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지난 번 옮긴 내용의 말미에 나온 욕망과 윤리의 열쇳말로 찾았다. 그리고 옮기면서 여러 번 들었던 노래. 나는 처음 이름을 들어보는데, ECM 녹음이라고 하고 재즈계에선 꽤 알려진 아티스트라고 한다. 두 곡의 노래를 들었고 첫 곡이 좋길래 올렸다. http://www.aladin.co.kr/blog/mypaper/779043

 

 

본문 후기 쓰기 전에 두 가지 단상:

 

-보통은 텍스트만 올리는 날 다음 날 옮길 본문을 두 서너번 읽어 본다. 처음엔 그렇게 안 했는데, 그렇게 했더니 무턱대로 글자들로 수놓듯 코박고 하는 것보다 좋고 시간도 외려 절약되는 것 같아서 계속 그랬다. 그런데 이번에는 뭐라고 해야 되나 잘 안될 것 같으니까 저절로 딴청이 피워지던, 그런 기분이었다

 

의심을 했다. 그럴 경우 대체로 내 욕심, 잘 해내고 싶다는 마음이나 초심을 잃은 잡념이 정신이 맑지 못하게 훼방을 놓아서 그러는 때가 많았으니까. 두루 다 있었음을 확인하고, 마음을 비우려고 하다 문득 이 일을 다 마쳤을 때를 앞당겨 상상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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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나 생각만으로도 좋고, 시원섭섭하던지. 머리 속에서 고구마 찐빵 같은 것들이 찐 채로 상상이 되고..

그 끝에 아까 밥 막 먹고서 읽었던 김소희 기자의 성칼럼 본문에 인용되어 있던 정희진의 한마디를 붙였다.

 

            정희진은 그의 책에서머리 좋은 사람이 열심히 하는 사람을 따라갈 없고,

            열심히 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없고,

            즐기는 사람은 고민하는 자를 능가하지 못하는 이라고 했다.

 

옮긴이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이 말을 좀 내게 맞게 해 봤다. 영어국어 잘 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난 이상하게 이 일을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인 것 같고, 그렇지만 옮기는 시간 잠시 어느 때 이 일을 내가 즐기는 마음일 때만큼 좋은 때는 없던 것 같고, 그래도 말 읽고 옮겨가면서 둘레둘레 따라오는 여러 생각들, 언어에 대한 본문에서 설명하는 주제에 대한, 그리고 좀 더 크게는 공부나 사는 것에 대한 고민 아닌 고민이 들 때 ㅇ; 시간이 내게 살되고 피되는 것 같은 뿌듯함과 고마움은 못 따라오는 것 같다.

 

 

 -아래 조금 구체적으로 쓰겠지만, 책 옮겨가면서 덕 사이의 구분에 대해 역시 책에서의 표현을 빌면 shaky 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그 중에서 내게 특히 모호한 것은 정직과 용기였다. 나를 놓고보면 진실에 가깝게 살고 싶다는 마음은 나의 이기, 그것이 좋은 의미에서건 아니건, 나의 이기에 반하거나 혹은 나를 좋게 보이고 싶어하는 마음과 충돌할 때 실제로 나를 정직하도록 해 주는 건 진실은 나의 빛, 과 같은 것 보다는 정직하게 행동한다면 잃을 것이 있겠지. 그러나 그래도 그게 내게 좋은 거야, 끝내는 잘했다는 생각이 들거야. 후회하고 고통스러울지도 모르지만 속은 시원할거야! 하며 날 북돋는 용기라는 생각이 든다. 철학책에서 지금까지 내가 용기에 대해 받은 인상들은 용감함, 남과 맞서 싸움, 불의를 참지 않음그런 것들이었는데 용기의 일인칭화랄까. 그런 점에서 정직와 용기가 얼마나 서로 다른지 잘 모르겠다 싶었다. 특히 진리와 진실이 누구의 손에서도 분명치 않을 때, 굳이 자백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어려운 상황에서는 정직과 용기가 결국 하나가 되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줄 아는 생각이 좀 들었다.    

 

--

 

이번 본문은 길었다. 게다가 혹 이해가 더 잘 될까 싶어서 본문을 추가로 옮겼고 사실 어디서 딱 끊기가 애매하기도 했다. 내용도 지난 번의 본문에 이어져 있어서 그 점이 어려웠다. The distinction 이란 말이 본문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나왔다는 것이 한 예가 되겠다. 그래서 그 전까지의 방식, 그날그날의 내용에만 집중하면 됐던, 이 통하지가 않았다.

 

은유가 있었고 철학용어의 이해가 필요했고 내용을 파악하지 않으면 기계적으로, 혹은 공부하는 마음없이 번역시간으로 삼고 말 수 있었겠지 싶다. 그래도 어쩐지 이번 고비를 넘기면 죽 내려가는 길일 것 같은 괜스런 즐거운 마음이 들어서 그쪽으로 믿어 보기로 했다.   

 

 

1.       먼저, 지난 시간에 passion 을 열정으로 생각없이 옮겼는데, 퍼뜩 생각이 나서 사전을 찾고 아무래도 그 말은 열정 보다는 정념 (꼭 흄 생각이 나는) 이나 감정 등으로 말을 고르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전 보다가 tender passion 에 애정의 의미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서로 상충하는 어감이었는데.

 

2.       마찬가지로, distinction. 나는 그 말을 차이로 옮겼고 나름대로 근거도 있었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이것저것 문서와 사전을 뒤져보니, 그 말을 구별, 구별짓기로 하는 편이 더 낫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차이의 의미는 distinction 보다는 difference 가 더 잘 상응하는 것 같고, distinct 서로의 특별함에 따라 나눔의 의미로 가는 것이 좋겠다. 웹 문서를 보니 부르디외의 책 제목이 distinction 인데 그 책을 구별짓기로 해 두었다는 책소개를 읽었다. 그 몇 줄을 외부참고로 삼았다. 

 

 

구별02(區別)「명」 성질이나 종류에 따라 나타나는 차이. 또는 그것을 갈라놓음. 신분의 구별/공과 사의 구별/요즘 옷은 남녀의 구별이 없는 경우가 많다.§//차이(差異)「명」서로 같지 아니하고 다름. 또는 그런 정도나 상태.

 

몇 년전 작고한 현대 프랑스사회학의 거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구별짓기(distinction)’라는 자신의 대표적 저서에서 문화적 취향과 기호의 중요성을 역설했는데, 이렇게 와인 종류 하나에도 출시일을 정하고 나름대로의 의미를 부여해 놓고 세계적인 풍습을 만들어낸 프랑스인들은 역시문화적인 구별짓기’를 훌륭히 해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3.       그런 류의 말들이 더 있었다. Often 이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는 often 하면 종종, 자주, 흔히 의 셋으로 옮겨왔다. 이번 본문에서 그렇게 옮기면 어색하게 읽히는 문장들이 있길래 꼼꼼히 사전을 봤고, 그러다 그 말에 대개의 경우’ ‘일반적으로와 같은 빈도 회수의 차원과는 조금 다른, 범위와 정도의 어감이 있다는 걸 알았다.

