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미네르바 > 이 소설은 소설인가, 소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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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1
미겔 데 우나무노 지음, 조민현 옮김 / 민음사 / 2005년 6월
평점 :
안개... 하면 김승옥의 ‘무진기행’부터 떠오른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라고 말한 무진의 안개. 그 모호함, 불확실함, 무질서, 혼돈이 가슴을 답답하게 짓누르기도 하지만 안개는 비밀스런 신비함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니콜 키드먼이 주연한 영화 ‘The others'도 떠오른다. 안개 속의 모호함과 함께 음산함, 공포까지 떠오르던 영화. 내게 안개는 그런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 소설의 작가 미겔 데 우나무노는 보르헤스나 가르시아 마르께스, 혹은 남유럽의 키에르케고르에 비유되는 스페인의 소설가이자 교육자이며, 철학가이다. 2년 전쯤인가 민음사에서 이 책을 출간한다는 소리를 듣고 무척 기다렸으나 정작 출간되었을 때는 잊고 있었다가 이번에 어떤 기회로 읽게 되었다. 읽으면서 난 얼마나 무릎을 치며 감탄했던지... 감히 올해 내가 읽은 소설 중에 최고의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소셜이란, 스페인어의 소설(novela)의 개념을 전복하기 위하여 쓰여진 '니볼라(nivola)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역자는 소슬, 수설 등보다는 소셜이 가장 적합할 것 같다고 했다. 내가 봐도 소셜이 가장 그럴 듯하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기존의 전형적인 소설의 구조를 뒤엎고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소셜에 대한 정의는 작품 속의 아우구스토의 친구 빅토르가 잘 설명하고 있다. “내 소설은 줄거리가 없어. 다시 말하면 펜 가는 대로 쓰는 거야. 줄거리는 자기 스스로 만들어지는 거지...” 그는 무명의 작가이다. 그의 소설에는 리얼리즘, 냉소, 외설, 기괴함, 우울, 비극을 위한 웃음이 있다. 소셜에는 전통적인 소설의 구조에서는 찾을 수 없는 새로움이 있다. 이 책에는 그 기발하고 신선한 새로움이 있다.
처음 읽을 때는 가볍게 TV단막극을 보듯, 편안한 자세로 침대에 엎드려 읽다가 3분의 2를 넘어가면서부터 아, 이게 아닌데 하며 난 책상에 앉아서 메모지를 준비하고, 심호흡을 하며 집중하여 읽기 시작했다.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읽다 보니 새벽 3시가 조금 넘어서야 다 읽었다. 주인공 아우구스토는 비가 오는 날 우연히 한 여자를 보고서는 그만 반해 버린다. 그래서 그녀의 부채까지 청산해 주며 다가가지만 그 여자는 끝내 그를 배반하고 만다. 실의에 빠진 아우구스토는 자살을 결심한다. 그러나 죽기 전에 작가, 즉 자신을 창조한 미겔 데 우나무노를 찾아와서 대담한다. 말하자면 이 부분부터 이 책이 소셜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피조물이 창조자를 만난다. 이미지가 실체를 만나는 것이다. 허구의 인물이 실제의 인물을 만나서 따진다니... 그런데, 이 허구의 인물이 창조자를 협박하자 창조자는 당황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처음엔 자살로 끝맺음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 주인공을 죽이고 싶어진다. 주인공 역시 작품 속에서 스스로 자살을 결심했지만, 자신의 창조자가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알자 반항한다. 살고 싶다고... 그러나 주인공은 죽는다. 그러면 주인공 아우구스토의 죽음은 자살일까? 타살일까? 즉, 주인공이 죽고 싶어서 죽은 것일까? 작가가 죽인 타살일까? 작가의 철학적인 사유가 번뜩이는 소설이다.
살아있고, 존재하는 자만이 죽는다. 태어나지도 않고, 존재하지도 않는 허구의 인물은 불멸한다. 허구의 실체는 하나의 관념이고, 그 관념은 항상 불멸한다. 유한한 인간, 소멸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불멸을 꿈꾸고, 그 불멸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이란 생식과 기억일 것이다. 일반 사람들은 자식을 통해, 작가는 작품을 통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불멸하게 된다. 세르반테스가 불멸하는 이유, 셰익스피어가 영원한 이유는 돈키호테가 있고, 오델로나 햄릿 등이 있기 때문이다. 미겔 데 우나무노는 이 작품 <안개>를 통해 불멸할 것이다. 실존의 인물들이 허구의 인물들로 인해 불멸을 얻는 것이다.
