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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뉴스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3월
평점 :
내가 대학 들어갔을 때는 손으로 쓰는 레포트가 대세였다.학교 문구점에서는 학교 로고가 박힌 푸른 표지의 레포트 용지를 팔았다.일부 잔머리 학생들은 선배들이 예전에 썻?것을 베끼던가 아니면 표지만 달랑 바꾸어서 냈다.표지만 바꾸어 제출해도 표지 이름은 볼펜으로 싸인펜으로 직접 서명했다.정말 가뭄에 콩 나듯이 워드프로세서 라는 걸로 작업해 오는 친구들이 있었다.부러움과 찬탄의 대상이었다.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 대세는 호떡 뒤집 듯이 바뀐다.군대를 제대하고 복학생의 신분이 되었다.레포트 제출을 하는데 90%가 면서기처럼 하얀 워드 프로세서 작업을 한 것들이었다.그 때는 그래도 아직 인터넷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라서 손으로 자판 때려 넣기라는 수고는 했을 것이다.그리고 몇 년 지나지 않으니 인터넷으로 레포트 대신 만들어 주는 사이트까지 생겼다.
사람들은 자신의 세대가 문화적 변이의 중심에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아침과 저녘이 다른 기술문명의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세대여서 늘 힘들다는 것이 그들의 하소연이다.나 역시 그 속성에 빗대어 본다면 내가 거쳐온 세대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변화 중심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날로그적 삶이 인생의 절반을 차지 했다면 디지털화된 삶이 나머지 인생을 차지할 것이다.조금 더 지나면 디지털의 총화라고 불리는 '유비쿼터스'의 시대도 경험하게 될 듯 하다.
저자 김중혁과 나는 비슷한 세대이다.그 역시 아날로그적 소년기와 디지털적 청년기 속에 있었을 것이다.그의 소설은 자연스러운 변화처럼 느껴지는 이 두가지 삶의 방식 사이의 차이에 대해 말한다.그는 아날로그적 삶의 상징물들을 몇 개 제시한다.라디오,자전거,에스키모의 조각지도,타자기,연필 등이 그것이다.이 상징물들은 디지털 시대에 왕년에 홈런왕이었지만 지금은 벤치나 지키고 있는 4번타자 처럼 배치되어 있다.작가는 이 상징물들에 대한 애정을 통해 삶의 방식과 스피드에 문제를 제기한다.<무용지물 박물관>에 등장하는 라디오를 생각해 보자.(그 외 다른 단편에도 라디오는 가끔 등장한다) 주인공은 '압축하지 않는 건 죄악'이라는 믿음을 가진 디자이너다.압축은 지금은 일상에서도 흔한 단어지만 예전만해도 그렇게 자주 쓰이는 단어는 아니었다.'압축파일'........ 음악 하나 뜨는데 예전에는 실시간이 필요했다.하지만 지금 환경에서는 10분의 1의 시간으로 압축된다.하지만 주인공은 라디오라는 올드 미디어를 접하며 새로운 묘사의 세계를 깨닫는다.장황하지만 상상력이 넘치는 세계.즉 아날로그적 세계에 대해 다시금 돌아볼 기회를 갖게되는 것이다.<회색괴물>의 주인공들은 타자기라는 상징에 집착한다.타자기를 두드릴 때 나는 톡톡톡하는 소리와 줄바꿈을 위해 넘기는 경쾌한 소리들.... 주인공은 아날로그 세계를 사랑니로 치환한다.강하고 목표가 명확한 충치먹은 어금니를 뽑아내고 쓸모없다고 여겨졌던 사랑니를 그자리로 대치하는 것이다.
김중혁이 소설에서 건드리고 싶어하는 주제는 박민규 소설의 주제의식과 일견 겹친다.일종의 트렌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그 트렌드는 몇 단어들로 정리된다. '탈관습적인 삶'.'느린 삶의 속도' .....박민규가 김중혁에 비해 조금은 더 일탈적이며 해학적인 특징이 있을 뿐이다.<사 백 미터 마라톤>에서 주인공들은 스스로 삶의 스피드를 찾아가길 원하는 작가의 주제의식을 보여준다.400미터 선수인 친구와 몸의 역동성에 대한 무의식상태에서 무미건조한 삶을 꾸려가는 친구. 400미터는 전속력으로 뛰어야하는 경기이다.마라톤 같이 페이스 조절같은게 있을 수 없다.그저 출발 신호와 함께 100미터 달리기하는 속도로 결승테이프를 끊을 때까지 뛰어야한다.김중혁이 바라보고 있는 대다수 사람들의 삶도 이러한 전력 질주하는 400미터 선수와 유사할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처럼 400미터 이상은 뛸 수가 없다.그 이상은 다리가 후들거리고 심장이 벌렁거려서 뛸 수가 없는 것이다.또 한 친구는 달리기를 바라만 보았지 결코 트랙에 내려선 적이 없다.막상 달리고 싶은 충동에 땅으로 내려서지만 차마 발끝을 땔 수가 없다.이 둘은 천천히 자신들의 문제점을 들여다 본다.그리고 결론을 내린다.마라톤을 본 친구는 중학교 때부터 선생님에 의해 자신의 발이 400미터로 개조되었다는 것을 알게된다.또 한 친구는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아서 생애 최초로 바람을 가르는 스피드를 육화한다.그들은 곧 결론에 도달한다.... "내 스피드를 찾으면 된다는 것...그냥 존나 달려본면 된다는 것.." <발명가 이눅씨의 설계도>에서 이눅씨 역시 자신만의 발명을 한다.일종의 '개념발명가',주인공인 사진기자는 처음에는 그 사실을 의아해한다.하지만 점차 이눅이 자신의 공간 전체를 '하늘을 나는 배'로 전환시켰다는 것을 알고 흥분하게 된다.발명가 이눅은 기존의 관념으로 보면 아무것도 발명하지 않는 사람과 같다.하지만 그는 관습과 타인의 시선을 넘어서는 세계를 스스로 꾸려나가는 발명가였다.
