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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정서웅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평점 :
괴테의 <파우스트>를 처음 본 것이 고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당시 집에는 아버지가 60년대 말에 사 놓은신 세계문학 문고집이 있었다. 그 책은 요즘은 보기 힘든 세로읽기 4단 구성이었다.글자는 요즘 책들이 비하면 10배정도는 작았다.그 문고집은 나의 고전읽기의 창고였다.안소니 퀸의 영화<25시>를 보고 서재로 달려가 뽑아 들었던 책,게오르규의 <25시>도 문고판에 있었다. 나스타샤 킨스키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은근한 성적상상과 연민의 감정을 동시에 느끼며 읽었던 <테스>도 그 동네 문고였다.방대한 고전 레퍼토리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문고집을 아끼지는 않았다.아니 오히려 그 문고집을 배반하고 싶어 안달난 숨은 모반자였다.세로 읽기에 낯선 나는 그 4단 구성 세로읽기를 읽다가 길을 놓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대개 읽었던 부분을 또 읽는 실수를 범했다.거기에 케케묵은 누런 종이는 아무래도 친구들 보기에 좀 창피했던 것도 사실이다. 나의 요구는 새 책이었으나 이미 집에 있는 책을 왜 사느냐는 상식적 답변에 늘 목소리를 죽여야 했다.그 경험으로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문집류의 책을 사지 않는 지도 모른다.아무리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이 훌륭해도 말이다.
약간의 겉멋에 읽었던 <파우스트>는 세로읽기의 번거로움과 함께 내용의 형이상학으로 인해 고등학교 2학년인 나를 괴롭혔다.운문투와 의고투의 문체는 내용 파악조차 힘들게 만들었다.하지만 이미 활을 떠난 화살은 날아가야만 했다.화살을 떨어뜨리고 싶어하는 중력의 힘을 주변의 시선과 오기가 버티게 해 준 것이다.파우스트를 어서 끝장내버리라고 메피스토펠레스를 응원하며 힘겹게 책장을 넘기고 있던 시절이다.그때 우연히 내가 <파우스트>를 읽고 있던 걸 본 한 선생님이 교단에서 나를 염두에 둔 듯 학생들에게 그런 말을 했다. "사실 요즘 여러분들이 무슨 고전 읽고 이러면 다 이해하긴 어렵다.뭔 말인가 싶기도 하고 또 안다고 해도 그 숨은 의미도 파악하기 힘들고...마치 무슨 의무처럼 읽게 된다.하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읽어라.그냥 모르면 모르는데로 넘어가며 읽어라.그리고 ...나중에 좀 더 어른이 된 후 다시 그 책을 꺼내 읽어봐라.그러면 지금 못 느꼇던 걸 다시 느낄 수 있을 것이고 지금과는 다른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나 평범한 말이었지만 책장 넘기기를 역기 들 듯 힘겨워 하던 내게 그 격려는 달콤한 샘물 같았다. 그 말을 듣고 난 다음에 <파우스트>는 금새 넘어가는 책이 되었다.그리고 그 말처럼 다짐했다. '지금 대충 넘어가지만 나중에 다시 꼭 한번 만나자' .... 그리고 10여년이 훌쩍 넘겼다. 대학 다니며 학교 앞 어느 서점의 포장지에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오직 푸르른건 인생의 황금나무'라는 <파우스트>속 구절을 볼 때 마다 그 약속을 떠올렸다.하지만 선뜻 이 화석처럼 오래된 괴테선생의 <파우스트>에 손이 가진 않았다.하지만 2005년.한해를 마감하는 시점에 드디어 오래전 나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별것 아니지만 왠지 오래전 부채를 떨쳐버린 느낌이어서 마음이 가볍고 올해를 마감하는 최고의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파우스트>에서는 우선 서양문화의 양대 축이 이종결합한다.기독교문명과 그리스문명이다. 구성상 보면 서막과 결론 부분은 기독적인 신관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서막부문에서 악마 메피스토펠리스는 절대자와 계약을 맺는다.또한 책의 대단원 부문에서 성모가 등장하고 기독교적인 구원이 이루어진다.전체적으로 인간의 절대정신이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구도속에서 어떻게 투영되는지를 보여준다.그리고 그 끝은 기독교의 죄사함과 구원이라는 틀로 수렴된다.하지만 중간 중간 인문정신의 보고인 그리스 문화의 중추들이 포진하고 있다.특히 그레트헨과의 짧은 비극이 끝난후 시작되는 2부에 그리스적 배경들이 전면에 등장한다.영화<트로이>의 중심인물인 헬레나를 비롯해서 수많은 그리스 신들이 파우스트의 여행에 동반하는 것이다.