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 64괘의 마지막을 '미제괘'라고 들었습니다. <주역>에 대해 적셔진 여우꼬리만큼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뜻은 이렇다고 합니다. 

 " 어린 여우가 물을 거의 건넜을 때 그만 꼬리를 적시고 말았다. 이로운 바가 없다."  

 알라딘 불매운동은 운동의 경중에 상관 없이 대략 2달 가까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편의상 두 단계로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11월 부터 테마카페가 개설되기 전까지가 초기 단계라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몇 몇 분의 불참선언과  작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달에 들어서면서 잊혀질 듯한 사건이 작은 불씨들과 함께 재점화 되었습니다. 12월의 이야기입니다. '테마카페'가 개설되었습니다. 그리고 좀 더 많은 분들이 참여 의사를 표명하셨습니다. 이것이 현재의 두번 째 단계입니다. '테마카페' 가 개설되고 또 다시 알라딘 불매운동과 -편의상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비참여 사이의 크고 작은 칼춤들이 오고 갔습니다. 

저는 이 문제에 개입을 결정하고 나서는 일련의 찬반 토론에 상대적으로 관심을 적게 두었습니다. 전혀 눈길을 주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거기서 얻어야 할 것들이 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 눈길이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은, 제가 가장 지키고 싶은 것은 '알라딘 불매참가자들'과 '운동의 방향' 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둘러싼 찬반 토론은 2달 가까이 이어져왔습니다. 거의 반복되는 주제들이 공회전을 하고 있습니다. 이 토론 과정등을 통해 조금씩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아예 상대에 대해 등지는 경우도 생깁니다. 앞으로도 이런 토론은 이어지겠습니다만 저는 이것이 고인 물 속에서 맴돌이 하며 나뭇잎만 썩이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그래서 저는 가급적 반복되는 토론에 말을 더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노자가 최고의 '선' 이라고 한것은 흐르는 물이었습니다. 물이 가진 힘과 유연성 그리고 아래로 향해 커져가는 흐름을 닮지 않으면 물은 고여서 썩거나 말라가기 시작합니다.  '불매운동' 참여자들 역시 이 점에 대해 충분히 고민하리라 생각합니다.   

   현재 기업 알라딘은 '불매운동'에 대하여  급박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지도 않은 복권추첨 방송을 들여다 보는 심정이겠지요."그러다 말겠지,몇 명 나가고 다시 평온해지겠지" 정도 일 겁니다. 바닷가 모래위에 남긴 글들이 몇 번의 파도에 사라져 가는 것을 알고 있듯이 말입니다. 전략적 차원에서 기업 알라딘은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의 불편함과 파편적인 소비자들의 속성 비해 절대적인 우위에 있습니다. 알라딘 불매자들이든 불매반대자들이든 모두 기업 알라딘에 비하면 약한 존재들입니다. 

불매운동에 대해 기업 알라딘이 쓰고 있는 방식은- 많은 기업들이 의도적으로든 관행적으로든 애용하는-은 아주 오래된 중국의 대외 외교 전술과 같다고 보면됩니다.  이이제이(以夷制夷) 라고 하지요. 자주 쓰이는 한자성어이기 때문에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듯 합니다. 여기서 두 오랑캐가 누군지는 따로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앞서 <주역>의 마지막 괘를 이야기했습니다 .알라딘 불매운동 참가자들 중 거의 대부분은 '우리가 물에 젖은 여우 꼬리나 만지지 않을까'걱정하지 않고 참가한 사람은 없습니다. 대단한 승리를 기대하는 것 보다 오히려 패배에 대해 더 많이 걱정합니다. 무슨 강철대오같은 것으로 착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생각없이 목소리만 외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목 위에 머리가 있듯이 다른 사람들의 목 위에도 머리가 있습니다. 단 하나 다른 것은 그들이 차가운 머리보다 조금 더 가슴을 좋아한다는 그 정도의 차이일 뿐이라고 위안합니다. 그리고 가슴의 온도가 조금 더 높다는 것이 머리는 나쁘고 목소리만 크다는 뜻도 아닙니다.

