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미네르바 >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것일까
파리대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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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의 어느 날, 학교 ‘숲 속 교실’에서 야외수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한쪽 모둠이 소란스러워지더니 한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가까이 가보니 남자아이들 몇 명이서 벌레를 잔인하게 죽이고 있었고, 그것을 본 지영이가 울고 있는 거였다. 지영이는 학습 부진아이다. 생김새부터 보통 아이들과는 눈에 띄게 다르다. 남자아이들뿐만 아니라 몇몇 여자아이들에게까지 늘 왕따를 당하고 괴롭힘을 받아서 몹시 내 맘을 아프게 하는 아이였다. 지영이는 무척이나 마음이 여리다. 그래서 쉽게 상처받고 잘 운다. 나는 남자아이들이 또 지영이를 괴롭혀서 운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죽은 벌레가 불쌍하기 때문에 우는 거란다. 얼마나 서럽게 울던지 난 그 아이를 오래 안아 주고 괜찮다고 하며 등을 다독여 주었지만 그만 나도 눈물이 나고 말았다.

그러면서 생각한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잔인하게 벌레를 죽이는 아이들과, 또 다른 한쪽에서 죽은 벌레가 불쌍해서 우는 아이... 그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본성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인간은 원래 선한데 살아가면서 악을 배우는 것일까? 아님 원래는 악한데 교육이나 환경에 의해서 악한 모습이 사라지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흰 도화지처럼 깨끗한 상태로 태어났는데 살아가면서 선이나 악을 배워 가는 것일까?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책은 노벨 문학상 수상작품이면서, 오래 전에 영화로도 상영되었다. 그러나 난 영화도 보지 못했고, 책도 이제야 접했다. 비행기의 추락으로 무인도에 불시착한 아이들은 그 곳에서 나름대로 규율을 만들고 대장을 뽑아 살아갈 방도를 마련한다. 대장 랠프는 권위와 문명을 상징하는 소라를 갖고서 모임이 필요할 때면 소라를 불어 그 집단을 이끌어 나간다. 랠프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물로 그 곳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봉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린다. 하지만 잭은 랠프와는 달리 야만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봉화보다는 사냥에 더 열을 냈고, 잔인하게 멧돼지를 사냥하면서 쾌감을 느끼며 그의 야만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처음 그 섬에 불시착했을 때만 해도 아이들은 바깥 세상에서의 규율과 도덕에 젖어 있어서 쉽게 살생을 하지 못했고, 나쁜 짓을 했을 때는 양심이 그들을 일깨워서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잭을 비롯한 몇몇 아이들은 친구 사이먼을 잔인하게 죽이는 일까지 감행한다.

합리와 질서와 도리가 우선시 되었던 집단은 잭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파괴와 타락과 야만으로 변해갔다. 천둥 번개와 폭우가 거세게 몰아치던 밤, 아프리카의 원주민이 어떤 의식을 치르듯 그들은 광기에 몸을 맡기고, 결국 폭발하고 만다. 그들이 얼굴에 칠한 푸르거나 희거나 검은 색칠은 곧 가면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들의 광기를 억눌러 왔던 이성이나 질서를 마비시키고 해체하며 야만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물론 사이먼은 한밤중에 멧돼지 사냥 후 즐겁게 파티를 하고 있을 때 산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그들은 사이먼이 괴물이라고, 혹은 멧돼지라고 여겨서 죽였다. 하지만 그들의 이성은 이미 그가 그들의 친구 사이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집단적 광기는 더 이상 이성이 자리잡을 수 없는 상태로 몰고 간다. 두 개의 세계, 즉 “한 쪽에는 사냥과 술책과 신나는 흥겨움과 솜씨의 멋있는 세계가 있었고, 다른 한쪽엔 동경과 좌절된 상식의 세계가 있었다”(103쪽) 그 두 세계는 화합할 수 없는 세계로 경험도 감정도 판이하게 달라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인간에게 내재된 공포나 두려움은 기실 실체가 없는 망상일 때가 많다. 이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보지도 못한 괴물과 유령에 두려워 떨기만 하였다. 그러나 오직 한 명, 사이먼은 그 정체를 찾아 나서고 기껏 그 괴물의 정체가 죽은 시체라는 것을 알고 진실을 알리려고 했으나 그는 가차없이 죽임을 당한다. 사이먼이 파리대왕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고도의 상징을 나타내고 있다. 파리대왕은 말한다 “나는 너희들의 일부야”라고.

