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거나 미치거나 - 권지예 그림소설
권지예 지음 / 시공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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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보는 것’만으로는 완전한 감상을 하기가 어렵다. 클림트의 ‘다나에’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로마신화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며 샤갈의 ‘생일’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샤갈의 인간적 삶을 알아야만 하는 것처럼 그림에 담긴 이야기와 그림을 창조한 작가의 사연까지 알아야만 완전한 감상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때로는 그림을 본다고 하는 것을 그림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말하는 것일 게다.

최근 미술관련 서적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 책들의 공통점은 그림의 이야기 듣는 법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종류의 책들은 하나의 공부를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최근에 등장한 책들 사이에서 유독 시선을 사로잡는 책 한권이 눈에 띈다. 바로 이상문학상 수상작가 권지예가 썼다는 <사랑하거나 미치거나>가 그것이다.

<사랑하거나 미치거나>의 속에는 이름만으로도 황홀한 상상과 두근거리는 설렘을 일으키는 대가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피카소, 고흐, 모딜리아니, 샤갈, 칼로 등 미술의 역사에서 굵직굵직한 족적을 남긴 그들이 보이는 것이다. 이쯤 되면 <사랑하거나 미치거나>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림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권지예가 또 하나의 공부용 미술책을 낸 것이라고.

그것을 추측하는 순간 우려감이 생기리라. 유명해진 작가들이 종종 독자들을 실망케 했던, 작가의 유명세로 만든 책이 아닌가 하는 우려 말이다. 하지만 <사랑하거나 미치거나>는 다르다. 여기에서 소설가 권지예는 소설가다운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저 지식을 나열하는 수준이 아니라, 소설가답게 그림 속에 담겨진 이야기를 포착하고 그녀만의 개성으로 재구성해놓은 것이다. 처음으로 만날 수 있는 고흐의 세계만 보더라도 그것을 알 수 있다.

권지예는 고흐의 이야기를 모았다. 고흐의 동생 테오나 깊은 우정만큼이나 크게 싸웠다는 고갱, 고흐를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 등과의 이야기를 모아 고흐가 걸어간 길을 복원했다. 권지예의 손에서 다시 이야기되는 고흐의 삶은 약 20페이지에 걸쳐 불안했던 나날과 자살을 시도하는 과정 등이 그려지는데 작가의 필력 덕분에 적은 분량에도 그 당시의 생생함을 충분히 맛볼 수 있다. 때문에 인터넷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백과사전 식에서 얻을 수 있는 그런 것들과는 수준이 다르다. 또한 감정이 들어있으되 적당히 조절되어 있으며, 상상을 하되 일정량을 넘어가지 않았다. 덕분에 고흐와의 만남은 산뜻하면서도 절실하게 이루어진다.

고흐에서 알 수 있듯이 권지예는 이야기에서 이야기를 꾸며내고, 그것으로 화가를 알려주는 방식을 취했다. 낯선 방식이다. 특히 피카소를 만나는 자리에서 그 낯설음은 커질 수밖에 없다. 권지예는 피카소를 이야기하는 자리를 도발적인 기운으로 채웠다. 피카소가 사랑했던 일곱 여인들을 한 자리에 모아 피카소를 논하는 것이다. 이른바 ‘러버들의 수다’이다.

일곱 여인들은 피카소가 자신과 만날 당시에 그린 그림을 말하며 자신이 피카소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첫 번째 정실부인 올가는 피카소가 큐비즘을 창시하게 된 데는 자신과 떠난 바캉스에서의 경험이 한몫했다며 자신의 공을 내세운다. 그러자 피카소의 첫 사랑을 자처하는 페르낭드는 피카소가 장밋빛시대를 연 데는 자신에게 공이 있다며 ‘아비뇽의 처녀들’을 보라고 소리친다. 피카소를 논하는 여자들의 수다는 밤샐 줄을 모르고 계속되는데 그 수다는 자연스럽게 피카소라는 인물과 그의 그림세상을 알려주고 있다.