 

4.       The distinctions derive, I think myself, from (1) a specially realistic feature of Aristotle’s thought-that he never forgets the fact that we were all once children. 밑줄 친 부분을 몇 번이나 고쳤는지 모르겠다. 특히, 특별히, 특수히를 짝의 하나로, 현실적인 사실적인 실재론적인을 나머지로, 그 다음엔 이렇게 부사+형용사+(나는 그렇게 본) 추상명사+고유명사+다시 명사화된 동사를 어떻게 자연스러운 어순으로 풀 것인가를 왔다갔다하면서. 처음엔, 아이들과 어른이 서로 다르다고 보는 것이 뭐 그리 대단히 실제론적인 생각일까, 그건 오바다 싶은 생각에 사실적인 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이 책은 철학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웹문서를 뒤졌고, 아리스토텔레스 realistic 하면 다들 실제론적인 실제적인 실제주의적인 으로 해 놨길래 순순히 그 용례들을 따랐다.

 

 

5.       To read almost any other famous moral philosophers is to receive the impression that we, the intelligent adult readers addressed, (1) sprang fully formed from our father’s brow. That children form (2) part of the furniture of the world occasionally (3)comes up in passing(about as often as the mention of non-human animals), but the utterly basic fact that we were once as they are, and that whatever we are now is continuous with how we were then, is completely (4) ignored.

 

6.       밑줄이 많다. 실제로 이 두 문장이 무척 애를 먹였고, 위에 두 기록하고 제일 연관도 깊다. (1)은 처음부터 어떤 감, 아마 은유겠거니 앞뒤 문맥상 아이에서 어른이 되지 못한 주문을 읊거나 해서 툭 튀어나온 존재, 그런 설명이겠거니..했다. 그런데 만일 이 문장이 어떤 은유라고 하면 이건 내 혼자 작업이라고는 하지만 번역이 좀 옹색해지겠다 싶어서 마음이 썩 좋지는 않았다. 이때까지도 신화 쪽으론 생각을 못했다. 아는 바가 없으니까. 내가 좀 싫었던 것은, 이때 시간이 되면 좀 더 찾아보자거나 하는 맑은 마음이 아니라, 혹여 이 글을 읽을 사람들이 철학쪽 사람들이라면, 그런데 내가 이런 것도 모르고서 이러고 계속하는 걸 다 보이게 된다면……창피하겠지..벌써부터 창피해라..하더라는 거. 그런 게 난 싫었다. 그래서 과감하게;;; 모르면 몰라라! 하고는 직역을 했고, 나중에 다 한 뒤에 이건 아무래도 뭔가 신화야..하고는 영문구굴검색을 했다. 미네르바..

 

7.       씨익..웃고선 참고했던 문장이고, 웃는 김에 허허..이런 것도 모르고서는..하고 참고한 글. (직역했을 때 문장은 이제보면 웃기다. 아버지의 머리가 아니라 눈썹이라고 했고, ‘아버지 눈썹 하나 뽑아서 불어 만들어진   이랬으니까;;;;) 

 

-Charles Ives, a maverick by anyone's definition. Given the quantity of Ives mythology and the overwhelming influence he ascribed to his father, it is tempting to see Charles Ives as a kind of musical Minerva who sprang full-grown from his father's brow.

 

 

-'하늘의 여왕'을 뜻하는 수메르어 아나타(anatha)에서 유래.

제우스?혼자 낳은 딸로서 제우스의 머리에서 무장한 채로 태어난 처녀신으로 로마신화의 미네르바(Minerva)에 해당하며 올림푸스 12신 중 하나이다. 전쟁과 여러가지 기예(技藝)의 수호신이며 도시의 수호신이기도 하여, 그리스의 여러 주요 도시에 아테나의 신전이 있었다. 처녀신이었으나, 같은 처녀신인 아르테미스와는 달리 남성을 멀리하지 않고 오히려 남성적인 행동을 즐겼으며, 싸움터에 가는 용사들을 응원했다. 그녀의 성조(聖鳥)는 지혜를 나타내는 올빼미였고, 그녀에게 바쳐진 식물은 올리브였다.  

 

 

8.       (2) 는 훨씬 막막했다. 설마 furniture를 사전 찾을 생각은 못해서 세상의 가구를 이루는 어린이들이라니..이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앞의 문장과도 뒤의 문장과도 이어지지 않고 보통은 앞뒤에서 얻는 힌트도 떠오르지 않았다. 통째로 (2) 를 영문구굴로 넣고 돌렸고, 그러다 그만 한 영국 여성밴드의 앨범에 실린 노래 제목이 바로 저 구 전체인 걸 보고선 이건 따로 보면 안되는구나 싶어서 사전을 펴 가구를 찾았다. 그랬더니 part of the furniture 눈에 안 뜨이는 사람이었다. 난 처음 봤다.

 

9.       (3) 은 내가 다루기 어려워하는 숙어라서 나올 때마다 또 문맥에 따라 어느 하나를 익숙하게 쓰기가 어려운 것 같다. 사전적 의미도 여러가지고. Come up with 를 대개 produce/supply 로 써 두고 있지만, 실은 come up 의 의미로 더 많이 보게 되는 것 같다. 없는 데서 새로 나게 하다, 싹이 돋다, 안건으로 오르게 되다, 산출하다 등등. 그 의미대로 섞어서 말을 썼다.

 

10.    (4) 의 경우를 보고선 평소 느낀 의문이기도 했는데, 다만 어감의 선택이 아니고 단어의 의인화가 언제 어떻게 정당화될까에 대해서 잠시 고민했고 좀 알수 있었음..했다. 이 말은 무시하다가 맞고 그렇게 가장 흔히 쓰이는 줄로 아는데, 우리말 사전에서 무시의 의미는 꽤 감정적이지 않나 싶다. 남의 가치를 낮게 보거나 업신여긴다의 의미, 그 다음이 사물의 진가를 잘 헤아리지 않다의 의미. 우선 저 문장 내에서의 ignore 는 낮게 보다의 의미 보다는 고려에서 빼거나 아예 고려의 대상에 올리지 않았다로 하는 편이 더 적절한 듯해서 그리 했고, 이어진 생각이 바로 그 의인화의 문제였다. 가끔 번역된 책을 보면 지나치게 의인화된 말들이 있다. 나는 그때마차 그럴거라면 차라리 문장을 능동형으로 한 뒤, 그 저자, 그 화자, 그 등장인물의 말로써 쓰면 되는 게 아닐까, 왜 수동형 문장이나 사물 주어를 고집하면서 표현이나 문구만 인격화를 시키는지 잘 모르겠다 했던 때가 많다. 지난 번처럼, 이는 순전히 내 인상 뿐이라서 어느 것이 더 좋은 우리말 쓰기인지 그 원칙이나 모범을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외국말에서 능동은 수동형 보다 읽기 좋고 낫다 류의 근거에서가 아니고.

