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이 다가온다 -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 프런티어21 3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서원 옮김 / 길(도서출판)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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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도장을 찍었다. 붉은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이다. 무림을 통일한 맹주 '자본주의'는 자기 내공의 한계점을 확인하려는 듯 맹렬히 팽창한다. 목적론적이라고 비판 받는 마르크스는 그 팽창의 임계점이 바로 자본주의가 끝장나는 지점이라고 예견했다.  즉 자본주의는 이미 그 안에 붕괴의 요소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고전 <사기>에 보면 '치솟아 오른 용은 떨어지기 마련이고 달은 차면 기운다' 고 했다. 결국 인류의 역사가 빙하기 얼음의 침묵속으로 사그라들 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자본주의도 다른 형식에 그 길을 열어 주어야 할 것이다. 요즘 봐서는 그 전에 빙하기가 올 것 같다.자본주의가 내적인 모순으로 붕괴된다고 하더라도 가만히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그렇다면 뭐하러 이런 책을 읽겠는가. 그냥 두면 터질터인데..

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는 레닌을 이야기한다. 마르크스를 형식화해내고 현실화해내는 기획가이자 정치 지도자로서의 레닌이다. 끈에 묶여 광장에서 질질 끌려 다니던 레닌 동상의 이미지를 생각할 때 '뭐 별 구태의연한' 이란 생각이 들 법도 하다. 그렇지만 지젝은 우리가 다시 레닌에게 돌아가기를 요구한다.그것은 책 결론에서 말하고 있듯이 '레닌을 반복하기'가 아니다. 그것은 레닌으로 되돌아가서, 레닌을 복기하면서, 레닌을 가지고 현실을 가로지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 <혁명이 다가온다> 를 쉽게 읽기 위해 레닌의 행적을 알아야 하는가?  절반은 그렇고 또 절반은 그렇지 않다. 특히 20세기 초반 러시아의 역사와  러시아 사회 민주당 내의 이념적 갈등 등에 대한 선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 책에 나오는 '레닌의 고독' 같은 말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고독'의 상황을 돌파해낸 실천가이자 이론가로서 레닌을 관뚜껑 열고 부활시킨 지젝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레닌과 러시아 혁명사에 대해 논문을 쓸 필요는 없다. 책의 부제가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이지만 정작 레닌이 이 책의 주인공은 아니다. 지젝은 기존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마르크스,라캉,헤겔을 가지고 '탈출구가 없는 자본주의','혁명의 전망이 사라진 자본주의' 를 헤집는다. 그는 많은 이들에게 '폐쇄 갱도'로 생각되는 '현재 대해 다시금 전복의 가능성을 타진한다.이 책의 목적은 바로 그것이다.

지젝은  현 시점에 서구 좌파가 놓여 있는 서글픈 상황을 적시한다. 진정한 노동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 문화전쟁을 해방의 정치학에서 주요 영역으로 승인하는 것.복지국가의 성과물을 지키는 순수한 방어적 입장,사이버 공산주의에 대한 순진한 믿음,그리고 최종적으로 항복 자체인 제 3의 길....결국 지젝은 레닌에게서 다른 단초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해방구는 아니어도 돌파구 같은 것 말이다.

이 책<혁명이 다가온다>를 나는 한국적 상황에 놓인  진보주의자들(?) 이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매일 동어반복적인 '약자', '독재', '저항' 등의 단어에 익숙해져서 자신의 정체성을 그 단어와의 '동일시'를 통해 확인하기 여념없는 진보주의자들에게 이 책은 필수적이다. 이것은 그 단어들이 의미가 없다는,괜한 짓 한다는 의미의 보수주의적 시각에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정치적으로 올바른 단어'들을 해체하고 재전유하여 앞으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진보주의 알라디너들이 좋아하는 노암 촘스키나 하우드 진, 피터 싱어 같은 이들의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서 지젝은 비판한다. 그것 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말이다. 나는 이 지점에 반드시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선'이 '선'이 되어 멈추는 순간 우리의 사고 역시 멈춘다. (나는 이 문제를 오프라인 상에서 설명하려다가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생태주의'는 왜 나빠요? ..내가 언제 나쁘다고 했냐...인간과 자연이 함께 살자는 것이 좋은 거 아니에요...누가 좋지 않다고 했냐...결국 나온 말은 '생각이 너무 많으면'..   쯥쯥 ) 아마 온라인 상에서도 비슷할 것이다. 그저 '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남겨 놓는 것에서 더 가보고 싶지 않느냐는 말만 남기자. 선불교에서 하는 말 중에 '백척간두 진일보'라는 말이 있다.