그들은 만 5세에서 12세의 어린 아이들이다. 세상의 악에 덜 오염된 아이들이, 문명의 이기가 전혀 침범할 수 없는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갖춘 외딴섬에 있다면 그들이 건설하는 사회는 인류가 꿈꾸는 유토피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섬에서 일어난 일들은 어른들 세계의 복사판이다. 그것은, 우리는 모두 카인의 후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까? 자기 동생 아벨을 살해하고 도망쳐 온 카인의 후예.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내재해 있는 본성은 결국 어둠과 죄악임을 증명하는 것...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부분에서 “잃어버린 천진성과 인간 본성의 어둠과 돼지(피지)라고 하는 진실하고 지혜롭던 친구의 추락사가 슬퍼서 마구 울었다”(303쪽)라고 하는 것은 아직 우리 인간이 전적인 타락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나만의 억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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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미네르바 > 이 소설은 소설인가, 소셜인가
안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1
미겔 데 우나무노 지음, 조민현 옮김 / 민음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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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하면 김승옥의 ‘무진기행’부터 떠오른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라고 말한 무진의 안개. 그 모호함, 불확실함, 무질서, 혼돈이 가슴을 답답하게 짓누르기도 하지만 안개는 비밀스런 신비함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니콜 키드먼이 주연한 영화 ‘The others'도 떠오른다. 안개 속의 모호함과 함께 음산함, 공포까지 떠오르던 영화. 내게 안개는 그런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 소설의 작가 미겔 데 우나무노는 보르헤스나 가르시아 마르께스, 혹은 남유럽의 키에르케고르에 비유되는 스페인의 소설가이자 교육자이며, 철학가이다. 2년 전쯤인가 민음사에서 이 책을 출간한다는 소리를 듣고 무척 기다렸으나 정작 출간되었을 때는 잊고 있었다가 이번에 어떤 기회로 읽게 되었다. 읽으면서 난 얼마나 무릎을 치며 감탄했던지... 감히 올해 내가 읽은 소설 중에 최고의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소셜이란, 스페인어의 소설(novela)의 개념을 전복하기 위하여 쓰여진 '니볼라(nivola)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역자는 소슬, 수설 등보다는 소셜이 가장 적합할 것 같다고 했다. 내가 봐도 소셜이 가장 그럴 듯하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기존의 전형적인 소설의 구조를 뒤엎고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소셜에 대한 정의는 작품 속의 아우구스토의 친구 빅토르가 잘 설명하고 있다. “내 소설은 줄거리가 없어. 다시 말하면 펜 가는 대로 쓰는 거야. 줄거리는 자기 스스로 만들어지는 거지...” 그는 무명의 작가이다. 그의 소설에는 리얼리즘, 냉소, 외설, 기괴함, 우울, 비극을 위한 웃음이 있다. 소셜에는 전통적인 소설의 구조에서는 찾을 수 없는 새로움이 있다. 이 책에는 그 기발하고 신선한 새로움이 있다.

처음 읽을 때는 가볍게 TV단막극을 보듯, 편안한 자세로 침대에 엎드려 읽다가 3분의 2를 넘어가면서부터 아, 이게 아닌데 하며 난 책상에 앉아서 메모지를 준비하고, 심호흡을 하며 집중하여 읽기 시작했다.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읽다 보니 새벽 3시가 조금 넘어서야 다 읽었다. 주인공 아우구스토는 비가 오는 날 우연히 한 여자를 보고서는 그만 반해 버린다. 그래서 그녀의 부채까지 청산해 주며 다가가지만 그 여자는 끝내 그를 배반하고 만다. 실의에 빠진 아우구스토는 자살을 결심한다. 그러나 죽기 전에 작가, 즉 자신을 창조한 미겔 데 우나무노를 찾아와서 대담한다. 말하자면 이 부분부터 이 책이 소셜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피조물이 창조자를 만난다. 이미지가 실체를 만나는 것이다. 허구의 인물이 실제의 인물을 만나서 따진다니... 그런데, 이 허구의 인물이 창조자를 협박하자 창조자는 당황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처음엔 자살로 끝맺음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 주인공을 죽이고 싶어진다. 주인공 역시 작품 속에서 스스로 자살을 결심했지만, 자신의 창조자가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알자 반항한다. 살고 싶다고... 그러나 주인공은 죽는다. 그러면 주인공 아우구스토의 죽음은 자살일까? 타살일까? 즉, 주인공이 죽고 싶어서 죽은 것일까? 작가가 죽인 타살일까? 작가의 철학적인 사유가 번뜩이는 소설이다.

