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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신곡 강의 - 서양 고전 읽기의 典範
이마미치 도모노부 지음, 이영미 옮김 / 안티쿠스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아직 단테의 <신곡>을 읽지 않았다.
아무리 각종 단체에서 수 십년 동안 '필독' 이니 '100대 명작'이니 해도 돌아앉은 돌벅수처럼 끄떡하지 않았다. 필름을 이 십여년 전으로 돌려보자. '레드 썬.!!'
고등학교 다닐때 사실 단테 표 <신곡>라면의 겉봉지를 뜯은 적이 있다. 요즘처럼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때였다. 팔팔 끓는 날씨 속에서도 단테표 라면이 끓였다. 면발 넣고 스푸 넣고...그러나 뚜껑한번 열어보고 지옥문 닫히듯 '쿵' 닫아버렸다. <정석수학>과 <성문종합영어>의 익숙함이 차라리 나았다. 의고투의 말투와 발음도 안돼는 주석 속에 등장하는 수 많은 인물들은 최악이었다. 역시 '라면은 몸에 않좋다.'는 고금의 진리 되뇌이며 <신곡>과 돌아섰다. 내게 <신곡>은 DIVIINA COMMEDIA가 아니라 '신 한번 보려다가 곡소리나는 책' 이었다.
그리고 이제 " 우리네 생명길 한 가운데에서/어두운 삼림에 있음을 알았을 때 (도모노부 역)' 다시 <신곡>을 만나려고 한다. 단테 시대보다 인간의 평균 연령이 늘었을 테니 단테가 말한 '인생의 반고비' 가 물리적으로도 내 나이 즈음이 아닐까 한다. 이제 다시 단테의 <신곡>을 만날 용기가 생긴 것이다. (내 나이가 이제 그렇게 되어서 일지도)
Nel mezzo del cammin di nostra vita/ mi ritrovai per una selva oscura/ che la diritta via era smarrita.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단테 신곡 강의>는 <신곡>으로 가기 위해 먼저 만난 책이다. 어린 시절 한 번 채한 음식은 나이가 들어도 먹기가 꺼려진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가르시아 효과'라고 한다고 들었다. <신곡>에 이미 데인 나 역시 조심스럽게 가고 싶어서 이 책을 고른 것이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나처럼 <신곡>에 소화불량을 겪었던 사람들에게 이 책은 훌륭한 소화제가 될 듯 하다. 물론 단테 전공자이거나 각종 서지분석의 대가들에게 이 책은 시시할 수도 있다. '뭐 다 아는 얘기를 하네.' 라고 말할 수도 있을 법하다. 그런 사람들에게도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강의에 직접 참가해서 질의 응답을 하던 일본의 노교수들의 겸허함 정도는 책을 읽고 배워도 될 듯 하다.
도모노부 교수 역시 단테 전공자는 아니다. 저자의 약력과 본문 내용을 살펴봐도 어림짐작 할 수 있다. 그는 철학전공이었고 주로 철학이나 미학관련 책들을 펴냈다. 그런 그가 단테에 대해 전문가가 된 것은 순전히 개인적 관심과 그에 이어지는 '토요공부법'에 의한 것이다. 철학 공부에도 빠듯했던 그는 스스로 규칙을 정해 매주 토요일 밤 3시간씩 단테와의 연애를 한다. <신곡>을 읽고 비교분석하고 정리작업을 한다. 이 책은 그렇게 오래 숙성된 개인적 노력의 결과이다.
저자는 단테의 <신곡>으로 곧바로 들어가지 않는다. 단테의 동반자가 되어주는 베르길리우스를 먼저 말한다. 그리고 베르길리우스가 서사시 전통에서 영향을 받았던 호머를 되짚어간다. 그러닉까 계보로 말하자면 "호머-베르길리우스-단테' 로 이어진다. 도모노부 교수는 서사시의 전통과 각 작가들의 차이점을 비교분석하면서 <신곡>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역사적 배경을 설명해준다. 강유원의 <서구정치사상 읽기>라는 책에도 보면 '호머-베르길리우스-단테'의 문장을 비교하면서 시대적 에피스테메의 차이를 예로 드는 장면이 있다. 도모노부 교수의 분석틀과 거의 똑같다. 다른 책에는 과문하니까 이것이 일종의 서사시 전통을 해석하는 고전적인 방식이 아닌가 짐작해본다.
<단테 신곡 강의>는 이렇게 호머와 베르길리우스의 그리스.로마문화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그리스도교의 전통이 단테의 신곡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책 초반부에 이야기한다. 그리고 4번째 강의 부터 '지옥'으로 들어간다. 저자는 매 강의 도입부에 지난번 장에서 언급했던 것들을 복습하는 차원에서 정리해 준다. 너무 많은 내용으로 두서가 없어진 뇌세포들을 짧고 간단하게 줄맞춤해주는 셈이다. 도모노부는 단테를 대단한 문학가로만 평가하는 것에 반대한다.그가 평가하는 단테는 비록 실패했으나 현실의 정치가였으며 성찰적인 철학자이다. 시적 영감은 자기 개혁으로 이어진다.그리고 이것은 역사의 목적으로서 구원에 이르는 사고의 원형을 형성한다. 도모노부는 단테의 이러한 사상이 비코까지 이어진다고 말한다.
단테는 이제 지옥문 앞에 서 있다.
