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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위안 - 에코의 즐거운 상상 2
움베르코에코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에코읽기'의 가장 큰 즐거움은 그의 익살과 풍자이다.<철학의 위안> 에 있는 에세이 도서관을 보면 가장 좋지 못한 도서관의 예 19가지를 정리한다.신청과 대출 사이가 길어야 한다.도서관에서 허기를 채울 수 있는 카페나 레스토랑이 없어야한다.화장실이 없어야 한다.신간 안내는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전시돼어야 한다.이렇게 하면 아무도 도서관을 찾지 않게 될 것이다.에코식 글쓰기의 특징은 이러한 반어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선명하게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에코에 의해 비틀리고 돌려치기된 세상과 사물들은 고정관념의 두꺼운 먼지를 털어내고 함초롬한 모양새를 드러낸다.독자들이 에코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이렇듯 세상을 한번 털어내어 독자들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에코읽기' 는 지적 유머를 동반하기에 분명히 책 읽는 즐거움을 준다.하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에코읽기'는 산을 올라가는 것 만큼 고역이기도 하다.물론 히말라야 준봉을 가을 소풍다니 듯 오르내리는 독자들에겐 에코가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주말에 동네 뒷산 오르면서도 가쁜 숨을 몰아쉬는 나같은 독자에게 '에코'라는 산은 뒷산 너머 아스라히 보이는 어느 산맥의 마지막 봉우리이다.
<철학의 위안>을 읽으며 몇 번을 그냥 접고 내려갈까 망설였다.90년대 이후 불었던 에코 열풍이 과연 진짜 열풍이었나 회의하면서 말이다.에코에 열광했던 그 많은 사람들이 에코식 글쓰기를 이해했을까? 또 에코의 지적 유희에 어느정도 공감하면서 손을 흔들었을까? 에코가 그렇게 인기가 있는데 왜 나는 에코를 읽으며 이렇게 고전을 면치 못하는가? 에코로 인해 책읽기의 자괴감마저 생기는 것은 아닐까? 하여간 이런 저런 부정적 생각을 하면서도 책장은 계속 넘어갔다.산 정상이 바로 저기 앞인데 조금만 조금만 더 가자는 심정으로말이다.
에코의 글쓰는 주제는 참으로 다양하다.매스미디어,대중문화,스포츠,희극,도서관,토마스 아퀴나스...아무래도 그의 글들이 지적인 대중지나 계간지등에 실렸던 글들이다 보니 그런 듯 하다.이 다양한 주제를 구워삶는 에코의 요리술은 화려하다.텍스트에 대한 이해를 주 재료로 수많은 도서관식 자료를 부 재료로한다.거기에 에코식 풍자와 익살이라는 양념비법이 버무려진다.우선 에코읽기에 어려움을 느낄 때는 에코가 말하는 텍스트에 대해 나의 사전 정보가 부족할 때이다.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중학교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중세 철학의 거두라는게 전부이다.에코가 아퀴나스를 가지고 이리저리 굽고 삶고 하는데 정작 독자인 나는 에코가 굽는게 돼지고기인지 쇠고지인지 모르고 있는 꼴이다.이 책 전반부에서 부터 가장 많이 언급되는 텍스트는 마샬 맥루한이라는 미디어 학자이다.마샬 맥루한....신문방송학을 전공한 내게 무척이나 친근한 이름이다.나의 대학 교수 중 어떤 분은 대학 4년 내내 맥루한의 <핫미디어><쿨미디어>만 이야기하고 다녔다.그는 에코식 표현을 빌자면 미디어 낙관론자인 셈이다.하지만 신문방송학이나 사회학 전공자들이 아니면 얼마나 마샬 맥루한에 대해 알 고 있을까?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계에서 전통의 어떤 흐름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도 아니고 또 그 뒤를 이어 어떤 학문적 계파를 이룬것도 아니다.어떻게 보면 미디어 학계에서도 혜성처럼 등장했던 사람이다.물론 그가 만든 개념들이 미디어에서 차용하기에 너무나 섹시하여 그의 저서 <미디어의 이해>가 다른 미디어학계의 고전들을 제치고 현대 사회과학 고전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말이다.
