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세데스 소사...  

아르헨티나의 역사를 살다간 최고의 가수이다. 

언젠가 내가 한 번에 내 마음을 앗아간 세 명의 여자 가수를 언급한 적이 있었다. 

마리아 칼라스, 빌리 홀리데이, 그리고 메르세데스 소사....가 그들이다. 

이제 모두 고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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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정말 든든한 어머니 '산'과도 같았다. 그녀의 굵은 음성은 뿌리 깊은 나무의 수액을 타고 올라 오는 소리였고 수 많은 민중들의 울음과 웃음을 위안하던 목소리다. 메르세데스 소사를 보면 왠지 우리나라의 '대무당'같은 생각마저 든다. 굿으로 산 사람을 위무해주는 것이 무당의 종교적 의미 아니었는가. 그녀 역시 노래로 세상을 위무해 준 위대한 가수다. 최소한 내게는 그런 '대무당'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고 이제 그녀의 음성만이 세상에 남는다. 

하늘에서도  '삶에 감사하고 있을' 그녀를 위하여... 

 

 

 

 

                         생에 감사해

내게 이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삶은 내게 눈을 뜨면 흑과 백을 완벽하게 구분할 수 있는 두 샛별을 주었고,
높은 하늘에 빛나는 별들을,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내 사랑하는 이를 주었습니다.

내게 이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삶은 밤과 낮에 귀뚜라미와 카나리아 소리를 들려주었고,
망치소리, 터빈 소리, 개 짖는 소리, 빗소리,
그리고 내 가장 사랑하는 이의 그토록 부드러운 목소리를 새겨 넣을 수 있도록 커다란 귀도 주었습니다.

내게 이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삶은 내가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소리와 언어, 문자를 주었고,
어머니와 친구, 형제들 그리고 내 사랑하는 이가 걸어갈 영혼의 길을 밝혀줄 빛도 주었습니다.

내게 이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삶은 내게 피곤한 발로도 전진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나는 그 피곤한 발을 이끌고 도시와 늪지, 해변과 사막, 산과 평야, 당신의 집과 거리,
그리고 당신의 정원을 걸아갈 수 있었습니다.

내게 이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삶은 내게 인간의 정신이 열매를 거두는 것을,
악으로부터 선이 해방되는 것을,
그리고 당신의 맑은 눈 깊은 곳을 응시할 때
내 심장을 온통 뒤흔드는 마음을 주었습니다.

내게 이토록 많은 것을 준 삶에 감사합니다.
삶은 내게 웃음과 눈물을 주어 슬픔과 행복을 구별할 수 있게 해주었고,
내 슬픔과 행복은 나의 노래와 여러분들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이 노래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 모두의 노래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모든 노래가 그러하듯
내게 이토록 많은 것을 준 삶이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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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맑스 - 미셸 푸코, 둣치오 뜨롬바도리와의 대담 디알로고스총서 1
미셸 푸코.둣치오 뜨롬바도리 지음, 이승철 옮김 / 갈무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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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력이란 무한히 작은 것 속으로 파고 들어갈 줄 아는 능력이고 그 모든 집약된 것 속으로도 새로운,압축된 내용을 풍부하게 부여할 줄 아는 능력이다."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푸코의 맑스>를 읽다가 고등학교 때 <수학 정석>을 떠올렸다. 뒤편에 실린 문제 풀이 해설서와 내 연습장의 풀이과정이 똑같을 때 느끼는 소소한 쾌감. 물론 이 말은 내가 푸코를 학문적으로 온전히 이해했다는 말도 아니고, 또한 푸코의 철학을 그대로 수용하여 푸코주의자가 되었다는 뜻도 아니다. 푸코에 대해 어떤 고원에서 바라 보는지는 다를 수 있다.(나는 최소한 그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고백은 해야한다.) 다만 푸코를 만나는 방식에 있어서 내 입질이 그다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정도이다. 여타의 증언들이 '푸코'의 입을 통해서 나오니 지나가던 수학 선생님이 '그래 그렇게 하는 거지.'라고 일종의 추임새를 넣어주는 것 같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대화록은 재미있다. 물론 그의 주요 저서보다 얇으며 읽기 쉽다는 것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제목이야기부터 해보자. <푸코의 맑스>, 국역판 제목이다. 영역판이 <맑스에 대한 언급>이고, 불어판이 <푸코와의 대담>이다. 국역판은 이에 비하면 제목부터 짧고 굵다. 묵직하다. 하지만 실제 책은 얇다. 역자는 국역판 제목을 이렇게 정한 이유를 푸코 자신의 주장을 인용하여 밝힌다. 푸코는 '경험주의적 철학이 맑스주의의 한계와 인간해방적 관점을 새롭게 재전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 했다. 먼저 책 제목만 보고 너무 머리를 긁적일 필요는 없다. 이 책은 맑스주의자 뜨롬바도리와의 인터뷰 내용을 묶은 것이다. 난해한 프랑스 철학 용어가 난무하지 않는다. 푸코는 소파에 앉아서 하는 인터뷰하는 사람인 양 편안한 어투로 자신의 이론적 관심과 변화, 학문적 접근 태도 그리고 세계와 소통하는 관계에 대하여 답변한다. 푸코가 '경험-책'으로서 자신의 이론적 작업과 실천을 설명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날 철학-즉 철학적 활동-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사고에 대한 사고의 비판 작업이 아니라면, 또 그것이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정당화하는 대신에 어떻게 그리고 얼마만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오늘날 철학이란 과연 무엇이겠는가? "   미셀 푸코, <쾌락의활용> 

