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주리는 세계 - 식량에 관한 열두 가지 신화
프랜씨스 무어 라페 외 지음, 허남혁 옮김 / 창비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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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업무상 서울에 갔을 때일이다.KTX를 타고 서울역에 내렸다.원래는 지하철을 이용해서 목동까지 가려했으나 조금 늦은 출발에 결국 택시를 탔다.택시 아저씨가 어느 방향이 좋겠냐고 물으며 교통방송을 틀었다.라디오에서는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 지금 여의도에서는 전국 농민대회가 벌어지고 있어서... 이 방향으로 운행하시는 분들은 외곽으로 우회하시는게...."

택시는 방향을  돌려 강변북로를 따라 성산대교쪽으로 향했다.조금전 교통리포터의 다급한 목소리에 이어 스튜디오의 아나운서가 다시 한번 비장한 목소리로 여의도 농민집회와 주변 정체에 대해 새겨듣고 괜한 고생하지 말라는듯 또박 또박 씹어 말했다.택시는 여의도 외곽을 지나고 있었다.멀리 왼쪽으로 국회의사당이 보였고 택시 기사는 약간 한심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허구한 날 시위야.차만 막히게.." 라며  궁시렁거렸다.

<굶주리는 세계>는 기아와 식량부족에 대해 일반인들이 믿는 상식이 완전히 잘못 된 것이라고 말한다.식량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막연한 믿음은 상식이 되어버렸다.그 상식은 세월을 더하며 의심의 여지가 없는 신화가 되어버렸다.이 책은 우리가 잘은 모르지만 '그러지 않겠어'라고 믿는 식량에 대한 생각을 12가지 주제를 동원해 차례 차례 공격한다.먼저 책은 독자들에게 식량부족,굶주림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 지 명확히 알 것을 주장한다.굶주림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전쟁,기근,인구과잉 등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부족이다.즉 부의 불평등 분배나 생산요소의 불평등한 지배구조야말로 전지구적 기근의 주범이라는 것이다.이와 함께 굶주림에 대한 일반인의 생각-이 책에서 지속적으로 공격받을-이 굶주림 종식의 가장 큰 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은 12개의 주제로 전지구적 굶주림의 신화를 인수분해한다.대략 그 제목만 살펴보자. 첫번째 신화, 식량이 충분치 않다.두번째 신화,자연 탓이다.... 자유시장이 굶주림을 끝낼 수 있다.미국의 원조가 굶주림 해결에 도움이 된다.... 이 신화가 제시하는 의견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거 아닌가'라고 답하기 쉽다.우리나라같은면 미국의 식량원조때문에 그나마 보릿고개 넘길 수 있었던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 있다.또는 아프리카의 대기근은 사막화와 내전때문이라는 미디어에서 만든 이미지만을 전적으로 믿고 있는 사람도 다수이다.이 책은 단호히 'NO'라고 말하며 한번 더 나아가 문제를 깊이 봐 주길 권한다.

12개의 주제 중 몇가지만 살펴보자.먼저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자연재해 때문에 기근이 온다'라는 것이다.미디어에 비춰지는 아프리카의 기근은 대개 자연재해 때문이다.에디오피아와 르완다의 뼈만 남은 아이들은 사람들에게 동정심과 자연재해의 무서움,또 저런 나라에 태어나지 않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때론 자기나라에 대한 애정으로까지-등을 불러 일으킨다. 동정심이라도 남아 있는 사람은 모금함에 돈을 넣고 나머지는 그대로 끝이다.'어떻게 해줄 수 있을까' 라는 적극적 행동은 말할 것도 없이 수동적인 생각마저도 멈춘다.그 자리다.바로 그자리에서 신화가 액체상태에서 고체상태고 응고한다.이후 부끄러움도 없이 '자연재해때문에 기아가 생긴다'라고 강력하게 말할 수 있는  근거로 자리잡는다.

