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교육의 파시즘 - 노예도덕을 넘어서 프런티어21 1
김상봉 지음 / 길(도서출판)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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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국민학교 배정을 받고 어머니와 교과서를 수령하러 갔다.요즘은 전부 새책을 나누어주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70년대에는 조금 달랐다.일부는 새책이고 일부는 선배들이 쓰던 책을 모아서 학교에서 임의분배 해주었다.내 기억에 나는 대부분 새 책을 받아던 것 같다.아무래도 엄마의 발이 빨랐나보다 아니면 강력한 항의가 한 몫을 했으리라.국민학교 저학년때는 책이 그다지 많지 않다.국어,산수..뭐 이런 기본과목에 '바른 생활'이 있었다.도덕이라고 그랬는지 '바른생활'이라 그랬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아마 국민학교 고학년쯤 교과명 변경이 있어서 기억에 혼동을 주고 있는게 분명하다.학교가 달라져 가도 바른생활-도덕-국민윤리로 이어지는 만만한 과목은 계속 돼었다.왜 만만한 과목인가 의아해하는 분.. 아마 그분은 대한민국에서 학교를 다니지 않으신 분일게다.'도덕' '국민윤리'는 공부 잘 하는 친구나 못하는 친구나 시험보면 점수가 비슷비슷하게 나오는 과목이었다.수학이나 영어의 반평균이 60점-70점 대였다면 국민윤리의 반평균은 80점 이상을 넘어섰다.개인의 성적으로 보자면 잘해도 표 안나고 못해도 그저 그정도 못하는 가장 만만한 과목이 바로 '국민윤리'였다.

'도덕'시험에서 점수 따기란 정말 쉽다.그냥 답안의 내용이 나의 신념이든 가치이든 하는 것은 상관없이 가장 그럴싸하고 또 가장 기계적 중용을 지키는 답에 동그라미치면 대개 평균이상 나온다.물론 고등학교 시간에 철학사가 조금 나오니 약간 외울 것도 있긴 했다.까짓거 그거 귀찮으면 찍고 나머지 옳은 소리에 동그라미쳐도 80점은 나온다.너무 극단적인 것들 배제하고  또 너무 이상적인 것 배제하면 사지선다 중에 대개 두개는 애시당초 답에서 배제된다.거기에 체제의 이념과 관련된 내용들은 공부안해도 그냥 답을 찾을 수 있다.그냥 공산주의 사회주의 나쁘다에 동그라미치면 된다.물론 거기서도 기계적 중용이 적용은 된다.예를 들어 자본주의의 내용중 잘못된 것은 ..뭐 이런 질문에 '자본주의는 완전무결한 시스템이다.'같은 것들은 정답이다.기계적 중용은 도덕 교과서의 미덕이기 때문이다.슬쩍 자본주의와 교과서 검정시스템의 관용의 자세를 보여주는 도덕 교과서의 센스다.

김상봉교수의 <도덕교육의 파시즘>은 우리가 일주일에 두시간 이상씩 12년 동안 배워온 도덕과목에 대해 반성적 성찰을 요구한다.도덕 교과서의 내용은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가장 먼저 부정되는 것 중에 하나이다.흔히 일상에서 '인생이 도덕교과서 같은 줄 아니?" 하는 말을 듣는다.평범한 말인데 잘새겨보면 도덕교과서의 경직성과 현실부적합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또 너무 고지식하거나 융통성이 없는 사람을 보면 '걸어다니는 도덕교과서네 그려" 라고 비꼬기도 한다.일상적인 언표가 지엽적이기는 하다.하지만 도덕 교육에 대한 현실적 거리감에 대한 한 우화정도는 될 것이다.사실 우리의 의식은 도덕교과서의 내용에 대해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그냥 교과서 안에서 완성된 진실정도로 여긴다.우리는 우리가 받았던 도덕,윤리 교육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전략을 써왔지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기회를 갖진 못했다.도덕,윤리 교육이 사회에 갖는 무게와 12년동안 지속된 교과과정의 양에 비하면 우리는 도덕,윤리교욱을 졸업하자마자  너무 감상적으로 폐기처분한 것이 사실이다.