 푸코는 '현재 진행형'을 좋아했던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이론이 어떤 규정된 틀로,또는 진리의 이름으로 불리우길 거부했으며, 그렇게 될 수 도 없음도 여러 차레 강조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호기심많은 '실험가'로 묘사하기도 했다. 이론가와 달리 실험가는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자신을 추종하는 일군의 '푸코주의자'가 나왔을지라도 이미 그 자리에 '푸코'는 없다.  이런 태도는 인간 푸코로서의 삶과 이론가 푸코로서의 삶이 일치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는 '권력'이란 주제 그리고 그 대상으로 '주체'라는 문제를 부여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이들을 마치 길을 가다 매번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사람처럼 해체하고 재전유해 냈다. 그래서 그는 '현재의 역사가'요 '현미경을 가진 역사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푸코는의 이런 작업을 통해 그가 천착했던 '권력'의 완결된 상을 만들어 세상에 선사했을까? 하지만 애초부터 푸코는 그런 완결된 '권력'의 모습을 상정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푸코의 일련의 미시적 작업을 통해 '권력과 주체' 상당한 다른 모습을 눈치 채게 된다. 그리고 세상을 조금 달리 보기 시작한다. 푸코가 세상에서 하고 싶었던 일은 바로 그것이다. 새로움에 대한 횡단을 통해 우리는 푸코를 따라 '새로운 관계 맺기' 를 시도하게 된다. 그것은 그것은 단지 세속적 의미의 뇌의 쾌락, 즐거움만을 위한 것이었을까? 푸코는 지식과 권력의 문제에 대한 자기 이론의 통찰이 혁명적 잠재력을 내포 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 역시 이 문제를 실천적 영역에서도 감행한다. <감옥정보집단>활동을 말한다. 감옥의 인권을 개선하기 위한 상식적 프로그램에 무슨 이론의 경험적 실천이니 정치적 실천이니 대단하게 말할 필요가 있을까? 푸코의 <감옥정보집단>은 단순히 휴머니즘적인 실천이 아니다. 오히려 푸코는 '반-휴머니즘'의 기치를 내건다.(여기서 '휴머니즘'은 철학적인 개념이다. '인간을 위합니다'같은 류의 휴머니즘이 아니다.) 푸코는 '휴머니즘' 안에 예속적 존재로서의 주체가 있고, 그 '휴머니즘'의 이름 하에 권력에 대한 시선 회피가 있다고 말한다. 니체적인 의미의 반 휴머니즘이다. 결과론적으로 '어쨋거나 저쨋거나 인권을 옹호하니 좋은거 아닌가?' 라고 해버리면 사실 푸코니 들뢰즈니 뭐니 철학적 가치들을 논할 필요도 없다. 대신 그게 철학을 매장시키는 행동이었다는 것만 알면 된다. 

