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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전략 - Reading & Writing
정희모.이재성 지음 / 들녘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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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의미

 나는 글쓰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잘 쓰지는 못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 이 말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좋아는 하지만 방법을 모르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글쓰기를 처음부터 시작하기로 하였다. 시가 좋아 시집을 들고 다니며 많이 읽고 써 왔다. 하지만 시는 감성적인 글이지만 글쓰기는 논리적이고 체계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글쓰기는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다. 시간의 노력이 끊임없이 요구된다. 혹자는 그냥 대충 쓰면 되지 하겠지만 그러한 글은 자신뿐만 아니라 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한 죽은 글이 되어 버린다. 돈키호테의 작가 미켈 데 세르반테스는 글은 글을 쓴 사람의 영혼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단 한 줄의 문장에서 긴 장편의 문장까지 글쓴이의 정성과 노력이 담기지 않는 글은 진정한 글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글쓰기가 쉽지만은 않는 이유다.
 나는 늘 의미 없는 글을 써왔다. 단순히 하루하루 떠오르는 생각들, 머리 속에 잔뜩 그려놓은 수많은 그물들을 나는 엮을 수가 없었다. 즉 생각만 있고 글은 없는 나의 자괴감은 아직도 내 머리 속을 맴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정희모, 이재성 교수의 필적 “글쓰기의 전략”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읽고 한동안은 그 동안 가져온 혼란에서 벗어나기보다는 더욱 복잡하게 얽히게 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미처 생각지 못한 새로운 사실에 놀란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혼란에서 일찍 빠져나와 창조적인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시작이다. 글은 단순할 수가 없다. 글은 살아있어야 한다. 글은 자신의 발견하는 새로운 작업이다. 피천득 교수는 “삶의 흥을 돋구어 스스로 의미를 발견하는 작업”을 글쓰기로 보았다. 생각은 있되 의미가 없는 표현은 나와 너를  감동시킬 수가 없다. 글은 이러한 점에서 나를 표현하는 나를 발견하는 새로운 작업인 것이다. 하지만 이 작업은 대단히 어렵다. 에덴의 동쪽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미국의 소설과 존 스타인 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글쓰기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노동이다.”
 글쓰기는 시간의 작업이다. 한 사람이 생각을 하고 펜을 들어 종이에 적으면 생겨나는 쉬운 작업이 아니다. 그 옛날 우리 선조들은 시조의 한 문장을 생각하기를 몇 년에 걸려 심사숙고하였는지 모른다고 한다. 또한 어네스트 헤밍웨이도 “글을 잘 쓴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하였다. 글쓰기는 나를 발견하는 위대한 기술이다. 기술은 하루아침에 생겨나거나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글쓰기의 전략”을 읽으면서 나 자신을 위한 글쓰기의 의미를 찾아보았다. 글쓰기는 존재적 자아를 발견하는 작업이다. 글은 나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중의 하나다. 우리는 나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거나 확인시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한다. 몸짓, 그림, 노래, 대화, 기타 등등..... 그 중 글은 생각을 표현하고 표현하면서 새로운 생각을 창조적으로 만들어 내는 작업이다. 그리고 자신을 가장 정확하고 의미 있게 표현할 수가 있다. 
 

그리고 글은 사회적 자아를 발견하는 작업이다. 우리는 사회적 공간에서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과의 관계속에서 살아간다. 관계는 늘 의미를 낳고 그 의미는 나를 다시 사회속으로 환원시킨다. 즉 나를 둘러싼 이 공간에 나의 현재 위치를 확인시키는 작업, 그것이 바로 글 속에 드러나 있다. 나는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지는 사회적 현상들에 대하여 고민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글로 표현하며 나의 위치를 확인하며 살아간다.
 마지막으로 글은 미래적 자아를 발견하는 작업이다. 나는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나아가는 작업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즉 나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바로 글이다. 글쓰기가 나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고 나의 현재를 확인시키며 나의 미래를 발전시킨다. 새로운 지식과 대면하는 나는 늘 약자다. 수많은 정보의 바다 속에서 헤엄치는 나는 약자다. 약자의 고통을 이겨내는 힘이 바로 글쓰기에 있다. 글은 과거형과 현재형 그리고 미래형이다. 

