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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 개정판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박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덥썩 물었다.한입 삼키면서 부터 '이거 봐라.이거 계속 먹어도 되는거야' 라고 되뇌였다.하지만 내 소화기의 자존심은 이까잇 녀석에게 굴복할 수 없다는 자신감을 내비췄다.그렇다면 가는 거지....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물에 빠지지 않는 묘기를 보여주셨다.이론상 아주 간명하다.한발 빠지기 전에 다른 발 딛으면 된다.영화 <동막골>에보면 바보 강혜정이 이런다 .'나 참 이상해요.팔이 이렇게 마...악 빨라지면,발도 마...악 빨라지고..." 예수님도 왼팔 오른팔 열나 빨리 움직여서 발이 따라오게 했을 것이다.그래서 물에 빠지지 않았겠지.나 역시 이까잇 <일본야구>쯤에 빠지지 않기 위해 손에다가 침바르고 열나게 빨리 넘겼다.다 넘겼다.
패잔병처럼 마루 한편에 쭈그러져 있는 <일본야구>를 보고 찍..한소리 했다.
까잇거....니가..까잇거..나를 ..까잇거....가지고...까잇거...거시기 할려는것 같은데...까잇거.. 머리에 왠 파리가 윙윙 도냐?
덥썩 물었던 <일본야구>와 나와의 한판은 나의 일방적 승리(?)로 끝이났다.'까잇거'와 '산만한 정신'으로 무장한 나를 '우아나 떨고 감상이나 떠는'<일본야구>가 이길 수는 없는 것은 명약관화하다.하지만 기분이 유쾌하지만은 않다.22층 아파트를 다 내려와서 화장실 물안내리고 온게 생각날때 드는 기분이다.베이지색 변기 수영장에 동동 자유형에 배형까지 자제로 동동...에이 자꾸 눈 앞에 파리가 윙윙 돈다.
이 책을 덥썩 문것은 일부 알라디너들의 지대한(?)관심때문이다. 책 제목은 영화제목처럼 흔하다. 한번도 듣지 않았어도 어디선 가 들었던 것 같은 친숙함을 준다.그래서 이 책에 대한 알라디너들의 관심을 목격했을 때 나역시 부하뇌동했다.거기에 한동안 절판이었다는 것은 신비주의적 후광을 발휘하는 덕목이었다.내게 이 책을 클릭하게 만들었던 알라디너들은 단 한명도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쓰지 않았다.신중한 분들이라 말을 아끼고 있으리라.이런때는 돌쇠가 나서서 '까잇거...다 덤벼 보드라고....다 죽어불자..잉' 이렇게 나와야 한다.나는 트팀전에서 돌쇠로 서재명을 바꿀까 심각하게 고민중이다.
<일본야구>의 스토리는 알 필요없다.그렇다고 스토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단 스토리가 미친 언니 치맛자락 처럼 마구 날리고 있어서 촛점 맞추기 어려울 뿐이다.거기에 작가의 말장난과 독자를 향한 새디스트적 상상력은 줄거리를 '거시기' 하게 만든다. (주: '거시기'는 작가를 겨냥한 나의 복수다.) 줄거리를 애써 맞추려는 논리적인 사람들은 펜과 노트를 준비해서 앞뒤를 맞추어 볼 수 도 있다.다부지게 마음 먹고 달려들면 인물들의 관계와 줄거리의 맥락을 '거시기'해 버릴 수 있다.근데 '나의 게으름'은 그러길 거부했다.그러면서도 논리에 대한 교육받은 의식은 사건을 정리하고자 한다.준비없이 암산만으로 정리하려니 자꾸 눈앞에 파리가 윙윙돈다.앗..바로 이것이 <일본야구>가 나를 향해 준비한 공격패턴이군.이라고 생각하며 가볍게 줄거리 따위는 대충 '거시기'해버린다.