  이 책에서 푸코는 자신을 '철학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 뜻은 역설적이게도 기존의 철학자들과는 다른 패러다임의 철학자임을 강조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오히려 그는 '실험가'라고 말하는데 그의 일련의 작업들은 그가 '경험'을 강조한 '실험가'적인 작업의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광인, 의학, 감옥, 성 과 같은 미시적 문제들의 역사를 통해 무언가 다른 것을 증명해내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경험에 대한 그의 강조가 니체, 바따이유, 블랑쇼 등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왜 그들인가? 푸코는 그들이 체계를 구축하는데 관심을 보인 사람들이 아니라 개인적인 경험들을 확보하는데 관심을 기울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주체의 '한계 경험'을 통해 주체 자체를 '뿌리 뽑는' 일에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되면 주체는 더 이상 과거의 주체가 아니다. 대담자인 뜨롬바도리는 '연속적으로 전개되는 경험으로서의 작업, 방법에서의 극단적인 상대성, 주체 해체의 긴장'을 푸코의 지적 태도의 핵심적인 측면이라고 지적한다. 푸코의 이런 태도는 그의 비판자들의 타킷이 된다. 메르키오르 같은 사람들은 그를 '신 니체주의자' '허무주의적 아나키스트' '근본주의적인 강단허무주의자' 같은 혹평을 가하기도 한다. 메르키오르의 지적은 곡해이거나 과도한 측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푸코의 작업에 대한 그런 비평의 맥락 역시 충분히 병행하여 고민해야 하는 바가 있다는게 내 생각이다. 푸코가 '맑스의 성전화'를 비판하했듯이 '푸코의 성전화' 역시 함께 지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대담집에서는 푸코의 입을 통해 그가 활동하던 시기의 프랑스 철학계의 흐름이라던가 사상적 영향, 그리고 그에 대한 푸코의 응대같은 후일담같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푸코가 현상학과도, 사르트르식의 실존주의와도 거리를 두게 되는 이유가 자못 흥미롭다. 예를 들어 푸코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다분히 자유주의적 주체관으로 받아들인다. 푸코에게 사르트르의 주체는 주관적인 존재이며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다. 푸코의 의문은 -당연하게도- 주체가 유일하게 실존의 형태일 수 있을까. 주체가 자신을 구성하던 관계들과 자기 동일성 소게 있을 수 없는 그런 경험을 없을까, 하는 그런 것이다. 푸코는 또한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던 당대의 비판에 대해서도 하나씩 대답한다. 먼저 구조주의자라는 평가에 대한 푸코의 답변들이 흥미롭다. 푸코는 레비 스트로스를 제외하고 알뛰세르나 라캉 같은 이들-물론 자기도 포함해서- 구조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한다.  '구조주의'라는 개념 적용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같느냐에 따라 다르게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럼 도대체 왜 당신을 구조주의자라고 하나요?' 라는 질문에 대한 푸코의 답변이다. 푸코는 당대 정세에 영향을 받은 '외인론'의 결과물로 이를 설명한다. 길게 설명하긴 힘들지만, 스탈린의 소련 이후 맑스주의자들의 불안으로 푸코는 말한다. 즉 맑스주의적이지 않은 좌파문화가 구조주의에서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통적인 맑스주의에서 이에 격렬하게 반응한 것이라는 점이다. 푸코는 구조주의 논쟁의 본질이 동유럽적인 것이라고 단언한다. (정세적으로 동유럽에서는 전통적인 맑스주의가 해방적인 가치를 읽고 있었던 반면 서유럽에서는 이에 대한 지지가 여전했다. 이런 점은 예전에 읽었던 박노자의 책에서도 나온적이 있다. 러시아에서는 구습으로 읽히는 맑스-레닌이 한국에서는 진보로 읽히는 정세적 모순) 뜨롬바도리는 푸코의 이런 답변이 자의적이라고 응대한다. 