  혹자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탐색하는 더듬이라고 수필을 정의하였다. 이는 수필뿐만 아니라 글 자체가 바로 나 자신의 영혼과 우리의 실체적 자아를 탐색하는 긴 여행이라는 의미이다. 글은 쓰고 읽는 행위와 더불어 글 자체에 항상 깊은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글쓰기를 함으로써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글은 나 자신의 의미를 확인하며 나를 더욱 빛나게 한다. 오늘도 아름다운 삶의 빛을 발하는 글 한편을 남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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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
안병수 지음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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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를 내놓은 안병수의 이름은 낯설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양심선언'을 했고 그 덕분에 상상할 수 없었던 무서운 사실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까지도 즐겨 찾는 과자와 껌, 라면, 사탕 등 수많은 식품들이 '독극물'이라고 할 정도로 위험하다는 것을 말이다.

지은이는 유명 과자회사에서 16년간 근무한 전문가였다. 그런 만큼 그 분야에서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같은 분야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 건강 문제를 앓는 것을 목격하고 이상하다 싶어 이유를 조사를 하게 된다. 그리고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된다. 바로 자신이 만드는 과자가 위험천만하기 그지없으며 과자뿐만 아니라 전국 어느 슈퍼마켓에나 있는 유명한 음식 종류들 또한 백해무익하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일을 그만두게 되고 실태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그 결과 양심선언이라고 할 수 있는, <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을 내놓은 것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이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같이 즐겨먹는 그것들을 왜 독극물이며 백해무익하다고 말하는지를 살펴보자. 먼저 '20세기의 걸작' 이라는 라면은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전문가도 파악할 수 없는 여러 종류의 첨가물로 만든다는 것이 문제다. 더군다나 이러한 첨가물의 '유해성' 여부뿐만 아니라 스낵과 마찬가지로 정크푸드로서 혈당관리시스템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캔디나 껌 종류도 마찬가지다. 지은이는 캔디를 두고 혐오물질 범적의 대표적인 제품이라고 말할 정도다. 캔디에 들어있는 설탕과 정제물엿이 몸 안에서 당 대사 기능에 심각한 해악을 끼치기 때문이다. 껌 같은 경우는 어떤가. 껌 역시 첨가물에서 문제를 일으킬 여지가 농후한데 그도 그럴 것이 그 작은 껌에 어마어마한 화학물질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식품 아닌 식품인 라면이나 스낵, 몸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캔디나 껌 이외에도 <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은 햄이나 청량음료, 아이스크림과 초코파이 등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식품의 위험성을 폭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하나같이 무서운 사실들을 말하고 있다. 지은이가 거짓말이라도 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이것은 '장난'이 아니다. 달콤하지만, 파괴적인 유혹에 대한 양심선언이다.

<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은 가공식품들 각각의 문제점을 살펴본 뒤에 오늘의 시대가 직면한 세계적인 '건강 문제'를 가공식품의 발전을 통해 가늠해보고 있다. 지은이는 암과 심장병, 당뇨병 등이 20세기 초반만 해도 희귀한 병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병들이 20세기 중반 식품 산업이 급격하게 발달하면서 병들 또한 함께 창궐한 것을 두고 가공식품들에서 그 원인을 찾아보려는 것인데 그 과정은 '확실'해 보인다. 또한 해외의 연구나 정치논쟁 등 다각도로 그 인과관계를 살펴보는 과정 끝에 얻은 결론 또한 '확실'해 보인다.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필연적으로 궁금증이 생긴다. 가공식품 문제가 이렇게 심각하다면 건강 문제에 꽤 민감한 선진 국가들에서 이미 논란이 불거졌을 텐데 그들은 왜 이 문제를 방치하고 있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의문은 금세 답을 얻는다. <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에서도 말하듯이 어마어마한 시장 규모를 자랑하는 식품 산업에서 기업들의 로비는 이미 상상을 초월한 상태다. 잘 알려진 군수 산업에서도 볼 수 있듯이 기업들은 국민의 건강과 생존보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로비를 펼치기 때문이다.

과학 덕분에 가공 식품들이 등장한 것을 두고 그들은 '진보'했다고 자화자찬한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지은이는 그것이 '퇴보'이며 '재앙'이라고 딱 잘라 말한다. 절대적인 행복조건인, 건강을 해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에서 지은이는 소비자들이 알고 행동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왜냐하면 소비자들이 변하면 기업들도 살아남기 위해서 소비자들의 뜻을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다.