이와 같이 권지예는 <사랑하거나 미치거나>에서 화가들을 이야기하는 방식을 다채롭게 시도했다. 샤갈처럼 본인의 입을 빌리는 경우도 있는가 하면 모딜리아니처럼 그를 따라 죽는 아내의 입으로, 클림트처럼 ‘다나에’의 모델의 입으로, 발튀스처럼 동거녀의 딸의 입을 빌리는 등 다양한 이야기 구성으로 흥미로운 이야기에 더욱 흥미로움을 가중시켰다. 더욱이 그 안에서 사명감과 같은, 본래 해야 할 이야기들을 놓치지 않고 있으니 <사랑하거나 미치거나>는 확고한 제 가치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사랑하거나 미치거나>는 또 하나의 공부용 미술책으로 볼 수 있다. 또는 물씬 풍기는 소설의 향기에 취해 이름 그대로 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중요한 건 권지예가 좋은 기회를 마련해줬다는 것일 테다. 그림에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그녀는 그 이야기들을 재구성해 또 하나의 이야기들을 창조해 냈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림 속 이야기에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말 그대로 좋은 기회를 만들어냈는데 이만한 기회도 드물다. 그러니 어찌 외면하랴. <사랑하거나 미치거나>에 취하고 그림에 취하자. 어느새 그림의 이야기를 듣는 자신을 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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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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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였을까? '페미니즘'이 '낡은 것'이 됐다. 이야기만 꺼낼라치면 "또 그 소리냐?"하는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진부하게 여겨지는 걸까? 아니면 상투적인 논쟁만 일으킨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여성을 위한, 나아가 남성을 위한 페미니즘은 그렇게 전락하고 말았다. 기껏해야 "페미니스트도 군대 가라!"는 뻔한 이야기들만 불러 오는 것으로.

하지만 페미니즘이 그렇게 다뤄져야 하는 것일까? 인류가 문명을 갖기 시작한 이래로 권력은 남성들의 것이었다.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모든 것은 남성들 위주로 흘러갔다. "하느님, 아버지!"란 말이 그렇다. 또한 남성 호르몬이 여성화된다고 걱정하는 뉴스 보도는 그렇다. 성폭행 사건이 발발하면 피해자(여성)가 가해자(남성)보다 더한 고통을 받아야 하는 것도 그렇다. 남성 위주로 돌아가기 때문에 여성과 남성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페미니즘이 진부하든 상투적이든 간에 꼭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은 반갑다. 한국 사회 일상 속에서의 성 권력 차이를 포착해낼 줄 아는 그녀의 시선은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를 돕는데 적격이다. 경험과 이론이 한데 어우러진 <페미니즘의 도전>은 페미니즘이 여성만을 위한 것이자 남성을 공격하는 이론이라는 오해를 불식시키는 것은 물론 페미니즘의 나아갈 길까지 제시하고 있다. 소모적인 논쟁을 끝내고 생산적인 논의로서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다. 제목 그대로 '페미니즘'의 '도전'을 기대케 한다.

<페미니즘의 도전>은 총 3부로 구성돼 있는데 1부에서는 여성주의가 필요한 이유와 오늘날의 페미니즘과 여성이 처한 위치를 탐색하고 있다. 1부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여성주의'가 필요한 이유를 "저항이라기보다는 한 가지 목소리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여성들이 그리고 남성들이 살아남기 위한 협상 수단"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성주의를 경쟁이 아닌 조화의 수단으로 보자는 것이다.

남성들이 여성주의를 배격하는 데는 여성주의가 팜므파탈과 같은 맥락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착각이라 할 수 있다. 팜므파탈은 남성들 스스로 만든 것이며 여성들이 요구하는 것은 남성들의 거세가 아니라 평등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 옛날 흑인이 백인에게 요구했듯이, 오늘날 동양인이 백인에게 요구하듯이 말이다.

마찬가지로 1부에서 다루는 여성언어의 필요성이나 성스러운 '어머니'의 일을 남성에게도 부과해야 한다는 요지의 글들도 모두 '조화'를 위한 제안인데 1부만 갖고도 페미니즘의 필요성을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짤막짤막한 분량의 글에도 불구하고 정희진의 글이 분명한 태도를 보이는데다 남성들의 생각과 다르게 '이승연 누드사건'이나 '특권화된 어머니'와 '탈특권화된 아줌마'를 다루는 것처럼 주류 속에서 비주류의 한 순간을 포착해내는 실력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2부에서는 가정폭력과 인권 앞에서 약해질 수밖에 없는 여성들의 처지를 지적하면서 한국의 진보를 비판하고 있다. 이 대목은 확실히 눈길을 끈다. 페미니즘 또한 한국사회에서 보면 진보의 영역에 속한다. 그럼에도 정희진은 한국의 진보를 비판한다. 얼핏 보면 동지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정희진이 들으면 펄쩍 띌 소리다. 정희진의 눈에 한국의 진보는 '진보가 없음'이기 때문이다.

