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짓는 늙은이 - 황순원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8
황순원 지음, 박혜경 책임 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S형는 나의 직장상사였다.

첫만남 부터 그는 좀 만만해 보였다.친근감 가는 동그란근 얼굴,둥근 안경,하얀색 남방과 청바지...묵직하지 않지만 부드러운 목소리...아직 어색한 몸짓의 신입사원에게 편안해보이는 그의 인상은 적지않게 안심이 되었다.그로부터 몇 달이 흘렀다.서로 부대끼며 그에 대해 점점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그의 필체가 아주 독특하다는 것.보통사람들은 왠만해서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지갑을 갖고 다니지 않고 그냥 돈을 꾸깃 꾸깃 넣어다닌다는 것,깜빡깜빡 잘하는 성격이라는 것.그리고 은근슬쩍 웃어넘긴다는 것.예를 들자면 이렇다.

"차장님,오늘까지 000서류 넘기라고 했는데 하셨어요? " "아...잊어먹었다.아휴..정말 난 왜 이러니..미안미안" ....  "오늘 00시에 000씨와 약속있는 거 아시죠?" "아..진짜...모르겠는데" "제가 어제 저녁에도 이야기 했었잖아요?" "아...그래 기억난다.미안 미안...아휴..."

그래서 난 그에게 제안했다."차장님 메모를 하세요 " ... "아!좋은 생각이다.진짜 그래야겟어"

며칠뒤..."차장님...그때 알려드린 전화 번호 좀 주세요" "어...여기있는데...어디다 적어 놓았더라.아 !찾았다.근데 이 메모지 안에도 뭐가 많이 적혀있다.이거니 ..아니야...이거...아휴..미안 미안"

그래도 S형은 결코 밉지 않았다.그에게는  권위적인 모습이  없었다.그는 스스로도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이었고 또한 타인에게도 그러했다.나의 직장 생활 초반은 그래서 거의 대학생활 비슷했다.물론 더 높은 아저씨가 가끔 딴지를 걸었지만 신입사원에게 불똥이 떨어져 봤자다.대개 왠만한 일은 S형이 다했기때문에 상사에게 욕먹어도 그가 다 당했다.그러면서도 늘 "난 진짜 서류랑 회의랑은 안맞는 거 같아." 이러고 만다.

 내가 그를 좋아했던 것은 그가 내가 언젠가 꼭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나는 나이가 들어도 영혼이 자유롭고 생각이 유연한 '젊은 어른'을 만나고 싶었다.그런데 불행히도 그를 만나기전까지 단 한번도 그런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대학교의 복학생들만 해도 목에 힘주고 '야..내때는..'이런다.)내 교류의 폭이 좁아서이기도 하겠지만.... 지금 나름대로 사회생활을 하고 난 후에도 그를 제외하고 그런 사람을 만난적이 없다.

S형과 나는 잘 놀았다.

어떤 책을 보다가 "차장님..000 이거 봤어요" "아니" "이거 진짜 괜찮거든요." "그래..나두 봐야지" ... "차장님, 마음 답답한 가을에 들을만한 음악 뭐 없어요? " ..." 브람스 현악 6중주"...언젠가 S형과 술 먹다가 2차로 그가 좋아하는 화가 선생을 찾아 가기로 의기투합했다.그 화가는 부산 가까운 시골에서 비닐 하우스 화실을 쓰고 있었다.밤 11시에 전화해서 그가 막무가내로 보고싶으니 차 한 잔만 달라고 그랬다.그리고 출발.... 가다가 내가 뭐 하나 사가야 되지 않느냐고 했다.우리는 꽃다발을 사기로 했다. " 무슨 꽃이 좋을까요?"  "뭐 대충..국화랑..." ..  "돈 주세요" 그는 주머니를 뒤적이다가 꼬깃 꼬깃해진 천원짜리 3장 꺼냈다. "야..미안한데..나 이거밖에 없다." ..."이그..차장쯤 되면 돈 좀 가지고 다녀야지 ..뭐에요" "그러게 말이다."..결국 내 돈 1만원 깨졌다. 그가 말했다."근데 꽃다발 포장말고 그냥 신문지에다 싸달라 그래.그걸 좋아할꺼야" .....결국 신문지에 싼 국화 한다발을 들고 시내에서 한 시간쯤 들어간 시골화실에 가서 화가선생이랑 잘 놀았다.나야 들러리였다.맘 속의 애인 만난 S형만 좋았다.

