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플레져 > 미칠미칠 미칠 듯이
-
-
해질녘에 아픈 사람 ㅣ 민음의 시 120
신현림 지음 / 민음사 / 2004년 7월
평점 :
지하철에서 시집을 읽는 건 시집 말고 다른 것을 포기하는 일이다.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끊이지 않는 소음, 지하철이 지하에서 벗어나 지상의 다리를 건널때 잠깐 보여주는 알록달록한 풍경들, 그 모든 걸 포기하고 시집과 사귀고 있는 것이다. 내가 내려야 할 문 앞에 서있어야 하는 긴장감을 갖고 시집을 읽는다. 누군가 내 책을 함께 보는 것 같은 기분이 싫어서 슬쩍 가리고 있어야 하는 폐쇄주의자 같은 어깨로 시집을 읽는다. 세기말 블루스 춤을 멈추고 해질녘에 머물고 있는 시인은 많이 아파 보인다. 나도 덩달아 아프다.
절묘한 사고들로 큰 불운을 액땜하며 / 뜨거운 물리치료에 저녁 해는 다 지고 / 미칠미칠 미칠 듯이 봄바람만 부는데 <해질녘에 아픈 사람 - 보행 명상>
그녀의 이력에는 싱글맘이라는 중요한 운명이 씌어져있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있게 싱글맘이라고 밝힌 것과는 달리 많이 연약하다. 사랑을 갈구하고, 따뜻한 돈을 필요로 하고, 일을 찾는다. 그녀의 움직임은 다소 불안하여 내 어깨라도 살찌워 빌려주고 싶을 정도다. 누구라도 얼른 튀어나와 그녀를 감싸줘야 할 것만 같다. 든든한 보험이 될 만한 존재를 소개해 줄 수 있다면 그녀의 우울과 불안과 그리움이 진정될까. 미칠미칠 미칠 듯이 를 읽던 순간 나는 지하철에서 내렸다. 모든 사람이 다 튼튼해 보이는데 나만 유독 미칠미칠 미칠 듯이는 아닌가. 금세 그녀에게 전염되버린 것 같았지만 지하철 패스를 찍던 순간 경쾌한 신호음은 나를 잡아준다. 내가 내려야 할 곳에 제대로 내렸다는 안도감을 그녀에게 잠시 빌려줄 수 있다면...
한 권의 시집이 시인의 운명일 수는 없다. 한 권의 시집은 그러나 시인의 일상이다. 일상은 시인이든 범인이든 가리지 않고 달겨든다. 살아야 하니까. 왜? 살아있으니까. 내 생을 유기하는 것조차 용기가 필요한 일, 그녀는 하루에도 백만 번 변신한다. 일어섰다 허물어지고 다독이고 다시 일어서고 홀로 라는 걸 잊지 않으며 춥고 무섭다고 고백한다. 툭 치면 스러질 것 같은 연약한 시인은 가정 법원에서 나오는 길을 시에 다 토로하려다 멈춘다. 세상에 널려있는 모든 이미지들에게도 그녀는 쉽게 자신을 내주었으면서 그 대목에서는 왜 그랬을까?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 나무를 보면 나무를 닮고 / 모두 자신이 바라보는 걸 닮아간다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어떤 면역체계도 포기한 듯한 그녀의 야윈 몸은 모든 걸 흡수하고 있는 것도 모른채 떠난 사람만 그리워한다. 그녀에게 이별은 우울을 낳았고 소외를 낳았다. 그토록 진한 이별을, 사랑보다 더 진한 이별을 막을 수는 없었을까. 그녀의 시에 얼룩진 그리움의 정서는 세기말의 블루스 에서 보여준 빳빳한 가죽점퍼에 도사리고 있던 호기를 지웠다.
오후 세 시 에서 네 시로 넘어가는 시간이면 오겠지, 오겠지...하는 맘에 불을 켜지 않는다. 최대한 자연광을 집안에 들여 놓고 싶어 완전히 사라질 때 까지, 내가 버틸 수 있을 때 까지 불을 켜지 않는다. 네 시에서 다섯 시가 되면 어두워진 것을 느끼고, 어둠이 왔음을 안다. 그래도 불을 켜지 않고 버틴다. 그때 만약 누군가 나를 기억하여 전화를 걸어오면, 전화를 받으러 가면서 불을 켠다. 전화 받는 일에 급급하여 불을 켜기 전에 버티던 간절함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지금 시인에게 필요한 건 한 통의 전화일지도 모른다.
따뜻한 연애 상상도 해보지만 다 배부른 얘기 / 죽도록 일만 하다가 / 관짝 하나로 비로소 휴식을 얻겠지 <그해, 네 마음의 겨울 자동차>
가끔이지만 지하철에서 만나던 꽃미남, 따라해 보고 싶은 패션을 코디한 아가씨, 욕설이 대화의 반을 차지하는 여고생들의 수다, 그 모두를 포기하고 시인이 던져놓은 시를 읽는다.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시, 마지막 구절에 써있는 한 줄은 시인의 현재가, 미래가 될 현재가 아직은 버겁다는 걸 보여준다.
다시 힘내는 거야 <너는 약해도 강하다>
선생님이나 선배가 해주었을 때 금세 효력을 발휘하는 말이다. 스스로 내뱉을 때는 아직은 그 안에 내 몸이 힘없이 들어있다는 증거다. 다시 힘내는 거야. 나는 펜끝을 힘주어 썼을 시인의 말을 따라해보지만, 힘은 나질 않고 눈물만 흐르니...어쩌면 좋을까... 오늘도 해는 질텐데, 오늘도 해질녘에 아픈 누가 있을텐데, 이대로 시집을 덮는 게 못할 짓인것만 같으니... 어디선가 푸르르 전화벨이 울린다. 전화를 받으러 일어나자 책꽂이에 새로 산 책들이 눈에 띈다. 그 책이 읽고 싶어 몸이 단다. 누군가는 여전히 해질녘에 아플테지만, 나는 아플 때도 있고 아프지 않을 때도 있다. 시인의 일상이 회복되기를... 시집을 읽던 순간엔 오롯이 시인을 생각하였지만, 시집을 다 읽고 나면 잊혀지기도 하는 자신의 존재를 너무 슬퍼하지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