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잠들다

                    -김윤식

삶이 피곤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물 한 그릇을 얻지 못해서도 아니다 발굽이 다 닳은 나귀처럼 하루 저녁은 서서 잠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잠속에서 그냥 마른 풀 향기처럼 흩어져도 좋고 모닥불로 사위어도 좋기 때문이다 길 가다가 눕는 곳이 곧 마지막 쉴 집이다 옛날 청도에 가면서는 정말 그런 생각을 했다 어깨뼈 위에 이슬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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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일찍 출근해서 회사에서 잛게 책을 봤다.글로 사귄 친구는 아니어서 멋있게 '문우'라는 표현을 쓰긴 멋쩍지만 글때문에 알게된 친구가 보내 준 책이다.이 책에서 내게 가장 큰 인상을 남긴 글은 김윤식 시인의 <길에서 잠들다>이다.시에 과문해서인지 처음 들어보는 시인이었다.이 시 다음 장에는 나귀와 관련된<나귀야>라는 시가 있다.무거운 짐을 짊어진 허름한 나귀가 종이 앞 뒤에 다보탑처럼 새겨져 있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황지우의 '뼈아픈 후회'중에서)임에 땅바닥을 치던 나의 시간도 이렇게 변화해간다.아이때문에 잠을 설쳐서 그런지도 모르겠고 남들 다 지고 가는 삶의 무게에 엄살을 부리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통속적인 비유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내 어깨를 누르는 중력은 나귀와 나의 모습을 오버랩시킨다.그럼에도 한가닥 남은 자존심이랄까 아니면 한쪽에 흐르고 있는 초원을 달리던 DNA의 슬픈 기억이랄까...  '하루 저녁은 서서 잠들고 싶은' '길 가다가 눕는 곳이 곧 마지막 쉴 집'이길 바라는 나귀의 눈빛이 자꾸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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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07-09-28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념무상, 주어진 삶을 자유롭게 살고 싶은 것은 누구나 가지는 바램이 아닐까요. 저도 그렇게 살아봤음 합니다. ㅎㅎ

비로그인 2007-09-29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뼈아픈 후회'는 어느 흐린날 나는 주점에 앉아있을거다 '에 수록된 시가 아닌가요? ^^
인식의 힘 님 서재에 댓글을 남기셨더군요. 파도타고 넘어왔습니다. ^^

드팀전은 메밀꽃필무렵에 나오는 그 드팀전 허생원이 맞나요?
이곳 서재에 잠시 들러 여기저기 둘러보고 갑니다.
드팀전님, 행복한 주말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