푸코의 프랑크푸르트학파에 대한 애정도 이 대담집에 언급된다. 김유동의 <아도르노의 사상>을 읽다보면 푸코와 프랑크푸르트 1세대와의 관계가 언급된다. 푸코는 뉘늦게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책을 접했고, 만약 어린 나이에 접했다면 그들의 주석서나 썻을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또 너무 늦게 접해서 불필요한 시간을 줄이지 못했다는 점도 말한다. 푸코같은 창의적인 학자로부터 또 많은 읽을 거리를 얻는 독자로서는 그런 늦은 조우가 오히려 득이다. '자아 동일성'의 문제나 근대성 문제에 있어서 '계몽이성과 합리주의의 지배' 같은 프랑크푸르트의 문제 의식에 푸코는 친화성을 느낀다. 물론 푸코는 프랑크푸르트학파와의 유사성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푸코가 니체적이라면 프랑크푸르트사람들은 조금 더 프로이트적이다. 푸코는 주체문제를 조금 더 멀리 밀고 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그에 반해 프랑크푸르트 쪽은 본질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의 회귀에 해방적 가치를 두고 있다는게 푸코의 입장이다. 

이 책에서는 이외에도 푸코에게 큰 영향을 끼친 68혁명과 튀니지에서의 경험, 그의 정치적 실천 그리고 이런 일련의 행동에 근거가 되는 생각의 바탕들이 흥미롭게 전개되어간다. 대담자 뜨롬바또리는 비교적 푸코의 입장을 듣고 그 때 그 때 푸코에게 누적되어온 세간의 평가-즉 비판적 내용-을 질문한다. 특히 '권력담론'에 대한 장에서는 뜨롬바또리는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맑스주의적-자코뱅적인 의미의- 권력 이야기로 푸코의 권력담론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그는 푸코가 거부한 '집합적' 권력의 총체성이란 문제를 들어 푸코 권력론의 현실성과 실천성을 묻고 있다.뜨롬바또리는 푸코의 권력담론이 일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폭넓은 정치적 실천이나 프로그램과 절합되기 어렵다고 보는 입장을 견지한다. 반면에 푸코는 -들뢰즈도 말했듯이- 특이하고 구체적인 형태속에서, 권력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의 투쟁이 오히려 더 일반적인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푸코는 어떤 형태로든 '대의적' 분신에 대한 의심과 역사적 반복의 거부의지가 담겨있다. 푸코는 '우리는 대변인들과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 라고 말한다. 뜨롬바도리는 '정당이나 제도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하는 사회적 문제를 부차적으로 만드는 효과'에 대해 질문한다. 푸코는 '좌익분파의 오래된 비판'이라고 말한다. 푸코의 관점은 기본적으로 '선한 권력' '악한 권력'이 아니다. 그에게는 '권력' 자체가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권력의 구별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만 접근의 시각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푸코는 그런 다른 차원에서의 접근을 통해 저항의 결을 이끌어내는 것 뿐이다. (물론 푸코의 이런 태도는 '근본주의적이다, 아나키즘적이다' 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기도 했다.) 하여간 뜨롬바도리가 책 후반부에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질문들은 푸코 비판에서도 자주 거론되는 내용들이며, 푸코의 강점이자 또 약점이 되는 부분들이기도 하다.뜨롬바도리는 그것도 못내 아쉬웠는지 저자 후기를 통해 맑스주의적인 관점에서 푸코가 가지는 한계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평가를 달아 놓았다. (나는 현실정치에서 권력의 얼굴이나 실체에 대해 조금 더 직접적이어야 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또한 반권력적인 담론일 지라도 현실정치의 권력자장 안에서 적용할 때는 함께 작동하게될 권력의 문제에 대해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면에서 담론적으로는 자코뱅적인 요소를 버리고 성찰할 수 있겠으나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요소 역시 역사적 실재로 대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나는 푸코의 긍정적인 점을 받아들이는 입장이기 때문에 푸코의 작업이 가진 '해방적 가치'에 대해 높이 평가한다. 권력이 모든 곳에 편재해 있다면 권력에 대한 저항 역시 모든 곳에 편재해 있을 수 있다는 푸코의 낙관주의는 오래전에 큰 기쁨을 주었다. 그러나 그가 어떤 '-주의자' 이건간에 그의 대선사께서 만든 이론과 생각을 텍스트로 수용하고 해석해서 이론가로서 실천한답시고 여기저기 끼워넣는 방식에는 늘 부정적이다. 현실의 역사성,복잡성, 그리고 거기에 야수성은 문학텍스트가 아니다. 문학텍스트처럼 '여기부터 여기까지는' 우리 대선사께서 하신 이런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면 그대로 적용가능하다는 식은 통하지 않는다.  