실제로 80년대 에디오피아의 기근은 심각했다.그리고 자연재해가 가장 큰 원인이기도 하다.하지만 가뭄은 에디오피아의 토지중 30%에만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이것도 작은 비율은 결코 아니다.그렇지만 관개망만 갖추면 경작이 가능한 토지가 충분했었다고 한다.노는 땅이 많았다는 것이다.그리고 이미 기근이 시작되기 전부터 1인당 평균 식량생산이 20%이상 감소하고 있었다고 한다.거기에 에디오피아의 비옥한 토지에서 자라는 수출용 환금작물은 기아를 벗어나는데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이러한 증상들의 원인을 찾지 않고 날씨탓만 하는 것은 가장 쉬운 희생양찾기에 지나지 않는다.에디오피아의 경우 쿠테다와 내전으로 인한 국방비증가와 외자 유치가 문제가 되었다.군비충당을 위해 수출작물재배에 열을 올릴 수 밖에 없었고 노동력은 국방력으로 대체돼어 버렷다.르완다의 경우 역시 수출작물재배의 피해가 고스란히 나타난 국가이다.대토지 소유자의 수가 늘어나며 생계농업대신 환금작물농업 비율이 커져갔다.그중 커피가 문제가 된다.80년대 폭락한 커피가격은 르완다 경제자체에 부담이 될 수 밖에 없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르완다 민중들에게 굶주림이란 이름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관심을 갖고 보게 되는 부분은 '녹색혁명이 해결책이다' 주제이다.녹색혁명은 종자개량,과학적영농,화학비료의 사용등으로 생산량을 급격히 증가시켰다.우리의 경우  박정희의 근대화프로젝트중에 하나로 녹색혁명의 바람이 농촌에도 일었던 역사를 갖고 있다.일단 녹색혁명이 생산량의 증가를 가져와 절대적 빈곤해소에 도움이 된 것은 인정해야한다.그러나 우리는 운이 좋았던 편이다.모든 녹색혁명을 시도한 국가에서 성공한 것은 아니다.또한 성공의 단맛이 빠져가는 지금,녹색혁명에 대해 성찰하는 자세도 필요하다.녹색혁명은 경제권력의 집중구조라든가 토지접근성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그 기간동안 위 요소들이 강화되어 부농과 빈농의 격차가 훨씬 커졌다는 것은 외면 당하고 있다.또한 전통농업에서 중요시 되었던 식물다양성이 무시되었으며 농업에 있어서 석유의존도가 커졌다는 부분도 간과돼고 있다.녹색혁명이 주도한 화학비료나 농약들은 시간이 지나며 토양의 오염이나 생산성 감소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환경문제 뿐만 아니라 영농비용의 증가를 불러일으켜 소규모 자작농이나 빈농들의 부담을 가중시키고 말았다.수입의 저하는 당연히 농업의 포기를 불러일으켰고 토지는 몇몇 부농이나 대규모 농장들에게로 집중되어가고 있다.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저자들은 한국의 상황을 그나마 긍정적으로 파악한다.비교적 관개망이 잘 발달되어 있고 토지개혁이 상대적으로 잘 이루어졌기에 농업생산량증가를 위한 녹색혁명이 성공적이었다고 파악한다.옮긴이가 이 장 뒤에 토지개혁과 농업문제에 대한 국내연구 자료를 첨부하고 있는데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각과는 차이가 있어서 이채롭다.

굶주림에 대한 대다수의 시각은 시장과 자유무역이 이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다.이 논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성격 규정과 같은 내용이다.짧게 말하자면 ,신자유주의 시장에서는 경제권력의 집중이 초래된다.이는 정치권력의 집중과 궤를 같이한다.정부는 시장을 견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엘리트,대기업,외국계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관으로의 역할 밖에 하지 못하게 된다.대다수의 민중을 구조조정이라든가 임금삭감,복지의 축소등으로 삶의 질에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다.농업에서도 신자유주의와 시장의 파괴력은 가난한 농민의 생존권 자체를 말살 시킨다.