몇 가지 사례를 보자. 얼마 전 한국의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이라 불리는 이는 한국의 페미니즘은 중산층 여성들에 의한 것이 많다며 길거리 여성들이나 돈 없고 가난한 빈민 여성들과는 연대하지 못하고 있다는 투로 비판을 했었다. 보수 세력이 불리는 이들이 시민단체를 비판할 때 '시민의 지지가 없는' 정체성을 지녔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논리로 비판을 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페미니즘의 도전>에서는 진보적 언론인이 "먹고 사는데 아무 지장 없는 중산층 여성들의 페미니즘은 역겹다"라고 말한 것을 예로 들고 있다. 정희진에 따르면 이것들은 '진보 없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유는 무엇인가?

두 남성의 언어에 정희진은 정면으로 맞대응을 한다. 남성들이 경험하지 못한, 여성이 경험하는 억압을 함부로 언급하는 것은 무식을 넘어 지극히 우파적이라고 못 박는다. 정희진은 "여성이 독자적인 개인, 시민, 인간으로 존재하기 어려운 한국 사회의 구조상 '중산층 부르주아 여성'이 있기나 한지도 의문"이라며 여성운동은 '먹고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는' 여성들이 하는 운동이 아니라 '맞아 죽지 않으려는' 여성들의 '최소한의 자구책'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언어가 지극히 남성적인 시각에서 나온 것임을 비판하는 것이다.

2부는 확실히 논쟁거리들이 담겨있다. 일제시대 군 위안부 문제와 같이, 전시 성폭력을 여성 인권 침해로 보지 않고 민족 말살의 하나로 보고 흥분하는 남성들에 대해 정희진은 욕 먹을 각오를 하고 비판의 날을 감추지 않는다. '군 위안부' 사건을 민족 간 갈등으로만 환원하려는 남성 중심의 사회를 향해 "한국 남성들이 한국 여성에게 행하는 성폭력과 성매매는 괜찮다는 것인가?"라고 묻는 말은 논쟁거리가 되고도 남는다. 하지만 논쟁과 별도로 정희진은 글 자체를 외면할 도리는 없을 테다. 정곡을 찌르기 때문이다.

3부는 '성판매' 여성의 인권과 여성으로서의 나이 듦, 군사주의 등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서 남녀 모두에게 눈길을 끄는 것은 뜨거운 감자인 군대문제일 테다. 여성들이 남녀평등을 이야기할 때 남성들이 단골로 하는 말이 "너희도 군대 가라"인 만큼 정희진의 논리가 궁금해지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그녀는 생각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 남성들이 군대 문제를 갖고 여성들에게 행하는 언행은 가기 싫었던 군대를 향해 돌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정희진은 남성들이 이회창 가의 사람들처럼 군대 가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복잡한 감정을 갖게 되면서도 분풀이는 군대 가지 않는 사람들에게 푼다고 지적한다. 일종의 우월감과 보상 심리를 얻으려는 것인데 정희진은 이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차라리 소모적인 논쟁보다 여성들과 연대하면 군사주의에 향한 사회적 문제 제기를 시작할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녀의 말이 어떤 파급효과를 일으킬지는 미지수이지만 확실히 미래지향적인 생각의 전환을 꾀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하다.

<페미니즘의 도전>이라는 제목처럼 정희진은 글은 도전적이다. 도전은 위험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도전이라면 누구도 피하고 싶지 않을 테다. 소모가 아닌 발전을, 싸움이 아닌 동지애를 꿈꾸기 때문이다. 더욱이 정희진은 어느 것 하나 소홀함 없는, 치열함이 느껴지는 글쓰기를 선보인 만큼 정직한 신뢰감이 든다. 이런 신뢰감을 기반으로 한 페미니스트의 글이라면 한번 '상대'해볼 만하지 않을까? 이기든 지든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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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 7색 - 일곱 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곱 개의 세상
지승호 지음 / 북라인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단 '한 권'으로, 사회 전반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고루 갖춰 대략적으로나마 여러 분야에 대한 관심을 채워줄 수 있다면 어떨까? ‘한 권으로 충분하다’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뿌듯함을 느끼게 하는 책은 흔하지 않다. 어쩌면 그런 책을 만나기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 법하다. 하지만 지승호라는 이름 덕분에 그것은 현실 속에서 가능해진다.