김중혁의 소설은 트렌드처럼 되어 버린 주제를 생활 속 상징들을 가지고 직조해낸다.그가 책 후기에서 자신을 레고에 비유한다.이것은 그의 소설 속 소재들이 그 문화의 실타래 속에서 풀려나온 것임을 말한다.그래서 인지 그의 소설에는 대중음악을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코드들이 수시로 등장한다.이 소품들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친근함과 재기발랄함을 느끼게 해 줄 것이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저 이름일 뿐이다.<펭귄뉴스>에 나오는 펭귄뉴스 창단멤버들 엘비스 코스텔로(그래도 이사람은 좀 낫다..SHE라는 곡이 영화에 쓰여 인기있었으니)조이 라몬,시드 비셔스등에 대해 아시는가?( 라몬스의 조이라몬과 섹스피스톨스의 시드비셔스....펑크를 들으면 알고 아님 모른다) .<회색 괴물>에 나오는 1초에 13연타를 쳤다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는? <발명가 이눅씨의 설계도>에서 이눅씨의 공룡뱃속 같은 연구실에서 흘러나오던 사계의 연주자 앤드류 맨츠는...
다양한 레고조각(저자가 말한 자신을 구성한다고 한..)들이 소설 속에 과시적으로 배치된 것이 과욕이라고 생각한다.또한 이러한 과욕은 시대적 배경까지 헛갈리게 한다.저자가 듣는 음악들이 주인공들의 삶 속에도 그대로 투영되어 어색하게 만든다.예를 들어 <사 백 미터 마라톤>을 보면 소설 속 배경을 짐작하게 하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요즘은 아무도 정비 같은 건 받지 않는다.자동차의 동력원이 전기로 바뀌고 나서 자동차는 가전제품 같은 형편없는 골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생겼다' .추론컨대 소설의 배경은 가까운 미래이다.10년 -20년 뒤의 시대가 분명하다.작가의 상상력은 여기서 다시 90년대로 돌아온다.이 시대에 사는 오토바이 스피드 클럽 친구들이 '레이지 어게인스트 머신'을 듣는다.그리고 DVD방에 가서 그들의 라이브 실황을 본다.물론 작가의 상상력이 시대를 혼성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상상력과 작가가 경험한 문화적 세계의 충돌은 어색하게만 느껴진다.마치 요즘 고등학교 폭주족 아이들이 듀런 듀런,신디로퍼 등의 음악을 듣는 꼴이다.하지만 어쩌겠는가.주인공들은 불쌍하게도 작가의 음악적 취향에 따라 시대 배경 쯤은 무시하고 옛날 음악을 들어주어야하니 말이다.<펭귄뉴스>의 주인공은 77년 생이다.그런데 대화 도중 이런 말이 나온다. "난 동시 상영관이 좋아.왼쪽 화면에선 텔레비전 크기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오른쪽에선 대형화면으로 <영웅본색>을 상영하는거야" ...푸하하. 77년생이면 <영웅본색>이 나왔을 때 초등학교 저학년 찌질이들이었다.그들의 대화에 이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나? 있다면 딱 한가지 경우다.작가가 스스로의 경험을 캐릭터에게 뒤집어 씌운 경우이다.작가 세대에 <영웅본색>은 강력한 문화코드였다.그게 갑자기 여기서 불쑥 튀어나온다.그외에도 작가가 불쑥 불쑥 들이대는 경우가 한 두가지가 아니다. <펭귄뉴스>에서는 보드리야르에 대한 대중적 이해의 예를 그대로 인용한다.주인공은 TV 속 전쟁을 보며 삶이 따분하다고 느낀다.'모니터 속 전쟁' 개념은 언론이 시뮬라르크의 세계를 설명할 때 가장 빈번이 등장하는 예이다.'지난 걸프전 때 CNN은...어쩌구 저쩌구..'하면서 말이다.
또한 작가는 너무 직접적인 방법으로 '탈관습화된 삶'을 계몽한다.그 방향은 두고온 아날로그화된 삶이다.<바나나 주식회사><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등 여러 작품에서 작가의 주제에 대한 강박은 너무 직접적으로 소설 속에 반영된다.마치 이러저러한 우화를 들려주고 이렇게 되야되는거 아닙니까...라고 호소하는 듯 하다.이런 스타일이 꼭 나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그러나 작가를 구성하는 수많은 문화코드와 오버랩되면서 이 역시 작가의 과잉의욕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저자의 세대는 문화적 축복 속에 살았던 세대이다.집집마다 라디오가 있었고 초등학교 때 컬러 TV라는 것도 나왔다.또한 음반,영화 직배,해외 스포츠중계,PC,인터넷 등등을 통해 어느 세대보다 풍족한 문화자본을 축적할 기회를 얻었다. 이것이 소설 속 한 요소로 표현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하지만 소설을 보면서 불쑥 불쑥 소설 속으로 치고들어오고 싶은 작가가 보여서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