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주의의 시대경험
후지따 쇼오조오 지음 / 창비 / 199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독도문제로 한일간에 감정이 날카롭다. 행여 일본에 대해 우호적 발언을 했다가는 돌맞기 딱 좋은 정서가 가득하다. 이런 마당에 삐딱선을 타며 일본학자의 책을 읽었다.그는 일본내 진보적 소수를 대표하는 학자이다.이 책에 실린 내용은 멀게는 1960년대부터 가깝게 90년대까지의 일본정치사와 사회사에 대한 저자의 독특한 시각을 담고 있다. 후지따선생이 다루고 있는 소재는 일본적인 것이다.하지만 선생의 해석범위가 닿는 곳은 일본이라는 한 국가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는 6,70년대라는 일본 상황을 토대로 현 자본주의가 직면한 위기와 문화적 정체,소비사회의 노예가 되어가는 현대인들의 무감각한 감성에 대해 보편적 가치에 기대어 비판의  칼날을 던진다. 특히 일본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여러모로 일본 사회시스템과 닮아있는 한국에서 그의 비판은 직접적으로 유효하다.

우선 책 초반에 가장 인상적인 그의 표현은 '안락에의 예속'이다. 현대인들은 불쾌감이란 단어에 극단적인 혐오를 갖는다.이를 회피하기 위해 그들은 사물과의 상호관계를 거부하고 호의적인 것들만 받아들이다.이 안락에 대한 강박증적 추구와 안락의 파괴에 대한 우려감은 사물에 대한 돌발변수제거라는 형태를 추구한다.이는 소유라는 불완전하고 일방적인 형태를 취하게 된다.또 안락을 유지하기 위한 이익보호자,즉 조직에 기대게된다.이는 결국 정신의 궁핍화를 일으키고 생활속에서 안락의 전체주의 속에 빠져들게 된다는 것이다.인간이 자본이나 조직에 노예가 되었다는 명제는 이미 익숙한 것이다.후지따 선생이 그 원인으로 든것은 다분히 심리적인 요인이다.이 '안락에의 예속'은 그런 면에서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문제의 원인으로 볼 수 있다.물론 저자 역시 안락이란 감정 상태를 나쁜 것으로만 보지는 않는다.문제는 그 요소에 대한 추구가 일방적인 것이고 무의식적이지만 광적인 추구가 되는 상태인 것이다.

대학다닐때 친구들과 미팅에 갔었다.어느 여대 교육학과 친구들이었다.무슨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당시 쉽게 만날 수 있었던 사진전 이야기가 나왔다. 철거민들의 삶을 다룬 사진전이었다.나는 그 안의 리얼리티와 무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담고 있는 작가의 시선이 좋았다.그런데 어떤 여학생이 내 혈압을 올리는 말을 했다. " 전 그런 사진들 별로에요.그런 사진보면 왠지 우울해지고 내가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제 주변에서는 그런 사람들 본 적도 거의 없구.어쨋건 전 그런 칙칙한 사진보다 좀 밝고 예쁜 사진이 좋아요."

당시에 나는 무지 열받았다.지금 다시 생각해도 좀 답답한 감은 있다.어쨋거나 그녀의 그말...물론 단순히 어린친구의 순진한 반응일 수도 있지만... 그게 바로 "안락에의 자발적 예속"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요즘은 뭐가 달라졌을까?  절대 아니다. 정치적 이슈로 가지 않고 좀더 만만한 문화적 아이템으로 들어와도 된다.영화나 책,음악 등등등 진짜 대량소비되는 시대이다.다들 가장 좋아하는게 무었일까?  쉽고 편안하고 무언가 고민하게 하지 않고 인지부조화를 만들지 않고 가급적 해피앤딩이면 좋고... 한마디로 불편하게 하지 않는 것이다.오히려 가끔 컬트나 좀 쉽지 않은 작품을 보면 옆에서 그런다 "그런걸 왜보세요.머리만 아프게" ....문화적으로 보자면 이 또한 "안락에의 예속"이다. 이렇게 후지따 선생의 말처럼 '생활속의 안락이 전체주의화'되어 간다.