지승호, 그는 국내 유일의 전문 ‘인터뷰어’다. 한마디로 인터뷰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라는 말인데 사회 인식을 고려해본다면 그 길을 고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는 버텼다. 실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 <7인7색>을 선보였다. 유시민, 이우일, 박노자, 진중권, 노회찬, 김규항, 하종강 등 '뜨거운' 기운으로 주목받고 있는 7인을 만나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을 엿볼 수 있게 만들었다.

알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7명 개개인의 인터뷰만 하더라도 한 권의 책을 낼만하다. 개개인 모두가 그 분야에서 ‘코드’라고 할 만큼 화려한 경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승호는 이들을 한데 묶는데 성공했다. 두루뭉술하게 생색내기 식도 아닌, 어설프게 그들의 주장을 실어주기 위한 자리로서도 아닌, 색깔 있는 인터뷰로서 이들의 정체를 밝혀낸 것이다. 덕분에 <7인7색>은 앞서 말했던 한 권으로 충분하다는 뿌듯함을 줄 수 있는 흔치 않은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지승호가 처음으로 만난 인물은 박노자다. “나는 모든 지배와 권위에 반대한다”는 박노자는 <7인7색>에서 신자유주의와 미국에 대한 비판과 함께 국제 정세를 이야기하는데 그 모습이 한없이 날카롭다. 국제 정세 돌아가는 것은 박노자의 처음 몇 마디만 듣고도 단번에 파악할 수 있을 정도다. 또한 국제 정세 외에도 한반도를 들썩이게 만드는 현안들, 예컨대 북한 인권 문제, 한류 열풍, 친일 역사 청산 등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는데 인터뷰어의 전문적인 솜씨 덕분에 책 한권 분량이 나올 법한 논의들이 간결하면서도 핵심적으로 드러나 있다.

덕분에 박노자만 만나도 충분한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데 반갑게도 아직 6인이 더 있다. 박노자의 뒤를 잇는 건 이우일이다. 이우일과의 인터뷰에서는 최근에 나왔던 <옥수수빵파랑>에서 만날 수 있었던 친근한 모습은 물론 기존에 만날 수 없었던 화끈한 모습들도 볼 수 있어 인간 이우일에 한층 더 가깝게 다가설 수 있다. 더불어 중간 중간 이우일의 만화 철학 같은 것도 볼 수 있으니 이우일의 팬을 떠나서 만화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눈여겨볼 만 하다.

<7인7색>에는 정치인도 두 명 포함돼 있는데 한창 뜨고 있는 유시민과 노회찬이다. 지승호 스스로가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정치인이라는 점도 있겠지만 가장 대중적으로 관심을 받는 신세대 정치인들인 만큼 <7인7색>에서 그들을 만날 수 있는 건 특별한 재미다. <7인7색>에서 만난 유시민이나 노회찬 모두 정치인 개개인의 색깔이 분명히 드러나는데 그것이 관념적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 눈에 띈다.

즉, 인터뷰를 본 사람들이 ‘정체성’ 같은 것에만 관심을 쏟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오늘 정치를 하면서 생기는 이득이 무엇이고 내일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게 인터뷰한것이다. 덕분에 ‘색깔’ 갖고 편 가르기 하는 자리를 ‘재발견’했다기 보다는 정치인으로서 그들을 ‘발견’하는 좋은 기회를 만날 수 있다.

그 외 진중권, 하종강, 김규항과의 인터뷰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가 있다. <7인7색>에서는 방송을 하면서 많이 ‘무뎌졌다’는 소리를 듣는 진중권의 모습이 아니라 욕먹을 각오하고 앞장서는 본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글로는 볼 수 없던 진중권의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특색이다. 하종강과의 인터뷰는 최근에 논란이 되는 노동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석과도 같다. 박노자가 그 분야에서 그랬듯 하종강의 인터뷰만으로도 그 분야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

김규항과의 인터뷰 또한 볼거리가 풍성한데 어린이 인권 문제나 ‘억압’이 아니라 ‘대열’로 파시즘의 요체를 파악한 것 등 지식인 김규항의 머릿속을 들여다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냉소적으로 이미지화 된 김규항이 아닌 이웃이자 아버지인 김규항의 모습도 만날 수 있다. 인터뷰 하나로 김규항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최소한 편견 속에서 재구성된 ‘좌파’라는 딱지를 떼고 B급 좌파로서의 매력적인 남자로 그를 만날 수 있을 테다.

