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21의 기사를 읽다가 이 책을 보게 되었다.책 미리보기에 가면 한겨레21에서 노약자와 미성년자,심장약한 분들은 읽지말라는 경고문이 인용한 부분을 볼 수 있다.

임신한 흑인 노예의 아내를 처형하는 장면이다.

자주 인용되는 푸코의 <감시와 처벌> 첫 장면에 등장하는 다미엥의 처형장면 처럼 잔혹하다.

미리보기에는 프레모 레비의 글이 인용되어 있다.

"괴물이 있기는 있다.그렇지만 진정으로 위험한 존재가 되기에는 그 수가 너무 적다.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평범한 인간들이다.의문을 품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믿고 행동하는 기계적인 인간들 말이다."

뉘른베르크에서 아이힌만 재판을 취재한 한나 아렌트의 지적이 떠오른다.'악의 평범성'에서 그녀가 찾아 낸 것을 한 단어로 말하면 '생각한 것에 무능력함' 아니었던가.

올해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은 미국의 아그리브 수용소에서 포로들을 학대한 미군 병사들의 다큐멘터리를 다룬 <S.O.P>(Standard Operating Procedure)가 수상했다.아감벤이 말한 '호모 사케르'란 말이 떠오른다.영화 제목이 수동적인 인간의 폭력 수용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이런 극단적인 행위와는 질적으로 분명 다르다.많은 사람들이 극단적 폭력 행위에 가해자가 되진 않으리라고 믿는다.

대신 그것보다 작은 질문에서는 어떨까?

우리는 일상에서 '의문을 품지 않는' 사고 속에 묻혀 있는 것은 아닐까?

'정치,사회적 깨우침'만으로 과연 그 갈 곳 잃은 '의문'은 이제 답을 찾았는가?

한겨레신문에 실린 리뷰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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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부 환경운동가 데릭 젠슨의 대표작
인종학살·환경파괴 등 전지구적 공포 고발
“문명 안락함 뒤엔 타인의 노예화” 일침


이 책은 하나의 무기다. 잔학행위에 반대하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의 손에 쥐어진 총이고, 그 총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려주는 매뉴얼이다. 이 책은 우리의 인식을 묶어두고 지금 같은 세상에 우리를 묶어두는 밧줄을 자르는 칼이다.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성냥이다.

아나키스트요 환경운동가인 데릭 젠슨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거짓된 진실〉(아고라 펴냄)의 서문은 그렇게 끝난다. 그러니까 위의 글은 지은이 스스로 ‘이건 이런 책이야!’ 하고 책의 성격과 쓴 이유를 밝힌 일종의 선언문이다. 2005년에 번역출간된 그의 또다른 책 〈네 멋대로 써라〉만큼이나 당돌하고 당당해 보인다. 그때의 ‘혁명’과 〈거짓된 진실〉의 ‘우리의 인식을 묶어두고 지금 같은 세상에 우리를 묶어두는 밧줄을 자르는 칼’은 상통한다. 그 칼질은 이 세상이 근본적으로 잘못돼 있다는 사실 확인에서 시작한다. 이를 위해 젠슨은 책 첫머리부터 충격요법을 구사한다.

1918년 미국 조지아주 발도스타에서 한 백인 농부가 살해당했다. 백인들은 아무 관련도 없는 흑인 남자 열한 명을 무참하게 죽였다. 그리고 억울하게 죽은 남편의 복수를 맹세한 흑인 여성이 끔찍하게 난도질당했다. 묘사는 단도직입적이고 거침없다. 거의 백년 전 일이니 지금 세상과는 무관할 것이라는 생각이 오산이라는 걸 보여주려는 듯 그는 뒤이어 2001년 콜롬비아 알토나야에서 부활절에 벌어진 40명 학살 사건, 그리고 17살 소녀 전기톱 살해사건을 끌어들인다. 이 사건이 조지 부시 대통령이 이사로 재직했던 미국 석유회사의 ‘구사대’격인 현지 ‘암살대’에 의해 자행됐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리고 매일 4~6명 정도가 경찰관들 손에 살해당하는 미국 현실. “에드워드 앤토니 앤더슨. 1996년 1월15일, 바닥에 엎드린 채 수갑을 찬 상태에서 총에 맞다. …1994년 12월22일, 뉴욕 시 길거리에서 축구를 했다는 이유로 질식사당하다. 르니 캠포스. 수감 중이던 그가 자기 목에 티셔츠를 절반 이상 쑤셔넣어서 자살했다고 경찰은 발표했다. 폐에 이르는 기관의 4분의 3까지 티셔츠가 쑤셔넣어져 있었다. 갈랜드 카터, 17살. 1996년 1월8일, 등 뒤에서 경찰이 쏜 총을 맞다. 경찰관이 피해자의 집 옆을 지나고 있는데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발포’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런 식의 묘사가 무려 3쪽이나 계속 이어진다. 그 희생자들은 거의 모두 ‘흑인’ 등 유색인·소수자·약자들이다.



야생동물 사냥하듯 살육당한 인디언 인종말살, 아동노동과 아동학대, 성폭행, 포르노, 노예노동, 지옥의 교도소, 환경파괴, 홀로코스트, 아귀 같은 기업과 경찰, 그리고 매달 1만8000명의 이라크인들이 죽어간 최근 전쟁에 이르기까지 젠슨의 뒤집기와 속살 파헤치기는 대상과 시대를 가리지 않는다. 500쪽이 넘는 두툼한 책을 메우고 있는 그 고발은 추상적이지 않고 매우 구체적이다. 이 구체성이 젠슨의 전략적 무기다. 젠슨은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를 인용하며 관계를 ‘그것’으로 대상화하는 것이야말로 문명의 속성이며, 범죄자들을 죄책감에서 구해주는 것도 바로 대상화라고 지적한다.




80 대 20의 비참한 약육강식 현실에 안주하는 우리 역시 대상화를 면죄부로 이용하면서 제국 미국에 편승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장식용 백합 생산으로 돈을 벌기 위해 독극물 메틸브로마이드를 한 해 약 30만톤이나 뿌려댄 결과가 빚은 참상에 환경운동가 캐런은 극심한 공포와 함께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빠져든다. 운동가인 그조차! “내가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어. 모든 게 너무 끔찍하고 너무 불합리해.”

그런데 이 공포와 슬픔이야말로 “바깥의 정복과 안의 억압”에 뿌리를 두고 “대다수의 피땀 위에 소수만이 안락을 누리는” ‘문명’의 세뇌에서 해방되는 실마리가 된다. 젠슨조차 “내가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미친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서 변화가 시작됐고, 인생의 4분의 3 이상을 산 다음에야 산다는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공포와 슬픔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된다는 것, 제대로 아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사실은 “자신의 삶의 방식이 (자연과 인간에 대한) 착취 위에 서 있다는 것”, “파괴와 착취, 증오가 문명의 토대”라는 것, “문명이 주는 안락과 고상함은 언제나 타인의 노예상태, 비참함”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는 것이다. 증오와 파괴와 위선과 착취를 개인범죄 차원에서 바라봐서는 안 된다. “정직하라는 것, 절망을 똑바로 보고 우리의 마지막 희망인 저항의 움직임에서 용기를 얻는 거야. 그것이 때로는 아무리 희망이 없어 보인다 해도 말이야.”

아나키스트답게 젠슨은 계급분화와 억압, 착취가 시작된 문명 이전, 농경문화 이전 시대로의 복귀를 해법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진실을 직시하고 저항하라고 촉구한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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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8-02-18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기는 책이네요... 신문을 통 안보니깐 놓칠 뻔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