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이런 토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물리적으로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결국 입장의 재반복 내지는 오독에 대한 해명 등이 전부일텐데, 상대의 글을 읽고 또 생각하고 쓰고 하면 제법 시간을 뺏깁니다. 그런데  가만히 있자니 목 안에 걸린 말들이 툭툭치고 올라 와서 불편하게 하고, 앉아서 글을 쓰자니 다른 일을 할 기회를 잃게 되니 여기에 딜레마가 있습니다. 대개는 이런 토론에 긴 글이나 댓글을 쓰고 나서는 "에이, 대체 내가 뭐하고 있는 짓이야!" 라고 혼자 책상을 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조금 더 적극적으로 행동해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는 것일 뿐입니다. 오히려 지금 적은 기업 알라딘이지 않나요? 왜 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이해가 안되네요." (Bašta님 댓글중)

만약 님께서 이렇게 처음부터 겸허하게 이야기한다면 저로서는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알라딘 불매운동에 동참하고 있는 로자님이나 게스츠레님의 주장 등에는 분명히 행동의 근거가 있고 그 분들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여러번 말했습니다. 제가 첫 번째 글을 쓰고 나서 추신의 형태로 로자님의 글을 인용한 것은 그런 예의의 표현입니다. 상대적으로 로자님보다는 제 노출 빈도가 높기 때문에 저로서는 이례적으로 블로그 주소를 기입하면서 로자님의 글로 이어지게 만들었지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포지티브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네거티브에 대한 사전적 경계 때문입니다. 첫번째,  로자님 텍스트는 자체로-문득 지나가기 쉽지만- 여러가지 이견의 불확실성 속에 가치 혼돈을 가칠때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저는 종종 이것을 알랭 바디우가 말한 '사건의 충실성' 이라는 개념으로 말합니다. 로자님의 방식이 그런 개념의 한 예가 됩니다. 

쉽게 말해 '그래 그래, 네 말이 다 맞다 치자. 그래도 나는 어깨를 걸고 함께 눕고 싶다.' (브라보!)  로자님은 핵심은 이겁니다. 그리고 이건 강한 파급력을 가질 수 있고, 객관과 이론으로 가장된 상황을 돌파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님께서도 궁극적으로 이 말을 하고 싶으신 거로 보입니다. 제 댓글에 대한 재댓글에서 님은 

" 이 모든 걸 떠나서, 사라진님의 말씀처럼 저 또한 김종호씨를 혼자 내버려 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이 뭔가 행동하고 있으니 힘을 내라는 걸 알리고 싶었습니다" 

로자님의 말과 같은 내용이고 제가 이것이 부질없다거나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제 첫번째 페이퍼에 남겼습니다. 

제가 남긴 첫번째 페이퍼에 추신을 단 또 다른 이유는  당시 어떤 알라디너 한분이-이 분은 주로 수학적 객관성을 좋아하시는 분인데- 제 글을' 자본주의 사회의 기회비용'의 예로 올렸습니다.  제가 이야기한 것은 이 문제가 훨씬 더 구조적인 것이고, 또한 현재 상황에서 알라딘의 과실을 일방적으로 몰아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알라딘-김종호씨의 각 주장 외에 다른 정보가 별로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결과 원청업체로서의 책임이 있다는 점에 동의하고 그것이 비록 알라딘 단독의 문제는 아니지만 전향적인 결과와 자세를 요구한다고 했던겁니다. '알라딘 불매운동' 이라는 방법론적인 접근에는 그다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다시 한번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했던 '자본주의 기회비용'으로 인용되는 측면에서 저는 어떤 원칙적 경계를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글에 대한 추천 중에는 분명히 '기계론적 합리'에 대한 동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추신 성격의 글을 통해 이를 경계한겁니다.  

