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미네르바 > 기독교인이 읽은, 나니아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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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아 연대기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폴린 베인즈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아무리 동화라고는 하지만 7권이 되다 보니 오랫동안 맘만 먹었지 쉽게 읽지 못했다. 그러다 7권이 합본되어서 성인용으로 출간되고, 이 책의 두 번째의 동화 <사자와 마녀와 옷장>이 영화로 개봉된다고 하니 마음이 조급해져서 부지런히 읽기 시작했다. 벌써, 우리 반 아이들과 방학 때 이 영화를 보기로 약속까지 한 것이다. 난 책이 영화로 만들어질 경우, 어떠한 일이 있어도 책을 먼저 읽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먼저 영화를 보고 나면 책은 잘 안 읽게 되고, 설령 책을 읽어도 상상력은 한계를 그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서는 이미 그 책을 읽었어도 이젠 영화 속의 영상이 머릿속에 남아 있고, 상상으로 그려보았던 주인공의 이미지나 작품 속의 배경들은 사라져 버린다. <반지의 제왕>을 영화로 본 사람이라면 뒤늦게 책을 읽어도 레골라스를 올랜드 볼름이나, 표르도를 일라이저 우드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상상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위대한 문학작품들을 영화화하는데, 의구심을 갖기도 한다.
이 책은 기독교인에게는 이 작품의 작가, C.S 루이스라는 것만으로도 필독도서이다. 최근에 내가 읽은 몇몇 기독서적만 하더라도, 수없이 많은 곳에 이 사람 이름과 저술들이 인용되고 있다. “C.S 루이스는 <00>에서 언급하기를...” 혹은 “C.S 루이스는... ” 하면서 많은 저자들이 루이스의 말과 행동을 마치 기독교인의 삶과 정신세계를 대변해 주는 듯, 모델로 삼고 있다. 그의 이름 앞에는 ‘20세기 최고의 기독지성인’이라던가, ‘20세기의 뛰어난 변증가’ 같은 여러 종류의 수식어가 따라 붙곤 한다. 그래서 그럴까?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나는 그동안 기독교인이라면 터부시해 왔던 여러 금기에 대해서 조금 자유로움을 느꼈다. 예를 들어 마법이나 마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켄타우로스 같은 반인반마라던가, 로마 신화에 나오는 숲의 정령인 파우누스 등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어 이래도 괜찮은 것인가?”했다. 그것은 감히 루이스가 했기 때문에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평범한 기독교인이 이런 작품을 썼다면 어쩜 비난의 대상이 될지도 모르겠다.
먼저, 이 책은 기독교인이라면 곳곳에 깔려 있는 기독교적인 알레고리에 가슴을 설레며 감동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어린 시절 소풍 가서 보물찾기 할 때 보물을 발견한 기쁨이라고 할까? 나 역시 작품의 문학성을 따지기 전에, 예수님을 상징하는 아슬란(사자)이 나오거나 성경의 어떤 구절이 슬며시 드러낼 땐 가슴이 뛰었다. 특히 1권의 <마법사의 조카>에 나오는 나니아 창조라던가 2권의 <사자와 마녀의 옷장>의 예수님의 구속사적인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7권의 <마지막 전투>에 나오는 새나라와 새 땅에 대한 상징과 은유는 전율을 느끼게 한다. 3권의 <말과 소년>에 나오는 소년 샤스타는 위험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모세를 상징하고 있다.
작가의 기독교적 사상과 세계관이 가장 많이 드러난 곳은 7권의 <마지막 전투>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그림자이고(이 부분은 히브리서와 고린도전서의 성경구절을 떠오르게 한다), 실체인 곳을 상징하는 그 나라(천국)의 모습은 서정적인 아름다움과 함께 신비한 힘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러나 이 책은 비기독교인이 읽어도(즉 성경이나 기독교의 교리를 전혀 몰라도) 에픽 판타지 세계의 초대라는 이유만으로 감동과 즐거움을 주리라 본다. 오히려 난 읽으면서 비기독교인이 읽는 맛은 어떨까 궁금해졌다.
난 어린 시절에 착한 사람이 있으면 악한 사람이 있고 그 중간의 사람, 즉 착하면서도 악한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어린이들의 정신 세계로는 그 중간세계를 이해하기는 힘들다고 한다. 그래서 어린이 동화책에는 유난히 선과 악의 대립구도가 뚜렷하다. 그러한 대립구도는 어린이들이 책에 몰두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리고 항상 선이 승리했고, 그 승리는 책을 읽는 어린 독자들에게 뿌듯함과 함께 성취감을 안겨 준다. 아무리 짓궂고 장난꾸러기 아이들이라도 착한 사람이 승리하기를 원하고 있다.
이 책에서도 선과 악의 대립이 뚜렷하다. 그리고 주인공들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 있을 때면 아슬란이 등장해서 위기를 넘기게 되고 평화는 찾아온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독자들 중에는 불만을 품기도 할 것이고, 또 혹자는 주인공이 스스로 위기를 해쳐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좌절하고 있을 때 절대자가 나와서 구출해 주기 때문에 문학성이 떨어진다고도 한다. 그런데 영문학을 전공했고, 대학에서 중세 문학과 르네상스 문학을 가르치며 소설도 쓰고, 평론도 썼다는 작가가 그것을 몰랐을까? 작가는 불가지론을 주장하는 무신론자였다가 뒤늦게 예수님을 만나 기독교에 귀의했다. 나는 여기에 작가의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본다. 그는 문학가(혹은 지성인)이기 전에 기독교인이 되기를 원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TIME지는 이 작품을 2005년 100대 영미소설의 하나로 뽑았고, 1957년 영국 도서관 협회에서는 그 해의 가장 우수한 동화에 수여하는 카네기상을 이 작품의 7권을 대표하여 7권의 <마지막 전투>에 수여하였다. 정의와 진실, 진리를 찾아 떠나는 어린 순례자들에게 준 상인 것이다.
반면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 아슬란이 등장하여 주인공들을 구해 주는 모습은 큰 위로와 감동을 준다. 그것은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린도 전서 10장 13절)라는 성경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그것은 살아오면서 내가 겪었던 신앙 체험이기도 하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의 힘든 시기를 겪었을 때 예수, 그 분은 나에게 위로와 피할 길을 주셨다. 그래서 아슬란이 나타나 위기에 빠진 주인공들을 위로하고 피할 길을 보여 주는 장면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그 때 일이 떠오르며 가슴이 뭉클해지곤 했다.
작가 루이스는 판타지 동화라는 형식을 빌려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가장 적절하게 다 전달했다고 생각한다. 사실과 진실은 분명 다르다. 판타지는 사실은 아니지만 때로는 진실을 전하는데 오히려 더 뛰어난 방식이라는 것을 작가는 알고 있기에 이 형식을 취했던 것이 아닐까? 나니아 나라의 창조와 멸망, 아슬란의 인간의 죄를 대신한 구속과 부활, 새나라에 대한 소망은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감동과 흥미를 느끼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