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구조

 

정치에 관한 해체의 출발점, 또는 (해체는 항상 중간에서 출발하므로) 해체의 한 사례를 보여주기는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정치에 관한 데리다 사고의 원형적 구조를 보여주는, 짧지만 매우 심오한 『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의 한 문단에서 출발해 보자.

“체계 내에서 특유한 것을 사고하는 것, 이를 여기에 기입하는 것이 원-문자기록archi-écriture의 태도다. 원-폭력은 고유한 것, 절대적 친근성, 자기 현전의 상실이며, 실제로는 결코 발생하지 않았던 것의 상실이다 ... <도덕>을 설립하고, 문자기록의 은폐를 지령하고, 이미 고유한 것을 분할하고 있던 소위 고유 명사의 삭제와 말소를 지령하는, 복원적이고 보호적인 두 번째 폭력에 의해 금지되고 따라서 확증되는 이 원-폭력으로부터 보통 악, 전쟁, 불의, 강간으로 불리는 것 안에서 세 번째 폭력이 생성되거나 생성되지 않을 수 있다(경험적 가능성). ... 이 마지막 폭력은 원-폭력의 두 하위 수준과 법에 동시에 준거하기 때문에 그 구조에서 훨씬 더 복잡하다. 사실 이 폭력은, 이미 비고유화/비전유expropriation였던 최초의 명명을 드러내며, 또한 그 이후부터 고유한 것으로, 지연된 고유한 것의 대체물로 기능해 온, 그리고 사회적, 도덕적 의식에 의해 고유한 것으로서, 자기 동일성과 비밀의 확실한 봉인으로서 지각돼 온 것을 폭로한다.”(De la grammatologie, Minuit, 1967, 164-65쪽―강조는 데리다)

이 압축적인 문단에서 데리다는 폭력의 세 가지 수준을 구분하고 있다. 첫번째는 “결코 발생하지 않았던” 고유한 것, 절대적 친근성, 자기-현전을 성립시키면서 동시에 이것들을 분할하는 원-폭력이고, 두 번째는 이 분할의 흔적을 지우는 법의 설립이라는 폭력이며, 마지막 세 번째는 기존의 법을 침탈함으로써, 법이라는 두 번째 폭력이 지닌 폭력적 성격을 드러내고, 이를 통해 첫번째 원-폭력을 드러내는 폭력이다. 따라서 이 구절에 따르면, 법은 미리 실존하는 고유성, 기원, 정의를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설립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고유성이나 기원, 정의는 본래 현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또는 고유성이나 기원, 정의는 차이(différance)라는 원-폭력으로의 기입에 의해 사후에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존재한다.

 

법이라는 힘: 폭력의 환원불가능성

 

폭력의 구조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들을 이끌어낼 수 있다. 첫째, 이러한 분석은 기원, 법, 동일성의 파생적 성격을 보여 준다. 데리다가 많은 철학자들에게 불신받고 비난받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 기원과 법, 동일성, 즉 로고스를 파생적인 것으로 제시함으로써, 데리다는 합리성의 근거, 즉 서양 철학의 기초 자체를 위험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허무주의와 상대주의라는 비난이 제기되는데, 로고스가 파생적인 것이라면, 로고스의 기원은 폭력, 광기, 정념, 신비 등과 같은 이성의 타자일 수밖에 없고, 이는 정당성(legitimacy) 또는 정당화(justification)의 문제를 배제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리다가 보기에 해체는 로고스 중심주의보다 더 철학적인데, 왜냐하면 해체는 로고스 중심주의 철학이 독단적으로 전제하는 기원, 법, 동일성 자체의 근거에 관한 질문을, 비판적으로(칸트적 의미에서), 또는 의사-초월론적으로 제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원, 법, 동일성을 무비판적으로 전제하는 로고스 중심주의 철학이야말로 원-폭력을 은폐하는 2차적 폭력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폭력적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둘째, 위의 분석은 우리가 보통 설정하는 법과 폭력의 대립 구도가 그릇된 것이며, 사실은 법과 폭력 모두 동일한 원-폭력의 뿌리에서 유래했다는 점을 보여 준다. 이는 이중적 결과를 낳는다. 한편으로 이는 자신으로부터 일체의 폭력성을 제외시킴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법의 관심(interest)은 사실은 어떤 폭력의 이해관계(interest)에 불과하다는 점을 보여 준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는 법이 지니고 있는 위선과 불의를 폭로함으로써 자기자신을 새로운 법, 새로운 정의로 제시하려는 대항 폭력의 주장 역시, 기존의 법을 주재하고 있는 폭력의 변증법, 즉 궁극적인 비폭력의 불가능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보여 준다.

이런 결론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낳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궁극적인 정의란 불가능한가? 법의 역사, 정의의 역사란 서로 전적으로 정당하지도 않고 전적으로 부당하지도 않은 폭력과 대항 폭력, 권력과 대항 권력 사이의 상대주의적인 갈등의 역사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데리다에게는 부당한 권력에 대한 정당한 저항의 가능성, 또는 더 나아가 폭력과 대항 폭력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정의로운 폭력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는 결국 허무주의, 또는 적어도 상대주의적 입장에 불과한 것 아닌가?

