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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민규동 감독, 황정민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6년 1월
품절


초라한 옷차림이 부끄러운것이 아니라 초라한 생각이 부끄러운거야.-선애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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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라는 노희경의 시처럼 나는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라고 생각한다. 노희경의 시처럼 나는 한때 나 자신에 대해 지독한 보호본능에 시달렸다. 타인에게서 상처받지 않으려 노력했고 심지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더라고 나의 보호본능은 내게 견고한 방어막을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어느덧 지독히 고독에 빠져 있었고 그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 쳤을때는 이미 나는 스스로조차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현재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스스로 사랑할수 있어야만 누군가를 사랑할수도 있고, 그런 나의 모습을 누군가가 사랑해줄 수도 있다라고...

 

독일 영화 <파니핑크>는 이런 나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여주인공 파니는 30살의 문턱에 막 들어서는 독일의 career woman이다. 파니의 일상은 매우 무료하다. 그래서 물건을 팔 듯이 결혼정보회사에서 자신을 홍보하는 비디오를 찍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물건 팔 듯이 나를 팔기는 싫다." 그리고, "30살 넘은 여자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히로시마가 원자 폭탄을 피하는 것보다 더 힘들다."라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타인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같다."라고 말한다.

 

그렇다.
과연 인생을 살면서 나는 나에게 얼마만큼의 사랑을 가지고 스스로를 존중하면서 대하고 있는가? 영화 <파니핑크> 와 <뮤리엘의 웨딩>에서는 사랑 받지 못하는 주인공들이 남성에게 사랑 받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사랑하고 존중해야만 타인도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사랑하고 싶다고 항상 말하고 멋진 사랑을 꿈꾸지만 한번도 그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걸지도 못 했고 누군가를 미치도록 그리워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신애가 없었다. 그들은 자신을 형편없는 존재로 인식했고 스스로를 사랑 받지 못할 존재로 옭아맸다.

 

그러나 파니는 오르페오라는 조력자를 만나서 진정한 자기애를 가지게 되었고 사랑은 인위적으로 몸부림친다고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오르페오는 파니에게 사랑은 원래 내 주변에 있었지만 내가 받아들일 노력이 없었기 때문에 찾아오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항상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가질 것을 그녀에게 상징적으로 가르쳐 준다. 그는 잔에 반쯤 채워진 샴페인을 보며 파니 에게 묻는다.

 


"파니, 잔이 반쯤 비었니, 반쯤 차있니?" 파니 는 말한다. "반쯤 비었잖아?"

 

그러자 오르페오는 "그것봐 , 너는 그게 문제야. 긍정적 사고를 가져. 같은 잔을 보고서 반쯤 차있다고 생각은 왜 하지 않지?"

 

그리고 그녀는 오르페오와 함께 생활하면서 죽어 가는 그를 보면서 항상 죽으면 모든 것이 그만 이라는 식으로 죽음을 동경하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를 감사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는 삶은 숭고하고 그 삶속에서 사랑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삶을 기름지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호주영화 <뮤리엘의 웨딩>에서 주인공 뮤리엘은 뚱뚱하고 못생긴 왕따이다. 그녀는 심지어 가족에게서도 사랑 받지 못하고 골칫거리로 인식되는 존재이다. 그녀는 자신을 그런 식으로 모두들 인정하는 고향 폴포이스핏을 떠나 시드니로 떠나서 거기서 새로운 자신으로 태어나려고 한다. 가장 첫 번째로 이름을 마리엘로 바꾼다. 그리고 자신은 새로워졌다고 느끼고 자신을 무시했던 사람들에게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잘생긴 남자와 만나서 멋드러진 결혼식을 해서 그들에게 복수해주고 싶은 게 진정한 그녀의 심정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호주 시민권이 필요한 수영선수와 계약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꿈꿔왔던 결혼식을 자신을 무시했던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치른다.

 


이 모습을 본 그녀의 진정한 친구 론다는 그런 그녀에게서 떠나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얼마후 어머니의 자살소식을 접하고 다시 고향 폴포이스핏을 찾으면서 그녀는 진정한 자기애는 이름만 바꾼다고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녀의 현재의 모습은 진정한 사랑이 아닌 가식된 모습이 이루어낸 사상누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에게 헤어질 것을 요구하고 그녀는 그에게 말한다. 나는 나자신을 소중하고 가치있는 존재로 여기지 않았고 또한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그리고 그녀의 유일하지만 진정한 친구 론다에게 찾아가서 함께 시드니로 떠나자고 말한다.

 


그들을 왕따 시켰던 친구들에게 시원하게 그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상기시켜주고 그들은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찾아, 그리고 스스로를 사랑하고, 자신의 사랑을 찾아 시드니로 향한다. 그리고 통쾌하게 시드니로 가는 택시 안에서 자신들의 못났던 지난 과거와 자신을 부정했던 옛모습들에게 작별을 고한다. "Good bye " 라고...