 살아있고, 존재하는 자만이 죽는다. 태어나지도 않고, 존재하지도 않는 허구의 인물은 불멸한다. 허구의 실체는 하나의 관념이고, 그 관념은 항상 불멸한다. 유한한 인간, 소멸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불멸을 꿈꾸고, 그 불멸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이란 생식과 기억일 것이다. 일반 사람들은 자식을 통해, 작가는 작품을 통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불멸하게 된다. 세르반테스가 불멸하는 이유, 셰익스피어가 영원한 이유는 돈키호테가 있고, 오델로나 햄릿 등이 있기 때문이다. 미겔 데 우나무노는 이 작품 <안개>를 통해 불멸할 것이다. 실존의 인물들이 허구의 인물들로 인해 불멸을 얻는 것이다.

아우구스토는 “그러니까 허구의 실체인 나는 죽어야 하는군요? 그렇다면 좋습니다. 저를 창조해 주신 우나무노 선생님, 당신도 역시 죽을 것입니다. 신은 당신이 꿈꾸는 것을 중단할 것입니다. 당신은 죽을 것입니다. 네. 비록 원하지 않더라도 당신은 죽을 거예요! 당신은 죽을 거예요! 그리고 내 이야기를 읽는 모든 사람들도 죽을 것입니다. 모두가, 모두가 한 사람도 남김없이 죽을 것입니다!...............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소셜적 허구의 실체인 나, 아우구스토 페레스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나의 창조자 돈 미겔 당신도 하나의 소셜적 실체에 지나지 않으며, 당신의 독자들도 당신의 희생물인 나, 아우구스토 페레스와 똑같이 소셜적 실체일 뿐입니다....“(p292)라는 말을 남기며 미겔 데 우나무노와 헤어지던 날 밤 집에서 총체적인 죽임을 당한다.(혹은 죽음을 맞이한다.) 위와 심장과 뇌의 이상으로... 그러나, 아우구스토 페레스나 미겔 데 우나무노는 모두 불멸한다. 이 작품으로..

3분의 2나 되는 앞부분이 경쾌한 TV단막극 같다고 해서 결코 가볍거나 경망스럽지 않다. 유쾌한 문체나, 실존에 대한 대담이나 독백은 그것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 뒷부분의 장자의 호접몽을 연상시키는 꿈에 관한 대화는 정말 흥분하면서 읽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침대에서 꼼짝 않고 잠들어 있는 사람이 꿈을 꿀 때 무엇이 더 존재하는 겁니까? 꿈을 꾸는 사람으로서의 그입니까? 아니면 그의 꿈입니까? 그는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 겁니까? 꿈을 꾸는 사람으로서입니까? 아니면 자기 자신에 의해서 꿈꾸어진 사람으로서입니까? 그밖에 선생님은 저와의 토론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미 선생님으로부터 독립된 저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p 284)

이 책은 소설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작가와 작중인물과의 관계, 그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필요조건을 가진 관계이다. 작중 인물 없이 작가의 존재이유가 없듯이, 작가 없이 작중 인물은 탄생할 수 없다. 그런데 우나무노는 작중 인물인 아우구스토로 하여금, 작가는 작중 인물의 창조자이지만(즉, 작가의 환상적 산물이지만) 결코 작가 마음대로, 그것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을 지라도 내적인 논리가 있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귀속될 수 없다고 말한다. 소설적 허구의 실체는 예술의 훌륭한 법칙에 따라 독자가 그 실체에 대해 기대하지 않는 것을 할 수는 없다. 작중 인물은 비록 허구의 인물일지라도 그 인물의 성격과 존재방식, 내적 논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전지적 창조자로서 주체적인 존재인지, 허구적 인물인 작중인물의 내적 논리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지 고민하게 한다. 그래서 아우구스토의 죽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중요하다.

