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에 꼬인 거다. 인터넷 용어로 낚인 거라고 하고...저널리즘에서는 엘로우페이퍼(황색저널)의 선정적 제목이라고 한다. <혁명이 다가오지 않는다>는 지젝의 책을 패러디한 거고...클라우디오 아라우는 <사회변혁과 헤게모니>의 라클라우의 연상작용을 불러 일으킬 듯 하지만 사실 음악가다. ^^
-오늘은 6.10 .100만 동원의 날이다. 민주노총에서도 산별을 통해 촛불 시위 참여를 독려했다. 우리 회사 노조에서도 방을 붙여서 회사 출발시간과 장소를 고지했다.
-알라딘에서 내가 즐겨찾기 하는 분들은 대략 30명쯤 될것 같다. 웅녀의 후손으로 백일에 한번쯤 글을 올리시는 분들을 빼면 정작 10명 미만의 글이 매일 아침 서재 브리핑에 올라온다.
오늘 아침에 보니 23개의 서재 브리핑이 있었다.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그 중 19개가 '이명박', '촛불집회', '미국 소 수입 반대'와 관련된 글이다. 촛불 집회를 바라보는 시각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대략적으로 내가 즐찾하는 분들의 성향이 읽힌다.
일상의 작은 유머를 전하시던 분들은 어디갔을까? 아이들의 귀여운 모습을 전하던 분들은 어디갔을까? 재미있는 동화책을 소개해주시던 분들은 어디갔을까?
시국의 중대함과 무거움이 알라딘에 무언의 압력으로 작용하는 건 사실인 듯 하다. 실제 누구도 그런 글을 올리지 말라고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때와 장소 그리고 분위기를 읽는 것은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눈치 없으면 인간이냐? 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 듯 하다.
그 무언의 분위기를 '폭력'이라고 말하는 -별로 납득하기 어려운-인물들도 곧 등장할 것이다. 7천 5백년동안 썩지도 않고 써먹던 레퍼토리다. 거대한 '폭력'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피억압자들의 소란에 대해서는 심기가 불편한 사람들이 아주 아주 많다. 지금의 열기가 식고 나면 그런 분들이 나와서 다시 한번 시끄럽게 할 것이 분명하다. 조금 이르지만 그들 이성의 '고도 난시' 와 세상을 읽는 '난독증'에 대해 종합 검진을 적극 권장한다.
지금은 '혁명의 시대' 도 아니다. 촛불 시위는 큰 의미가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과장하여 흥분하는 것도 한번쯤 생각해봐야 한다. 거리 점거하는 경험, 그 곳에서 한 마음으로 모인 무수한 대중들의 역동적인 힘,그리고 그 역사적 순간을 함께 한다는 의식을 갖게 되면 가슴이 벌렁 벌렁 거리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누구인들 그러지 않겠는가? 그런 '해방구'의 경험은 소중한 것이고 승리는 또다른 승리를 부른다. 하지만 바닷물을 처음 본 아이들 처럼 과장하거나 흥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더 큰 싸움을 위해서 그리고 항구적 싸움을 위해서는 들뜬 마음도 추스리며 나아갈 필요가 있다. 열정을 단속하라는 뜻은 아니다. 열정의 아집에 자신을 둥둥 띄우지 말하는 뜻일 뿐이다.(결국 이게 꼰대같은 소리인 줄은 안다.) 당신이 태어나기 전 부터 싸움은 있어왔고 당신이 잠든 사이에도 싸움은 있어 왔다.
- 오늘 저녁때 나는 회사 노조와 함께 하긴 힘들 듯 하다. 집에 가서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시위 현장에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나중에 합류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 위치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냥 가는 데로 뒤에 설 수 밖에 없을 듯 하다.
