모두 MB님의 혜안덕분이다. 이 시를 보고 있으면 91년 지리산에서 실족하여 세상을 떠난 시인이 그리 오래지나지 않은 미래의 한반도에 그분이 오실 걸 알고 있었는 듯 하다. 시인의 시대에도 이미 작은 적 그리스도들이 목청을 높이고 다녔으니 시대의 감성을 앞서 읽는 시인의 눈에는 코리아버전 대빵 적 그리스도가 외울 기도가 귓가에 들렷을 것이다. 지금 평택에서, 여의도에서 저들 모두 무릎을 끓고 '악령의 주기도문'을 외우고 있다. 

시인은 '악령이 시궁창 모습으로, 마귀 얼굴로 다가오지않으며 누추하거나 냄새나는 손으로 악수하지 않는다' 라고 말한다.  '악령은 무식하거나 가난하지 않으며/ 악령은 패배하거나 절망하지 않으며/ 악령은 성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으며 무례를 범하지' 도 않는다. 그는 '너그러운 승리자의 모습으로 우리를 일단 제압한 뒤/ 우리의 밥그릇에 들어앉는다'   

고정희를 다시 펴보고 싶은 시대란... 뭐랄까... 이것은? 

시인은 내게-난 '콕' 찍어 '내'게라고 만 했다. 당신들이 자신을 스스로 높여 평가하든 아님 낯춰 평가하든 자유다. 당신들이 새로운 발견에 흥분하여 듣보잡이 되든지 발견의 실타래들이 엃히기 시작하여 미망에 묶이든지 그것도 당신의 일이다. 모두 당신의 공덕일 뿐이다. - 이런 말로 자꾸 종아리를 친다. (판소리 아니리식으로 읽어야 한다.) 

이제부터 인생이 무어냐고 묻거든/ 허튼 삶 삽질하는 힘이라고 말해둬/ 이제부터 목숨이 무어냐고 묻거든/ 허튼넋 몰아내는 칼이라고 말해둬/ 대쪽 같은 사람들아/금쪽 같은 사람들아/ 각자 목숨에 달린 허튼밥줄을 가려내!/ 각자 연혁에 엃힌 허튼돈줄 잘라내!  <몸바쳐 밥을 사는 사람 내력 한마당> 

물론 세상에는 '함께 할 일과 혼자 할 일'이 각각 따로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숫타니파타>의 유명한 '무소의 뿔' 비유가 좋은 예일 듯 하다. 그 장은 '모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라고 끝난다. 가장 대표적인 구절이 이거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런데 오로지 단 한 구절만 예외다. 

"만일 그대가 지혜롭고 성실하고 예의 바르고 현명한 동반자를 얻었다면 어떠한 난관도 극복하리니, 기쁜 마음으로 생각을 가다듬고 그와 함께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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