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라는 노희경의 시처럼 나는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라고 생각한다. 노희경의 시처럼 나는 한때 나 자신에 대해 지독한 보호본능에 시달렸다. 타인에게서 상처받지 않으려 노력했고 심지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더라고 나의 보호본능은 내게 견고한 방어막을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어느덧 지독히 고독에 빠져 있었고 그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 쳤을때는 이미 나는 스스로조차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현재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스스로 사랑할수 있어야만 누군가를 사랑할수도 있고, 그런 나의 모습을 누군가가 사랑해줄 수도 있다라고...
독일 영화 <파니핑크>는 이런 나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여주인공 파니는 30살의 문턱에 막 들어서는 독일의 career woman이다. 파니의 일상은 매우 무료하다. 그래서 물건을 팔 듯이 결혼정보회사에서 자신을 홍보하는 비디오를 찍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물건 팔 듯이 나를 팔기는 싫다." 그리고, "30살 넘은 여자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히로시마가 원자 폭탄을 피하는 것보다 더 힘들다."라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타인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같다."라고 말한다.
그렇다.
과연 인생을 살면서 나는 나에게 얼마만큼의 사랑을 가지고 스스로를 존중하면서 대하고 있는가? 영화 <파니핑크> 와 <뮤리엘의 웨딩>에서는 사랑 받지 못하는 주인공들이 남성에게 사랑 받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사랑하고 존중해야만 타인도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사랑하고 싶다고 항상 말하고 멋진 사랑을 꿈꾸지만 한번도 그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걸지도 못 했고 누군가를 미치도록 그리워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신애가 없었다. 그들은 자신을 형편없는 존재로 인식했고 스스로를 사랑 받지 못할 존재로 옭아맸다.
그러나 파니는 오르페오라는 조력자를 만나서 진정한 자기애를 가지게 되었고 사랑은 인위적으로 몸부림친다고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오르페오는 파니에게 사랑은 원래 내 주변에 있었지만 내가 받아들일 노력이 없었기 때문에 찾아오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항상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가질 것을 그녀에게 상징적으로 가르쳐 준다. 그는 잔에 반쯤 채워진 샴페인을 보며 파니 에게 묻는다.
"파니, 잔이 반쯤 비었니, 반쯤 차있니?" 파니 는 말한다. "반쯤 비었잖아?"
그러자 오르페오는 "그것봐 , 너는 그게 문제야. 긍정적 사고를 가져. 같은 잔을 보고서 반쯤 차있다고 생각은 왜 하지 않지?"
그리고 그녀는 오르페오와 함께 생활하면서 죽어 가는 그를 보면서 항상 죽으면 모든 것이 그만 이라는 식으로 죽음을 동경하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를 감사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는 삶은 숭고하고 그 삶속에서 사랑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삶을 기름지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호주영화 <뮤리엘의 웨딩>에서 주인공 뮤리엘은 뚱뚱하고 못생긴 왕따이다. 그녀는 심지어 가족에게서도 사랑 받지 못하고 골칫거리로 인식되는 존재이다. 그녀는 자신을 그런 식으로 모두들 인정하는 고향 폴포이스핏을 떠나 시드니로 떠나서 거기서 새로운 자신으로 태어나려고 한다. 가장 첫 번째로 이름을 마리엘로 바꾼다. 그리고 자신은 새로워졌다고 느끼고 자신을 무시했던 사람들에게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잘생긴 남자와 만나서 멋드러진 결혼식을 해서 그들에게 복수해주고 싶은 게 진정한 그녀의 심정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호주 시민권이 필요한 수영선수와 계약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꿈꿔왔던 결혼식을 자신을 무시했던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치른다.
이 모습을 본 그녀의 진정한 친구 론다는 그런 그녀에게서 떠나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얼마후 어머니의 자살소식을 접하고 다시 고향 폴포이스핏을 찾으면서 그녀는 진정한 자기애는 이름만 바꾼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녀의 현재의 모습은 진정한 사랑이 아닌 가식된 모습이 이루어낸 사상누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에게 헤어질 것을 요구하고 그녀는 그에게 말한다. 나는 나자신을 소중하고 가치있는 존재로 여기지 않았고 또한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그리고 그녀의 유일하지만 진정한 친구 론다에게 찾아가서 함께 시드니로 떠나자고 말한다.