 

무시04(無視) 「명」「1」사물의 존재 의의나 가치를 알아주지 아니함. 2」사람을 깔보거나 업신여김. 남에게 무시를 당하다/내가 자네보다 못 배웠다고 무시 말게./두 세계를 다 깊이 알고 있어서 건달들 사이에서도 무시 못하는 존재로 양다리를 걸치고 생활했다.≪황석영, 어둠의 자식들≫§ 언어의 인격화의 문제  

 

 

11.    사도 바울을 구굴로 확인했고 그 문장은 넘어갔다. We manifest that knowledge in our ascriptions of moral responsibility-albeit often with great difficulty-regarding intentional homicide committed by eight-year-olds, or those with a ‘mental’ age of eight, differently from when it is committed by those who have ‘reached the age of reason’. 이 문장 옮길 때 시간 많이 걸렸다. 처음엔 저 밑줄친 구를 잘 이해하지 못했고 that manifest 의 관계사 문장인 줄 알고, 그런데 knowledge 의 동사가 안 보여서 헤매고. 해 놓고 보면 왜 그랬나 싶은데 할 때는 꼭 한 번씩 막히곤 한다. 결국 ascription 이란 말은 적절히 받을 말을 못 찾아서 attribution 으로 받았다. 아래는 참고했던 말. The age of reason 도 그저 이성의 나이로 직역해서 옮겼다가 혹시나 하고 본 사전에서 선악을 구분하게 된 상태, 연령, 성숙도 를 보고 그렇게 했다.

 

 

12.    So in the moral sphere we do assume there is a distinction between being mentally a child and mentally an adult. But what is it? So 도 아마 내가 영문으로 된 문학작품(과 그 번역서를) 많이 접하지 않은 티가 이렇게 났지 않나 싶은데, 내내그래서’, 로 썼다가 아무래도 그렇게하면 앞문장에서 이 문장까지 호흡도 너무 길고 늘어지고, 바짝 붙어 옮기는 내 눈에도 지루하기까지 해 보여서 그것 말고 뭔가 더 있잖을까..하고 사전을 찾다가 봤었다. So suppose, assume 등의 말들과 있을 때는자” 해보자, 그러자치자 로 옮겨진다는 걸. 이때는 버린 시간이 아까웠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So, 《구어》 《문두에서 감탄사적》 그럼, , 드디어, 그럭저럭.)

 

귀인 歸因 attribution   

 

어떤 행동을 보고나서 많은 가능한 행위원인들 가운데 어느 원인을 그 행동에 귀속시켜야 할지를 추론하고 결정하는 과정. 이는 인간이 자기, 타인, 또는 주위 환경을 지각하는 기본과정의 하나로서, 관찰된 결과나 책임에 대한 원인론적 이해에 이르는 과정이다. 이에 대한 학문적 접근인 귀인이론은 사람들이 관찰된 행동의 원인을 추리할 때 사용하는 규칙을 발견하고 설명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귀인의 일반적인 두 가지 형태로는 사람의 행동을 그의 내면적 태도와 동기보다는 상황이나 환경속에 있는 요인들에 그 원인을 돌려 설명하는 방식인 상황귀인, 상황적 요인보다는 그 사람의 태도, 성향, 동기 등에 돌려 설명하는 방식인 성향귀인이 있다. 오늘날 귀인이론의 관심은 개체의 귀인 양식이 자신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주어지고 있다. 예컨대 개인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원인을 과제의 성질, 노력, 운세 등 어디에 귀속시키는가, 그리고 그것이 개인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관한 것이다.

 

 

13.    Most moral philosophers have nothing to say relevant to this question because, (1)having overlooked the fact that the rational adult moral agents they are addressing were children, they do not see it as a problem. (2) But Aristotle does-and hence the distinctions. (1) 과 같은 경우, 즉 이런 삽입구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잘 모르겠다. 그 구가 없으면 because 이하로 즉, ‘왜냐하면-이기 때문이다로 뜻이 통하고 말도 되는데, 바로 그 때문이다가 된 이유는 밑줄친 having 이하 때문이다 고로, ‘때문에 때문이다가 나의 해석이었고 두 번 때문이다를 쓰기 뭣해서 이므로 때문이다로 기술적으로 고칠까 하다 그냥 두고 둘 사이에 차이가 없다 싶어 어느 쪽이든..하고 넘겼다. 이런 내 해석이 맞을런지 좀 자신이 없다. 그런 애매함이 더했던 것이 (2) 인데, 뜻이야 다른 사람들은 안 그랬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랬다. 인 걸 알겠고 다만, hence the distinction ,의 숨겨진 문장성분들이 뭘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나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주어로 해서 남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걸 문제라고 봤고, 따라서 그걸 구별짓기했다.’ 로 받았다. 하지만 보기에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걸 문제라 생각했고 그래서 그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에 차이가 난 거다.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14.    Neither distinction is entirely unfamiliar in modern philosophy. 나는 in 이란 말은 나올 때마다 신경이 쓰인다 저 말을 근대철학분야 내에서라고 해도 어색하고 근대철학의 라고 해도 마찬가지로 해서. 그래서 그때마다 몇 번 말을 골라보다가 원칙없이 그때 제일 감이 좋은 말로 골라쓴다.

 

15.    But the distinctions, as thus drawn, are both technical and highly contentious, whereas the distinction between being mentally an adult and mentally a child is neither. Moreover, they tend to be presented as (1) hard and fast, whereas, as we know, the transition from childhood to adulthood is a continuum (2); there is no precise point at which the change occurs. 밑줄 친 문장을 파악하기가 좀 어려웠다. 우선은 hard and fast 가 엄한 규칙에서 나온 그 엄격한 단호한의 의미인 줄로만 알고 있어서 그 말이 잘 안 변하려드는 의 의미로 확대될 수 있는 줄 몰라서 그랬고, 그러나 설령 그렇게 해 놓고 봐도 저 말이 왜 그 뒤, 세미 콜론 뒤의 말과 이어지는지 알 수가 없어서 헤멨다. 내 머리로는 어린이à 어른의 느리고 연속적인 변화가 오히려 더 어디서부터 변화가 시작되는지 알 수 없지 않는가. 안 변할 듯 있다가 확,그리고 급격히 변화한다면 그 점은 더 발견관찰이 쉽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에 무척 혼란스러웠다. 그렇다고, 세미콜론 뒤의 문장을 주절도 아닌 문장에 연결할 수도 없고, 그러자 whereas 가 주절+종속적이 아니라 동격의 두 문장을 이을 수 있는게 아닌가….이렇게 별별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아 이건 내가 문장을 잘 이해 못해서 그러는 거구나. 영어능력 문제라기보다는..’ 했다. 그런 생각은 아래의 문장에서 최고점을 찍었다.   

