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나서 처음으로
해남 들 가운데를 지나다가
들판 끝에 노을이 들어
어찌할 수 없이
서서 노을 본다
노을 속의 새 본다
새는 내게로 오던 새도 아닌데
내게로 왔고
노을은
나를 떠메러 온 노을도 아닌데
나를 떠메고 그리고도 한참을 더 저문다
우리가 지금 이승을 이승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저 노을 탓이다
이제는 이승을 이승이라고 부르지 말자고
중얼거리며
조금씩 조금씩 저문다
해남 들에 노을이 들어 문득
여러 날 몫의 저녁을 한꺼번에 맞는다
모두 모여서 가지런히
잦아드는 저것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가슴 속까지 잡아당겨 보는 일이다
어쩌다가 이곳까지 내밀어진 생의 파란 발목들을
덮어 보는 일이다
그렇게 한번 덮어 보는 것뿐이다
내게 온 노을도 아닌데
해남 들에 뜬 노을
저 수천만 평의 무게로 내게로 와서
내 뒤의 긴 그림자까지를 떠메고
잠긴다
(잠긴다는 것은 자고로 저런 것이다)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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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미황사에서 노을을 기다렸던 적이 있다.너무 시간이 부족하여 미황사에서 바라보이는 섬들만 보다 내려왔다.해남 들녘을 달리는데 논과 산 사이로 붉은 구름과 푸른 구름이 엇갈렸다. 짧은 순간에도 하늘의 색은 수시로 변했다.해남 들녘을 걸어야만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