지젝은 이 책에서 '탈산업화 자본주의'에 대한 좌파의 합의에 대해 먼저 말문을 연다.그것은 레닌의 유령을 지우는 것이다. 비타협적 계급투쟁,전위당 노선,폭력 혁명에 의한 권력 쟁취 등에 대한 폐지..지젝은 이런 공통된 합의를 1차 세계대전에 대한 사회주의 정당들의 '애국주의 전선' 과 이에 대항하던 레닌의 '혁명적 패배주의' 전선과 병치시킨다. 이런 예 이외에도 레닌의 주장과 이론은 멘세비키 사이에서도 또한  볼세비키 사이에서 언제나 소수자의 그것이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현실의 상황을 정확하게 읽어내는 안목과 그것을 이론화하여 실천의 방향타를 만들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또한 그걸 만들어낼 수 있는 정치적 지도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강단좌파들과 다른 위대한 점이 거기에 있다.

지젝은 레닌의 유령을 복기하기 위해 탈근대 자본주의의에서 주를 이루는 진보적 가치들을 먼저 도마위에 올린다. 다문화주의에 바탕을 둔 포스트 식민주의는 고통을 '서사할 권리'만 가진다고 비판한다. 지젝의 칼카로운 송곳니는 이렇다.

 "착취당하는 소수를 위한 진정한 사회적 참여와 미국의 급진 강단에서 번창하고 있는 ,위험하지도 결함도 없는,여가 시간에 혁명을 하는 듯한 다문화적이고 포스트 식민주의적 작업은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

다들 '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관용'에 대한 지젝의 비판을 들어보자.

"우리가 트라우마적인 차원을 건드리는 순간 관용은 끝난다.간단히 말하면 관용은 타자가 '불관용적인 근본주의자'가 아닌 한 유효한 타자에 대한 관용이다.이는 곧 실재적 타자가 아닌 한 관용된다는 뜻이다. 관용은 실재의 타자,자신의 '향유'에 실체적 무게를 가진 타자에게는 '무관용'이 된다....(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자는) 이런 향유때문에 불편해지고,이런 이유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을 전반적인 전략으로 삼는다."

아닌가? 나는 타인에 대한 '관용'을 당연히 해야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지젝의 지적이 맞다고 생각한다.물론 민주노동당을 '한나라당 2중대'라고 비난했던 '열린 우리당'의 전례를 흉내내서 "기본적 '관용'도 없는 곳에서 거기까지 나아가는 것은 결국 '관용'의 가치를 희석시킨다...너무 생각이 많으면 아무것도 못한다." 라는 식으로 말할 분도 있을 것이다. 그 분들께 정말 싸가지 없게도 지젝은 한 걸음 더 나가는 질문을 한다.

"타인의 믿음에 대한 존중이 실제로 궁극적인 윤리의 영역인가?" (너무 생각이 없으면 이런 질문 자체도 생각하지 않을 듯 하다.)