 

16.    Although I would not stake my life on the impossibility of (1) someone’s coming up with the necessary and sufficient conditions for ‘acting from reason’ in the way we, typically, do, and animals and small children do not, I am quite certain that (2) any such analysis would have to embody, somehow, that continuum. 분명 대구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왜 (1) (2) 가 대구인걸까 어떡하면 대구를 살려서 뜻을 명료하게 하나..이때 내가 이번 본문 전체를 잘 따라가지 못한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저 위의 만화를 떠올렸다. 사실은 잘 생각하면 쉬운 문장일 수도 있는데 아무래도 무리인가보다..싶어서. (지금은 잘 된 것 같아서 편한데 아까는 기분이 좀 가라앉았었다.) 결국 coming up with 에서 왔어야 하는 감을 잘 못받은 것 같다는 생각하고, 다시 결국 맨 처음으로 돌아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왜 그런 구별짓기를 하려 했겠는가? 에 열쇠가 숨어있다고 봤다. 어거지로 번역했는데 잘 되었을지 자신은 없다.

 

come up

①오르다, 올라가다; 출세하다, 승진하다 ② 다가오다, 가까이 오다[to] (식물이) 싹이 나오다 ④ 유행하다 ⑤ (폭풍우 따위가) 일다 ⑥ 언급되다, 화제가 되다 ⑦ (법안 따위가) 상정되다, 제출되다; (~) 의제[후보]가 되다[for] (사건이) 심리되다; (피고가 법정에) 출두하다 ⑨(물고기 따위가) 수면 위로 올라오다 ⑩《英》 (런던에) 가다; 《美》 (북부로) 오다  

 

 

17.    Further, mental maturity is made up of many factors. ‘Has a mental age of five’ is often a gross judgment which, perforce, ignores(1) ways in which the subject has mental attributes that no ordinary five-year-old has. (This fact is no doubt connected to the fact that the distinction between the mental and the physical is often shaky. Is the desire to have sexual intercourse, or children, a mental attribute or a physical one?) Conversely, rational adults are of course not immune to childish or animal impulses or passions, but we are not (2) thereby ‘in the same state’ as children or animals. (1) 도 매번 방식 방도 식 법 대로 로는 아무래도 빈약한 듯해서 이번 기회에 사전 좀 보자고 하고 봤고, 거기서 경험/지식/주의/행동/ 의 범위의 의미가 있는 줄 알게 됐다. 바로 그 뜻 같았는데, 뜻을 풀자니 늘어지겠고 해서 막상 옮긴 건 좀 엉성하다. (2) 의 의미도 이번에 하나 새로 알았다. –따라서, -때문에로만 알았는데 보니까 그것 말고 ‘–하는 정도의 의미가 있었다. 이 문장에서 그런지는 반반이었는데, 그래도 그 때문에 애들이나 동물과는 다르다 보다는 , 아이나 동물과 같지 않은 상태, 그 정도인 것 뿐이다 로 봤고 그렇게 옮겼다. (special . 그 말도 특수특별 이외에 특정한으로 말뜻을 좀 확대했다.)

 

Thereby 1. 그것에 의하여, () 때문에.

2. 그것에 관하여[대하여].

3. 《고어•방언》 그 부근에, 그 근처에.

4. 《스코》 (수•양이) 대략, …정도. 

 

18.    We know, (1) dispositionally  if not occurrently, that the impulses or passion is innocent or deplorable, unduly strong or weak, justifiable or unjustifiable, only to be expected under the circumstances or calling for justification, and so on, and that (2) knowledge is part of the state we are in but not of whatever states animals and small children are ever in. 옮기기는 했어도 아직도 왜 that 이하의 긴 설명이 우리가 기질적으로나 우연히 알게 되는 사실들인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본능적으로나 따로 훈련없이 살다보니 알게 된다..그런 의미인 것인지. (2) 의 경우 예외없이 지식’ ‘으로 하다가 라고 아는 바, --인 인지로 섞어서 했고 그 편이 이 본문에서는 더 적절했다 싶다. 아이와 어른이 다르다는 것이 지식은 아닌 듯해서 

 

 [*dispositionally:  생득적으로 타고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계급에 따라 체화된, 내면화된, 사회화된 것을 의미한다. practical dispositions이라 말할 때는 행동(action)으로 이어지는 기질이란 의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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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istinctions derive, I think myself, from a specially realistic feature of Aristotle’s thought-that he never forgets the fact that we were all once children. To read almost any other famous moral philosophers is to receive the impression that we, the intelligent adult readers addressed, sprang fully formed from our father’s brow. That children form part of the furniture of the world occasionally comes up in passing(about as often as the mention of non-human animals), but the utterly basic fact that we were once as they are, and that whatever we are now is continuous with how we were then, is completely ignored.

 

내가 생각하기에, 그런 구별짓기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특히 실재론적인 특성에서 비롯되는 같다. 그는 우리가 모두 예전에는 어린이였다는 사실을 결코 망각하지 않는다. 다른 거의 모든 저명한 도덕철학자들의 책을 읽다 보면, 호명된 우리들, 이성적인 성인 독자들은 아버지의 머리에서 자란 채로 갑자기 솟아났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아이들이 세상을 이루는 것들 중에서 눈에 뜨이지 않는 부차적인 존재라는 것은 (대략 인간이 아닌 동물들에 대한 언급만큼이나 자주) 논의에 오르지만, 완전히 기본적인 사실, 일찌기 우리는 어린이였고, 현재의 우리가 어떠하건 그것은 예전의 우리의 상태와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는 것은 완전히 간과되고 있다.

 

We all know that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being a child and being and adult-and we all know that the difference is not merely physical. ‘When I was a child’, says St Paul, ‘I spake as a child, I understood as a child, I thought as a child: but when I became a man, I put away childish things.’ We manifest that knowledge in our ascriptions of moral responsibility-albeit often with great difficulty-regarding intentional homicide committed by eight-year-olds, or those with a ‘mental’ age of eight, differently from when it is committed by those who have ‘reached the age of reason’. So in the moral sphere we do assume there is a distinction between being mentally a child and mentally an adult. But what is it? Most moral philosophers have nothing to say relevant to this question because, having overlooked the fact that the rational adult moral agents they are addressing were children, they do not see it as a problem. But Aristotle does-and hence the distinctions. Neither distinction is entirely unfamiliar in modern philosophy. Many philosophers have wanted to distinguish acting from reason from acting from desire, and many have given accounts of special forms of rational wanting. But the distinctions, as thus drawn, are both technical and highly contentious, whereas the distinction between being mentally an adult and mentally a child is neither. Moreover, they tend to be presented as hard and fast, whereas, as we know, the transition from childhood to adulthood is a continuum; there is no precise point at which the change occurs. Although I would not stake my life on the impossibility of someone’s coming up with the necessary and sufficient conditions for ‘acting from reason’ in the way we, typically, do, and animals and small children do not, I am quite certain that any such analysis would have to embody, somehow, that continuum. Further, mental maturity is made up of many factors. ‘Has a mental age of five’ is often a gross judgment which, perforce, ignores ways in which the subject has mental attributes that no ordinary five-year-old has. (This fact is no doubt connected to the fact that the distinction between the mental and the physical is often shaky. Is the desire to have sexual intercourse, or children, a mental attribute or a physical one?) Conversely, rational adults are of course not immune to childish or animal impulses or passions, but we are not thereby ‘in the same state’ as children or animals. We know, dispositionally  if not occurrently, that the impulses or passion is innocent or deplorable, unduly strong or weak, justifiable or unjustifiable, only to be expected under the circumstances or calling for justification, and so on, and that knowledge is part of the state we are in but not of whatever states animals and small children are ever in.  