에코를 읽음에 있어 가장 큰 애로사항중에 하나는 역시 그가 인용하는 자료들에 대한 몰이해이다.에코를 탓이 아니라 배움이 부족한 나같은 독자의 무식이 원인이긴 하다.그럼에도 에코의 방대한 인용-자기만 알고 있는-이 면책을 얻는 것은 아니다.그러한 예는 책 중간 중간 너무 너무 많다. 에코를 읽었던 무식이 배짱인 일반 독자들은 공감할 것이다.그래도 서운하니 예를 들어보자.물론 이런 부분은 읽다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간다.그렇다고 에코가 전하고자 하는 바가 훼손돼지 않는다.단지 훼손되는 것은 이 책을 버겁지만 그래도 즐겁게 읽고자 했던 생각 정도일 것이다.
이런 예는 어떤가? ....평범한 이야기처럼 들리는 그의 라틴어 속에도 돌연 조야하고 천방비안과 빈정돼는 목소리가 난무해서 마치 마르크스가 스첼리가 씨를 질책하는 것처럼 들릴 정도이다.( 도대체 스첼리가는 누구인가? 마르크스가 신성가족에서 스첼리가를 뭐라고 질책했는데?)
우리는 이처럼 뻔한 수법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데 오늘날 가브리오 롬바르디와 같은 사람들이 애용하는 장난질도 이와 하등 다를 바 없다.(가브리오 롬바르디가 뭐하는 사람인데?)
무수히 등장하는 인용과 재해석과 낯선 이름들과 그들의 주장....에코의 지적 넓이가 보여지면 질 수 록 책읽는 속도는 반비례로 감속한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철학의 위안>에서 가장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매스미디어와 대중이다.에코는 현 시대에서 매스미디어가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장치라는데 동의한다.미디어가 지배하는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미디어에 의한 지배를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두가지가 있다.하나는 종말론적 입장이고 또 하나는 새로운 패러다임과 인간형의 탄생을 기대하는 낙관론적 입장이다.에코는 이 두 입장이 가진 논리적 과장과 논리 없음을 지적한다.그 칼날에 걸린 대표적인 희생양이 마샬 맥루한이다.맥루한의 그 섹시한 개념들은 에코에 의해 섹시하나 내용없음으로 규정된다.'미디어가 메시지'라는 마샬 맥루한의 유명한 문구는 코기토 인터룹투스-즉 논리적 연관성 없음-라고 선언한다.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가 그냥 한가지 섹시한 개념에 중복에 중복을 더해 '나는 치마를 입고 그리고 스커트를 입었다'는 동어반복만 일삼는다고 비평한다.에코는 메시지의 내용분석 즉 약호의 해석이 핵심이라고 주장한다.이러한 약호 해석의 다양성에 대한 에코의 관점은 미디어가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효과적 대응전략과도 그 궤를 같이 한다.미디어가 지배하는 세상에 대해 민중이 저항할 수 있는 방식은 게릴라적 대응이다.그것이 미디어에 의해 유포되고 강화된 방식이든 국가기관에의해 직접적으로 강화된 방식이든 메시지 해석의 자의성과 다양성은 개인적이고 점조직화된 방식으로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을 제시한다.푸코가 이야기한 권력이 분화되어 있는 것 처럼 저항의 방식 역시 분화되어야만 하는 것이다.에코의 지적처럼 사실 미디어계에서도 수용자 연구가 인기를 끌기도 했다.수용자 연구는 미디어 수용자가 메시지를 어떻게 해석하고 반영하는 가에 대해 촛점을 맞춘다.20세기 초반 등장했던 미디어 강효과 이론, 그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미디어 약효과이론에 이어 20세기 중반 이후는 수용자 해석의 다의성을 존중하는 중효과 이론으로 대세가 바뀌었다.에코가 지배에 대한 저항으로 게릴라전을 이야기 했듯이 이미 세상은 인터넷이란-에코가 글쓸 당시는 존재하지 않았던-대안 매체의 등장과 더불어 수많은 사이버 게릴라가 등장하였다.이들은 권력이 만드는 이데올로기에 대해 가상의 공간 속에서 다양한 담론의 장을 형성한다.인터넷이란 민주적 매체가 만든 저항의 한 양식일 것이다.
<철학의 위안>을 묵묵히 때론 짜증섞어가며 읽었다.에코식 글쓰기의 미덕은 분명하다.난삽하지 않고 날리지 않는다.한번 씩 비틀어주며 날을 세운다.'이성적 논리'에 대한 그의 존중 역시 개도 소도 포스트모던 이름 하에 숨는 세태에 회초리가 될 만하다.개인적으로 한가지 바람이 있다. 에코의 책을 좀 수월하게 읽을 수 있을 지적 능력에 대한 배고픔.. 히딩크와 아드보카트만 배고픈게 아니다.아..점심 먹으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