작가는 다양하고 동적인 우리 삶의 모습을 기존의 정형화된 소설의 구조에 다 담을 수 없기에 그 구조를 전복하면서 새로운 그릇에 넣어보려고 시도한다. 그것은 이 책의 서문부터 알 수 있다. 서문을 작품 속 주인공의 친구가 쓰다니. 그리고 그 서문의 후기를 다시 작가가 쓰고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가? 그래서 처음에 서문과 서문 후기를 읽을 때는 이해를 하지 못했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서문을 읽고 나니 그 때서야 그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제목이 안개이다. 안개는 모호하다. 어떤 것을 정의 내릴 수 없을 때 안개 같다고 한다. 삶도 안개이고, 소설도 안개이다. 이 소설의 제목이 <안개>인 이유는 소설이 아니고, 소셜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직접 읽어보는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난 이 책을 소셜이 아닌 소설이라고 부르고 싶다. 아주 멋진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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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미네르바 > 기독교인이 읽은, 나니아 연대기
나니아 연대기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폴린 베인즈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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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동화라고는 하지만 7권이 되다 보니 오랫동안 맘만 먹었지 쉽게 읽지 못했다. 그러다 7권이 합본되어서 성인용으로 출간되고, 이 책의 두 번째의 동화 <사자와 마녀와 옷장>이 영화로 개봉된다고 하니 마음이 조급해져서 부지런히 읽기 시작했다. 벌써, 우리 반 아이들과 방학 때 이 영화를 보기로 약속까지 한 것이다. 난 책이 영화로 만들어질 경우, 어떠한 일이 있어도 책을 먼저 읽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먼저 영화를 보고 나면 책은 잘 안 읽게 되고, 설령 책을 읽어도 상상력은 한계를 그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서는 이미 그 책을 읽었어도 이젠 영화 속의 영상이 머릿속에 남아 있고, 상상으로 그려보았던 주인공의 이미지나 작품 속의 배경들은 사라져 버린다. <반지의 제왕>을 영화로 본 사람이라면 뒤늦게 책을 읽어도 레골라스를 올랜드 볼름이나, 표르도를 일라이저 우드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상상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위대한 문학작품들을 영화화하는데, 의구심을 갖기도 한다.

이 책은 기독교인에게는 이 작품의 작가, C.S 루이스라는 것만으로도 필독도서이다. 최근에 내가 읽은 몇몇 기독서적만 하더라도, 수없이 많은 곳에 이 사람 이름과 저술들이 인용되고 있다. “C.S 루이스는 <00>에서 언급하기를...” 혹은 “C.S 루이스는... ” 하면서 많은 저자들이 루이스의 말과 행동을 마치 기독교인의 삶과 정신세계를 대변해 주는 듯, 모델로 삼고 있다. 그의 이름 앞에는 ‘20세기 최고의 기독지성인’이라던가, ‘20세기의 뛰어난 변증가’ 같은 여러 종류의 수식어가 따라 붙곤 한다. 그래서 그럴까?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나는 그동안 기독교인이라면 터부시해 왔던 여러 금기에 대해서 조금 자유로움을 느꼈다. 예를 들어 마법이나 마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켄타우로스 같은 반인반마라던가, 로마 신화에 나오는 숲의 정령인 파우누스 등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어 이래도 괜찮은 것인가?”했다. 그것은 감히 루이스가 했기 때문에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평범한 기독교인이 이런 작품을 썼다면 어쩜 비난의 대상이 될지도 모르겠다.

먼저, 이 책은 기독교인이라면 곳곳에 깔려 있는 기독교적인 알레고리에 가슴을 설레며 감동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어린 시절 소풍 가서 보물찾기 할 때 보물을 발견한 기쁨이라고 할까? 나 역시 작품의 문학성을 따지기 전에, 예수님을 상징하는 아슬란(사자)이 나오거나 성경의 어떤 구절이 슬며시 드러낼 땐 가슴이 뛰었다. 특히 1권의 <마법사의 조카>에 나오는 나니아 창조라던가 2권의 <사자와 마녀의 옷장>의 예수님의 구속사적인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7권의 <마지막 전투>에 나오는 새나라와 새 땅에 대한 상징과 은유는 전율을 느끼게 한다. 3권의 <말과 소년>에 나오는 소년 샤스타는 위험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모세를 상징하고 있다.