<푸코의 맑스>는 푸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푸코의 입을 통해, 그리고 비판적 질문을 통해 그의 생각의 큰 줄기를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이다.  뜨롬바도리와의 대담 이후에 나오는 푸코와 들뢰즈의 대담은 <푸코의 맑스>에서 언급된 내용들을 다시 재확인하는 짤은 인터뷰이며 <선악을 넘어서>는 68혁명과 제도권 교육에 대한 고등학생들과의 대담으로 평이하지만 흥미롭다.  

 권력에 대한 투쟁이 일어날 때는, 권력의 악독한 영향하에 있는 모든 이들 그리고 권력이 참을 수 없다고 느끼는 모든 이들이, 그들 자신의 영역에서 그들의 적절한 능동성(혹은 수동성)을 가지고 투쟁을 전개할 수 있습니다......이 투쟁들이 권력 체계에 봉사하는 통제와 구속들에 맞서 싸우는 한, 이 투쟁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운동들과 깊은 관련을 가집니다. 다시 말해 투쟁의 일반성은 확실히 총체화의 형식, "진리"의 형식을 띤 이론적 총체화의 형식을 띠지 않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투쟁의 일반성은 권력과 동일한 체계이며, 권력이 행사되는 형태일 뿐입니다. 

                                                                     -미셀 푸코 <푸코와 들뢰즈의 대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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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나를 하루 종일 불편하게 했던...그리고 그 진동이 아직도 남아 있는 나영이 사건은 내게 박찬욱의 영화들을 떠올리게 했다. 박찬욱의 복수 3부작 말이다. 그 중에서도 최근 결혼한 이영애의 <친절한 금자씨>의 백선생 복수 장면이 떠올랐다. 꽤 오래전에 본 영화이고 따로 기록해둔 바가 없어서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백선생은 어린 금자를 임신시키고 그녀에게 유괴범의 누명을 뒤집어 씌운다. 하지만 그 뿐 만이 아니었다. 백선생은 아이들을 유괴살해한 범행을 여러차레 저질렀다. 금자씨는 낣은 폐교의 법정에 피해자의 부모들을 소환하고 백선생을 피고의 자리에 앉힌다. 

금자는 복수의 기획자이지 직접적인 실행자가 되지는 않는다. 대신 영화는 이제 그 천인공노할 가해자 백선생과 분노와 낯선 경험 사이의 파장 안에서 멈추어 버린 피해자 부모들의 대립을 보여준다. 영화는 백선생을 절대악으로 설정함으로써 쉽사리 관중의 복수에의 동참의지를 독려한다. "그래 저런 놈은 죽어 마땅해."  부모들의 분노와 복수 사이에는 또 머뭇거림도 있다. 금자씨에게 복수를 대신 시키자는 주장도 있었다. 하여간 처음 머뭇거리다가 점차 강도를 더해가는 응징의 폭력에 관객들은 일종의 쾌감마저 느끼며 동화해 간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범행장면을 보여준 것은 감독의 눈에 보이는 작전이다.)그런데 어느 순간...박찬욱은 다분히 사실적이라 할만한 정지를 보여준다. 가해자들이 최후의 일격을 가하지 못하는 것이다....나는 그 장면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홀연히 나타난 검은 무사처럼 느닷없는 한 번의 타격...   