그는 '내츄럴 본 자유영혼'이다.아마 그가 정규교육을 받 지 않았기 때문에 더 그랬을 것이다.그는 중학교때 자퇴를 했다.(그의 자퇴이유는 언젠가 한 번 쓴 적이 있다)그리고 혼자서 책보고 껄렁거리며 놀았다.무전여행도 했다가 며칠 못 가서곧 포기하고 빈둥거리면 놀았단다.피아노 조율하는 것도 배우고 어깨너머 피아노도 배웠다.한 4-5년 그렇게 살다가 어느 순간 책에서 본 사변적인 지식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싶다는 학구열이 생겼다고 한다.그래서 스물 넘긴 나이에 대학에 들어가서 사회학을 배웠다.그리고 연애도 했다. 다른 학교 국문과 다니는 학생이었다.하도 그녀의 수업 도강을 많이해서 다른 학생들도 다 알았다고 한다.

어느날 교수가 '자네는 우리과 학생인가? 좀 나와보게' 그래서 S형은 교단까지 끌려나갔다.결국 이실직고를했다. "저기.. 이 과에 있는 00이 애인이라서 그냥 같이 몇 번 수업 들었습니다 ..교수가 웃더니 '그럼 이사람아. 수업료를 내야겠구만.노래 잘하나? 노래 하나 하고 들어가게"  S형은 결국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고 여학생들의 열광 어린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물론 그녀와 결혼했다.그리고 이혼도..ㅋㅋ (원래 다 그런거다)

그의 첫번째 직장은 포항 바닷가 근처였다.그는 창을 열면 바다가 보이는 어느 초가집 방한칸을 얻었다고 한다.할머니 혼자 사시는 집이었다.그의 말을 빌자면 밤에 눈을 감고 누우면 파도 소리가 방앞까지 와있는 듯 생생하게 들렸다고 한다.또 아침에 눈을 뜨고 방문을 밀면 푸른 바다가 눈앞으로 가득했다고 한다.몇년간의 직장생활을 하다가 그는 하던 일이 지겨워졌단다.왠지 머리로 하는 일말고 땀흘리며 몸으로 하는 일이 하고 싶어졌다고 한다.그래서 사표를 내고 제주도로 갔다.제주에서 한 1-2년 살았다는데 아주 어려웠단다.난 농사를 짓다가 실패하고 영어 학원강사도 해보고 식당에서 일도 해봤단다.결국 제주 생활을 접고 서울로 올라와서 운 좋게도 원래 하던 일과 비슷한 일을 잡았다.그리고 몇년 후에 부산으로 내려와서 일을 시작한 것이다.

S형과는 한 3년 정도 함께 일했다. 어느날인가 그가 잠깐 차나 한잔 하자고 했다.그러고 하는말.

" 야..나 인제 그만 둬야겠다.관리자가 내 적성에도 안맞는 것 같고..조직이랑 어울리지도 않고."  사표 수리되는데 한 달이 걸렸다. 그가 빠져나가고 난 다음부터 회사가 내겐 재미가 없고 진짜 회사가 되버렸다.다시 새로운 조직 인간들과 적응하는데 꽤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가 서울로 올라가고 1년 쯤 지난뒤 그를 만나러 갔다.저녁때 보기로 했지만 새로 시작한 일때문에 자꾸 미루어졌다. 그가 제안을 했다. " 야...우리집 경춘선타고 한 40분쯤 가면되는데 괜찮으면 같이 갔다가 내일 함께 나오자" 나는 그러마 했다. 우리는 10시 다 되어서 청량리 역에서 만났다.기차 밖은 캄캄했다.그래서 대학 시절의 경춘선 낭만을 느끼기 힘들었다.그와 함께 도착했던 역이 어느 역인지는 지금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형수가 역 앞까지 남색 마티즈를 끌고 마중 나왔다. S형과 형수는 가는 동안 "집이 좀 후지고 불편해도 뭐라 하지마라" 라고 연신 이야기했다.