작가의 기독교적 사상과 세계관이 가장 많이 드러난 곳은 7권의 <마지막 전투>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그림자이고(이 부분은 히브리서와 고린도전서의 성경구절을 떠오르게 한다), 실체인 곳을 상징하는 그 나라(천국)의 모습은 서정적인 아름다움과 함께 신비한 힘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러나 이 책은 비기독교인이 읽어도(즉 성경이나 기독교의 교리를 전혀 몰라도) 에픽 판타지 세계의 초대라는 이유만으로 감동과 즐거움을 주리라 본다. 오히려 난 읽으면서 비기독교인이 읽는 맛은 어떨까 궁금해졌다.

난 어린 시절에 착한 사람이 있으면 악한 사람이 있고 그 중간의 사람, 즉 착하면서도 악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어린이들의 정신 세계로는 그 중간세계를 이해하기는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 어린이 동화책에는 유난히 선과 악의 대립구도가 뚜렷하다. 그러한 대립구도는 어린이들이 책에 몰두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리고 항상 선이 승리했고, 그 승리는 책을 읽는 어린 독자들에게 뿌듯함과 함께 성취감을 안겨 준다. 아무리 짓궂고 장난꾸러기 아이들이라도 착한 사람이 승리하기를 원하고 있다.

이 책에서도 선과 악의 대립이 뚜렷하다. 그리고 주인공들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 있을 때면 아슬란이 등장해서 위기를 넘기게 되고 평화는 찾아온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독자들 중에는 불만을 품기도 할 것이고, 또 혹자는 주인공이 스스로 위기를 해쳐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좌절하고 있을 때 절대자가 나와서 구출해 주기 때문에 문학성이 떨어진다고도 한다. 그런데 영문학을 전공했고, 대학에서 중세 문학과 르네상스 문학을 가르치며 소설도 쓰고, 평론도 썼다는 작가가 그것을 몰랐을까? 작가는 불가지론을 주장하는 무신론자였다가 뒤늦게 예수님을 만나 기독교에 귀의했다. 나는 여기에 작가의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본다. 그는 문학가(혹은 지성인)이기 전에 기독교인이 되기를 원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TIME지는 이 작품을 2005년 100대 영미소설의 하나로 뽑았고, 1957년 영국 도서관 협회에서는 그 해의 가장 우수한 동화에 수여하는 카네기상을 이 작품의 7권을 대표하여 7권의 <마지막 전투>에 수여하였다. 정의와 진실, 진리를 찾아 떠나는 어린 순례자들에게 준 상인 것이다.

반면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 아슬란이 등장하여 주인공들을 구해 주는 모습은 큰 위로와 감동을 준다. 그것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 전서 10장 13절)라는 성경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살아오면서 내가 겪었던 신앙 체험이기도 하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의 힘든 시기를 겪었을 때 예수, 그 분은 나에게 위로와 피할 길을 주셨다. 그래서 아슬란이 나타나 위기에 빠진 주인공들을 위로하고 피할 길을 보여 주는 장면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그 때 일이 떠오르며 가슴이 뭉클해지곤 했다.

작가 루이스는 판타지 동화라는 형식을 빌려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가장 적절하게 다 전달했다고 생각한다. 사실과 진실은 분명 다르다. 판타지는 사실은 아니지만 때로는 진실을 전하는데 오히려 더 뛰어난 방식이라는 것을 작가는 알고 있기에 이 형식을 취했던 것이 아닐까? 나니아 나라의 창조와 멸망, 아슬란의 인간의 죄를 대신한 구속과 부활, 새나라에 대한 소망은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감동과 흥미를 느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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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히나 > 이 여행은 누가 꾸는 꿈입니까?
여행자의 로망 백서
박사.이명석 지음 / 북하우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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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은 다른 곳에’ 있다고 믿는 낭만주의자로 여행에 관한 작은 로망이 있다. 평소 시간은 남아돌지만 돈이 없는 관계로 낯선 공기를 마시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것 같을 때 종종 가짜 여행을 떠나곤 한다. 그 방법은 다음과 같다.


베텔스만 북클럽에서 받은 빨간색 여행용 가방에 옷과 책과 엠피삼 등을 챙기고 야구모자를 눌러쓴 다음 인터넷으로 기차 시간표를 알아본 후 신촌역을 출발해 백마역까지 가는 기차를 타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남으면 임진각역까지 가거나 아니면 대부분 백마역에 내려 커피숍에서 뭐 좀 마셔준 다음 마을버스를 타고 언니네 아파트로 간다. 별 거 없다고? 그럼 이건 어떤가?