 

 

우리는 어린이라는 것과 어른이라는 사이에 차이가 있으며,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차이만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내가 어렸을 ’,  애들같이 말하고, 철없이 알아듣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커서 어른이 되었을 , 나는 애들같은 짓을 그만 두었다.’ 사도 바울 St Paul 말이다. 많은 경우 그러기가 무척 어렵기는 하지만, 우리는 여덟살 짜리 어린이나, ‘정신연령이 여덟살 정도인 사람이 저지른 의도적인 살인을 선악을 구분할 아는 이성의 나이에 다다른사람이 자행한 살인과 다르게 생각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어린이로 있는 것과 성인으로 있는 것이 다르다는 인식을 도덕적 책임의 원인적 이해에서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이렇게 우리는 도덕의 영역에서 정신적으로 어린이라는 것과 정신적으로 어른인 것에 차이가 있다고 전제한다. 그런데, 무슨 차이란 말인가? 도덕 철학자들 대다수는 질문과 관련한 어떠한 말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이성적 성인인 도덕 행위자가 아이들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왔으므로, 점을 문제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달랐고, 따라서 차이를 보게 것이다. 근대 철학에서, 어느 쪽의 구별도 전적으로 생소한 것은 아니다. 많은 철학자들이 이성에서 나오는 행동과 욕망에서 비롯되는 행동을 구분시키고 싶어했으며, 이성적 욕구에 관한 특정한 설명들을 계속해왔다. 그러나, 이제까지 이야기 바대로 차이는 정신적으로 성인이라는 것과 정신적으로 어린이라는 것의 차이에 비하면 전문적인데다 매우 논쟁이 분분한 것들이다. 더구나, 아동기에서 성인기로의 이행이 하나의 연속체인 것에 비해, 구분은 고정된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경향이 있다. , 변화가 일어나는 정확한 지점이 없다. 비록 나는 인생을, 사람은 우리가 으례 하는, 그러나 동물과 어린 아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 식대로 이성을 따라 행동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을 갖추고 튀어나올 없다는 불가능성에 걸지는 않겠지만, 그런 분석의 어느 것이든 어떤 식으로든 그런 연속체의 속성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고 확신있게 생각한다. 게다가, 정신의 성숙는 많은 요소들로 이루어진다. ‘정신연령이 다섯살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총평가로, 대상자가 여느 다섯살짜리 아이에게 없는 정신적 속성을 갖게 되는 범위의 강제로 무시된다. ( 사실은 의심할 없이 정신과 육체의 구분이 많은 경우 불분명하다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성행위를 하고 싶다는 욕구, 혹은 아이를 갖고 싶다는 욕구는 정신의 속성인가 아니면 육체의 속성인가?) 거꾸로, 이성적인 성인들은 당연하게 아이같은 혹은 동물같은 충동이나 감정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나 동물과 똑같은 상태 있지  않은 정도인 것이다. 우리는 우연히가 아니라면 기질적으로, 충동과 감정이란 순진무구하거나 한탄스럽고, 지나치게 강하거나 약하고, 정당화될 있거나 없고, 조건 하에서만 당연히 예기되거나 명분이 필요하거나, 기타등등 임을 안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것이 지금 현재의 우리의 일부며, 동물이나 어린 아이들은 이제까지 있어 어떤 상태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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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istinctions derive, I think myself, from a specially realistic feature of Aristotle’s thought-that he never forgets the fact that we were all once children. To read almost any other famous moral philosophers is to receive the impression that we, the intelligent adult readers addressed, sprang fully formed from our father’s brow. That children form part of the furniture of the world occasionally comes up in passing(about as often as the mention of non-human animals), but the utterly basic fact that we were once as they are, and that whatever we are now is continuous with how we were then, is completely ignored.

 

We all know that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being a child and being and adult-and we all know that the difference is not merely physical. ‘When I was a child’, says St Paul, ‘I speak as a child, I understood as a child, I thought as a child: but when I became a man, I put away childish things.’ We manifest that knowledge in our ascriptions of moral responsibility-albeit often with great difficulty-regarding intentional homicide committed by eight-year-olds, or those with a ‘mental’ age of eight, differently from when it is committed by those who have ‘reached the age of reason’.  So in the moral sphere we do assume there is a distinction between being mentally a child and mentally an adult. But what is it? Most moral philosophers have nothing to say relevant to this question because, having overlooked the fact that the rational adult moral agents they are addressing were children, they do not see it as a problem. But Aristotle does-and hence the distinctions. Neither distinction is entirely unfamiliar in modern philosophy. Many philosophers have wanted to distinguish acting from reason from acting from desire, and many have given accounts of special forms of rational wanting. But the distinctions, as thus drawn, are both technical and highly contentious, whereas the distinction between being mentally an adult and mentally a child is neither. Moreover, they tend to be presented as hard and fast, whereas, as we know, the transition from childhood to adulthood is a continuum; there is no precise point at which the change occurs. Although I would not stake my life on the impossibility of someone’s coming up with the necessary and sufficient conditions for ‘acting from reason’ in the way we, typically, do, and animals and small children do not, I am quite certain that any such analysis would have to embody, somehow, that continu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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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12월 첫날이라는 데 내게 여유가 있어 그랬던지 그 사실, 그런 말에서 오는 감상들이 좀 있었다. 비발디 사계 생각은 진부한 듯 하면서도 좋아서 클래식 대신 젖과 꿀의 아트락 버전으로 골랐고, http://www.aladin.co.kr/blog/mypaper/777914 진눈깨비였다가 곧 비로 바뀌었다는 소리에 얼핏 떠올랐던 예전 스노캣 그림 하나를 올려 본다. 기말고사네 기말 페이퍼네 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던 하루였다.

 

 

이번에 올린 내용은 좀 까다로웠다. 대강 옮겨 놓고서도 한 세 번쯤, 한 번 더 해서 네 번쯤 죽 다시 읽어 모든 단어들을 다시 찾아 보고 나서야 이 정도 할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좋기도 하고 번역이란 거 어려운 일이로구나물론 언제나 하게 되는 생각이지만 오늘은 유독 더했다. 뜻을 전혀 모르겠다 싶은 문장이 있어서가 아니라 살짝 말 몇개를 바꾸면 미묘한 듯 중요한 의미의 차이가 나오는 것 같았달까, 그러니 느슨해질 틈이 없었달까 했던 것 같다. 이번 작업에서는 저자가 덕의 주제를 다루어가는 논리와 주장을 펴는 방식과 태도의 섬세함을 느껴 볼 수 있었고, 그가 앞에서 한 말하고 세부의 실제 논의가 일관된다는 걸 자연스럽게 느껴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방금 적은대로 이번 작업은 구체적으로 기록을 남길 것은 그리 많지 않고, 몇 번이고 문장을 고쳤어야 했었다는 그 자체, 문장의 미묘함을 어떻게 다룰 지를 고민했었다 정도면 충분한 것 같다. 어쨌든 이번에는 크게, 1 or 의 번역을 어떻게 잘 처리할 것인지, 2 dash 의 경우 우리말 문장에서도 꼭 받아야 하는 것인지 등이 골치였다.

