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미네르바 > 진주 귀고리와 5길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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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양선아 옮김 / 강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읽은 지 보름이 더 되어 간다. 그 후에도 몇 권의 책을 더 읽었지만, 여전히 내 상념은 17세기 네델란드의 한 저택을 서성거리고 있다. 그 보름 동안 나는 컴컴한 다락방에 올라가 물감을 만들거나, 화실에 있는 그림을 감상하다가 조용히 청소를 하는 그리트를 만났다. 그러나 내가 만난 소녀는 하녀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분을 알 수 없는 복장, 머리에 푸른색과 노란색 두건을 쓰고, 진주귀고리를 하고 있다. 그리고는 가끔씩 약간 벌려진 입술과 빛나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환한 빛을 내는 진주 귀고리이다. 맑은 우윳빛 진주귀고리는 그 소녀가 더 이상 하녀가 아니라고 말한다.
17세기의 네델란드의 화가 베르메르는 그리 많이 알려진 화가가 아니다. 그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다는 것은 작가에겐 행운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상상력이 증폭되기 때문이다. 작가의 상상력은 화석처럼 굳어있던 유물들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독자는 마법에라도 걸린 듯 터벅터벅 그 속으로 빨려들어 간다. 그러면 17세기 네델란드의 소도시 뎀블트에 있는 어느 저택에서, 하녀 그리트와 베르메르의 작품 28점을 만날 수 있다.
평범한 소녀였던 그리트는 갑작스레 기울어진 집안 형편 때문에 하녀로 전락했지만, 그녀에게서는 보통 하녀에게서는 볼 수 없는 기품이 있다. 비록 하녀로서 물을 긷고 빨래를 쥐어 짜며, 마룻바닥을 닦아내는 험한 일을 하지만, 그리트는 일반적인 하녀에 관한 속설을 거부한다.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는 그녀는 침착함과 지혜와 진중한 모습으로 큰마님과 화가인 주인에게 신뢰를 얻기도 하지만, 그것은 화가인 아내나, 같은 하녀 테네카에겐 질투의 대상이 된다. 큰마님이나 주인에게 사랑과 신뢰를 받는 것은 충분히 자랑거리가 될 수 있지만, 그로 인해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불편할 것을 안 그리트는 더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주인의 부탁으로 과외의 일, 즉 밤마다 물감을 만드는 일은 그만큼 잠을 못 자고 피곤하게 하지만, 그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고귀하고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일이다. 그리트는 예술적인 감성을 지니고 있다. 베르메르는 그리트를 통해 또 다른 미의 세계를 보기도 한다. 낮에는 빨래에, 집안 청소에 그녀의 흰 앞치마는 지저분했지만, 그녀에게는 또 다른 앞치마가 있다. 그것은 밤이면 아마인유를 풍기며 붉은 색을, 때로는 푸른색 물감을 묻히는 그리트의 다른 앞치마, 즉 그녀가 하녀이지만 그 곳에 있을 수 있는 자존심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트와 주인 여자, 또는 주인 여자를 닮은 딸아이와의 미묘한 갈등, 같은 하녀끼리의 질투가 섬세한 필치로 묘사되어 있다. 그것은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는 미생물들처럼 겉으로는 그리 크게 부각되는 것은 아니지만, 살얼음판을 걷고 있듯 언젠가 터질지 모르는 불안감을 내포하고 있다.
이 작품은 고요하고 잔잔하다. 그리트가 주인을 향한 은근한 연정은 불안하면서도 설렌다. 주인인 화가 베르메르의 눈빛이나 대단치 않은 심부름에도 설레이는 열 일고여덟의 소녀 그리트. 그것은 탱탱히 당겨져 있는 줄을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흔들릴 것 같은 위태로움이다. 그 감정의 선율들이 너무 조용하고 고와서 불안하다. 그 미세한 감정의 파동을 주인은 아는지 모르는지, 그리트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 그의 도덕성은 그저, 진주귀고리소녀 작품의 모델이 되었을 때, 얼굴 한 번 만져 보는 것으로 멈출 수밖에 없다. 베르메르의 감정이 극도로 절제되어 있어서 때로는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나로서는 오히려 그러한 모습이 이 작품을 더 가치 있게 만들었다고 본다.(물론 독자마다 느끼는 것은 다를 것이다)
그리트에게 그 저택은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는 푸줏간 집 아들 피터에게로 간다. (진주귀고리 때문에 그 집을 나오긴 했지만...) 그럼, 그 때의 삶은 한바탕 꿈이었을까? 그리고 10년 후, 그리트는 베르메르가 죽으면서 자신에게 남긴 진주귀고리를 20길더에 판다. 그리고는 베르메르가 남편에게 진 빚 15길더를 갚고, 나머지 5길더는 아무도 모르는 자신의 몫으로 남긴다. 비록 지금은 푸줏간의 아내가 되었지만, 그 5길더란 격정적이었던 젊은 날의 은밀한 비밀을 혼자만 누리고 싶은 욕망일 게다. 그 때의 삶이 비루했을지라도, 그로 인해 남겨진 5길더는 고단한 삶을 지속시켜주는 힘은 지니고 있을 것이다. 가슴속에 비밀 하나 없는 생이란 얼마나 척박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