이제 님이 남기신 페이퍼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님께서는 페이퍼를 통해 '알라딘 불매운동의 재점화'를 의도하셨으나 점점 갈 수록 '자기현시'와의 경계 속에서 그 방향이 흐릿해졌습니다. 제가 이야기했던 부분은 '사건'이라는 측면에 대한 해석이었다면 님은 이 문제를 더 큰 철학적 개념들과 연계시켰습니다.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제가 한정시켰던 범주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특히 님은 '자본주의=기업=악' 이라는 근본주의적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즉 지배계급과 자본의 음모로 첨절된 이 매트릭스 같은 세상에서 진정한 해방은 이런 '거짓된 세계'를 척결하고 단숨에 다른 사회로 가는 것입니다. 님의 근본주의적 방법론은 엥겔스식의 사적 유물론이 따르고 있는 속류 사회주의식 접근입니다. (제가 누차 강조하지만 '함께 연대를 해줍시다' 라는 돌파를 위한 연대의 손길을 요구하는 식이었다면 제가 이렇게 긴 글을 쓸 일도 없었을 겁니다. 그건 긴 글이 필요한 것도 아닐뿐 더러 님의 첫번째 페이퍼는 그런 의도로 시작해서 '가치의 문제' '정의의 문제'까지로 넘나들고 있습니다.) 

'사회 정의' 라는 것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경계가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명쾌하지 않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리고 '설령 '사회 정의'란 것이 명쾌하더라도 '사회정의'와 '사회정의를 외치는 사람들' 사이에는 틈이 존재합니다. 저는 그래서 '사회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을 100% 신뢰하진 않습니다.  님처럼 '정의'의 이름으로 움직이는 경우 지속적으로 '부정의'라는 배제 영역을 만들게 됩니다. '정의/부정의'의 이름으로 싸우게 되는 것인데 그 결과 '방법론적 차이' 마저도 '부정의'의 이름으로 갈아치우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이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자는 이미 '정의'의 이름으로는 '부정의한 자'가 되지 않겠습니까?  거기에 님이 말씀하신 '반자본주의적 근본주의' 까지 개입된다면 스스로의 연대의 공간을 엄청나게 축소시키게 됩니다. 

 "잘 아시겠지만 모든 상표의 진짜 이름은 착취이고 불의입니다. 그러나 Aladdin이라는 환상과 신의 이름은 그 착취와 불의를 말끔히 표백시키고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자, 이 책을 어떻게 읽으시겠습니까?"  

제가 희화한 한 부분은 있지잠 이 논리로 가면 '알라딘의 동화책 구매자들이 모두 불법과 착취의  지원자 또는 숨은 배양자' 가 됩니다. 그러니 알라딘의 엄마 아빠들이 불편해지겠지요. 

 이제 마지막으로 데리다와 알라딘 불매운동의 방법론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님은 제가 알라딘의 오피니언 리더라고 생각하시고 반론을 통해 '알라딘 불매운동의 재점화'를 꾀하셨습니다. 이용당했다는 느낌이 강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전술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은 듭니다. 첫번째 제가 알라딘에 가진 파급력은 그다지 강하지 않습니다. 일단 매체력으로 봐서도 그렇습니다. 최소 하루 1000명쯤 찾는 로쟈님이나 300명 이상 쯤 되는 바람구두님의 서재에서 이 문제를 터트렸어야 더 효과적이었을 겁니다. "왜 당신들은 가만히 있느냐?" 고 말이지요. 줄기차게 물고 늘어지고 귀찮을 정도로 댓글을 달면 훨씬 큰 파급효과가 발생하고 '재점화'라는 목적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었을 겝니다. 

어쨋거나 파워블로거를 이용해서 하려던 작업은 '재점화를 통한 연대'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론은 '알라딘 불매운동'이지요.  