 

 

 

 

1.       When we think of the virtues in general, or ‘virtue’ tout court, it seems that we think is the Aristotelian way. 여기서 바로 or 가 막혔다. 처음에는 당연스레 혹은이라고 했다. 그러다 덕 일반과 줄여서 덕, 이 둘의 관계가 배타적이건 포괄적이건 그 또는의 의미의 or 가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렇지만 머리에 떠오르던 말은 그럼 즉, 다시 말하면 그쪽인가?’ 정도 뿐이었고 그렇게 넣어도 말은 통했으나 만약을 위해 사전을 찾았다. 이젠 선택지가 더 넓어져서, ‘다시말하면’ ‘그렇지 않으면의 뜻까지 갔고, 그 바람에 잠시 혼란에 빠져서 헤맸다. 여러 번 생각끝에 덕 일반 줄여서 덕 의 관계는 A 또는 B 는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 아니면이 제일 낫겠다 싶어서 그렇게 옮겼다. 이때, or 앞에 apostrophe 가 찍히는 경우 대체로 또는 혹은 보다는 그렇지 않다면이 더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자, 이전의 본문에서 죄다 또는 혹은으로 옮긴 것 같다는 생각에 한숨이 좀 났다.  그래서 아무래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아서 두 문단만 하려다가 세 문단을 다 옮겼다. 마치고나서 우리 말로만 내가 했던 번역문을 모아서 천천히 한 번 읽어 봤으면 싶어서.

 

2.       위 문장에서 주절의 Aristotelian way 를 처음에는 따르다 류로 옮겼다가 가급적 직역을 지키려고 하되 불가피할 때만 하자는 생각이 들어서 way 를 다시 찾아 보는 쪽으로 하고, 그 말의 여러 뜻 중 관점을 찾아서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건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과 같다고 봐도 좋겠다의 의미로 정했다. 

 

3.       The concept of a virtue is the concept of something that makes its possessor good; a virtuous person is a(1) morally good, excellent, or admirable person who acts and reacts well, rightly, (2)as she should (3) --she gets things right. 여기서는 우선 morally good 의 의미가 뭔지 잘 알 수 없었다. 도덕적으로 좋다란 말이 어쩐지 동어반복 같았다. 도덕적으로 나쁘다=비도덕적 이런 식으로. Morally good 으로 웹 상에서 확인을 해 봤는데 도덕적으로 선한/좋은 이 대다수였고 몇몇이 도덕적으로 훌륭한이라고 해 놨었다. 그런데 훌륭한이라고 하면 보통은도 있다는 말이 되는가 싶어서, normal abnormal good bad 은 다르지 않느냐는 생각도 들었었다. 어쨌든 내가 morally bad do morally banned 로 쉽게 떠올리는 것에 비하면 morally good 에 대해선 불분명한 생각을 갖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4.       두 번째 부분이 좀 까다로웠다. As 에 초점을 두고서 하는 바대로 의 의미를 살려서 했는데 그랬더니 그가 그래야만 하는대로가 되어 버렸고, 그럼 마치 도덕적 규칙에 따라서 했다 식이 되는 것 같아서 결국 한 마디를 더 넣었다. 그가 그런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바대로 식으로. 잘 되었는지 모르겠다. 연결해서, 전부터 기록을 남기고 싶었던 내용인데, 국어공부를 제대로 안한 티가 날 줄로 알지만, 나는 우리말로 된 책에서 대쉬의 의미를 많이 본 적이 없다. 대쉬가 나오는 경우는 대체로 번역된 책, 그런 텍스트였다. 그래서 가급적 영문의 dash 를 우리말 문장에도 고스란히 옮기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내가 한국어 문장을 기본부터 너무 모른다는 생각 (갑자기 우리말 본문에도 이게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에 검색을 좀 해 봤지만 모두 영어 dash 만 나와있어서 아직 참고할 내용을 찾지 못했다.

 

5.       hyphen dash. 창피하게도 나는 여태 본문을 읽거나 속으로 번역하곤 할 때, 모조리 다 하이픈 길이로만 인지했었고 그 뜻도 대쉬의 여러 의미에 대해서는 관심없이 그저 긴 말을 줄여서 강조하려고 정도로만 생각해왔다. 그러니까 나는 대쉬로 서로 다른 것을 의미하는 문장을 표현할 수 있는 줄은 몰랐다. 이번에 대쉬 뒤의 저 말을 어떻게 옮길까를 고민하다가 우선은 내가 대쉬를 모두 하이픈 길이로 해 둔 것도 확인하게 되었고, 겉으로야 번역된 문장에 큰 차이가 나타나지 않겠지만, 대쉬의 의미가 비단 강조 뿐 아니라는 것도 염두에 두자고 해 볼 수 있었다. 환기시키는 차원에서 도움이 되었던 참고 내용 중에서 일부.

 

6.       흔히 하이픈을 길이를 기준으로 말하는데  하이픈 하나보다 약간 것을 ‘en dash’(short dash), 길이를 ‘em dash’(=long dash), 길이를 ‘2-em dash’( 대시) 그리고 길이를 ‘3-em dash’(쓰리 대시)라고 한다. 길이로 따지면 hyphen 개가 하나의 dash 되지만, 길이 외에 뜻과 용례는 서로 다르다. Dash 문장의 중, 변경, 삽입, 보충, 주저, 강조, 생략 등에 쓰인다. Dash(풀이표) 간단한 용례는 다음과 같다. 가령 ex-father-in-law( 시아버지, 장인)에서는 구성이 (en dash + hyphen + hyphen)처럼 이어진 것이다. 당히 중요한 내용이 있을 경우 기타 다른 방법을 이용하여 문장에 그 내용을 포함시킬 수 있다-그 문장이 또 다른 문장을 쓰는 것을 의미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괄호는 글의 내용을 비교적 덜 강조할 때 쓰는 반면 대쉬는 글의 내용을 강조할 때 쓴다는 것에 유념하기 바란다.

 

 

7.       These seem obvious truisms. But when we think of particular examples of virtues, we sometimes give these truisms up. 여기서의 particular 는 특수 특정 특유 말고 위에서의 in general 의 대구로 봐서 하나하나로 받았다.