 불매운동 참가자들 거의 대부분은  불매운동을 다른 이들에게 요구하거나 강요한 적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던가요? 오히려 전술적인 생각이었던지 아니면 소극적 대응이였던지 주된 반응은 '신중파'들에 대해 우호적이었습니다. 그들의 참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그들을 적으로 만들면서 나아간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또한 이들은'불매운동' 참여에 대해 다른 이들의 참여를 돌아다니며 설득하여 불편하게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테마카페'라는 것을 개설해 놓고, 참여 선언하고, 아이디어 내고, 이벤트 하고, 서로를 의지한 것 외에 '불매운동'이 '불매 불참자들'에게 어떤 무리한 요구를 했다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걔중에는 뜻이 앞서 간다거나 더 급진적인 요구를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사람 사는 곳에서는 어느 동네에나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불매 참가자들'에게 가해지는 비난과 조롱, 또는 드러나는 불편한 심기는 일방적일 때가 있는 듯 합니다. 특히 그동안 각종 반MB 신문 스크랩등을 통해 진보의 몸짓을 보이시던 분들의 그런 조류는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최소한 '응원은 하지 못하더라도 침묵하는 편'이 그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 분들은 물론 '더 합리적'이고 '더 이성적'이시고 '더 전략적' 이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분들을 포섭하지 못한 잘못은 저희들에게 있겠지요. 어쨋거나 그런 진보적인 분들 역시 무언가 이 움직임이 주는 불편함이 있으실 겁니다.  진보적인 분들은 '프랑스 지하철 파업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 과 관련된 글을 보신 적이 있고 또한 가끔 인용하기도 하셨을 겁니다. 그런글들은 대개 시민사회의 성숙을 말하며 끝을 맺습니다 . '내가 파업할 권리가 있듯이 그들 또한 그럴 권리가 있다' '내가 최소한 불편을 감소하는 지지를 보내주어야 그들 역시 나를 위해 그래줄 수 있다' 대략 이정도의 결론이 나옵니다. '알라딘 불매운동'이 어떤 정서적 불편함을 비참가자들에게 요구하는지, 그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으나 저는 응원을 못할 바라면 차라리 침묵으로 도와 달라는 최소한의 예의를 부탁드립니다. 현재 알라딘 불매참가자들의 수는 비참가자들의 수에 상대도 못할 만큼 적습니다. 부디 이 문제가 서로 극과 극의 대립적 상황이 아니라면 '이이제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미루어 짐작 하시길 바랍니다. 알라딘 불매참여자들이 싸우고 있는 대상은 '알라딘 불매 비참가자'들이 아닙니다. 또한 알라딘 불매참여자들 역시 이 문제에 대해 알라딘과 싸우는 것이지 어떤 형식을 통해서든 비참여자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되새겼으면 합니다. 가끔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있을 줄 압니다. 하지만 하수와 고수의 차이점은 목표를 위해 그런 분노를 다스릴 줄 아는 것입니다. 작은 전투에 이기고 전쟁을 놓친다면 그것을 두고 좋은 장수라고 칭할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앞서 말했지만 알라딘 불매운동 참가자들 역시 이 사건 하나를 가지고 '비정규직 전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김종호씨의 정규직 부여 같은 것도 요구하기 힘들다고 봅니다. 들리는 비난과 조롱 중에는 불매운동 참가자들이 '마구잡이' '우격다짐' 식이라는 악의적인 왜곡들도 간간히 있습니다. 계속 반복되는 왜곡에 반복되는 해명과 답변을 하다보면 분노가 치밀게 됩니다. 평정심을 잃게 되고, 죽든지 말든지 모르겠다가 되어 버립니다. 저는 알라딘 불매운동참가자들이 겪게 되는 이런 상황에 대해 우려하며 '평정심'을 잃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차라리 그런 악의적 조롱은 무시하시고 상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대화란 상대방에 대한 인정과 예의를 갖추었을 때 비로소 나눌 수 있는 차 한잔과도 같습니다.  

현재까지 약 두달 동안 알라딘의 답변이 대략 서너번이 있었습니다. 그 동안 이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알라디너들의 논쟁의 량에 비하면 분량상 약소합니다. 하지만 고객운영팀장이 매번 답을 할 수도 없고 다수의 글에 대해 반으로 나뉜 거울처럼 똑같이 응대해주기를 요구할 수도 없을 겁니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번 '알라딘 불매운동'이 단순히 소비자 불만사항 접수와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기업 알라딘의 두번째 방식은 '사건의 축소화' '협애화' 입니다. 어떤 분이 '생활 정치'를 이야기하셨는데 그분과 제가 보는 '생활정치'의 개념은 다를 듯 합니다만, 저는 '알라딘 불매운동'이 '생활 정치'의 대표적인 예라고 생각합니다. 즉 알라딘 불매운동은 '정치적 의사표명' 입니다. 그런데 알라딘의 반응은 여전히 1:1 개인 고객상담 수준을 넘어서지 않고 있습니다. 개인적 답변이나 고객불만 사항 처리페이지를 통해 이 문제에 응하고 있습니다. 물론 '알라딘 불매운동'의 힘이 약하기 때문에 그정도만 대응해도 적당하다고 생각하겠지요. 참가자들 입장에서는 꽤심한 일이지만 알라딘의 입장에서는 가장 소극적이며 무탈한 방식입니다. 그런데  지금 2달 가까이 알라디너 사이에 치고 받게 만든 이 문제가 단순한 '고객들의 불만' 일까요?  책을 바꿔 달라는, 적립금 사용은 어떻게 하느냐는, 재고는 언제쯤 들어오느냐는 그런 고객불만인가요? 

