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 이름은 빨강 2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소설 속의 '화자'를 어디까지 신뢰해야 하는가? 애거서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은 살인범이 끝까지 독자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뻔뻔스럽게 속이는 소설이다. 이 악한은 객관적이고 선량한 목소리를 가장하여 소설을 읽는 내내 독자들을 혼란시키다가,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뒤통수를 때리고는 낄낄거리며 즐거워한다.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자] 속 화자 역시 사건의 진상을 결코 온전한 형태로 독자에게 보여주는 일이 없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실제 벌어진 일과 전혀 딴판인 설명을 독자에게 진실인양 공개하기도 한다. 비단 추리소설만 그런 것은 아니다. 거의 모든 소설 작품에서, 화자는 자신의 이념을 선전(도스또예프스끼의 [악령]을 생각해보라)하고 자신의 처지를 변명하며 정당화(미스터 리플리는 이 방면에서도 천재적이다)해서 독자에게 납득시키기에 여념이 없다. 편협한 화자는 작중 특정 인물에 치우친 애착을 표하거나 찬양하기도(토마스 만의 [트리스탄]을 읽어보라) 하고, 다른 문화를 저급한 것으로 비하하는가 하면(셜록 홈즈 소설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고결한 인물을 비열한으로, 천박한 악녀를 영광된 성녀로 묘사하기 일쑤다. 때문에 우리는 소설 속의 화자라는 존재에 대해 한번쯤 심각하게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 그는 얼만큼 정치적으로 공정한 사람일까. 그는 자신의 윤리관이나 미학관, 취향을 우리에게 수긍하도록 강요하고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화자가 사건에 대해 갖고 있는 기억은 과연 얼마만큼 정확한 것일까. 그가 이야기하는 내용은 세월에 의해 흐려지고, 왜곡되고, 부풀려진 것이 아닐까.
터키 출신 작가 오르한 파묵의 장편소설 [내 이름은 빨강]이 흥미롭다면, 이는 분명 이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등장 인물들의 인간적 결함 때문일 것이다. [빨강]은 주인공 카라와 셰큐레를 비롯해서 십 수명의 인물들이 교대로 화자 역할을 맡아 자신을 변호하는 소설이다. 인물들은 마치 동네야구에서 서로 공을 던져보겠다고 싸우는 애들처럼 각 장마다 번갈아가며 이야기꾼으로 나선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 자신은 결백하고, 자신의 미학적 관점은 알라가 보시기에 올바른 것이며, 자신의 외모는 멋지고, 다른 사람은 멍청이거나 악당이거나 신성 모독자임에 틀림없다고 고자질한다. 등장인물들 간에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코란의 신성성과 셰큐레의 미모 뿐일 정도로, 화자들은 서로 다른 주장과 진술과 기억으로 독자에게 수십가지 서로 다른 사실을 제시한다. 심지어 주인공인 카라조차도 자신의 증언에서와는 달리, 세밀화가들의 묘사에서는 바보 멍청이에 무능력한 인간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러한 구성은 기존의 소설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텍스트 읽기를 독자에게 체험하게 한다. [빨강]에서는 수많은 주관적 진술들이 한데 모여 커다란 객관적 사실을 드러낸다. 독자는 [빨강]의 인물들을 결코 신뢰하지 않고 그들이 하는 얘기가 전부 사실은 아니라는 점도 알고 있지만(심지어 세 명 중 하나는 살인자라는 사실까지도), 그럼에도 이 모든 진술들은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어 '하나의 화자에 의한 단일한 설명'보다도 더 큰 사실성과 설득력을 얻게 된다. 