<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은 많은 사실을 알려준다. 그 사실이 너무 많고 무서운 내용을 담은지라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외면할 수는 없다. 바로 '모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아니다. '나'와 내 가족까지 포함하는 모두의 이야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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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책읽는나무 > 매번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과자,사탕,아이스크등등
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
안병수 지음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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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책도 꽤나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요즘 요리책을 뒤져보기에 앞서 계속 이러한 책들이 눈에 띈다. 만들어 먹이기에 앞서 먹여야 될 것과 먹이면 안될 것들을 미리 알고 난뒤에 요리를 해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 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헌데 이러한 책들을 읽고 나면 그야말로 혼돈상태다. 이것도 먹어서 안되고, 저것도 먹어서 안될 것같고...그렇게 하나, 하나 다 제하고 나면 정말 이세상에는 먹을 것이 하나 없다.
단 하나 오로지 유기농 식품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남게 된다.
유기농 제품이야 좋은 줄은 알고는 있지만 원체 비싸다보니 매끼니때마다 밥상위에 올리고 간식으로 먹이기가 참 벅차게 느껴진다. 또한 유기농 제품이 즐비하다보니 솔직히 100%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양심적으로 재배를 한 것인지 의혹이 가게 된다.

 암튼....한동안 유기농에 대한 관심만 있었지 가공식품에 대한 생각은 미처 하질 못했었다. 나쁜 것이야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인체에 이렇게 치명적일 것이란 것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아마도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막연하게나마 몸에 해롭기는 할 것이다라는 생각만으로 그래도 한 두개쯤은 먹어도 괜찮을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제과점에서 만들어지는 과자와 가공식품들은 그야말로 손쉽고 값싸게 구할수 있다보니 모두들 갈등을 하게 될 것이다.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여 비싼 유기농 제품을 살 것인가? 값이 조금이라도 싼 가공식품을 살 것인가? 하고 말이다. 꼭 가공식품만 아니어도 양 많고 값싼 제철 채소를 보면서도 나는 아직도 갈등을 많이하고 있다.

 이런책들은 읽을때 그때 심각하다고 생각하여 각성을 할뿐이지 한 달이 지나면 이내 무감각해지게 된다는 것이 정말 큰단점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까지 급한 마음이 없어서일 것이란 생각도 그렇겠거니와 모든 식구들이 같이 동참해주어야만 지켜나갈 수 있는 일인데 식구 중 누구 하나라도 브레이크를 건다든지 실천하지 않는다면 다른 식구도 이내 무너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책이 주장하는 내용을 읽고 나면 마음이 좀 급해짐을 알 수 있다.
직접 유명제과회사에서 직접 몸을 담고 일을 했었던 저자의 정확한 자료조사를 하나, 하나 읽고 나면 그야말로 정신이 번쩍 트인다. 그리고 왜 현대인들의 골치병인 암, 고혈압, 당뇨병, 심장질환등의 병의 원인이 생겨나게 되는지 이해가 가게 된다. 모든 것이 우리의 입으로 들어오는 식단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나에겐 시누이가 있는데 시누이에겐 초등학교를 다니는 두 딸이 있다. 방학때마다 조카들은 시댁에 내려와 한동안 놀고 가곤하여 일 년에 두 번씩 조카들을 꼭 보곤한다. 헌데 작년 겨울방학때부터 조금씩 아이들이 크게 성장해가는 모습에 많이 놀랐는데 올여름방학때도 더 놀라게 되었다. 밥을 먹는 양도 엄청 늘다보니 키도 쑥쑥 자라 있었다. 이제 한창 성장할 단계다보니 그러려니~~ 하고 보아왔지만 내가 눈여겨 본 점은 다른게 아니라 녀석들이 과자를 먹지 않는 것이었다. 그동안 과자나 아이스크림, 요쿠르트, 콜라 등을 달고 살던 녀석들이 충치가 심하여 치과를 다녀오고서는 아주 혼쭐이 났었던지 그후로부터 양치질 하는 습관이 몸에 베어버렸다. 시누이가 극성스럽게 매번 음식을 먹고 나면 무조건 양치질을 하라고 잔소리를 해댔고 콜라는 일체 마시지 말고 물을 먹도록 교육을 시켰다. 아이들은 양치질 하는 것이 귀찮아 단 것을 안먹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단 것을 싫어하게 되었다. 작은 녀석은 성질이 느긋하고 게으른 구석이 있어서 그런지 그래도 엄마 몰래 과자를 먹기도 하고 양치질도 건너뛰기도 하는데 큰녀석은 맺고 끊는 것이 어릴적부터 강했고, 자기 것은 알아서 잘 챙기는 성격이어서 그런지 하루에도 수 십번씩 양치질을 알아서 하고 있었고 일,이 년전부터 갑자기 너무 단 것을 기피하는 경향을 보이더니 올여름 방학때는 초콜렛이나 과자를 아예 입에 대지를 않는 것이었다. 아이들 세계에서는 유행인 빼빼로 데이때도 친구들에게 선물받은 빼빼로를 모두 다른 친구들에게 나눠줘버렸다고 별일 아니란 식으로 내게 말을 하기도 했다.
나는 지금도 단번에 유해식품을 끊어버린 녀석의 의지가 대단하고도 신기하다. 물론 단번에 끊은 것이 아니고 가끔은 아이스크림도 먹기도 하고 피자를 간혹 사먹기도 하는 것같아 보인다.
하지만 한창 과자맛에 길들인 아이가 과자를 안먹는다는 것은 참으로 대견스럽고 신기하다. 어른도 끊기 힘든 것이 바로 과자 주전부리인데....우리신랑은 과자를 절대 끊지 못한다..ㅡ.ㅡ;;