 

나는 이 두 영화에서 어떠한 모습의 사랑을 꿈꾸던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이는 타인에게서 진정으로 사랑 받을 수도 없고, 타인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나에 대한 사랑-그것은 보호본능과는 틀리다-으로 충만했을 때 맨 앞에서 언급했던 <사랑하지 않는자, 모두 유죄>라는 노희경의 시처럼 사랑에 열정적으로 빠져들고, 그 사람을 미치도록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득한 사랑을 주어 그 사람과 함께 공유하는 행복한 삶이 이루어진다라고 생각한다.

로맹 롤라의 <맹혹된 영혼>중에서

 

나는 너를 받아 들인다. 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너의 결함, 너의 심술, 너의 삶의 법칙을 받아 들인다. 너는 너다. 너이기 때문에 나는 너를 사랑한다.

 

라는 말처럼 그 사람의 장점뿐만이 아니라 그 사람과 나의 모든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여유와 삶을 충만하고 고귀하고 열정적이며 함께 가꾸어 갈수 있는 그런 사랑을 나는 꿈꾼다.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노희경

 

나는 한때 나 자신에 대한 지독한 보호본능에 시달렸다.

사랑을 할 땐 더더욱이 그랬다.

사랑을 하면서도 나 자신이 빠져나갈 틈을 여지없이 만들었던 것이다.

가령, 죽도록 사랑한다거나, 영원히 사랑한다거나,

미치도록 그립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게 사랑은 쉽게 변질되는 방부제를 넣지 않은 빵과 같고,

계절처럼 반드시 퇴색하며, 늙은 노인의 하루처럼 지루했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지 말자.

내가 한 말에 대한 책임 때문에 올가미를 쓸 수도 있다.

 

가볍게 하자, 가볍게.

"보고는 싶지"라고 말하고,

"지금은 사랑해"라고 말하고,

"변할 수도 있다"고 끊임없이 상대와 내게 주입시키자.

그래서 헤어질 땐 울고불고 말고 깔끔하게, 안녕.

나는 그게 옳은 줄 알았다.

그것이 상처받지 않고 상처 주지 않는 일이라고 진정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드는 생각.

너, 그리 살어 정말 행복 하느냐?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죽도록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만큼만 사랑했고,

영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당장 끝이 났다.

내가 미치도록 그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미치게 보고싶어 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랑은 내가 먼저 다 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버리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는 물잔과 같았다.

 

내가 아는 한 여자, 그 여잔 매번 사랑할 때마다 목숨을 걸었다.

처음엔 자신의 시간을 온통 그에게 내어주고,

그 다음엔 웃음을, 미래를, 몸을, 정신을 주었다.

나는 무모하다 생각했다.

그녀가 그렇게 모든 걸 내어주고 어찌 버틸까, 염려스러웠다.

그런데, 그렇게 저를 다 주고도 그녀는 쓰러지지 않고,

오늘도 해맑게 웃으며 연애를 한다.

나보다 충만하게 그리고 내게 하는 말,

나를 버리니, 그가 오더라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사랑을 얻었는데,

나는 나를 지키느라 나이만 먹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다.

자신에게 사랑 받을 대상 하나를 유기 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속죄하는 기분으로 이번 겨울도 난 감옥 같은 방에 갇혀,

반성문 같은 글이나 쓰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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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게 말걸기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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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님의 끊임없는 글쓰기 에너지 원천은 어디서 나오는걸까! 그녀의 글을 읽다보면 다양한 시점, 다양한 문체, 다양한 소재, 다양한 방식에 놀라곤 한다. 한권의 소설집을 읽으면 은희경이라는 작가 한 사람의 작품을 읽는것 같지가 않고 많은 사람들의 글을 읽은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작가를 꿈꾸는 사람은 아니지만 내 글쓰기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라도 은희경님의 작품은 꼭 필사를 해보고 싶다.

타인에게 말걸기를 읽는데 자꾸 언젠가 읽은것 같다라는 생각이 오버랩된다. 그것도 처음부터 생각나는것이 아니라 단편의 4/5 정도를 읽은 지점에서 생각이 난다. 그러니까 거기까지 읽으면 결론이 막 떠오르는거다. 아무래도 결혼전에 읽었었나보다. 대체 내 머리의 기억장치는 언제쯤 제대로 발동을 해줄것인지 원..