독자는 기존 소설에서 작가의 의도에 일방적으로 끌려가던 처지에서 벗어나, 같은 이야기를 그린 세밀화의 여러 판본들 가운데서 한 점을 선택하는 화원장처럼 진상이 무엇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또한 본래 화자들은 저마다의 세계와 이데올로기를 갖고 독자를 자신에게 맞춰 코드화시키려 안간힘을 쓰는 존재이다. 화자의 숫자가 늘어나는 만큼 독자는 [빨강] 속에서 각각의 화자들이 시도하는 여러 종류의 개별 코드화에 대응해야 하고, 꼭 화자의 숫자 만큼의 서로 다른 '백과사전'을 펼쳐 보아야 하며, 화자가 말하는 이야기가 지닌 개연성을 추론하는 작업 역시도 훨씬 복잡해지고 까다로워진다. 텍스트에 대한 독자의 협력 작업이 기존의 소설에서보다 매우 주도적이고 능동적인 지위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빨강]은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낯설게 하기'의 기법에 있어서도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둬내고 있다. [빨강]은 기본적으로 이슬람권 소설이며, 비이슬람권 독자에게는 낯설게만 느껴질 16세기 이스탄불의 채색 세밀화를 둘러싼 미학적-종교적 논쟁을 다루고 있다. 중요한 것은, 오르한 파묵이 강력한 박진법을 구사하며 이 화려하고 신비스런 세밀화의 아름다움을 '눈에 보이는 듯이'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인리히 라우스베르크의 수사학 이론에 따르자면, 박진법은 독자가 '재현된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제시하는 것'이자 '직접 보여주는 것처럼 말하는 것'에 해당한다. [빨강] 전체를 수놓고 있는 세밀화에 대한 묘사, 셰큐레의 아름다움, 이스탄불 겨울의 풍광 등은 그야말로 눈에 보이는 듯 선명하고 독자의 상상을 유도해내는 면에서 박진법의 한 경지를 일궈내고 있다. 오르한 파묵의 묘사는 알랭 로브그리예보다 신비롭고, 나보코프보다 사실적이며, 기계 장치를 묘사하는 카프카의 꼼꼼함만큼이나 정성스럽다. 이처럼 독자가 '잘 알지 못하는' 대상을 '잘 아는 것처럼' 묘사하는 방식을 통해 [빨강]은 텍스트의 의미 생성과 문체에 있어 두루 성공을 거두고 있다.
무엇보다도 나는 [빨강]이 이슬람권 작가에 의해 쓰여진 작품으로, 이슬람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플로베르나 네르발같은 대문호도 피해갈 수 없었던) '오리엔탈리즘'에서 자유로운 작품임을 지적하고 싶다. 소설 속에서 이슬람 전통을 고수하려는 자들과 유럽 르네상스의 성과물을 도입하려는 자들은 모두 공평한 발언 기회를 얻어 자신들의 미학관과 종교관을 피력한다. 이렇게 다양한 인물들의 이견을 두루 소개하면서도, [빨강]에는 '다양성의 존중'이라는 하나의 동위 주제가 관통하고 있다. 파묵은 이슬람권 작가임에도 이슬람적 가치에 함몰되어 서구의 문물을 배척하는 것을 경계하며, 한편으로는 고유의 정신적 유산이 사라지고 빛을 잃어가는 현실에 대해서도 안타까워한다. 파묵의 소설은 이슬람권 사람들의 정신으로, 이슬람의 사고 방식으로 이야기하면서도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열린 입장을 놓치지 않는다. 그렇게, 여러 화가가 힘을 합쳐 완성해낸 하나의 채색 세밀화처럼, [내 이름은 빨강]은 다양성 속에 존재하는 소중한 가치를 이야기한다. 세밀화 '유수프의 유혹'이 지닌 화려한 색채만큼 놀랍도록 아름다운 문체와, 비범한 세밀화가의 실험적 그림처럼 독자의 지위에 대한 색다른 실험을 시도한다. 기존의 소설들이 사실상 독자를 가르치고 속이고 농락하는 텍스트 전략에 기대고 있음을 생각할 때, [내 이름은 빨강]이란 소설을 읽는 것은 독자에게 있어서는 차라리 하나의 감동적인 특권에 가깝다. [내 이름은 빨강]은 전쟁에 불타버리고 세월에 좀슬어버린 옛 세밀화의 운명과 달리, 오래도록 보존되고 읽혀야 할 현대의 고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