<7인7색>이라는 제목답게 인터뷰로 만난 일곱 명 모두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늘어놓아 한 권으로 일곱 권을 읽은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한다. 그런데 <7인7색>에는 숨겨진 매력이 하나 더 있다. 색깔 있는 한 명이 숨겨져 있는 것인데 덕분에 책은 어느 순간부터 ‘8인8색’이 된다. 숨겨진 한명은 누구인가? 바로 인터뷰를 가능케하는 지승호다.

<7인7색>을 따라가다 보면 때때로 놀라게 된다. 지승호의 ‘노력’과 ‘기술’이 그 원인이다. 다양한 이야기를 끄집어내기 위해 다른 매체에 실린 글이나 비판 의견 등을 꼼꼼히 체크한 덕분에 인터뷰의 깊이가 몇 배로 가능해지니 놀랄 수 밖에. 때에 따라서는 7인이 지승호를 위해 동원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어쨌든 <7인7색>은 그렇게 사회 전반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는 물론, 정말 ‘제대로’ 된 인터뷰의 세계를 맛보는 즐거움까지 누릴 수 있다.

이쯤 되면 인문도서의 선물세트라고 할 수 있을까? 국제, 민족, 정치, 문화, 노동, 인권 등에 덧붙여 인터뷰까지 맛볼 수 있는 충분히 그럴 만 하다. 지승호의 <7인7색>, ‘오늘’을 보는데 한 권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알짜배기 종합선물세트라고 말하는데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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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내가 돌아오면
전경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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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린은 ‘귀기의 작가’라고 불린다. ‘지옥의 입구에서나 들을 법한’ 극단적인 고통을 담아낸 유려한 문장은 물론이거니와 그녀의 소설에는 언제나 위험한 마녀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마녀들, 그녀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녀들은 마치 메두사와 같다. 포세이돈과 사랑을 나눴지만 장소가 신전이라는 이유로 신의 뜻에 의해 ‘괴물’로 불리며 홀로 죄를 치러야 했던 것처럼 전경린의 마녀들은 실상 타인에 의해 마녀가 된다. 사회를 유지하는 가치관, 예컨대 가부장제도나 일부일처제를 옹호하는 법과 도덕 등에 의해 마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시선을 달리해보자. 결혼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자는 남편만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걸까. 만약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남편은 자신의 출세 길에 누가 될까 싶어 이혼은 절대 안 된다고 하며 그녀를 집 안에 내 팽겨 친다. 이럴 때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와 도망친다면 그것은 정말 마녀행위로만 볼 수 있을까? 그렇다. 기득권의 입장으로 본다면 그녀는 마녀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의 삶을 선택하는 행위를 했을 뿐이기도 하다.

<언젠가 내가 돌아오면>의 주인공 혜규도 마찬가지. 가정이 있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 그녀는 남자로부터 도망친다. 아니, 남자로부터 도망친다는 말보다는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몇 년 만에 시골집으로 돌아간다. 일로부터 도시로부터 떠나 쉬고 싶기 때문이다. 때문에 다른 작품들과 달리 <언젠가 내가 돌아오면>에서는 화자가 직접 지옥의 문턱을 다녀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다양한 상황에 처한 가족들을 통해 지옥의 문턱은 표면 위로 등장한다. 다시 ‘마녀론’이 부각되는 것이다.

중심인물은 혜규와 혜규의 형제들이다. 혜규의 오빠인 혜도는 자신을 버리고 미국으로 떠난 첫사랑 순이를 잊지 못해 미쳤다는 소리를 듣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다. 하지만 전처럼 온전하지는 않다. 건달 세계의 똘마니 같은 그는 흥청망청 살아갈 뿐이다. 아버지들의 눈, 사회의 눈으로 보면 혜도는 정신 나간 얼간이다. 하지만 혜도의 사랑은 어떤가. 지고지순한 사랑이 아닐까. 그것을 잊지 못해 미쳐버린 그 남자를 누가 과연 당당하게 욕할 수 있을까?