고통받는 타인들에 대한 거리두기도 지젝은 이런 식으로 말한다.그것은 타인을 추상적 사회기능의 담지자로 축소시키고 거기에 대한 주체의 차가움을 풍부한 개인의 정서적인 삶이라는 유령으로 대체시키는 것이다.여기서 말하는 주체는 '나 몰라'하는 주체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래도 그들에게 무언가 해' 라고 말하는 주체에 더 가깝다. 지젝의 말을 그대로 들어보자

"우리는 고통받는 타인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돈을 내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현실로부터 우리의 안전한 고립이 위협받지 않은 채 정서적인 공감에 빠질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희생자들의 분할이 바로 희생담론의 진실이다. " 결국 이것은 지젝이 비판하는 키에르케고르의 '죽은 이웃에 대한 사랑'일 뿐이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이웃은 죽은 이웃이다...지젝은 이제 오늘날 좌파 자유주의자들의 상황까지 비웃는데...(나는 이것이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에게도 적용되리라고 본다.) "그들은 체제를 위험하게 하지 않으면서 보수주의자들에게 대응하여 점수를 얻기 위해 인종주의,환경주의,노동자의 불만을 자극한다."라고 다분히 위험한 발언을 서슴치 않는다.

다들 좋아하라하는 반세계화 운동에 대해서도 지젝은 지젝거린다.그는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자기확신적 위임을 문제삼는다.그는 자유민주주의가 선험적으로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체제임을 지적해야만 실제로 반자본주의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반세계화 운동 내에 존재하는 실재를 확인하지 못하는 개량주의적 태도들에 대한 지적으로 읽힌다.그는 급진성의 유무를 떠나 자본주의의 정치적 형식을 문제삼지 않는 반자본주의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또한 자유민주주의적 유산을 붕괴시키지 않고도 자본주의를 붕괴시킬수 있다고 믿는 믿음이야말로 요즘 사랑받는 환상이라고 말한다.

문화자본주의에 대한 지젝의 비판에서는 제러미 리프킨이 링 위에서 스파링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리프킨은 이미지가 상품을 대표하는게 아니라 상품이 이미지를 대표한다는 말을 한다.이런 역설적인 방식이 또한 매력적이다.하지만 지젝은 리프킨의 전망이 탈산업적 질서를 너무 앞서서 나아가고 잇다고 지적한다.즉 문화적 경험의 상품화만이 아니라 '실제적' 물질 생산까지 포괄해야만 총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물질적 생산은 탈산업화 시대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무대 뒤로 숨을 뿐이라는 것이 지젝의 올바른 지적이다. 지젝은 그 예로 '헐리우드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생산장면' 과 우리들이 쓰는 상품 뒤에 존재하는 '메이드 인 차이나,인도,인도네시아' 등에 주목하라고 이야기 한다.(조만간에 그건 것고 삭제될 것이다.그렇게 무대 뒤로 숨기려는 의도와 그 영향을 읽어야한다.)