 알라딘은 이 사안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고객 불만 처리수준' 상태로 이에 임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출구전략'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알라딘불매참가자들'이 '불매선언'한 것 이외에 알라딘과 어떤 대립각을 세웠습니까? 어떤 전선을 구축하고 어떤 전투를 했기에 벌써 '출구'를 이야기해야 하는 것일까요? 앞서 말했듯이 알라딘 불매운동은 그동안 비참여자들과의 토론이라는 싸움을 했지 알라딘과 싸우지는 못했습니다. 불매를 선언하는 것 외에 말입니다. 그리고 '출구'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고민해야 합니다. 기업 알라딘의 귀에 들리는 귀찮은 소리를 죽여주기 위한 것, 불매운동이라고 올라오는 페이퍼들에 대한 부담감. 그것을 위한 출구일까요? 실제 불매운동이 시작된 것은 2달 전이지만 제대로 주목받은것은 '테마카페'라는 공간이 열리고 나서입니다. 언제 '테마카페'가 열렸습니까? 도대체 몇 주가 지났을까요?  화투를 칠 때 좋은 패를 먹는 것 만큼 쓸모없는 패를 버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비풍초똥팔삼'은 그런 '버리는 패'에 대한 일반화 목록입니다. 아래 놓여진 패와 내가 들고 있는 패, 그리고 상대방의 패를 보고 '초'를 먼저 버릴 수도 '똥'을 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전쟁으로 비유하면 휴전은 휴전 나름대로의 또 하나의 긴 싸움입니다. 수년 간의 전쟁의 결과물을 최종 확정 짓는 것은 몇 주간의 휴전 테이블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윷놀이로 치자면 '도'나 '개'에 해당하는 말놀이를 가지고 '출구 전략'을 구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경솔한 듯 합니다. 

사실 불매운동 참가자들 역시 이 문제 하나로 대한민국의 파견업체의 고질적 폐악과 구조적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하지만 또한 그 구조적 모순들을 구조적 편의로 생각하지도 못합니다. 어디가나 비정규직이 있습니다. 자동차 공장부터 영화관까지 우리 사회 곳곳에 비정규직이 있습니다. 그것을 몇 명의 사람들이 어떻게 분쇄하고 바꿀수 있겠습니까? 알라딘 불매운동 참가자들도 역시 알라딘에서 오랜 시간 글을 쓰고, 생각하고, 삶에 대해 고민한 사람들입니다. 즉 조롱하는 사람들이나 비판하는 사람들 만큼의 지능은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그들 역시 비정규직의 희생으로 구현되고 있는 현재의 자본주의적 질서하에서 어떤 편의를 누리기도 하고 또 그 편의만 알고 희생은잊어버리기도 합니다. 이건 저도 그렇고 참가자나 비참가자 모두 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동일한 근본적 태도가 양쪽에 발생합니다. 하나는 '핏빛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의 극단주의'와 '세상이 다 그런 건데 어쩔 수 있냐는 패배의 근본주의' 입니다. 저는 답을 모릅니다.  

 단 한가지 알고 있다면, 이제 그것이 나의 생활 영역에서 불거졌을 때 '내가 그동안 빚지고 있던 것들에 대해 무언가 답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 아들 둘에게도 그렇게 가르치도록 하겠습니다. 저와 제 작은 두 아이들이 살게 될 자본주의 세상에서 불패의 그리스의 전사들 처럼 매번 싸우고 매번 희생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면 살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그 마음을 담아두돼 우리가 겪는 일들, 우리가 들어가 있는 공간 안에서 그 일을 되뇌이게 하고 누군가 작은 도움의 손을 요구한다면 그 때는 믿은 바대로 생각한바 대로 행하라고 이야기 할 것입니다. 거기서 발생하는 불이익은 짧게 보면 손해지만 긴 인생을 볼 때 결코 잃은 게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비정규직 문제, 몇 몇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한국사회에서 비정규직이 어떤 위치에 놓여있고, 그것이 한 개인의 발전뿐만이 아니라 한 가정의 안정성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본주의다' 라고 그 이익만을 쫓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좀 더 안정적인 직장에서 자기의 아이들을 키우고 미래를 도모하길 바라는 소망말입니다. 1960년대 마틴 루터킹의 '꿈'이 있었다면 이 시대에도 그런 '꿈'을 가져보는 것이 그리 비난받을 일은 아닐겝니다. 그리고 알라딘 불매운동은 그런 작은 소망들의 실천적 표현일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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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4 0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14 0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립간 2009-12-14 09:06   좋아요 0 | URL
제가 구매를 미루고 있지만, 불매운동에 참여한다고 선언하지 않은 것은 어느 정도의 알라딘 답변에 다시 구매를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드팀전 2009-12-14 09:29   좋아요 0 | URL
마립간님의 판단을 존중합니다.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방법의 차이가 있다면 전 안에서 이야기하는 편에 있는것이고 마립간님은 바깥에서 이야기하고 계신겁니다. 지금으로서는 그 거리가 그리 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