혜규는 어떤가. 전경린 소설의 전형적인 마녀를 보여주는 그녀는 결혼하기 며칠 전 남자가 다른 여자와 여관에 들어간 것을 알게 되고 자살을 시도한 경력이 있다. 다행히 그녀는 살아났지만 그 후로 남자들을 쉽사리 믿지 못한다. 사랑은 또 어떤가. 그녀에게 사랑이란 부질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남자가 다가온다. 그런데 그는 유부남이다. 다만 가정을 벗어나고 싶어 안달하는 유부남이다. 이럴 때 혜규와 남자는 어떻게 돼야 하는 걸까? 혜규는 정말 마녀일까? 그 남자에게는 메시아와 같은 그녀인데도?

눈에 띄는 사실은 <언젠가 내가 돌아오면>에는 마녀의 반대편에 위치한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 동안 제3자로 등장해 마녀를 비난하던 방관자들은 많았지만 ‘마녀에게 당했다’고 생각하는, 소위 피해자들이 부각된 것은 드문 것이기에 분명 눈에 띈다. 혜규의 언니 혜진과, 혜규의 동생 혜미가 그 대상인데 이들은 남편의 ‘바람’ 때문에 속이 썩을 대로 썩은 상태다. 전경린은 왜 이들을 등장시켰는가. 일종의 비판이자 마녀론의 호응을 얻어내기 위함으로 보인다.

먼저 혜규와 극단의 위치에 서 인물은 혜진이다. 혜진은 혜규와 같은 여자 때문에 남편이 밖으로 돌아다닌다고 믿는 여자다. 실제로 그녀의 남편과 여자는 혜진에게 이혼해달라고 한다. 사랑 때문이다. 하지만 혜진은 절대 해주지 않겠다고 한다. 대학 교수가 되려는데 이혼녀는 좋지도 않거니와 자신이 만든 ‘작품’이 파괴되는 것을 허용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외친다. “일부일처제의 결혼과 가정, 이 사회의 제도와 가치와 관습과 법을 허깨비로 보지 마”라고. 그녀의 외침은 당당하다. 하지만 공허하게 들리는 건 왜 일까?

혜미는 혜규와 혜진 사이에 존재한다. 실상은 혜진과 같지만, 혜규를 통해 ‘구원’같은 것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상당히 위험하게 여겨질 수 있다. 마녀가 누군가를 구원한다는 건 얼마나 얼토당토한 말처럼 여겨지는가. 하지만 마녀라고 불리는 그녀는 자유인이다. 자유인의 정신은 세계의 패러다임에 갇혀 자신이 원하는 걸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충분한 도움이 될 수 있다. 혜규와 혜미의 관계가 그렇다. 그렇기에 어린 나이에 아무것도 모르고 남편의 장난감이 된 여자아이에게 심각한 ‘정신적 폭행’을 행사했기에 번뇌하던 혜미는 마음을 안정을 얻게 될 계기를 얻는다.

혜규와 혜진, 혜미의 관계만 보더라도 <언젠가 내가 돌아오면>은 전경린 소설에서 하나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는 걸 짐작케 한다. 이제껏 전경린 소설에서 혜규와 같은 이들은 견디지 못하고 나갔다. 그 후는 구체화되지 못했는데 이제야 그것이 드러난 것이다. 물론 <언젠가 내가 돌아오면>은 완전한 끝이 아니다. 아직 중간단계로 볼 수 있는데 어쨌거나 이것만으로도 전경린 소설에서 마녀로 낙인찍힌 마녀들의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 했던 이들에게 갈증을 풀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언젠가 내가 돌아오면>은 다양한 삶을 사는 여러 인물을 통해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마녀스러운 것’이기에 당장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도 많다. 하지만 그 질문들은 유용한 것들이다. 세상이 마녀라도 부르든 어쨌든 간에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 그것에 따라 삶을 개척하려는 삶은 누구나 한번쯤 동경하는 것일 테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 말이다.