알라딘 사람들이 질색하는 배수아 소설 ‘동물원 킨트’를 보면 외국에 굳이 나가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이방인 놀이’란 게 있다. 작가의 말을 옮겨보자. 이것은 반드시 혼자서 해야 하며 놀이가 끝날 때까지는 절대로 비밀을 지켜야 한다. 자신의 모국어를 외국어처럼 새롭게 받아들이는 것이 이 놀이에서는 가장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외국으로 여행을 떠난다고 말해두는 것이 아주 좋은 방법이다. 일단 이방인이 되면, 자신에게 피부처럼 익숙했던 사물이나 현상들이 좀 다른 각도로 보이기 시작한다. 


지리멸렬한 삶에서 비행기를 타고 활주로를 떠나 구름 너머 낯선 세계로 공간이동하는 것, 그것이 붙박이 생활인이 꿈꾸는 여행에 대한 로망이다. 사실 대부분의 여행기는 장소나 계절, 음식, 테마에 따라 객관적인 정보와 여행자의 감상을 종합해서 한데 묶는데 이 책은 여행을 꿈꾸는 사람의 로망에만 집중 올인한다. 그래서 (외국여행을 몇 번 못 떠난 나와 달리) 이 이야기들에 코웃음을 치는 경험 많은 독자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양이라서 다행이야’로 유명한 이명석과 박사 두 사람이 말하는 ‘여행자의 로망백서’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여기서는 취향별로 여섯 가지 코스로 갈아탈 수 있는데, 엔터테인 라인, 서바이벌 라인, 센티멘털 라인, 배가본드 라인, 메모리얼 라인, 판타지아 라인이 있다.


예를 들어 폭풍의 로망이 있다. 산토리니 섬에서 폭풍으로 꼼짝달싹을 못하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폭풍으로 섬에 갇히다니 로맨틱하잖아!’라는 대답이 돌아오는 것. 그리고 직항의 로망 대신 환승 비행장의 로망이 있다. 탑승 안내 모니터에 점멸하는 수많은 도시와 나라의 이름을 맞추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사연으로 소설을 쓰는 것.

 

위와 같이 1부터 100까지의 로망 중에 내 마음에 쏙 들었던 로망 Best 10을 꼽으라면 렌탈 바이크의 로망, 프티 부티크 호텔의 로망, 나침반 혹은 GPS의 로망, 도시락의 로망, 폭풍의 로망, 시간보존 상자의 로망, 귀국보고회의 로망, 변장여행객의 로망, 사설 숙소 스와핑의 로망, 미스터리 호텔의 로망이 있다. 책을 덮고 난 지금 당장이라도 여권에 이국의 스템프를 찍고 그 로망을 손에 넣고 싶어 근질근질할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만 던져보자. 당신이 이 여행에 대해 진짜로 원하는 게 뭔가. 만일 그 어떤 골치 아픈 사유도 섞이지 않고 순도 100%의 안전한 환상만 즐기고 싶다면 이 책을 고르는 것보다 더 좋은 선택은 없다. 그러나 사람이 꿈만 가지고 살 수 없듯이 로망만 가지고도 살 수 없는 법. 당신이 환상이 아닌 현실을 마주하고 싶다면 이 여행 가이드는 피하는 게 좋다. 그건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 싶을 때도 마찬가지다. 각자의 체험으로 바뀌기 전까지 ‘여행자의 로망백서’는 단지 낭만적인 여행의 기술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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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로망 백서
박사.이명석 지음 / 북하우스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여행이라는 단어를 행위로 만들기 위해 집 밖으로 나서는 여행자들에게는 여행지 가이드북만큼 로망을 자극하는 것도 없다. 교통은 어떻게 이용하고 비용은 어떻게 최소화할지 기쁘기만 한 고민의 끈을 놓지 않고 낯선 장소에 몸을 던진 순간에 어떤 기분을 느낄 것인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그 황홀함은 진정 ‘떠나는 자’의 로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행가가 되지 못하는 ‘떠나려는 자’는 어떨까? 사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여행을 떠나고픈 충동을 느끼지만 충동대로 행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궁색한 자금사정은 물론이며 사회생활을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쉬이 버릴 수 있는 자는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이들이라고 해서 로망을 느낄 권리가 없는 것은 아니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들도 떠나려는 자와 마찬가지로 로망을 느낄 수 있다. <여행자의 로망 백서>처럼 여행 갔다 왔다고 소위 ‘염장’을 지르는 내용들로 가득 메워진 여행 책이 ‘언젠가는’ 여행자가 되리라고 다짐하는 ‘떠나려는 자’의 로망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아이러니한 사실이지만 여행을 하면서 겪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떠나려는 자에게 최대한 염장을 지르는 책이야말로 더욱 강하게 로망을 자극하고 로망을 꿈꾸게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최대한 약을 올려놔야 ‘언젠가는’ 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을 더욱 강렬하게 해줄 테니까 말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가지 못하는 이들의 마음을 콕콕 찔러대는 그것이 너무나 얄미워서 책을 덮어버리고 싶게 만들 정도로 <여행자의 로망 백서>는 능수능란하게 염장을 지른다.