『법이라는 힘』(Force de loi)에서 데리다가 답변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 질문인 것으로 보인다. 법과 정의의 구분, 신화적인 폭력과 신의 폭력의 구분, “해체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정의”라는 데리다의 테제 등은 결국 법과 폭력의 역사적 상대성을 넘어 해방적인 힘, 궁극적인 정의의 가능성을 보여주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서둘러 결론을 내리기 전에 우선 이 책의 제목에 주목해 보자. 데리다 자신의 주해에 따르면 법이라는 힘, 법이 법으로서 지니는 힘은, 법이 봉사하는 외부의 권력을 의미하지 않으며, 법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의 폭력에 불과하다는 상대주의적인 함의를 갖지도 않는다. 오히려 법이라는 힘은 새로운 것을 창설하는 힘, 즉 이전에 아무것도 전제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운 어떤 것,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는 수행적 힘을 가리킨다. 따라서 법은, 어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제정된 법(벤야민이 말하는 <법보존적 폭력>)의 경우에도 항상 어떤 새로운 것을 창설하는 힘(<법정초적 폭력>)을 지닐 수밖에 없으며, 반대로 법으로서의 자기 동일성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법은 최초의 창설적 순간―이런 것이 존재한다면―에도 항상 이미 보존 가능성, 즉 되풀이 (불)가능성(itérabilité)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법이라는 힘은 앞서 말한 원초적 폭력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결국 무엇을 의미할까?

 

혁명을 일반화하기

 

데리다에게 원초적 폭력, 또는 법이 지니고 있는 수행적 힘은 혁명의 필연성을 의미한다. 즉 항상 예측할 수 없는 변화가 발생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것의 돌발은 필연적이라는 점에서 혁명은 필연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필연성, 또는―데리다의 핵심적인 양상론에 따르면―필연적 가능성은 합리적 이유 이전의, 합리적 이유의 비합리적(반(反)합리적이 아니라) 조건이라는 점에서 비이성적이며 비규범적이다. 혁명은 항상 필연적이지만, 또한 혁명은 항상 자체 내에 도착적 수행성(perverformativité)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데리다의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첫째, 이 도착적 수행성을 열어 두는 것, 이것이 바로 정의의 가능성, 해방의 가능성을 보존하는 길이다. 데리다에게 혁명의 역사는 목적론적 희망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이 희망이 대항 폭력, 즉 또 하나의 합법적 폭력으로 전락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항상 혁명은, 또는 적어도 마르크스(주의)가 추구했던 혁명은, 기존의 법의 위선을 고발하고 그것이 은폐하는 폭력성을 폭로하면서, 동시에 단순히 이 법의 위선을 바로잡거나 이 법의 이념과 실제 사이의 균열을 메우는 데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균열을 가능하게 했던 구조적 원인을 제거하겠다는 약속, 이러한 구조에서 곧 불의와 착취, 지배가 생겨나기 때문에 바로 이 원인을 소멸시키겠다는 약속, 그리고 이를 통해 불의와 착취, 지배를 근원적으로 폐지하겠다는 약속을 자신의 본질의 일부로 포함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목적론적 희망은 항상 대항 폭력, 즉 또 하나의 합법적 폭력으로 전락한다는 점인데, 이는 무엇보다 이것이 스스로를 역사의 완성으로 간주함으로써 원초적 폭력을 봉쇄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 원초적 폭력은 창설의 힘 자체이고, 쇄신의 가능성의 근거이기 때문에, 역사의 완성을 추구하면 할수록, 폭력은, 창설의 힘은 보존적 폭력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는 곧 폭력을 일소하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폭력의 일소라는 의미에서, 도착 가능성의 소멸이라는 의미에서 궁극적 정의, 궁극적 해방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따라서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이 도착적 수행성 내부에서 이 도착의 가능성과 맞서 싸우는 것, “폭력 내부에서 폭력을 반대하는 것”([폭력과 형이상학])이며, 데리다에게는 이것이 해체라는 정치의 본질적인 요소를 이룬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정치인가? 이러한 정치는 종말론/목적론 대 허무주의/상대주의라는 그릇된 양자택일을 넘어서 정치적인 것의 보존을 정치의, 더 나아가 인간 실존의 고유한 과제로 제시하기 때문이다(이런 측면에서 데리다는 한나 아렌트와, 차이 속에서 유사하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혁명의 일반화인가? 이전까지의 혁명이 추구하던 불의의 시정, 착취의 폐지라는 목표와 함께, 그 실현의 조건으로서, 이러한 혁명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만들던, 혁명에 본질적인 도착가능성을 제어하고 축소하는 것을 혁명의 핵심 과제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이는 오늘날 정치를 사고하는 사람들 모두가 유념해야 할 본질적인 교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