그들을 왕따 시켰던 친구들에게 시원하게 그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상기시켜주고 그들은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아, 그리고 스스로를 사랑하고, 자신의 사랑을 찾아 시드니로 향한다. 그리고 통쾌하게 시드니로 가는 택시 안에서 자신들의 못났던 지난 과거와 자신을 부정했던 옛모습들에게 작별을 고한다. "Good bye " 라고...
나는 이 두 영화에서 어떠한 모습의 사랑을 꿈꾸던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이는 타인에게서 진정으로 사랑 받을 수도 없고, 타인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나에 대한 사랑-그것은 보호본능과는 틀리다-으로 충만했을 때 맨 앞에서 언급했던 <사랑하지 않는자, 모두 유죄>라는 노희경의 시처럼 사랑에 열정적으로 빠져들고, 그 사람을 미치도록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득한 사랑을 주어 그 사람과 함께 공유하는 행복한 삶이 이루어진다라고 생각한다.
로맹 롤라의 <맹혹된 영혼>중에서
나는 너를 받아 들인다. 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너의 결함, 너의 심술, 너의 삶의 법칙을 받아 들인다. 너는 너다. 너이기 때문에 나는 너를 사랑한다.
라는 말처럼 그 사람의 장점뿐만이 아니라 그 사람과 나의 모든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여유와 삶을 충만하고 고귀하고 열정적이며 함께 가꾸어 갈수 있는 그런 사랑을 나는 꿈꾼다.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노희경
나는 한때 나 자신에 대한 지독한 보호본능에 시달렸다.
사랑을 할 땐 더더욱이 그랬다.
사랑을 하면서도 나 자신이 빠져나갈 틈을 여지없이 만들었던 것이다.
가령, 죽도록 사랑한다거나, 영원히 사랑한다거나,
미치도록 그립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게 사랑은 쉽게 변질되는 방부제를 넣지 않은 빵과 같고,
계절처럼 반드시 퇴색하며, 늙은 노인의 하루처럼 지루했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지 말자.
내가 한 말에 대한 책임 때문에 올가미를 쓸 수도 있다.
가볍게 하자, 가볍게.
"보고는 싶지"라고 말하고,
"지금은 사랑해"라고 말하고,
"변할 수도 있다"고 끊임없이 상대와 내게 주입시키자.
그래서 헤어질 땐 울고불고 말고 깔끔하게, 안녕.
나는 그게 옳은 줄 알았다.
그것이 상처받지 않고 상처 주지 않는 일이라고 진정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드는 생각.
너, 그리 살어 정말 행복 하느냐?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죽도록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만큼만 사랑했고,
영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당장 끝이 났다.
내가 미치도록 그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미치게 보고싶어 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랑은 내가 먼저 다 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버리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는 물잔과 같았다.
내가 아는 한 여자, 그 여잔 매번 사랑할 때마다 목숨을 걸었다.
처음엔 자신의 시간을 온통 그에게 내어주고,
그 다음엔 웃음을, 미래를, 몸을, 정신을 주었다.
나는 무모하다 생각했다.
그녀가 그렇게 모든 걸 내어주고 어찌 버틸까, 염려스러웠다.
그런데, 그렇게 저를 다 주고도 그녀는 쓰러지지 않고,
오늘도 해맑게 웃으며 연애를 한다.
나보다 충만하게 그리고 내게 하는 말,
나를 버리니, 그가 오더라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사랑을 얻었는데,
나는 나를 지키느라 나이만 먹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다.
자신에게 사랑 받을 대상 하나를 유기 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속죄하는 기분으로 이번 겨울도 난 감옥 같은 방에 갇혀,
반성문 같은 글이나 쓰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