저자는 일본의 국가적 무비판성에 대해 냉정하게 비판한다. 무비판의 대상이었던 천황제에 대해서도 그동안 천황제 논의의 저열함을 짚으며 메스를 들이댄다.또 일본인들의 조직에 대한 맹종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비판한다.자기비판이 가장 부족한 국민이 일본인이다 라고 까지 하면서 일본인들의 무비판능력을 공격한다.이것이 일본이 경제동물이란 칭호를 듣게되는 원인이고 패권주의라는 이름으로 존속하고 있는 이유라고 생각된다.그렇다면 이웃국가 한국은 어떠한가? 그의 말중에서 '일본'을 '한국'으로 바꾸면 그대로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닐까? 일본이 터무니없이도 독도를 우리땅이라 우긴다. 이에 대응하여 마산의회는 대마도를 우리땅이라고 한다. 뭐가 다른지 내 기준으로선 이해가 안된다.방송에선 일부 일본 진보학자들이 역사적사죄의 뜻을 비쳤다는 것을 보도한다.사람들은 '그래도 일본놈 들 중에도 괜찮은 놈들도 있네' 한다.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과연 괜찮은 한국인일 수 있을까?  인류의 위대한 이상인 보편적 가치보다 자신이 속한 가족,직장,조직,국가의 가치가-거기에 승리주의의 가치가- 우선시 된다는 점에 대해서 과연 이 책속에 나온 일본,일본인과 한국,한국인이 차이점이 생기는 것일까?

저자가 말하는 현대사회에 대한 탈출구는 그렇다면 어디에 있는가? 여기서 조금 진부하긴 하지만 저자는 "보편적 이가치,보편적 이성"이란 것을 들고 있다.러셀이 자주 인용되는 것도 이 이유에서이다.결국 사고의 괘적은 다를지라도 몰락의 방향으로 가는 현대사회를 돌려놓을 수 있는 것은 인류가 가진 보편적 가치에의 희망에 기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후지따선생의 생각인 듯하다.그렇게 하기 위해선 타자의 것,다른 것,공존할 수 없는 것과의 상호관계에 대한 생각의 전환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자이며 공산주의자이고 또 아나키즘에 기댄 저자의 도덕적 호소는 그러한 결론에 도달한다.

사족같지만 이 책에 알라딘 리뷰는 모두 별5개이다. 주관적인 판단이라 왈가왈부 할 수는 없다.하지만 내 경우 별5을 주기 망설여졌다. 우선 만연체의 문장이 거슬렸다.저자의 글쓰기 형태인지 아님 번역가의 능력인지는 모르겠다.하지만 한 문장이 10줄이 넘어가고 중문의 형태를 띠는데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또 책의 어떤부분들은 지극히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나온 글들이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동시대에 살던 일본 학자들의 언행에 대해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렇다면 이 책이 별다섯을 받아야하는 이유는 후지따선생의 칼날같은 정신에서 나온 사회의식때문이다.하지만 본인도 인정하듯이 그의 주장은 도덕주의적 관점이 너무 많이 배어있다. 이 책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맑스주의의 대차대조표에서 후지따선생은 관점에서 좀 멀어진듯한 인상을 많이 준다.

물론 이 책에서는 보편주의의 시각하에서  한일양국의 부정적 공통점에 바탕을 둔 비판적인 시각을 많이 얻을 수 있다. 그의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하지만 참신성은 지금와서는 빛이 좀 바란듯하다.이 책이 동시대적 상황에 반응하는 책이라면 6,70년대에 나왔어야했다.너무 늦게 우리에게 소개된 점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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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달 2005-03-30 17:09   좋아요 0 | URL
'안락의 예속', 에릭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떠오르네요..스스로 말미암는 것이 '자유'라고 하던데...참 쉬운 일은 아니죠^^;;

딸기 2005-09-21 23:02   좋아요 0 | URL
뒤늦게 읽었지만, 서평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