내일 당장 그런 상황에 직면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언젠가 내가 돌아오면>과 함께 답을 찾아 떠나보자. 가슴 속에 묻어둔 것을 건드리는 이 소설은 보기 좋은 외모는 아니지만, 분명한 도움을 주는 믿음직한 파트너가 되기에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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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진이다 - 김홍희의 사진 노트
김홍희 글.사진 / 다빈치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길치’처럼 ‘기계치’라는 말이 있다. 기계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인데 나 역시 이것에 해당됐다. 그런 까닭에 집 구석구석에 기계들이 널려있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중에는 하나의 장면을 영원히 보존할 수 있는 매력적인 수동 카메라도 있었다. 하지만 기계치는 그것도 두려워했다. 그것 역시 기계이기에 만지면 오슬오슬 소름이 돋는 것만 같기에 그랬다.

그렇게 지내던 중에 시간이 흐르고 흘러 21세기가 됐는데 그때부터 세상에서는 필름 카메라 대신 디카(디지털 카메라)가 대세인양 등장하기 시작했다. 친구들과의 가벼운 술자리에서도, 동창회에서도 디카를 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핸드폰처럼 디카도 진정으로 21세기형 인간의 필수품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큰마음 먹고 디카를 마련했다. 작동방법이 너무나 단순한 것이 매력인 디카, 그것을 소유하는 것으로 나는 마침내 기계치에서 탈출할 수 있다고 여겼다. 또한 ‘나도 사진을 찍는다’는 기쁨을 만끽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기분은 일주일을 넘지 못했다. 기계치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기회는 얻었건만 기쁨이 금세 사그라졌다. 사진을 찍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으면 친구들이 서로의 것을 평가해주곤 하는데 나는 그것조차 해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나조차도 내 사진이 만족스럽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정말 그랬다. 인터넷에서 본 그 아름답고, 황홀한 장면들은 내 사진에서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부터 사진이 미워졌다. 사진을 찍는 것이 매력적이라고 여겼지만 결국 디카를 친구에게 건네주고 말았다. 그리곤 사진을 찍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이 흘러 우연히 김홍희의 <나는 사진이다>를 만나게 됐다. 우연히라도 이 사람을 만난 건 무슨 의미일까? 아마도 사진의 매력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게다. 또한 일종의 대리만족이라도 느껴보고자 하는 심정이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사진이다>는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주는 책이 아니었다. 회한이랄까? 왜 디카를 친구에게 건네줬는지 후회스러운 감정이 들게 만들었다. 다시 사진을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사진이란 무엇인가?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김홍희도 그것을 모른단다. 그것을 알면 끝이란다. 그래서 사진을 찍는단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진이란 사진을 찍는 사람의 ‘모든 것’을 담아낸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으며 난 내가 찍었던 사진들을 떠올려봤다. 난 사진들을 미워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것들을 미워했다. 하지만 김홍희의 말대로라면 난 나를 미워한 것이었다. 그 대목에서 천천히 생각해봤다. 정말 그것이 사실인가? 반박할 수는 없을 것일까?

반박, 그것은 불가능했다. 사진을 찍는 순간부터 난 소위 ‘대가’들의 수준을 탐냈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세상살이에 그런 일이 일어날 리는 만무하다. 물론 난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사진만큼은 예외로 생각했던 것이다. 찍기 쉬워졌다는 이유로 어마어마한 착각을 했던 게다.

사진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글을 쓰듯 연습하고 또 연습해야 하는 것이었다. 또한 친구를 사귀듯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하는 것이었다. 또한 회화를 보듯 공부하고 또 공부해야 하는 것이었다. 사진도 예외는 아니었건만, 우습게도 단번에 경지를 꿈꿨다가 홀로 실망했던 것이다.

내가 찍었던 사진들을 가물가물한 기억에서 찾아본다. 평범하다. 화려하지 않다. 못난이들이다. 하지만 김홍희의 말처럼 그것들이 모두 나의 것이자 내 일부임을 생각해본다. 그래서 미움을 버리기로 했다. 쉽지 않지만 사랑하기로 했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인간이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 안에는 추한 모습까지도 포함돼 있다. 그래서 그 못난이 사진들도 사랑하기로 했다. 그러면 다시 당당하고 즐겁게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생각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리라. 김홍희의 말처럼 계속 찍고 찍어봐야 한다. 생각만 해봤자 죽도 밥도 안 된다. 일단 찍어봐야 한다. 그래, 그 말도 맞다. 디카를 구해야겠다. 내 사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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