신화는 깨어졌다.하지만 질문은 남는다.그렇다면 뭘 어쩌란 말인가? '내가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고 소비자입장에서 싼 농산물이 있으면 대기업이든 곡물메이저든 쓰는거지... 안타깝긴 하지만 별 도리없다.'아마 이런게 일반적인 생각일 것이다.저자는 굶주림을 해소하기 위해 가장 먼저해결해야 할 것이 '무력감'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굶주림을 끝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변화의 가능성'을 믿는 것이라고 강력히 말하고 있다.전세계적으로는 노동자,농민들,작은 권리밖에 없는 대다수 민중의 연대를 강조한다.곡물메이저가 자본이 전지구화하는데 맞추어 노동자,농민의 투쟁 역시 전지구화해야만 전선이 형성된다.이렇게 거시적인 연대말고 저자는 작은 일상의 실천을 제시한다.우선 대안적 정보원의 확보이다.기존 미디어가 만드는 신화에 대해 삐딱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또한 지식의 활용을 제안한다.마지막으로 도덕적용기에 대해 언급한다.어떻게 보면 거대한 주제에 비해 무력해보일 수도 있다.대개 '무력감'편에 선 사람들이 그런 작은 도구가 무슨 소용있냐고 말한다.그가 바로 적이다.

일상을 사는 사람이 전국 농민대회에 나가서 돌을 던질 수는 없다.하지만 막연한 무력감에 또는 신화에 젖어 있는 동료에게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않은가? 그래서 그 상대가 달리 한번 생각해본다면 그것이 힘이다.세상은 나에게 모든걸 한번에 확 바꾸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마치 작은 소용은 별 의미가 없다며- 따지고 보면 '무력감'의 제자인-말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너무 대단한 영웅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일 지도 모른다.내 옆의 사람이 가진 신화에 대해 조금의 틈을 만들 수 있다면 세상은 그만큼 나은 쪽으로 가까와진 것이다.그것이라도 안하는 것 보단 훨씬 세상을 낫게 만든 것이니까.

 교통방송은 쉬지도 않는다....이번엔 영어로 교통방송을 한다.외국인이 멋진 캘리포리아 발음으로 여의도에 전국농민대회가 있어 차량정체가 심하다고 한다.택시 기사가 나도 안다는 듯 라디오를 끈다.택시 기사가 다시 궁시렁거린다. "아...지들만 살기 힘든가...요즘 힘든 사람이 어디 한둘이야..."

내가 내릴 때까지 그를 바꿀 수는 없다.하지만....

"아저씨..근데요..아저씨나 농민들이나...."

택시는 여의도를 빠져나와 한강을 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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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16 16: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blowup 2005-11-16 17:34   좋아요 0 | URL
이렇게 직구를 강속으로 날리시면 읽는 사람, 휘청합니다. 막연한 무력감,에서 고꾸라집니다.

서연사랑 2005-11-17 22:42   좋아요 0 | URL
한쪽은 지나치게 넘치고, 한쪽은 그때문에 지나치게 부족하고...
리뷰 잘 읽고 갑니다. 그렇지 않아도 제가 읽고 싶은 책 중에 드팀전님 리뷰가 달린 책들이 많아서 가끔 들어와보곤 했는데 인사는 처음이네요.
인사 드리며 더불어 추천도~^^

드팀전 2005-11-17 18:03   좋아요 0 | URL
@@님>연일 날려주시는 추천 뻐꾸기에 ....감사.
나무>켕...직구였나요? 사실 슬라이더를 덜질라 햇는데...손에서 빠져버렷나봐요.에이...이 막연한 컨트롤에 대해 무력감이 드는군요.켕켕.
서연님>..그 유명한 분을 친견하오니 오늘 로또나 한방 사야될 듯 합니다.반가와요.
대학후배 여자에 중에 자기 이름이 맘에 안든다고 하면서 '서연'이란 이름을로 지를 불러달라던 애가 있었는데...제가 님 서재를 처음봤을때 그 친구가 떠올랐습니다.이쁜 이름이에요.그쵸? 제가 좀 소심하여서(ㅋㅋ) 여기 저기 댓글을 많이 남기지는 않습니다.바람구두님은 그래서 절 깍쟁이라고 언젠가 부른적도 있지요.(부르르 아직도 기억한다...) ... 저도 님의 서재를 가끔씩 들러봤다는 것만 기억해주시길..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