그렇다. 한눈에 봐도 풍부한 여행경험이 있다는 것이 드러나는 박사와 이명석의 <여행자의 로망 백서>는 눈꼴 시려 당장에라도 ‘떠나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지나치다고 해야 할까? 아무리 로망의 백서를 제목으로 내세웠다고 하지만 먹는 것에도 로망, 자는 것에도 로망, 걷는 것에도 로망을 운운하는 그 모양새는 기가 막히다. 그 말과 달리 내용이라도 부실하면 참을 만 할 텐데 그런 것도 아니다. 내용을 보고 있자면 그것에 빠져들까 두려워 책을 덮어버리고 싶어지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책을 덮을 수 없는 건 왜일까? 나도 꼭 가보고 싶고 해보고 싶다고 결심하게 만드는, 떠나는 자가 되라고 격려하고 용기를 복 돋아주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게다. 그래서 투덜거리면서도 책에 언급된 지명 이름을 머릿속에 꼭꼭 담아두고 유용하다 싶은 정보들을 옮겨 적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행자의 로망 백서>는 여행을 언급하는 책들이 기본적으로 갖춘 여행가는 법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마치 그런 것을 누군가가 알려준 대로 따라한다면 여행의 로망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 침묵하고 있다. 뿐인가. 지명 이름을 헷갈리는 척 하기도 한다. 여기였는지, 저기였는지 하는 태도로 운을 떼는데 여행기로서 본다면 그 모습은 꽝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하지만 <여행자의 로망 백서>는 꽝이 아니다. 오히려 복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여행자의 로망 백서>는 상상하게 만든다. 불편한 숙식과 힘든 여정을 견디면서도 여행지에 도착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말이다. 여행사의 투어에 참가해서 유명한 곳들을 둘러보는 것과 망망대해 속으로 빠져들듯 낯선 땅에 발을 들여놓아 그 세계를 발견하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상상하게 만들고 그곳에서 내 존재가 어떻게 비춰질지를 상상하게 만든다. 그리고 세상에 떠도는 정의가 아니라 자신만의 로망에 대해서도 상상하게 만든다.

더군다나 <여행자의 로망 백서>는 다른 여행기들과 달리 왜 여행을 가는 것인지를 묻게 만든다. 왜 한라산에 오르고 싶어 하는지, 왜 몽마르트 언덕을 거닐고 싶어 하는지, 왜 신주쿠거리를 가득 메운 행인들 사이에 몸을 섞고 싶어 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이 이유를 모른 채 여행을 떠나면 그것은 떠나는 자가 아니라 계속해서 떠나려는 자로 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리라.

과연 이제껏 여행을 운운하면서 이 질문을 진지하게 던진 이가 누구였던가? <여행자의 로망 백서>는 참으로 소중하면서도,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 돌계단을 쌓고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돌계단은 튼튼하다. 어떤 이라도 돌계단을 밟고 올라 떠나는 자가 될 수 있게 만들 정도다.

‘언젠가는’ 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지도를 보고 있는 이들과 수차례 여행을 했으면서도 로망을 겪지 못한 이들에게 <여행자의 로망백서>는 반가운 자극제가 될 것이다. 마음을 콕콕 찌를 정도로 자극이 강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그것이 무어 대수롭겠는가. 그럴수록 떠나려는 자들의 로망을 더욱 키울 수 있을 터인데. 한 권으로도 충분하다. <여행자의 로망 백서>면 떠나려는 자들도 로망이 있어 빛나는 여행의 주인공이 되고도 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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