- 히틀러는 유태인들을 학살하면서 베토벤을 들었다. 지옥의 묵시록에서는 베트남 마을을 초토화하는 헬기에서 바그너를 듣는다. 레닌은 슈베르트를 듣다가 너무 감동하여 이런 음악은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들어 혁명에 방해가 된다고 했다. 슈베르트를 들으면서 할 수 있는 혁명은 나쁜가? 혹시 레닌이 슈베르트를 내려놓아서 피로 흥건한 역사와 중앙집중형 권위주의 문제가 발생한 것은 아닌가 ? ^^
음악가 이야기를 하려고 이 카테고리에 글을 써놓고 사실 딴 이야기가 너무 길었다. 나는 클라우디오 아라우를 들으면 시위를 갈 참이다.
어제 6월 9일은 20세기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 '클라우디오 아라우' 가 죽은 날이다. 나도 우연히 알았다. 남미는 사실 음악의 보고다.( 어디 음악 뿐이겠는가 문학,미술, 정치 등등에서 엄청난 영감을 준다.) 대중 음악만 봐도 대단하지 않은가.보사노바,탱고,차차차,룸바 뭐 이런 것들이 전부 남미의 리듬이고 음악이다. 브라질,아르헨티나,멕시코,쿠바의 월드뮤직은 세계를 재패했다. 거기에 슬픈 정치적 역사가 만들어낸 누에바 깐시온의 가수들은 민중음악의 산맥이다. 클래식 쪽에서도 요즘 주목받고 있는 볼리비아가 있다. 빈민 청소년오케스트라 지원프로그램 같은 것 말이다. 이미 메이저로 데뷔한 구스타브 두다멜은 그런 프로그램의 상징이다.조금 옛날 일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바이올린연주자 헨릭 쉐링은 나치를 피해 망명하는 유럽인들을 흔쾌히 받아들여준 멕시코 정부에 감사를 뜻하는 차원에서 멕시코 국적을 얻고 그 곳에 뿌리를 내렸다.
남미 클래식의 위상을 높인 1세대 연주자가 클라우디오 아라우다. 그는 뛰어난 피아니스트 였지만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나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등 러시아 피아노 거장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기가 그리 높지는 않은 듯 하다.그는 클래식의 변방 칠레 출신이다. 어려서 부터 신동이었으며 리스트의 제자로 알려진 크라우제 교수의 눈에 띄어 독일에서 공부하게 된다. 그는 1903년에 태어나서 1991년에 세상을 떠났다. SP시대부터 CD 시대까지 산 것이다. 그의 레퍼토리는 주로 고전음악과 낭만주의 음악에 중심을 두고 있다. 젊은 시절에는 바흐의 모든 건반 악기곡들은 릴레이 콘서트로 연주하는 괴력을 선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에 바흐곡들도 꽤 녹음한 걸로 알고 있으나 점차 멀어지게된다. 일반적으로 아라우가 피아노로 연주하는 바흐의 건반악기곡의 한계에 대해 고민한 결과로 알려져 있다. 아라우는 80이 넘은 나이까지 정력적으로 연주했다. 연간 100회 가까운 연주를 한 걸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 강행군 속에서도 하루에 몇 시간 씩 피아노 앞에 앉아서 연습을 했다고 한다.
클라우디오 아라우의 피아노 소리....이건 독창적이다. 유화같은 두터움이 있으면서도 유리구슬 같은 영롱함이 있다. 타건에는 파워와 힘이 있다. 그리스의 비너스처럼 조금 살이 오른 우아함과 넉넉함이 있다. 힘을 요하는 연주에서도 같은 강함이어도 러시아의 찬바람 같은 날카로움이 아니라 햄머의 묵직함이 있다. 리히터나 호로비츠의 연주를 들으면 마치 피아노를 조각 낼 듯 하다. 그러나 아라우는 피아노를 한번에 으깨버릴 듯 하다. 하지만 아라우 피아노의 가장 큰 특징은 그런 강력한 힘은 아니다. 힘에 바탕을 두돼 미묘한 음색을 어떻게 팔레트 위에서 섞어내느냐이다. 그 색깔이 참으로 묘해서 직접 듣고 느끼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하기가 힘들다. 어느 누구도 클라우디오 아라우를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가끔 호로비츠나 리히터에 대해서는 그런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1등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는 그만의 독특함으로 여전히 우리를 떨리게 하는데 말이다.
유명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열정' 1악장과 협주곡 '황제' 1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