불매운동은 알라딘처럼 작고 개인화되어 있는 사이트에서 생각나면 한번씩 쓸 수 있는 투쟁전술이 아닙니다.  직접행동의 중요성은 알지만 아무때나 직접행동을 위한 대중이 모일 수 있고, 모여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중의 미묘함을 알지 못하는 전술적 오류 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알라디너들이 가진 정보가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님이 먼저 하셔야 했던 작업은 '불매운동하자. ...** ...뭐야 너희들' 이 아닙니다. 먼저 한겨레 같은데 실린 비정규직 특집 기사로 비정규직에 대한 연민 또는 연대를 불러올 수 있는 이데올로그작업부터 시작했어야 합니다. 또한 김종호씨의 일에 대해 좀더 구체적 정보를 수집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노력은 전혀 하지 않으셨지요. 전술적인 양 하시지만 전혀 전술적이지도 또한 실천적이지도 않습니다. 일종의 '유사 실천'입니다. 또한 전술의 다양성 문제에 있어서도 불매운동이라는 방식만이 유일한 방책으로 밀로 나갈 필요도 없습니다. 훨씬 쉽지만 더 대중적 공감을 얻어 알라딘을 압박할 수 있는 방식도 있을겝니다.  그리고 연대의 구체성도 없습니다. 저희 노조에서도 지노위를 이용해 회사를 압박하곤 합니다. 지노위 가면 좀 귀찮아집니다. 조사 받으러 오라가라. 하여간 결과적으로 지노위도 카드인셈인데....불매운동을 하자면 도대체 언제부터 언제까지 인지 정확히 해서 단기간에 알라딘을 압박할 수 있는 효과정도는 발휘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알라딘이 지노위가 부담스럽다면 이 중재 시점까지 압박을 하자는 둥...그게 전술입니다.

데리다를 이야기하지요. 앞서 말했듯이 제가 문제를 다룬 것은 '사건' 차원에서 였는데 님은 이문제를 '철학' 차원에서 접근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현시'로 가버리는데요...제가 데리다를 잘 몰라도 인용하신 그 문장은 이해했습니다. 그럼에도 왜 그런 '연대를 위한 보통어'를 강조했는지는 이제 설명하겠습니다.  제가 푸코를 인용했는데 그거나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돌리셨는데 그 차이까지 설명하지요.  

아...제가 푸코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언표와 투쟁속에서 님처럼 반드시 '정의'의 옷을 입지 않고도 싸울 수 있는 가능성을 보기 때문입니다. 저는 싸움에 화용론적으로 '정의'를 거는 것은 백분 이해합니다만 '정의'나 '도덕' 이라는 몸에 맞지 않는 불편한 옷을 입지 않고 싸우는 방식이 훨씬 더 다차원적이고 상상력 충만하게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잠시 웃자고 비유하자면 님은 '정의'로 제단된 옷을 입고 전장에서 제대로 칼을 뽑아야 된다고 생각하시는 거고 저는 야만인처럼 옷입지 않고 어디서나 사방에서 부딪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다시 갑시다. 먼저 님의 글은 뚜렷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재점화-연대) 즉 저라는 루트를 통해서 '연대'를 구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글은 제게 반론을 펴는 형식을 취하지만 오히려 그 외의 타자들의 연대를 위한 것입니다. 

또, 님의 말씀처럼 제 입장을 밝히는 것이었다면, 아마 알라딘마을 메인까지 올라가지도 못했을 겁니다. 말하자면, 저로서는 전략상 님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ㅡ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일단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이런 전략상의 필요와 '연대'라는 목적이라면 그 대상들까지 고려하는 섬세함이 전술입니다. 님이 연대해야 하는 대상 들 중에서 데리다를 이해하는 사람들은 몇 없습니다.  데리다가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 정의'를 말하였던 것도 90년대 맥락적 읽기를 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후쿠야마의 '종언'과 미국 패권의 일방성 속에서 나온 텍스트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70년대 데리다가 주창했던 '해체'의 함수 속에 다시 브랜딩 될 수 있는 '정의'입니다. 즉 '정의'의 안과 밖은 없는가?  제가 이해한다면 데리다의 '정의'는 님께서 주장하시는 식의 '고정된' 정의 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유동하는 정의' 여야하고 경계선에 서 있어야 하는 정의입니다. 