그가 사는 집은 논 사이에 있었다.개구리 소리에 귀가 아팠다.가로등 하나가 집 대문을 비추고 있었다.전형적인 촌집이었다.어떤 화가가 쓰던 집인데 몇 백만원에 샀다고 한다.집은 안채가 있고 대문옆에 광이랑 외양간이랑 사랑채가 있었다.마당에는 작은 평상이 하나 있었다.오랜만에 이런 저런 이야기하다 꽤 늦게 잠이 들었다.사랑채 방에는 피아노랑 책들이 가득했다.그가 예전에 살던 아파트에서 봤던 책 배열 보다 훨씬 운치가 있었다.한 사람 누우면 달리 남는 공간도 없는 작은 방이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개구리 소리가 좋았고 방에서 나는 책 향기가 좋았다.공기는 너무도 달콤했다.안채에서 S형이 물었다. "야..안 불편하냐?"

나는 '아니요' 라고 답하면서 밖으로 나왔다. 아직 잠들지 않았던 형수의 목소리가 들렸다'"불편해서 못 주무시고 나오시는 거에요'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형...이집 너무 좋네요.별빛 보는게 얼마만인지..설레여서 잠이 안오네"  그가 말했다. "니가 그걸 좋게 봐주니까 좋은 거지....나두 여기가 나쁘진 않아" 나는 담배를 몇 개피 연달아 피우며 밤의 소리와 별빛을 감상했다.별빛이 따뜻했다.

 함께 놀던 시절, S형이 황순원 선생의 단편소설을 읽고 다녔다. 황순원 선생이 작고하신 즈음이었다.신문에 난 부고기사를 보고 책장에 박혀있던 옛날 책에 손이 닿았으리라..형은 그 때 바닷가를 달리는 기차를 타고 다녔다.출근 길에 덜컹이는 기차 안에서 바다를 배경으로 책을 봤을 것이다.그는 "황순원 단편 소설 정말 좋아.예전엔 미쳐몰랐는데..이렇게 좋은 소설인지 최근에 알았어.왠만한 단편소설의 원형은 다 들어 있는 것 같아.너두 언젠가 기회되면 봐라.좋더라."

나는 그와의 인연이 오래 가리라는 믿음이 있다.그는 내 전 직장상사이자 동료이며 또 형님이자 친구이다.

"S형...소설 좋았어요.형 말처럼...."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kleinsusun 2005-08-24 13:48   좋아요 0 | URL
이야....리뷰를 이렇게도 쓸 수 있구나.
그 선배 정말 cool한데요. 시골집 묘사가 뛰어납니당. 보이는 것 같아요.ㅋㅋ

근데...드팀전님,드팀전님은 정말 넘 웃겨요.
어쩜 그렇게 웃길 수가 있는거죠..... 자유롭고 분방한 영혼,호홋.
제 서재에 다신 댓글 읽고 넘 웃겨서 10분은 키득거린 것 같아요.

어제 와인이 달아서 홀짝 홀짝 , 꿀떡 꿀떡 마셨더니 오늘...힘드네요.

바람구두 2005-08-24 17:38   좋아요 0 | URL
슬픈....

드팀전 2005-08-25 09:04   좋아요 0 | URL
수선님>ㅋㅋ 쿨한건가요.....웃으라고 쓴 글 아니었는데..즐거우셨다니 다행이군요.
구두님>뭐 어쩌라구요? 말을 하다 말어...슬픈 감자탕? 슬픈 아롱사태? 슬픈 붕어빵?... 즐거운 금자씨,불친철한 미자씨,뺀질거리는 순자씨...슬픈..뭐가 도대체 뭐가?

픽팍 2006-04-02 10:30   좋아요 0 | URL
이 리뷰 정말 괜찮네요;;지금 데니스 루헤인의 살인자들의 섬 읽다가 감기몸살이라머리가 아파서 기분전화하려고 리뷰읽었는데 완전 감동입니다요;;;하나의 단편 소설을 본 기분이에요 아 부럽다 글 잘 쓰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