지젝은 이제 레닌의 가진 '진실의 정치학'을 찾자고 한다. 탈근대적인 상대주의가치관 속에서 뻔뻔하게 진실의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역사로 점프하자....1차 세계대전 당시 당신이 러시아에 있었다면 레닌처럼 '혁명적 패배주의'를 주창하는 편에 설 수 있었는가...그렇다고 말한다면 지금도 같은 급의 질문을 할 수 있다.....'혁명은 그렇게 불가능한가? ) 이제 본격적으로 지젝은 상대주의적 가치관의 철학자들에 대해 훅을 던질 준비를 한다.특히 정치적인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룬다. 지젝과는 그래도 가까와 보이는 알랭 바디우는 자코뱅당적이라고 비판받는다. 자크 랑시에르,에티앙 발리바르등도 문화연구와 인정투쟁 중심자들로 경제 영역의 몰락을 공유한하고 비판한다. 지젝은 여기서 조금 더 마르크스에 뿌리를 견고히하고 이들 프랑스 정치철학자들이 정치로 환원될 수 없는 경제의 영역을 실증적인 사회 영역의 하나로 축소하고 정치적인 것을 규정하고 있다고 말한다.일종의 '신사회 운동'의 적자들에 대해 지젝은 '혁명 없는 혁명을 꿈꾸는 자' 들이라고 비난한다.그러면서 일련의 반세계화운동(또는 반자본주의 운동)이 교화되어 단지 또 하나의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의 장소'로 이용되는 것은 아닌가 우려한다.지젝은 레닌을 그대로 적용하여 '당이라는 형식어 없는 운동은 저항의 악순환'에 빠진다고 말한다.즉 정당이라는 조직의 형식 없는 정치는 정치 없는 정치라는 셈이다.그는 이어서 레닌의 예를 들어 '극단적인 정치 전략가 레닌과 생산의 과학적인 재조직을 꿈꾼 테크노라트 레닌이 분리되어서는 안된다.'라고 정치경제학에 바탕을 둔 연타를 날린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제목은 <슈베르트를 듣는 레닌>이다. 지젝의 좌충우돌형 글쓰기의 즐거움을 보여주는 대목이다.실제 레닌이 듣는 슈베르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겨울나그네>의 텍스트를 중심으로 이데올로기가 자리바꿈을 통해서 어떻게 작용하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지젝은 고급문화와 정치적 야만이 아무런 문제 없이 일체화된다는 점을 이야기하면서 권력 투쟁 가운데서 예술이 가진 '적대 관계'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한 레닌을 말하고 있다.또한 고급 문화의 공유를 위한 또하나의 토대인 외설적 연대가 낳는 배제에 대해 지적한다. 즉 풍월당에서 클래식을 듣는 것 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함께 고급 와인을 마셔야지 되며,거기서 이질감을 느끼는 사람은 배제된다는 것이다.또한 자본주의적 주체에 대한 영화'파이크 클럽'을 텍스트로 한 분석은 쉬우면서도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절단이나 자기구타는 아니어도...다들 겨울의 칼바람 맞으며 '아...살아 있구나.'의 물질성을 느껴보았다면 이해할 수 있을 내용이다.9/11 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는 트라우마적 사건에 대한 <현실의 사막에 온것을 환영하네> 역시 그 자장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시의성 있는 내용이다.마지막 장에 해당하는 <삭제의 정치학은 존재하는가>에서는 바디우의 용어 '20세기는 실재의 열정'이다 라는 말을 이용하여 그 두 측면 '정화'와 '삭제'라는 개념으로 새로운 지평을 모색한다.즉 폭력적으로 껍질을 벗겨 실재를 드러내는 정화와 텅 빈 영역으로서의 삭제를 중립적으로 지켜내었던 레닌의 모습을 통해 '사라진 혁명'에 대한 기획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 책<혁명이 다가온다>에서 지젝은 정말 조자룡이 헌 창 쓰 듯이 각종 문화적 콘텐츠들을 자신의 주장을 이해시키기 위해 동원한다. 21세기형 철학자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 이제 남은 문제는 그것이다..... '지젝은 어떻게 혁명을 상품화 했는가?' 과연 '그의 혁명'은 또다른 동유럽'강단좌파'의 출몰은 아닐까?" "우리에겐 레닌의 시대와 다른 어떤 종류의 혁명을 준비해야 하는가?"  질문거리는 많고 지젝은 여전히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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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8-05-11 19:19   좋아요 0 | URL
뒤늦게, 재밌게, 읽었습니다.^^ 동유럽'강단좌파'란 비판은 지젝이 가장 혐오할 만한 것인데요.^^; 지젝에 대한 그런 식의 '수용'이 있을 뿐이죠. 특히나 국내에서의 '동유럽의 인문학 천재'라는 특이한 비아냥(천재다! 하지만 그래봐야 '동유럽'!)...

드팀전 2008-05-11 23:25   좋아요 0 | URL
^^..제가 지젝을 그렇게 생각치는 않습니다. 지젝에 대한 그런 비판들이 있다는 것에 어떤 답변이 필요한 가를 생각해본 것이지요. 물론 현재 돌아다니는 '지젝 비판'이 그에 대한 몰이해나 오독에서 오는 일방적인 것일 수 도 있겠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