절대자와 대립되는 악의 한 축으로 등장한 메피스토펠레스는 2부에서 그리스의 문명의 다신주의 속에 하나 외부에서 유입된 악으로 묘사된다.메피스토펠레스는 자신을 비롯한 북구의 신이나 정령들도 이 곳 그리스적 문화 앞에서는 여러가지로 몸을 사려야 한다고 말한다.중세 유럽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괴테의 시대는 중세의 암흑대신 인간 이성과 인문의 정신이 모든 걸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 강했던 계몽의 시대이다.괴테의 상상력을 통해 메피스토펠레스는 절대적 악에서 상대적 악으로 변모하며 종교적 의미성보다는 인간적인 면모를 훨씬 많이 갖게된다.사실 소설<파우스트>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주인공 파우스트가 아니라 메피스토펠레스라고 생각한다.파우스트가 인간정신의 절대성을 상징하며 전형적이라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위트로 무장한 상대주의적 악이다.특히 메피스토펠레스가 뱉는 대사들은 파우스트의 형식적 공허함에 비해 훨씬 독성이 강하다.그레트헨을 유혹하는 장면에서 메피스토펠레스는 모든 작업의 정석을 보여준다.달콤함과 시적인 표현 그리고 가시를 숨긴 치명적인 언술등은 모사꾼이나 악동으로서 최고의 예가 될 듯하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우유부단하며 스스로 몸을 숨기는 파우스트에게 통렬하게 야유를 퍼붓기도한다.하지만 메피스토펠리스는 파우스트와 한 배를 탄 공동운명체로 행동을 한다.그의 영혼을 얻을 때까지 그는 목적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근대적 인간형의 은유자로서 움직이는 것이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메피스토펠레스와 파우스트의 관계를 근대적 인간형의 관점에서 바라본 독문학자 김수용 관점이 아주 재미있다. 김수용은 그의 책<괴테,파우스트,휴머니즘>에서 파우스트를 근대정신의 총화로 파악한다.무한한 욕망의 무한한 추구,이성에 대한 강한 믿음 등이 파우스트가 가진 내면성이다.즉 이는 파우스트의 모습이기도 하면서 우리들의 정신 세계와도 닮아 있다는 지적이다.메피스토펠레스는 이러한 무한한 욕망과 영원한 불만족을 비웃는 존재로 등장한다.그가 파우스트랑 내기를 한 것은 비웃는 존재로서의 실험일 뿐이다.김수용의 관점은 메피시트적인 악을 '계몽주의의 또 다른 모습'으로 이해한다.계몽주의의 한 면이 파우스트로 나타난다면 다른 한 면은 메피스토펠레스로 나타난다는 것이다.메피스토는 파우스트의 욕망 실현을 돕는 존재이다.그에겐 파우스트의 욕망이 선인지 악인지가 중요치 않다.김수용은 이 지점을 근대인이 가진 목적지향적인 계몽정신의 한계로 보는 듯 하다.즉 이성의 타락이 메피스토적인 악의 본질이라는 것이다.김수용의 비판은 더 멀리 나가서 파우스트가 가진 주관주의와 그 이성의 발전이 가져오는 전체주의적 속성까지 이어진다.
괴테의 시대는 계몽과 이성의 발전을 맹신했던 시대였다.지금은 그 근대적 인간과 프로젝트에 대해 성찰하는 시대이다.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김수용의 파우스트에 대한 탈근대적 접근은 여러모로 유효하다.2005년 최고의 뉴스였던 줄기세포와 황우석 박사.결국 그의 이야기도 무한 욕망을 추구한 한 인간의 좌절로 볼 수 있다.이성과 과학의 힘이 자기 통제를 잃고 무한한 욕망으로 발전한다.그 주관적 유토피아의 환상은 맹목적인 다중의 환상으로 확산된다.더 이상의 자기검열과 비판은 그 속에서 사라진다.황우석이라는 한국 최고의 과학자는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맺었다.파우스트가 바닥없는 허무주의로 악과의 계약을 맺었다면 황우석은 국가적 맹신이 자신을 지켜주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파우스트는 왕을 도와 얻어낸 땅에 간척사업을 한다.그리고 자신의 영원한 이상향을 건설한다. 그 와중에 유토피아를 거부한 노부부의 집을 불사르고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일을 묵인한다.황우석 역시 환자맞춤형 복제세포라는 과학적 유토피아에 대한 자기환상에 수많은 중요한 요소들을 묵살시켰다.진보와 발전의 맹목성에 대해 다시 한번 검토해봐야하는 시점이다. 우리는 <계몽의 변증법>에 나오는 이 말이 너무나 유의적절한 시대를 살고 있다.
"스스로를 계몽하지 않는 계몽은 필연적으로 전체주의에 이른다."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둘 다 매력적인 인물이다.그리고 괴테 시대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이다...... 다시 한 번 고전의 위대함에 경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