타인에게 말걸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두번째 작품 [특별하고 위대한 연인] 과 소설집의 제목과 동일한 [타인에게 말걸기] 이다. 특별.... 을 읽으면서는 바보들! 이라며 피식 웃음이 나왔고 타인에게..를 읽으면서는 남자의 태도에 답답함을 느꼈다. 두 경우 모두 타인에게 말걸기에 실패한 경우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전자의 경우는 말걸기 전에 너무 오래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다가 실패를 한 경우이고 후자는 너무 자신의 입장에서만 타인에게 말걸다가 실패한 경우를 보여준다. 타인에게 말걸기는 소통에 관한 이야기이다. 혼자사 살기, 혼자서 말하기가 아닌 타인과 함께 하는것에 대한 이야기하는것이다. 요즘 소설들을 보면 혼자서도 잘해요! 식의 소설을 많이 볼수있다. 특히 조경란 씨의 소설을 보면 사방이 꽉! 막힌 독방에 갖혀있는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그마저도 소통의 단절에서 오는 해결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타인에서 말걸기에서는 독방은 아니지만 뭐랄까..군중속의 고독이랄까!  함께 있는데 혼자다. 마음을 열고 싶지도 않고 말을 잘 건네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주위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둘러쌓여져 있다. 그리고 원하지 않은 이야기를 들어야하고 관계를 맺어가야한다. 너무나 일방적으로..

타인에게 멀걸기에 나오는 여자는 정말 기가막힐 정도이다. 그런데 그렇게 한없이 지껄여대고 요구하는 여자보다 남자가 더 기가막히다. 관계하고 싶지 않고 튀고 싶지 않고 그냥 묻혀지내고 싶은 마음에 거절이라는걸 하지 못한다. 그냥 냉소적인 분위기만 풍길뿐이지 하는 행동은 하나도 냉정하지가 않다. 뭔가.. 그도 혹 혼자는 외로운건가? 그렇게 누구와도 관련되고 싶지 않으면서도 혼자만 있는건 두려운건가.

 타인에게 말걸기 속의 인물들은 참으로 다양하다. 가족, 연인, 직장동료, 전혀모르는 남 등등.... 그들은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그것을 유지하려 살지만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다들 혼자이다. 이제 혼자인 이들의 극복기를 좀 적어주어 타인에게 어떻게 말을 걸껀지 그 해답을 좀 주면 좋겠는데 그건 우리의 몫이다. 너무 타인을 의식해서 할말을 하지 못해도 안되고 너무 의식을 안해서 타인을 질리게 해서도 안되고, 너무 관심가져도 안되고 너무 무관심해서도 안된다. 아..디럽게 어렵다. 그래 인생이란 그런거지 디럽게 어려운거지...

난 은희경이 좋다. 참 질리게도 안하고 답답하지도 않고 적당히 트렌드를 따라가고 또 자신만의 그 무언가를 잃지도 않은....그래서 난 은희경이 좋다. 내 기억장치의 고장으로 읽은 걸 또 읽어야하는 짓을 앞으로도 또 몇천번을 거듭할지라도 은희경 소설이라면 괜찮다. 읽고 또 읽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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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호] Farnsworth House _ 거들떠 보다. #2 (06.01.17 11:13)


 

Farnsworth House ( Mies van der Rohe, 1946 ~ 1950 )

 

Farnsworth House의 공간은 여느 주택들의 공간(방들로 이루어진)과 크게 다르다.

60평이 넘는 규모임에도 설비시설의 코어를 제외하면 전체의 공간이 하나로 통합되어있다. 미스는 어떤 생각으로 이런 주택을 계획한 것인지... 이 주택은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지... 이제부터 Farnsworth House의 독특한 공간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

 


 그는 Farnsworh House를 계획함에 있어 공간행위에 대해 주목하였고, 각각 행위에 대한 방(침실, 거실, 식당 등)이 있고 그러한 방들을 공간속에 배치하던 기존의 정형화 된 설계방법 속에서 ''의 불필요함을  깨닫는다. 

 수 많은 행위들이 공간 속에서 일어나고, 공간은 그러한 행위들을 수반하게 되는데, 이러한 양자간의 관계속에 '방'의 존재는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행위들과 공간의 흐름에 방해가 될 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의 아무것도 없는(Almost Nothing)'상태가 가장 이상적이며, 아무것도 규정해 놓지 않은 이 빈 공간은 어떠한 행위도 수반할 수 있는 절대적인 공간이 되고 미스는 이를 'Univercial Space'라 불렀다.

 방을 없애고 행위와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가구를 용도에 맞게 배치함으로써 공간의 쓰임에 관하여 규정짓지 않고 공간에 융통성을 부여할 수 있다. 가구들은 사용자의 의도와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자리를 옮길 수 있기 때문에 미스의 Univercial Space에서는 어떠한 행위들도 수용 될 수 있는 것이다.