아우구스토는 “그러니까 허구의 실체인 나는 죽어야 하는군요? 그렇다면 좋습니다. 저를 창조해 주신 우나무노 선생님, 당신도 역시 죽을 것입니다. 신은 당신이 꿈꾸는 것을 중단할 것입니다. 당신은 죽을 것입니다. 네. 비록 원하지 않더라도 당신은 죽을 거예요! 당신은 죽을 거예요! 그리고 내 이야기를 읽는 모든 사람들도 죽을 것입니다. 모두가, 모두가 한 사람도 남김없이 죽을 것입니다!...............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소셜적 허구의 실체인 나, 아우구스토 페레스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나의 창조자 돈 미겔 당신도 하나의 소셜적 실체에 지나지 않으며, 당신의 독자들도 당신의 희생물인 나, 아우구스토 페레스와 똑같이 소셜적 실체일 뿐입니다....“(p292)라는 말을 남기며 미겔 데 우나무노와 헤어지던 날 밤 집에서 총체적인 죽임을 당한다.(혹은 죽음을 맞이한다.) 위와 심장과 뇌의 이상으로... 그러나, 아우구스토 페레스나 미겔 데 우나무노는 모두 불멸한다. 이 작품으로..
3분의 2나 되는 앞부분이 경쾌한 TV단막극 같다고 해서 결코 가볍거나 경망스럽지 않다. 유쾌한 문체나, 실존에 대한 대담이나 독백은 그것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 뒷부분의 장자의 호접몽을 연상시키는 꿈에 관한 대화는 정말 흥분하면서 읽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침대에서 꼼짝 않고 잠들어 있는 사람이 꿈을 꿀 때 무엇이 더 존재하는 겁니까? 꿈을 꾸는 사람으로서의 그입니까? 아니면 그의 꿈입니까? 그는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 겁니까? 꿈을 꾸는 사람으로서입니까? 아니면 자기 자신에 의해서 꿈꾸어진 사람으로서입니까? 그밖에 선생님은 저와의 토론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미 선생님으로부터 독립된 저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p 284)
이 책은 소설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작가와 작중인물과의 관계, 그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 필요조건을 가진 관계이다. 작중 인물 없이 작가의 존재이유가 없듯이, 작가 없이 작중 인물은 탄생할 수 없다. 그런데 우나무노는 작중 인물인 아우구스토로 하여금, 작가는 작중 인물의 창조자이지만(즉, 작가의 환상적 산물이지만) 결코 작가 마음대로, 그것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을 지라도 내적인 논리가 있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귀속될 수 없다고 말한다. 소설적 허구의 실체는 예술의 훌륭한 법칙에 따라 독자가 그 실체에 대해 기대하지 않는 것을 할 수는 없다. 작중 인물은 비록 허구의 인물일지라도 그 인물의 성격과 존재방식, 내적 논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전지적 창조자로서 주체적인 존재인지, 허구적 인물인 작중인물의 내적 논리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지 고민하게 한다. 그래서 아우구스토의 죽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중요하다.
작가는 다양하고 동적인 우리 삶의 모습을 기존의 정형화된 소설의 구조에 다 담을 수 없기에 그 구조를 전복하면서 새로운 그릇에 넣어보려고 시도한다. 그것은 이 책의 서문부터 알 수 있다. 서문을 작품 속 주인공의 친구가 쓰다니. 그리고 그 서문의 후기를 다시 작가가 쓰고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가? 그래서 처음에 서문과 서문 후기를 읽을 때는 이해를 하지 못했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서문을 읽고 나니 그 때서야 그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제목이 안개이다. 안개는 모호하다. 어떤 것을 정의 내릴 수 없을 때 안개 같다고 한다. 삶도 안개이고, 소설도 안개이다. 이 소설의 제목이 <안개>인 이유는 소설이 아니고, 소셜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직접 읽어보는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난 이 책을 소셜이 아닌 소설이라고 부르고 싶다. 아주 멋진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