김상봉 교수가 말하는 윤리교육의 핵심은 '자유로운 인간의 자기실현'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존재에 대한 긍정과 적극적으로 자기를 실현 할 수 있는 자유의 확보가 우선 필요하다.'도덕은 인간의 근원적인 자기표현이다'라고 저자는 말한다.하지만 개인의 존재확장만 가지고는 완전할 수 없다.타인과의 관계성 속에서 자기존재가 실현되어야 한다.저자의 말을 빌자면 '홀로주체'가 아닌 '서로주체'속에서의 완성이 바로 그것이다.하지만 우리 윤리 교육은 능동적 인간양성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근대 교육의 목표 중 하나는 보편적인 교육을 통해 국가 구성원들을 정신적 문화적으로 통합하는 것이었다.,우리 윤리 교육은 선이라는 보편적 가치 추구에 대해서는 피상적 접근 태도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억압하며 국민통합이란는 목표를 위해서는 주입식 교육을 통해 정권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다.이 과정을 저자는 '노예를 기르기 위한 도덕 교육'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윤리교육의 몇가지 특징을 말한다. 타자지향성,불의에 대한 침묵,타율적 당위성 강요,국가주의,국수주의,법과 질서에 대한 맹목적 순종 등이 그것이다.특히 관심이 가는 부분이 불의에 대한 침묵이란 점이다.우리 도덕교과서는 개인이 사회에 대해 도덕적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가르친다.하지만 타인이나 사회가 나에게 가하는 악에 저항하는 것이 도덕적 의무라는 것은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저자는 예절의 강요가 불평등한 사회관계의 위계를 고착화하고 불의에 대해서도 침묵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우리가 배운 예절이란 것은 상호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즉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대하는 태도만 있지 윗사람의 예절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없는 것은 잘못된 교육이란 것이다.이것은 사회적으로 확대해서 볼 수도 있다.즉 군대 내에서 폭력문제,직장 내에서의 언어폭력문제,학교에서의 선후배 간의 폭력문제등이 따지고 보면 이러한 일방적 교육의 잘못된 단편들이다.불의에 대한 침묵이 비도덕이라는 것이 교육되지 않는 상황에서 법과 질서에 대한 획일적 절대화는 당연한 수순이다.우리 교과서와 보수 언론이 가장 꺼려하는 말이 바로 '갈등'이다.노사갈등,빈부갈등,도농갈등,수도권과 지방의 갈등....등등. 도덕 교과서는 사회안정이라는 미명하에 '갈등'을 죄악시한다.그나마 조금 세련되게 말해서 "갈등도 사회발전의 동력이 될 수 있다.하지만.." 정도로 비켜가고 있다.그러면서 그 대안으로 말하는 것이 대화와 타협 그리고 기계적 중용이다.도덕교과서 점수 따기 쉬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이런 기계적 중용 중심 도덕 교과서를 잘 배운 사람들은 사회에서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대화가 돼는 사람으로 통하기쉽다.물론 그들의 성향이 온건하고 타협을 중시여기는 태도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하지만 '중용'은 '기계적 중용'을 뜻하지 않는다.김수용 시인은 '너의 중용은 비겁이다'라고 말했다.시인이 말하고자 한 바도 기계적 중요의 합리성 사이로 숨어버리는 중산층의 용기없음을 지적하기 위한 것일 게다.오히려 '기계적 중용'의 보신주의로 떨어지는 것 보다는 '세계는 당파적일 수 밖에 없다'고 전선을 긋는 것이 비겁은 면할 수 있는 태도일 것이다.하지만 우리 도덕 교과서는 자신들이 강요하는 도덕이 기계적인 중용인지 아닌지 생각조차 하게 만들지 않는다.갈등이 사회발전의 강력한 동인이 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며 당파성은 조선시대 사색당파로 인한 망국을 빗대며 전부 나쁜 것이라고 매도한다.그리고 그 끝을 장식하는 멋진말은 소크라테스가 명예훼손을 걸만한 '악법도 법이다'이다.