소위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더냐? 나의 생활의식은 모더니즘에 극히 구속되어 있다.하지만 90년대를 시작으로 불기 시작한 '포스트모던'은 내 의식의 범위를 약간 확대해놓았다.모든 영역에 그대로 대입하긴 어렵겠지만 내가 바라보는 포스트 모던은 모던의 극복이나 모던 이후의 무었이 아니였다.지배적 양식인 '모던'에 대한 비주류적 실험이요 반성적 성찰이었다.이러한 심플한 정리는 주로 사회학적 관점에 입각한 것이다.예술에서의 모던/포스트모던은 각 장르별 특성에 따라 소재의 변주에 따라 백화제방을 이룬다.소설의 포스트모던에 대해 내가 그다지 깊이있게 알지 못한다.하지만 대개 포스트모던 소설이라는 것들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알고 있던 소설 구조와 형식,문체를 휴지통에 처넣는다.전통적 소설에 익숙해져 있는 것에 대한 낯설게 하기를 통해 성찰하게 한다.(이것 봐라 아는게 없으니 늘 모더니즘적 관점일 수 밖에 없다.괜찮다.내가 문학론 석사냐 박사냐...) 특히 언어에 직접적인 구속을 받는 소설은 다른 장르에 비해 언어해체와 커뮤니케이션 연속성에 대한 부정등이 빈번히 등장한다.언어해체라는 것은 결국 언어가 가지고 있는 자기완결성에 대해 '그까잇게 뭔데'라고 찔러보는 것이다.대개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한다.'말을 논리적으로 하란 말이야..뭔뜻인지 알겠어?....그렇게 말하면 잘모르겠잖아...진작에 그렇게 말하지'' 이 모든 것들은 언어와 그 언어를 사용하여 커뮤니케이션하는 과정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목적에 두고 있다.하지만 언어/커뮤니케이션이 그러한 목적에 종속된다는 것이 싫었나 보다.결국 언어/커뮤니케이션을 가지고 지랄발광을 한다. 비비꼬고 뱅뱅 돌린다.벽보고 이야기하고 때론 벽을 파고 이야기한다.문제는 이러한 놀이에 독자들이 '뭐 어쩌자고'이렇게 반응한다는 것이다.물론 평론가들은 신난다. 원고요청이 많아지고 술자리 안주 한판 늘어나니까.
이 책이 엄청난 철학을 담고 있다고 생각치는 않는다.라이프니치가 등장하고 뭐가 뭐가 패러디대고 하지만 '그까잇거'같고 포스트모던의 우화속에 담긴 심오한 철학 이라는 둥 하면 퇴니스의 '1차집단''2차집단'만 가지고도 심오한 소설 수백권은 써내려 갈 수도 있다.1차집단의 애정결핍에서 비롯된 2차집단내의 부적응..엽기적 살인사건.....
열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를 구현하기 위해 한신타이거즈 팀원들은 뿔뿔히 흩어졌다.우승했다는 객관적 사실도 부정된다.일본 야구의 구현을 위해 도서관에 다니고 정신병원에서 열변을 토하고 코푼 화장지를 뒤적여 자료를 정리한다.<일본야구>란 어떤 의미인가? 우아하고 감상적이어야 하는 그 일본 야구가 의미하는 바가 아직 명료치않다.의미를 찾으려는 것 자체를 보면 작가가 또 비웃을 지 모른다.'그렇게 당하고도 의미와 해석의 망령속에 있냐?' 그냥 일본야구나 구현하라구!친구야' ...이렇게 잘난 척하는 작가에게 일년내 좋은 햇살과 좋은 땅의 양분을 먹고 자란 고구마를 만났을 때 쩌쪽..남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참 거시기 해부네"
'거시기'하나로 살아온 리뷰를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ㄳ....내 이 싸가지 없이 가벼운 이 책을 읽고 난후 황순원 선생의 단편소설집을 또 덥썩 또 집어들었다.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내가 중학교때 배운 그 <소나기>,TV문학관에서 재탕삼탕 하며 1시간여의 러닝타임을 갖고 있던 그 <소나기> 그 불후의 명작이...고작 7장이었다.에이 까잇거....고작 7장이었나...7장이었다는 거 늘 알고 계셨던 분? 나만 몰랐군.까잇거...이래서 무식하면 하나씩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어 좋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