 

.. 안전을 강조한다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폭력적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운명의 여신 모이라의 핏빛 눈길에 의해 불가역적인 사건들은 어떤 안전 조치나 예방으로도 막을 수 없다. 사건은 벌어지고 우리는 어떨 때 아파트에서 정전이 만든 순간의 암흑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사람처럼 무용지물이 된다. 그 때 느끼는 건 무력감이다. 내가 나영이 사건을 보면서 느끼는 분노에는 다분히 그런 무력감이 내재되어 있다. 이건 법적 조치를 강화하지 말자는 뜻도 아니고 그런 의지가 없다는 말도 아니다. 이런 류의 범죄적 폭력 앞에 드는 무력감은 정말 견디기 힘든 것이다. 그것의 한가지 해소방식이 '사적 복수'이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사적 복수를 사회가 용인해야한다고 생각치 않으며 또한 이번 일을 계기로 사형제 폐지에 대한 내 입장이 바뀌지도 않는다.)만약 운명과의 다툼이 있다면 그건 다른 말로 불가역적인 무력감과의 쟁투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어찌 보면 함무라비식의 '대항적 폭력' 또는 '직선적인 복수'는 그런 무력감의 공적 확산에 대한 경계였을 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복수가 범죄를 줄이지도 또 피해자의 원한을 완전히 해소하지도 못한다. 그렇지만 표층적인 해원에는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건이든 역사든 해원을 위한 '살풀이'의 과정이 없다면 사실 존재의 구원을 위한 첫 단추는 여전히 단추 구멍 주변을 더듬고 있는 것이 될 른지도 모른다. 지금 이 사건에 크게 분노한 내게도 그런 굿의 위안이 한 번 쯤 필요한 것 같다. 
 

..

 아내와 나는 가끔 저녁 무렵에 아파트 방송을 통해 "00동 000이나 알고 있는 분은 집에서 엄마가 찾고 있으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세요." 라는 내용을 들으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좌불안석할 부모들이 생각나서 그런 것이고 또 조금 크면 우리 집 아이도 그렇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해 여름의 일이다.나와 아내는 예찬이와 함께 놀러온 4학년 짜리 처조카를 데리고 해운대 해수욕장에 갔다. 예찬이는 어려서 내가 돌보고 있었는데 조카 녀석은 바닷가에 들어가서 놀아도 되지요 하면서 물로 들어갔다. 앞에서만 논다고 약속하고 보내주었는데 잠시 후 바닷가에 나가보니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불안해졌다. 이후 대략 1시간 가량 동안 아이를 잃어버린 셈이다. 방송을 하고 바닷가를 샅샅이 헤맸는데도 초등학교 4학년 아이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정말 별별 생각이 다 들고, 막막했다. 눈에 뭐가 보이는지도 잘 모를 정도 였다. 해운대 해수욕장의 파라솔은 모두 비슷하고 또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속 늘어나기 때문에 어른들도 여차하면 자기 위치를 놓친다. 대략 1시간쯤 지나고 녀석이 태연히 돌아왔다. 오히려 어른들이 왜 그렇게 화가 나있었는지를 어색해하면서 말이다. 자기 말로는 바로 앞에서 놀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와 내 아내의 눈에는 전혀 보이지가 않았던 것이다. 바닷물 속에 들어간 아이들은 식별하기가 쉽지 않다. 방송도 못들었다고 말했다. 노는데 정신이 팔려 있으니 들릴 턱이 없다. 하여간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그 때를 생각하면 ...후... 

몇 달 전에 서점에 들렀다가 아주 우연히 추적 60분팀에서 만든 책을 한 권 봤다. <당신의 아이는 안전합니까>라는 책이다. 아직 우리 집 아이들은 혼자 어디를 가거나 보낼 만한 나이는 아니지만 내 눈길을 끌었다. (나는 아이들의 안전사고에 민감한 편이다. 유괴같은 것은 아니다.난 어린 시절 끓는 물을 뒤집어 쓴적도 있고-다행히 상처가 거의 없다- 주인집 여자아이가 떠밀어서 옥상에서 바닥으로 널브러진적도 있다.부모님들 말에 의하면 정말 넙죽해져서 기절해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전혀 기억 못한다.)  