학교가 국가주의적 가치를 맹목적으로 주입한다는 것은 이미 여기저기 수많은 책들에서 언급된 내용이라 새로울 것이 없다.도덕 가치에 있어서도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국가라는 언급은 생각해볼 만 하다.특히 이념적으로 폐쇄된 나라에서 한쪽 방향만을 진리라고 강요했던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성찰해 봐야만 하는 질문이다.한쪽 눈만 커다랗게 툭 발달해 놓고 주변에 같은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이 전부 같은 모습이라고 자기들이 정상이다라고 외치는 꼴이다.예를 들어 양심적 병역거부 같은 경우 국가가 선과 악을 정하는 대표적인 예이다.군대를 가면 최고 애국은 안돼도 정상적인 사람이고 신념에 의해 그걸 거부하면 매국에 비정상 빨갱이 동조자가 된다.실제적으로 대체복무가 없는 상황에서 구속되어 감방가고 빨간줄 그어진다.이 양심범들은 국가가 정한 선에 대해 부정했기 때문에 악의 한 축으로 규정되어 그에 해당하는 징벌을 받는 것이다.그들에게 선과 악을 정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국가이다.

김상봉 교수는 우리 윤리교육의 문제점 조목 조목 지적하면서 윤리교육의 중요성과 윤리교육 내의 철학교육 강화를 그 대안으로 내세운다.왜 철학 교육인가 라는 질문에 저자는 철학이야 말로 학문과 삶의 총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 과목이기 때문이다 라고 답한다.전적으로 동의한다.저자가 말하는 철학이라는 것은 과거 국민윤리시간에 배웠던 관념론중심의 서양철학사를 의미하지 않는다.저자가 말하는 철학을 쉽게 설명하면 스스로 생각하고 반성하고 성찰하는 것이다.칸트식으로 말하자면 단순히 법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법칙을 능동적으로 정립하고 입법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이를 통해 주체의 자기실현이 이루어지고 궁극적으로 모든 인류의 절대적 서로주체성 속에서 완성을 이루는 것이 윤리교육의 목표가 돼어야 한다.조금 더 쉽게 말해서 스스로 성찰하는 인간이 정의감을 바탕으로 인류애를 실현하는 단계에 이르러야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노예 도덕을 배운 우리에게 여러가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많은 미덕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단점도 지적해야만 할 것 같다.우선 책의 중후반을 넘어가면서 흥미가 떨어져간다.이유는 읽는이의 철학적 깊이의 부재때문 이기도 하지만 윤리학의 당위론에 대한 설명이 너무 장황하다는것도 한 몫을 한다.저자 역시 도덕을 설명하면 어쩔 수 없이 당위를 언급할 수 밖에 없음을 이야기하지만 뒷부분으로 갈 수 록 책읽기의 동력이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어떻게 보면 정말 도덕교과서의 어떤 한 부분을 읽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이래야 하는 것'들에 대해 설명한다.이 부분이 이 책의 가장 큰 아쉬움이다.

이 책은 12년간 매주 2시간 이상 씩 받아오던 만만한 도덕 교육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교육은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연약한 사회를 만들 수 밖에 없다.상식이 상식으로 통하지 못하고 불의가 정의를 타고 넘는 사회,개인의 자유는 책 안에만 존재하고 사회에선 늘 조직과 국가가 우선시 돼어야하는 사회,이런 사회는 발전불가능한 갈등만 양산하며 사회에 근저에 있는 암적인 바이러스-예를 들면 파시즘같은-만을 배양할 뿐이다.그러한 점에서 우리 사회가 뿌리부터 깊은 단단한 사회가 되려면 저자가 강조한 철학하는 사회가 돼어야 한다 저자의 말에 동의 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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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1-31 23:05   좋아요 0 | URL
아 이 책 보셨군요. ^^ 현장에 있는 이로서 3월부터 또 어찌 가르쳐야할지 막막합니다. 나의 신념과 정신에 위배되는 내용들을 또 가르치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