 

 

8.       We may say of someone that he is too generous or honest ‘to a fault’. It is commonly asserted that someone’s benevolence might lead them to act wrongly, to break a promise they should have kept, for example, in their desire to prevent someone else’s hurt feelings. 이때 it is commonly asserted 를 어떻게 옮길까 하다 이 경우는 that 절을 살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앞은 짧게 인 바, 로 받았다. 그랬다고 적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일 같고 다만, --인 바, 식의 문장이 좋은 문장인지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다는 정도는 남겨 두고 싶다.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떤 문장이 좋은 문장인가에 대해 내가 그려둔 상이 거의 없다는 것이 어려움이고, 점점 더 느껴가는 중이지 싶다. Prevent 이하에서는 실수를 할 뻔했다. 남의 상처입은 감정을 보호해주려고- 식으로 했다가, 그게 아니라 prevent 하지 않게 막다의 의미(from 이 없더라도) 가 아닌가 해서 고쳤고, hurt feeling 도 문맥상 구체적으로 무엇 때문에 상처를 입었다 보다는 두루뭉수리하게 기분 상하다 쪽인 듯해서 그렇게 했다.  

 

 

9.       So, it would appear, being generous, honest, benevolent, or courageous, despite their being virtues, can also be faults; or they are not always virtues, but sometimes faults. Someone who is generous, honest, benevolent, or courageous might not be morally good, admirable person(1)-or, if it is still a truism that they are, then morally good people may be led or enabled by what makes them morally good to act wrongly! (2) Which all sounds very odd.  일단 헛갈리고 나니까 보니는 or 마다 다 어쩐지 이게 아닌 듯해 보여서 골치였다. 결국 너덧 번을 고치다가 한 한시간 밖에 다녔다 와서 자리에 앉아 읽을 때 입에서 제일 잘 굴러가던 대로 옮겼다. (2) 는 이번 번역에서 제일 자신없는 부분인 듯한데, 처음의 직관적인 이해대로 저 문장의 which 는 다른 뜻이 아니라 만일 그 앞 문장이 감탄문으로 바꾸지 않았다면, 그 앞 문장 전체를 받는 관계대명사 절로 되었잖겠느냐..는 생각에서 그렇게 했다. 하지만 중간에 양보절로, 어떤 식의 해석이건 모두 이상하게 들린다로 하기도 했었다. 문제는, 그렇게 하면 어떤 식의 그 어떤이 될만한 복수의 해석이 앞에서 나온 바 없어서 그걸 근거삼아서 설마 하고 지웠다. 내 생각 속에서는 당연히 all 은 모두가 아니라 완전히, 말 전체가 의 의미였다. 쓰면서 좀 자신이 없다. 밑줄 친 부분이 잘 옮겨졌는지 

 

 

10.    Odd as it is, it would be futile to insist that it was wrong. As far as my own linguistic intuitions go, the only virtue term we have which is guaranteed to operate as a virtue term-that is, to pick out something that always makes its possessor good-is ‘wisdom’. (Perhaps also ‘just’-I am not certain.) 이때의 virtue term law term, 즉 법률 용어와 같은 뜻인지 좀 불분명했다. 그렇다고 덕목이라는 말로 받을 수도 없어서 좀 애매하게, 한번은 이름으로 받고 한 번은 안 받고 식으로 어물쩡 넘어갔다. 괄호 안의 just justice 정의로 받았는데 왜 저자가 앞에선 wise 가 아닌 wisdom 으로 받고 괄호에선 형용사로 받았나 모르겠다. 대쉬 이하는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서 근데 난 확신을 못하겠네요 쪽으로 했다. 여기서의 의문은 (1) 저 대쉬를 지우고 하지만등의 말을 넣어도 되는지 (2) 아니면 그냥 대쉬를 살리고 그 의미대로 해석되게끔 하는 것이 정확한 번역일런지를 잘 모르겠다는 거였다.

 

11.    People can be ‘too clever by half’ but not too wise. But all the other candidates seem to accept ‘too’ or ‘what a pity he is so…’. However, we do not have to talk this way, and we have various circumlocutions that enable us to hang on to the truisms that a virtue is a good way to be; that it makes its possessor good and enables her to act well. 밑줄 친 부분을 여러 번 바꾸었다. 결론적으로는 and 에서 (and or but may seem 은 할 때마다 몇 번씩 사전을 보고 또 보게 되는 것 같다)

 

12.    [대립적 내용]-이면서도, 그러면서도 he is so rich, and lives like a beggar. 의 용례를 보고서 그것으로 했다. 그 전에는 문장을 둘로 나누어,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다. 그리고 많은 완곡표현이 있다.’ 이런 식이었으니, 무척 어색했었다. 한 가지 사족이지만, 본문에 자주 나오는 good 이라던가 excellent 라던가 하는 말들이 얼핏 그 본성인 덕을 지닌다는 것하고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지 좀 의문스러웠다. 쉽게 말하면, ‘아낌없이 칭찬받아도 좋을어느 성품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그게 만일 나라고 가정하면, 나는 누군가에 의해 그렇게 칭송받게 되는 것 자체가 대단히 부담스러울 것 같고, 그래서 그런 나를 설명하는 수식어들이 좀 지나치게 화려해 보인달까 하는 감상이 들었었다. 덕의 은둔성이나 익명성, 소박함 혹은 내재적인 덕 이런 쪽으로는 어떤 말이 없을까 하는 잡념과 함께. 그런 점에서는 나는 탁월/칭송받을만한 쪽 보다는 본이 되는/따르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하는/울림이 있는, 예를 들자면 그런 말들에 더 끌리는 것 같다.   

 

 

13.    We can make sense of the claim that it is impossible to be too generous or too honest. Someone initially described that way can be redescribed as not (1) quite having the virtue of generosity but a misguided form of it, as not so much honest as candid or outspoken. Instead of saying, without qualification, that someone’s benevolence led them to act wrongly on a particular occasion, we might say, again, that they had, not the virtue, but a misguided form of it, or (depending on the nature of the case) a perverted form of it, or that they were on the right path but did not possess the virtue yet, or possessed it to a very imperfect degree. And we may say that the desperado is daring but does not possess the virtue of courage. (1) 긴 문장이기도 했거니와 대구가 잘 잡히지 않고 표현되지 않아서, (2) 여기서의 and 를 어떻게 받나 다시 좀 불확실해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 .대강의 번역은 되었다 생각하고 다만 나는 이번에서야 quite 란 말에 사실은의 의미가 있는 줄 알게 됐다. 지금까지는 저 말은 무조건 , 상당한, 아주로 알고 있었다. 사전에서 사실은을 확인한 뒤에야 아, 하고 문장의 대구가 잡혔다. 사실 덕 // 알고보니 덕 아님 으로.  

 

 

 

14.    The third thing I import from Aristotle is a pair of interrelated distinctions. Import  때문에 정말 머리를 많이 굴려봤는데 내 수준에서는 옮겨 온 것말고는 도입해 온 것이 다였다. 하지만 도입해 온 것 이라니. 참 어색하다.

 

 

 

(I)                  There is a distinction between acting from reason, which we, typically, do, and what the other animals and small children do when they ‘act’.

