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반 푸르트뱅글러와 함께 지휘계를 양분했던 지휘자 토스카니니이다. 아주 오랜전 그의 젊은 시절을 소재로 했던 영화를 봤던 기억이난다.아마 토스카니니란 이름을 알게된 건 그때였던 것같다.

토스카니니는 흔히들 즉물주의의 대표적인 지휘자로 알려져있다.그래서 그의 연주에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평가절하하는 사람도 있다.예를들자면 바람구두님같이 '지휘자의 제2의창작'을 높이 평가하시는 푸르트뱅글러계 팬들에게 흔히들 나오는 말이다. 지휘자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는데..... 매너님이 좋아하는 퀸터 반트는 죽기 몇달전 인터뷰에서 '연주자들이 악보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오만을 부리고 있고 그런 행위는 작곡가의 의도를 무시하는 잘못된 일이다.'라고 비판했다.

다양한 음악적 해석을 즐기는 음악팬으로서는 나는 지휘자 해석의 다양성을 존중한다. 작곡가의 악보는 하나의 텍스트이고 시대와 연주발전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음악을 듣는 즐거움은 거기에 있다고 믿는다. 원전 연주에 대한 의견도 결국 이런 생각과 괘를 같이하며 반대로 원전연주자들이 현대악기로 연주된 고음악에 대해 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것도 사실 조금 경망스럽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토스카니니보단 결과적으로 푸르트뱅글러의 손을 들어줄 사람인데 오늘 이 음반을 다시꺼낸것은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때문이다. 노회찬의원은 경기고 시절 첼로를 연주했다고 한다.그리고 그의 집안에도 악기를 다루는 사람이 몇있었다고 한다.그 노회찬 의원이 아끼는 연주중에 하나가 토스카니니가 연주한 베토벤 5번 이다.옛날엔 하두 많이 들어서 판에 금이 갔다나.....뭐 그후에 들은 카라얀이나 번스타인은 이 음반에 대한 애정때문에 귀에 잘 안들어왔단다.

이 음반은 베토벤 5번의 절대명연에 속하는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70년대 녹음과 닮아있다.클라이버가 1악장에 선정한 템포가 흔히말하는 토스카니니 템포이다. 머뭇거리지 않으며 직설적으로 돌진한다. 이러한 당당함은 곡의 피날레인 4악장까지 쭉 이어지는데...... 카를로스 클라이버 이전 이렇게 당당한 연주는  토스카니니외엔 그다지 많이 않을 듯 다.(시카고와 연주한 프리츠 라이너의 음반 역시 대단하다는데 아직 들어보질 못했다.)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다른 점은 클라이버가 조금더 극적 연출을 한데 비해 토스카니니는 오로지 직구 스트라익이라는 점이다. 대단한 다이나믹이 아닐수 없다. 실현을 들었다면 아마 머리칼이 쭈삣 쭈빗 섯을 듯한다.

바흐의 첼로음악을 들을때 음질도 떨어지고 연주능력도 후대에 비해 나을게 없지만 파블로 카잘스를 듣는다. 그만이 가진 뼈대 굵은 연주와 그의 음악에대한 애정은 다른 이에게선 찾을 수 없는 감동을 주기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토스카니니의 연주 역시 그러한 굵은 선이 있다.

참고로 52년 카네기홀에서 NBC심포니와 함께한  음반을 들었다.(노회찬이 추천한 음반이기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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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4-09-06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이런 저를 지나치게 한쪽 구석으로 모셨네요. 저는 토스카니니 역시 최고의 지휘자 중 한 사람으로 이미 상찬한 바 있습니다. 모든 예술가에겐 그 나름의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겠지요. 저 역시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주어야 한다면 역시 푸르트뱅글러의 손을 들어주기는 하겠지만, 토스카니니를 폄하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음.... 아무렴 그렇고 말고요. 흐흐. 물론 토스카니니 할배의 불 같은 성격을 감안할 때는 그런 뒤에 잽싸게 튀어야겠지만... 분명히 제 등 뒤로 지휘봉을 투창처럼 집어던지지 않았을까, 상상합니다만, 저런 사유님은 이미 저만큼 달아나고 계시군요. 흐흐, 괜찮아요. 지금쯤 토스카니니 할배는 천당에서 엔젤오케스트라에게 화 내느라 우리 같은 건 거들떠 보지도 않을 거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