 

 Univercial Space 속에서 적절한 가구의 배치만으로도 주거내에서의 행위들에 대한 요구를 충분히 충족시켜준다. 동쪽에 침대를 놓아주고 옷장으로 살짝 가려주어 침실의 분위기를 만들고 있으며, 식탁 주변은 식당으로, 책상 주변은 서재로, 벽난로 옆쪽의 쇼파는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자 때로는 손님을 위한 응접실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해결해 주고 있다. 벽으로 둘러싸인 방의 형태가 아니고서도 얼마든지 주거 프로그램을 해결 해 나갈 수 있음을 보여주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가구의 배치를 달리 할 수 있다는 것과, 공간이 때에 따라 얼마든지 그 쓰임을 달리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는 필요 이상의 가구 역시 자유로운 공간의 사용을 제한한다 믿었으며 가구를 배치함에 있어서도 '신중하게 선택된 소수의 가구'만을 배치하였다. 위 사진들은 현재 Farnsworth House에 배치되어있는 가구들인데, 과거의 사진에 의자와 작은 테이블 등은 보이지 않음을 미루어 보아 최초의 가구들에 Mies가 설계한 가구들이 추가적으로 배치되었다고 보여진다.

 

 벽난로와 화장실, 주택의 설비부분(배선,배수 등)은 밀폐된 공간을 필요로 하였고, 미스는 이들을 통합된 하나의 공간 가운데 코어로 배치함으로써 사방의 유리면을 확보할 수 있었다. 건물의 높이에 비해 코어의 높이를 낮추고 코어 윗부분의 공간은 트여줌으로써 전체가 하나의 공간임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Mies가 Farnsworth House를 통해 보여준 Univercial Space는 정말 흥미로운 개념이다. 하지만 Farnsworth House는 오직 한명을 위해 계획되어 졌기에 가족의 형태(두세명 이상으로 구성되는)로 이루어진 일반의 주거에 Univercial Space의 개념을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Univercial Space가 보다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개념으로 활용되기 위해서는 각기 다른 구성원들의 행위가 중첩될 때의 상황과, 행위들의 공과 사에 관한 부분들이 신중히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 : http://paper.cyworld.com/Zin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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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호] Farnsworth House _ 거들떠 보다. #1 (05.12.29 13:14)  
 
 
Farnsworth House   ( Mies van der Roe , 1946~1950 )
 
 
Barcelona Pavilion과 더불어 미스의 또 다른 대표작이 바로 이 Farnswoth House이다.
 
Fansworth House는1950년 시카고 교외 폭스천 부근 나무숲 속에 독신의사 Edith Farnsworth를 위한 주말주택으로 세워졌다.

 

미스는 이 주택을 통해 그가 말해온 "Less is More"이란 문구를 건축적으로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Fansworth House 그 어디에서도 기능이 없는 장식적인 요소를 찾아 볼 수 없으며, 구조를 위한 부재들 또한 솔직하게 드러나있다.

 

Fansworth House는 77피트x29피트(23.5m x 8.8m)의 넓이에 9피트 6인치(2.9m)높이로 크지 않은 규모이고 그 구조와 형태 또한 매우 간결하다. 하지만 이 주택이 나오기 까지는 구상에 3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였고, 건설에도 2년이라는 기간이 걸렸다고 한다.

 

Fox River 주변 숲속에 위치한 Fansworth House


계절마다 자연의 다양한 색채에 Fansworth House의 흰색이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건물의 외벽은 전부 유리로 처리되었고, 이로 인하여 거주자로 하여금 주거 안에서도 숲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Fansworth House는 장마가 졌을때 Fox River의 최대 수위를 고려하여 대지면에서 1.2m가량 들어올려진 형태로 계획되었다. 홍수를 감안하여 건물 전체를 들어올림으로써 내부의 시야와 디자인의 아름다움에서 보다 나은 효과를 얻게 되었다.

존셰퍼(John Sheaffer)는 그의 저서 "홍수에 견디기 위한 원리와 방법의 개론서" (Instroduction to flood proofing, an out line of principles and methods)에서 판스워드 주택이 폭스강이 범람한 홍수의 피해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택의 바닥면을 높게 설정하였는데 그 구상은 후에 디자인에 성공을 가져다 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늘 완벽에 가까운 시공수준으로 인해 급격히 늘어나게 된 공사비와, 강철과 유리로 처리되어 여름에는 너무 덥고 겨울에는 너무 추워서 살 수 없다는 문제로 건축주 Edith Farnsworth는 미스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기도 했다.

 

당시 미스 밑에서 열심히 배우고 있던 필립 존슨(Philip Jhonson)은 구상에 3년 건설에 2년을 필요로 한 이 집의 모습에 완전히 매료되었고, 후에 뉴카낭의 자신의 부지에 Glass House을 설계할 때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Farnsworthhouse는 공식 웹사이트(Farnsworthhouse.org)를 통하여 예약관람을 할 수 있다.
 
 
자료출처
o  서양건축사 Winand Klassen 대우출판사
o  Google.com & naver.com 검색

 

출처 사이트 : http://paper.cyworld.com/Zin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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