이 책은 추적 60분 팀이 연기자를 이용하여 유괴에 대한 아이들의 반응을 실험카메라 형식으로 방송한 것이다. 당시 방송을 보지는 못했지만 책의 내용을 보면 정말 충격적이었다고 한다. 유괴에 대한 안전 교육을 충분히 받은 아이들 중에도 어른 연기자들의 여러 유형의 꾐에 결국엔 넘어가서 승합차에 합승하더란 것이다. 당시 실험에 참가한 엄마들은 다른 곳에서 모니터로 이 장면을 보고 있었다. 엄마들 중에는 충격에 말을 잃거나 펑펑 울거나...그런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게 만약에 실제 상황이었다면 그 아이들은 '유괴'된 것이다. 그러니 엄마들의 가슴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이들을 대상으로 몰래카메라를 한 것이 윤리적이냐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만큼 유괴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 측면에서 그 정도의 비난은 감수할 만 하다.  

서점에서 대충 훑어본 것이어서 얼마나 효과적인 대처방법을 제공하고 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방심한 곳에 허점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만큼은 알 수 있을 듯 하다.  

.. 

이런 류의 사건이 발생하면 교과서적으로 나오는 말이 '학교-가정-지역사회'의 연대이다. 나는 거의 십 년전에도 이런 말을 들어봤다. 이런 반복적인 구호가 나오는 것은 그만큼 이런 연대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또 이런 연대가 가진 실효성이 그저 공염불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최소한 아이들의 안전에 대한  사회적 연대의 애정이 있다면 열번의 사건을 한번으로 줄 일 수 있는 가능성의 확률은 높아지지 않을까 싶다. 

..여전히 마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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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털 기사를 보다가...못 볼걸 안볼 걸 보고 말았다. 

...가학적 내용은 보지 말았어야 한다. 

.. 

고통스럽다. 

... 

.. 

이런 새끼들은 정말 한 점 한 점 뜨고 싶다. 

..내 안에 존재하는 악을 부활 시키는 그런 '악'이다. 

.. 

선의 이름이 아니라 

악의 이름으로 응징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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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오래 기억하지 않는다. 이게 아마 한국의 정치인들이 대중들에 대해 갖는 생각의 중요한 공통점일게다.

공무원 노조가 민주노총에 가입했다고 한다. 민주노총은 사실 내적인 문제와 외적인 문제에 동시에 맞서고 있다. 변화하는 자본주의의 양상에 따라 노총 내의 민주화와 새로운 방향의 제시라는 문제에서 자꾸 걸려넘어지고 있으며 또 이명박 정권 하에서 집요하게 작동하는 노총 교란에 힘을 잃어가고 있다. 그래서 규모가 큰 공무원노조의 가입을 크게 환호하고 있는 듯 하다.  

공무원 노조....공무원...난 일반명사로서 공무원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다만..어쨋거나 공무원노조의 민주노총 가입은 반가운 소식이다.  

그런데 공무원 노조를 생각하다가 최근에 회고록을 낸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생각났다. 공무원 노조와는 악연이 좀 깊기 때문이다. 

회고록의 출간으로 '님을 위한 행진곡' 내지는 '님의 뜻을 따라..'가 부하뇌동격으로 작동하는 것은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런 감상적인 흐름은....   

2004년의 노무현과 2009년의 노무현 사이에 나는 별로 달라진 게 없다.  

2004년의 홍세화 선생의 말과 2009년의 노무현 열기를 정리하면 

 '공무원 노조를 탄압하는 민주주의의 영웅' 이 된다.    

2004년 11월 홍세화 선생이 한겨레에 이런 칼럼을 쓰셨다. blog.aladin.co.kr/apple21/574250  

2004년 11월에 내가 쓴 거다. blog.aladin.co.kr/apple21/573815 
2006년 신문 자료는 못찾고 사회진보연대는 이런 글을 쓰기도 했다.  www.newscham.net/news/view.php  

.. 그리고 물어보나 마나 MB의 2009년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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