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그림자 1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인류 최초의 거장 조각가인 다이달로스는 크레타의 왕 미노스의 요구로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미궁을 만들었다.그 안에는 부정한 아들인 반인반수 미노타우루스가 갇혔다. 인신공양의 신화는 영웅 테세우스의 등장으로 막을 내린다.테세우스는 실뭉치의 지혜를 빌어 다시 바깥으로 빠져나온다. 이후 미궁에 갖힌 사람은 미로를 만들었던 다이달로스였다.아이러니이자 순환하는 역사의 또 한가지 모습이다.다이달로스는 인간의 의지로 탈출한다.그의 재능은 그에게 인류 최초로 하늘을 나는 기회를 주지만 결국 또 다른 비극을 잉태한다. 태양에 너무 가까이 가버린 아들, 이카루스의 죽음이다.

<바람의 그림자>의 구조는 다이달로스의 미궁과 같다.소설의 형식은 소실점을 향해 달려간다.파편적인 기억의 몽타주가 책장을 넘기며 강렬하게 충돌한다. 불빛 하나에 몸을 의존한 테세우스처럼 벽을 더듬으며 미노타우루스에게 다가간다.가끔 발뒤꿈치를 따라오며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실꾸러미의 존재도 잊곤한다.때는 1940년대.바르셀로나의 이국적 풍경들이 미로를 둘러싼 벽화들 처럼 소설의 벽들을 장식한다. 책 표지의 사진처럼 소년 다니엘과 그의 아버지는 '잊혀진 책들의 도시'로 향한다.수십년이 흐른 후 아버지 다니엘은 똑같은 모습으로 그의 아들을 데리고 그곳을 향한다.테세우스가 미궁 앞에 묶어 놓았던 실의 첫묶음이 다시 돌아오는 길의 최종목적지가 된 것처럼 말이다.

이 소설의 형식과 내용,그리고 인물은 반복적인 순환의 관계성을 갖는다.<바람의 그림자>는 책의 저자 사폰의 작품이자 다니엘이 '잊혀진 책들의 도시'에서 운명적으로 조우한 소설속 훌리안 카락스의 작품이다.훌리안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주인공 다니엘은 또한 훌리안 카락스의 또다른 이름이다.훌리안은 또한 다니엘의 가족이기도 하다.소설 속 인물들은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즉 시간과 공간의 배치를 달리하지만 인물들이 대칭적으로 마주하고 있다.마주선 사람들 사이를 흐르는 것은 시간이고 바르셀로나라는 낭만적인 도시이다.또한 스페인내전을 둘러싼 어수선한 시대의 분위기와 변하지 않는 사랑의 이야기가 대칭구조를 채우고 있다. 신비한 인물인 훌리안은 다니엘과 대를 이룬다.페렐로페는 배아,훌리안의 믿음직한 친구 미켈은 페르민... 훌리안의 손에서 다니엘에게 그리고 다시 훌리안에게 돌아간 몽블랑 만년필까지도 소설이 두개의 기둥을 가진 한 구조물임을 알게 한다.

아쉽게도 다니엘이 찾은 훌리안카락스의 <바람의 그림자>가 어떤 내용인지 소설 끝까지 봐도 알 수는 없다.하지만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는 두 남자의 사랑이야기이다. 형식은 훌리안의 흔적을 뒤적이는 취리소설의 형태를 띤다. 조각 조각난 인터뷰들을 재구성하며 훌리안의 모습을 그려나가는 재미가 소설 전반부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가끔 누가 누구더라 하면서 앞장을 뒤적이는 경우도 있지만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들이 살아있어서 이내 적응한다.소설 속에서 가장 매력적이며 모범적인 인물은 다니엘의 아버지이다.책을 읽으며 조금은 평면적이지만 현자와도 같은 아버지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사람들의 생각은 비슷하다고 책의 역자 역시 후기에서 자신 역시 다니엘 아버지의 단정한 모습이 강하게 남아있다고 말한다. 반대로 악역을 맡은 이는 푸메로 경위이다.그는 마치 고문경찰 이근안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소설 전반부 부터 악의 축으로 모습을 천천히 드러낸다. 다니엘의 훌리안의 흔적에 대한 추적은 결국 푸메로의 어린 시절까지 닿아있다.소설속 갈등의 원인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고 이후 소설은 고속기어로 변환되어 속도를 높여간다.조금 아쉬움이 있다면 푸메로 경위라는 캐릭터 역시 악의 축으로 전형화되어 있다는 것이다.조금만 더 인물의 내적인 악에 대해 집요함을 보여주었다면 푸메로라는 캐릭터가 훨씬 공포스럽고 입체화 되었을것이다.

이 소설이 추리소설의 형태를 띠며 갖는 한계가 주요 인물들의 서술에 대해 관찰자 또는 전달받은 형태로 서술 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훌리안의 세계,페넬로페와의 사랑,푸메로의 악마적 내면,미켈의 자학적 헌신 등등 과거 속 인물들의 이야기가 이들의 주변 인물의 입을 통해 그려진다.이러한 관찰자의 시선은 늘 그들이 가진 내면의 고통과 감정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닿기 어려운 벽을 만든다. 이 인물들의 캐릭터는 현재 인물들 이상으로 중요하며 매혹적이다.하지만 작가는 추리구조를 지키기 위해 이를 양보할 수 밖에 없었나 보다.그나마 현재 인물들-특히 페르민-의 경우에는 촌철살인의 문장과 현학적 대사등을 통해 인물들이 천연색의 옷을 입고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소설의 구조상 줄거리와 관련된 많은 말을 할 수 없다. 누리아의 마지막 편지로 모든 사실들과 단절된 사건이 통합되어 지기 전까지 소설은 조금씩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더 많은 이야기는 스포일러가 될 가능성을 높인다.소설은 빠르게 읽힌다.후반부로 갈 수록 탄력을 받는다. 스토리 역시 영화화 하기 좋은 내용이고 또 어디선가 한번쯤 본 듯한 영화같기도 하다. 미궁은 조각조각 모습을 보이다 결국엔 전모를 드러낸다. 뒤에 오는 자는 앞선자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테세우스가 이미 미궁을 탈출하는 법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휴가가는 동안 읽기 위해 골랐는데 좋은 선택이었다.휴가 갈 때 읽으면 좋다.너무 머리를 쓰지 않아도 너무 감정이입되지 않아도 너무 인생의 불가해성과 깊이의 모호함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태우스 2005-09-22 15:00   좋아요 0 | URL
관찰자의 시선은 늘 그들이 가진 내면의 고통과 감정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닿기 어려운 벽을 만든다.--> 전 언제쯤 이런 멋드러진 서평을 쓸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