먼저 제 페이퍼와 님의 페이퍼를 비교하면 제 페이퍼는 연대를 위한 목적이 전혀 없습니다. 반면 님은 연대를 위한 목적의식이 있지요. 처음부터 저보다는 더 대중 연대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인데, 님이 연대를 신경쓰셨다면 연대를 위해 전술적 소통표현방식이 있었어야 합니다.  

 (인용이 나쁜 것도 아닙니다만.) 제가 푸코를 인용했다는 구절은 딱 하나입니다. "권력은 모든 곳에 있다" .... 

이 한 줄과 데리다의 한 문단은 분량적으로도 텍스트 내용의 심오함과 읽기의 번거로움 측면에서도 '연대를 위한 전술' 이 결코 아닙니다. 또한 푸코를 이해했다고 데리다를 이해할 거라는 것도 님의 착각이지요. (제가 오래전에 어떤 진보적 여성분이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해서 그의 영혼도 아름다울 거라 생각하는 것의 오류 대해 쓴 글이 생각나는군요.) 

그렇다면 '타자적 관계 속에'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법이란 무엇입니까? 발마스님의 글(<해체라는 정치>)에 따라 데리다를 끌어오면, '법과 폭력 모두 동일한 원-폭력의 뿌리에서 유래 했'습니다. 이로써 '새로운 정의로 제시하려는 대항폭력의 주장'이나 '필연적인 혁명'은 '도착적 수행성'을 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기로 데리다는 '결국 법과 폭력의 역사적 상대성', '기존의 법을 주재하고 있는 폭력의 변증법', '도착적 수행성을 포함하고 있는 필연적 혁명'을 '넘어 해방적인 힘, 궁극적인 정의의 가능성을 보여주려'고 하지 않느냐고 발마스님은 말하고 있습니다. '보존적 폭력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는' '법정초적 폭력'은 '역사의 완성을 추구하면 할수록' '도착의 가능성'이 '수행'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데리다는 '이 도착적 수행성을 열어 두'고, '이 도착적 수행성 내부에서 이 도착의 가능성과 맞서 싸우는 것'이 중요하며, '이것이 바로 정의의 가능성, 해방의 가능성을 보존하는 길'임과 동시에 '해체라는 정치의 본질적인 요소', '정치적인 것의 보존을 정치의, 더 나아가 인간 실존의 고유한 과제로 제시하'고 있다고 발마스님은 말합니다. '혁명을 일반화하기'인 것이겠죠.  

그리고 데리다의 '폭력론'과 '도착적 수행성'에 대해서는 제가 다른 곳에 남긴 폭력관련된 글들에 그 의미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도착적 수행성의 개념은 지젝의 '레닌'에서도 발견됩니다. 

대략 정리하겠습니다.  

전 사실 알라딘 이상으로 오프라인 서점을 이용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그 동안 '알라딘 불매'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불매'도 아니고 정치적 행위도 아닙니다. 실제로 알라딘 불매운동에 참여하시는 것에 대해 반대하지도 않고 비난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알라딘 불매운동 한다.' 라고 선언하는 것 이상 이시길 바랍니다. (제가 이렇게 긴 글을 쓰고 나니까 오히려 그냥 '나도 알라딘 불매선언 해요.' 라고 하고 서재 대문에 두 줄 써 놓고, 그냥 저냥 잊고 지내는게 더 깔끔한 일이었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아...마지막으로 신영복 선생이 했다는 '우산을 함께 벗자'는 대략 20년전쯤 본 글인데...맞습니다. 님처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요.  하지만 제가 당시에 '우산을 벗고 비를 맞자' 를 이해한 방식은 그렇습니다. '운동이 결코 시혜여서는 안된다.' 는 것. 그 글이 생각하게 해준 것입니다.  우산을 함께 나누어쓰면 비를 맞지 않지만 그것은 우산을 가진 자의 시혜인 셈이고 그건 다시 주인-노예의 관계를 만듭니다. 신영복 선생의 그 글을 저는 당시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기업 알라딘과 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그런거 아니야?  아니면 말고'는 이야기하는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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