"영원한 것 외에는 나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 없으며, 그리하여 나 영원토록 서 있으리라, 너희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야마카와 역)
아주 유명한 지옥문의 자기 소개식 문장이다. 나는 이 문장을 수 십번도 더 읽었다. 그런데 너무 좋다. 읽으면 읽을 수 록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것이 '고전'의 포스가 아닌가 싶다. 또한 단테 이후 동서양의 수 많은 사람들이 이 문장을 읽고 감동하고 좋아했을 것을 상상하면서 나 역시 그들과 같은 느낌을 받고 있다는데 무한한 동류의식을 느꼈다. 내가 '고전'을 읽고 나면 뿌듯해지는 것 중 하나는 이런 황당한 상상력도 한 몫을 한다. 단테를 버나드 쇼도 읽지 않았을 까, 오스카 와일드도 읽었겠지,토마스만도, 카잔차키스도...햐...나도 그들이 본 걸 같이 보는구나. (우리는 같은 독자!!) 이런 생각들을 하면 인류의 위대한 인물들과 한 무리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주어서 무엇보다 흐뭇하다. (물론 다짜고짜 내맘대로 하는 상상이지만...^^ ) 도모노부 선생은 지옥의 공간성을 이야기하면서 지옥이 멀리 있는 곳이 아니라고 말한다. 어린 시절의 상상이 고착화되서 지옥은 땅 속 깊이 천국은 하늘 저 멀리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내게 '그건 아니지' 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단테가 뒤에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빛의 천국이야 나는 모르겠다만 지옥은 이 땅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인류가 겪어온 수많은 전쟁, 기아, 살육, 착취, 배신 등을 생각하면 지옥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단테는 '희망'에 주목한다. 즉 '희망'을 버린 모든 곳이 '지옥' 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별'을 '희망'의 상징으로 읽어서 천국,연옥,지옥에 나타나는 별의 이미지를 그때 그때 상기시킨다.
연옥편에서는 단테의 텍스트와 르 고프의 명저 <연옥의 탄생>(바람구두님의 리뷰를 본 적이 있다.)를 소개하면서 그리스도교가 세속적 질문들에 대응하는 방식들을 이야기 한다.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태어난 사람들과 태어나자 죽은 아이들의 사후심판같은 것들 말이다. 르 고프는 그런 문제에 대한 답변을 찾는 과정에서 13세기 이후 연옥 개념이 일반화된다고 말한다. 단테에게 연옥은 '불로서 정화하는 곳'이며 지옥처럼 완벽하게 닫힌 구조는 아니라 천국으로 향하는 계단이 열려 있는 곳으로 정의한다.
도모노부 선생은 <천국>편이 철학적이고 교리적인 내용이 많아서 <지옥>편에 비해 외면받는다고 아쉬워한다. 그가 보기에 단테의 궁극적 목적은 '천국'에 이르는 길을 위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목적을 잊고 과정의 흥미진진함만을 쫓는 것은 주객이 전도되는 것인 셈이다. 단테는 천국의 진리를 인간의 진리 범주 밖에 두고 있다. 인간의 격과 신의 격은 다르기때문이다. <천국>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진리관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어야 한다. 다행히 어려서부터 고등학교때까지 교회를 다녔던 삐딱한 교인이었기이 한결 이해하기 좋았다. 일단 내가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신곡>에는 '인간의 희망과 의지가 우주를 움직이는 신의 사랑에 의해 작동'된다는 것이 기본적인 전제가 있다. <신곡>가지고 고등학교 학생처럼 종교논쟁을 할 것이 아니라면 그 신이 왜 그의 아들을 내려 보냈는지. 그리고 대속의 과정이 인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같은 것들에 대한 선이해는 필요할 듯 하다.
<단테 신곡 강의>를 읽다보면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그 중 하나는 '낭독의 즐거움'의 문제이다. 단테의 <신곡>은 일종의 정형시이다. (로쟈님의 단테 페이퍼를 참고하시길..) 압운이 규칙적으로 반복된다. 랩에서 '라임'이라고 하는 것 처럼 말이다. 그냥 저냥 이태리어 발음이야 대충 따라 간다해도 도저히 그 '운율'을 흉내내지 못하겠다. 책에는 '딴따 딴따'하면서 초등학교 음악시간처럼 몇 개의 예를 보여주고 있지만 실제 귀로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으니 '과연 이렇게 읽는게 맞나? ' 싶다. 누군가 멋드러진 이탈리아어로 읽어주는 몇 몇 구절을 들어보고 싶다. (인터넷 검색을 해서 좀 찾아봐야 겠다.)
또 한가지 아쉬운 점은 '독도'와 관련이 있다. 단테와 '독도'라니 '소주'와 '야채 비빕밥' 같다. 그런데 내가 이 책을 보면서 '일본 이기기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일본에만도 단테 <신곡>의 번역본이 20여종이 넘는다고 한다. 그것이 중역을 포함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쪽발이' 일본은 '밥통' 과 '자동차' 만 잘만드는 것은 아니다. 일본의 인문 사회적 토대는 상당히 깊고 저력이 있다. 일본의 문화 역시 마찬가지다. '게다짝' 신고 '전자제품' 판 돈으로 문화 강국이 되었다는 식의 발상은 아주 저열하다. 그런 발상 머물고 있다면 '독도'를 지킬 수 없을 것 같다.
요즘 기업에서도 인문사회학에 관심을 갖는 듯 하다. 기업들이 직원들을 위해 강좌를 열기도 하고 의식있는 직장인들도 관심을 갖고 그런 가보다. 그런 관심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결국 '말 잘 듣고, '돈 잘벌어 올' 예비 CEO들을 창출하기 위해 인문학이 '이윤창출을 위한 도구'로 이용되는 인상이 있어서 의심쩍은 눈빛을 거둘수가 없다. 인문학이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저마다 다른 답들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제 단테의 <신곡>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오랫동안 나를 따라다니던 <신곡>에 대한 '가르시아 이펙트'로 부터는 벗어났다. 그리고 덤으로 한줄 한줄 아주 천천히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마음 속에 담아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