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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평점 :
'농가월령가'라고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의 세시풍속과 시기별 농사일을 노래 형식으로 만든 노래이다. "정월이라....어쩌구 저쩌구...달도 밝고...어쩌구..." 뭐 그렇다. 10년도 훨씬 지난일이니 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탓 하지는 마시라. 분필 맞아가며 배웠던 추억이 떠올라 도저히 참을 수다 하시는 그런 분들을 위해 알려드린다.
" 손가락 쫙악 펴서 인터넷 검색창에 '농가 월령가' 를 치세요."
"달싸쵸"(우리 와이프가 그렇게 불렀다. 똑똑한 친구같으니..) 이 책의 형식은 '농가월령가'를 그대도 빼어박았다. 머리가 유달리 비상한 분들은 이렇게 이야기 하면 "아...12장으로 구성되었군" 하신다. 그럼에도 꼭 확인하고 싶으시다. (원래 포커판에서도 지는 패를 들고도 꼭 확인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분들은 책을 사서 펴 보면된다. 그리고 펼친 김에 읽으면 도랑치고 가재 잡는 격이니 이 아니 좋을 쏘냐. '농가월령가'가 반복되는 세시풍속을 1년 12달로 나누었다면 '달싸쵸'는 한 사람의 출생, 성장, 죽음의 기록을 12단락으로 나눈다. 거기에 각 장은 맛있는 요리로 시작된다.시각과 미각을 동시에 자극한다. 레서피... 주인공 티타의 가문에 전수되어 온 멕시코 전통 요리가 주재료이다.티타 가문의 이야기가 얇게 저린 부재료로 쓰인다. 이 두 이야기가 때론 강한 불에 때론 옅은 훈제 연기에 데워져서 '달싸쵸'라는 멋진 요리 하나가 완성된다. 물론 남미 특유의 에로틱한 정서와 마술적 리얼리즘의 세계가 향긋한 향신료로 미식가를 감동시킨다.
앞 문단을 다 읽기 귀찮은 분을 위한 공식: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멕시코 요리 + 티타가문의 가족사 + 티타의 사랑+ 섹스+ 마술적 리얼리즘+페미니즘 + x(x= 읽는 독자가 마음껏 추가해도 되는 미지수)
이 소설은 원래 영화를 만들려고 기획되었다고 한다. 결국 작가의 남편을 통해서 영상화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영화를 보지는 못했다. 그런 선입견때문인지 소설의 줄거리와 형식이 헐리우드 영화구조를 닮아 있다. 선악의 구조가 명확하다. 마마 엘레나를 중심으로 한 전통가치를 수호하는 세력과 티타와 그녀의 큰 언니로 대표되는 새로운 가치 세계의 대립이 간단명료한 이분법으로 나뉘어 있다. 불행하게도 마마 엘레나는 이사벨 아엔데의 <영원의 집>에 나오는 가부장적 아버지처럼 살아 생전 가치체계의 변화를 겪지 못한다. 오히려 그녀의 딸 로사우라를 통해 그 가치가 이어져 간다.오히려 현실성이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결국 이 구세대의 가치관은 죽음이란 형태로 소멸해 간다. 이 과정이 현실적이긴 하지만 조금은 판에 박힌 듯 하다. 물론 믿음직한 남미의 딸 답게 저자는 마술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들 삶의 변화를 형상화한다. 로사우라의 희안한 신체왜곡,마마 엘레나의 죽음과 그 영혼의 재생,죽은 나차의 영혼의 등장 등등.결론 역시 에브리 바디 해피로 끝난다.물론 이게 맘에 안드는 건 아니다. 녹차 아이스크림으로 후식을 한 것 처럼 깔끔하게 떨어진다. 읽는 독자입장에서는 뭔가 덜 닥고 나온 것같은 것 보다야 낫다. 마치 비데하고 뜨뜻한 바람으로 엉덩이 드라이 한것 같다.
이 소설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바로 음식과 성의 결합이다. 영화감독 피터 그리너웨이의 작품을 처음 봤을때 " 음식과 성의 결합"이란 단어가 생경했다. 지금도 별반 달라지진 않았다. 식욕과 성욕이 둘다 인간의 기본적 욕구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나는 조금 통속적 용어를 써서 "먹는다"(이거 아주 귀에 거슬리지만 ..이런 말들을 남자 애들이 ?때문에 리얼리티를 위해 쓴다) 는 말이 주는 반페미니즘적 공통어 외엔 떠오르는게 없었다.사실 아직도 음식과 성이 어떠한 알레고리로 결합되는지 잘 이해하고 있진 못하다.오히려 이 소설에도 등장하지만 어떤 향기가 최음의 효과가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쉽다.그게 어떠한 정도의 영향을 미치는 지 알 수는 없으나.내 상상력 부족인지 아니면 인문학적 지식의 부족인지 알 수 없지만 내게 음식은 음식이고 성은 성이다.^^ (뭔가 좀 더 아시는 분은 멋지게 설명해달라.) 또 한가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요리에 난 전혀 관심이 없다.이유는 무슨 요리인지 본적도 없고 재료를 소개해도 머릿속에 그려지지가 않으니 좀 답답할 뿐이다.물론 요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것은 신기하다.별개의 음식들이 모여서 제3의 맛을 만들어내다니.거기에 그럴싸한 장식까지 갖추어지면 요리는 눈과 입을 동시에 즐겁게 해주는 아트가된다.드라마 대장금을 봐도 이영애 만큼 멋지게 나오는게 수랏상에 오르는 음식들 아니던가.내가 남미 요리를 한 번도 먹어본적 없다는게 아쉬운 뿐이다.
남미 소설들을 그다지 많이 봤다고 할 수는 없다.하지만 이름난 주요 작가들의 작품을 한두편 쯤은 본 것같다.(보르헤스는 아직 노려보고만 있다.아직 내 내공으로는) 아직 까지 남미 작가들은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그들의 소설에는 삶에 묻어 있는 역사가 있다.또 산자와 죽은자가 동시에 공존하는 세상이 있다.이 책에는 거기에 더하여 향긋한 요리의 향기와 한 숨 놓게 하는 행복한 결말이 있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