(II)                There is a distinction between rational wanting or desire, which we, typically, have and the mere passion or desire that impels the other animals and small children.   

 

는 원래는

 

 

(1)이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 우리가 전형적으로 하는, 과 다른 동물들과 어린아이들이 행동할 때 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2) 합리적인 욕구나 욕망, 우리가 전형적으로 갖게 되는, 과 다른 동물들과 어린 아이들을 휩싸이게 하는 단순한 열정이나 욕구에는 차이가 있다. 로 완전 직역을 했다. 게다가 이는 일종의 명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손대지 말고 넘어가자고 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너무 어색해서 마지막에 고쳤다. Distinction 도 풀어서 차이가 맞다고 생각되지만 구분으로 일단 쓰고 본문에만 차이로 했다. 나는 왔다갔다 하고 좀 결단력있게 말을 잘 못 옮기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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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we think of the virtues in general, or ‘virtue’ tout court, it seems that we think is the Aristotelian way. The concept of a virtue is the concept of something that makes its possessor good; a virtuous person is a morally good, excellent, or admirable person who acts and reacts well, rightly, as she should--she gets things right. These seem obvious truisms. But when we think of particular examples of virtues, we sometimes give these truisms up. We may say of someone that he is too generous or honest ‘to a fault’. It is commonly asserted that someone’s benevolence might lead them to act wrongly, to break a promise they should have kept, for example, in their desire to prevent someone else’s hurt feelings. Or we may think of the ‘virtue’ of courage as something that, is a desperado, enables them to do far more wicked things than they would be able to do if they were timid. So, it would appear, being generous, honest, benevolent, or courageous, despite their being virtues, can also be faults; or they are not always virtues, but sometimes faults. Someone who is generous, honest, benevolent, or courageous might not be morally good, admirable person-or, if it is still a truism that they are, then morally good people may be led or enabled by what makes them morally good to act wrongly! Which all sounds very odd. 

 

일반에 대해, 아니면 간단히 대해 생각할 , 우리의 사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인 같다. 덕의 개념은 그것을 지닌 사람을 훌륭하게 주는 어떤 것에 대한 관념으로, 있는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바르고, 탁월한, 혹은 존경할만한 사람들로서, 그런 사람이기에 그래야 하는 바대로 훌륭하고 올바르게 행동하고 대응한다. -- 사람은 모든 일이 올바로 되게끔 한다. 이것은 마땅한 이치인 같다. 그러나 하나하나의 예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때때로 이런 이치를 저버린다. 우리는 아마도 누군가에 대해, 사람은 흠이라고 할만큼지나치게 너그럽거나 솔직하다고 평을 있을 것이다. 흔히 주장되는 , 관대함은 사람들을 잘못 행동하도록, 예를 들어 남의 기분이 상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지켰어야 했던 약속을 깨버리도록 있다. 혹은 용기의 물불 가리는 무법자로, 그래서 사람들이 겁장이일 있는 것보다 훨씬 나쁜 짓을 있게 하는 것으로 수도 있다. 그래서, 너그럽다, 정직하다, 인정많다, 또는 용감하다는 것은 모두 덕이 되는 것이라 지라도 동시에 결점이 있는 같다. , 반드시 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결점이 된다. 너그럽고, 정직하고, 인정많고, 용감한 사람이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존경할만한 사람은 아닐 있다.--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자명한 이치가 되는 경우,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들이 자신들을 그렇게 되도록 것으로 인해 잘못을 저지를 있게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전적으로 말이 안된다.      

 

 

Odd as it is, it would be futile to insist that it was wrong. As far as my own linguistic intuitions go, the only virtue term we have which is guaranteed to operate as a virtue term-that is, to pick out something that always makes its possessor good-is ‘wisdom’. (Perhaps also ‘just’-I am not certain.) People can be ‘too clever by half’ but not too wise. But all the other candidates seem to accept ‘too’ or ‘what a pity he is so…’. However, we do not have to talk this way, and we have various circumlocutions that enable us to hang on to the truisms that a virtue is a good way to be; that it makes its possessor good and enables her to act well. We can make sense of the claim that it is impossible to be too generous or too honest. Someone initially described that way can be redescribed as not quite having the virtue of generosity but a misguided form of it, as not so much honest as candid or outspoken. Instead of saying, without qualification, that someone’s benevolence led them to act wrongly on a particular occasion, we might say, again, that they had, not the virtue, but a misguided form of it, or (depending on the nature of the case) a perverted form of it, or that they were on the right path but did not possess the virtue yet, or possessed it to a very imperfect degree. And we may say that the desperado is daring but does not possess the virtue of courage.

 

이상하게 생각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나의 언어학적 직관에 따르면, 덕으로서의 영향을 보증할 있는 유일한 덕의 이름은, 다시 말해 언제나 그것을 지닌 사람을 좋게 하는 덕을 고른다면, 그것은 지혜 (아마도  정의. 나는 확신 하지는 못하겠다). 사람들은 지나치게 영리할 있지만 지나치게 지혜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다른 모든 덕의 후보들은지나치게혹은안타깝게도 사람은 너무…’ 라는 말을 허용하는 같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말할 필요없이, 우리는 다른 여러 완곡한 표현들을 써서 덕이란 좋게 사는 길이며, 그것을 가진 사람을 바르게 하고, 처신하도록 준다는 이치를 계속해 있다. 우리는 지나치게 관대하거나 지나치게 정직하다는 것은 있을 없다는 주장의 의미를 이해할 있다. 처음에 그런 식으로 설명되었던 사람을 실제로 관대함의 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덕인 잘못 알았던, 정직하다기 보다는 솔직하거나 말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으로 다시 말할 있다. 특수한 경우에는 사람은 자신의 너그러움 때문에 잘못 행동할 있다고 무조건적으로 말하는 대신,  우리는 다시, 그들에게는 덕이 아니라 그런 알았지만 엉뚱한 , 혹은 (문제의 본질에 따라) 덕의 왜곡된 형태가 있거나, 아니면 맞게 가고는 있지만 아직 덕을 얻지는 못한, 혹은 덕을 지녔되 매우 불완전한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고 말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무법자는 용감하지만 용기의 덕을 가지지 않았다고 말할 있다.  

 

 

The third thing I import from Aristotle is a pair of interrelated distinctions.

 

(I)                 There is a distinction between acting from reason, which we, typically, do, and what the other animals and small children do when they ‘act’.

(II)              There is a distinction between rational wanting or desire, which we, typically, have and the mere passion or desire that impels the other animals and small children.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도입해 번째는 상호연관된 쌍의 구분이다.

 

(I)                  우리가 전형적으로 하는 이성에 따른 행위와, 다른 동물들과 어린아이들이 행동 하는 행위에는 차이가 있다

(II)                우리가 전형적으로 가지게 되는 합리적인 욕구나 욕망과, 다른 동물들과 어린아이들이 휩싸이게 되는 단순한 열정이나 욕구에는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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