  그렇게 유해식품을 멀리하고 있는 큰조카는 작은조카에 비해서 체력면에서 월등히 차이가 난다. 큰조카는 여자아이치고 좀 활달한 성격에 운동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감기를 잘 하지 않는 것같다. 작은조카는 그에 비해 운동도 싫어하고 감기를 자주 하고 한 번 걸리면 빨리 낫질 않아 보인다. 큰조카의 체력이 원래부터 좋았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나는 녀석들이 태어날때부터 보아왔던지라 눈에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큰조카는 어릴적엔 엄청 약한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릴적엔 할머니집에 오면 이쁘다고 매번 사탕과 콜라, 과자등을 빼놓지 않고 던져주곤 하셨었다. 초등학교 입학할 당시만 해도 아이가 삐쩍 마르고 약하고 골골거렸었다. 입학하는 날도 감기때문에 아이가 아파서 시누이가 업고 학교에 갔었다는 얘기를 들었을정도다.
헌데 지금 5학년이 된 조카는 그야말로 건강해보인다. 이것이 아마도 먹거리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누이도 최근 몇 년 전부터 유기농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서 이거 저것 알아보고 구입을 하기 시작했었다. 서울에서 살고 있지만 시누이는 웬만한 양념은 울시댁에서 조달해 먹는다. 왜냐하면 시어머님은 양념종류는 거의 대개 손수 담아서 드시기 때문이다.

 먹을 것 하나로 저렇게 아이의 체력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바로 옆에서 보고 있자니 참 놀랍고도 신기하다. 그래서 더욱더 자라나는 내아이에게 되도록 과자같은 주전부리 대신 고구마나 과일등을 찌거나 삶아서 먹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몸이 피곤할때는 사실 손쉽게 과자를 주고 싶은 유혹을 느낄때가 많다. 더군다나 아이아빠가 주전부리를 좋아하다보니 매번 아이를 데리고 슈퍼에 가서 과자를 몇 개씩 사가지고 오다보니 아이는 더더욱 과자나 초코렛의 유혹을 못벗어나게 되는 것같다. 우리집은 아이뿐만 아니라 신랑도 과자의 유혹에서 벗어나야하는 큰과제가 주어졌다. 이책을 읽어보면 어른들의 체력과 질병 또한 아주 무섭게 다가오기에 어제는 몇 가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신랑도 조금은 놀래는 눈치인 듯해보였지만 그것이 언제까지 갈지는 미지수다.

 일단 아이의 먹거리를 책임지는 부모는 무조건 부지런해져야을 절감하게 된다. 찌고, 삶고, 익히는 식단이야말로 최상의 식단이란다. 간단하게 상을 차리게 되는 음식물들은 무조건 과감하게 줄여야만 한단다. 예전엔 먹거리의 중요성을 잘 몰랐을적엔 상을 차리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고, 설거지하는 시간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었다. 헌데 요즘은 언제부턴가 시간이 좀 걸리게 되고, 설거지거리도 엄청 늘게 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매번 조리를 하기때문에 그릇과 냄비가 늘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임신까지 하고 보니 설거지 하는 것이 무척 버겁고 힘겨울때가 있다. 물론 아이아빠가 도와줄때도 있지만 그래도 반은 주부인 내몫이 되다보니 매번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간단하게 해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ㅠ.ㅠ

 내몸이 좀 힘들어도 내아이와 내식구의 먼미래의 건강을 생각하면서 꾹 참아보려고 생각중이다. 이생각과 다짐들이 제발 작심삼일이 되지 말아야 할터인데....ㅡ.ㅡ;;

 암튼....이책은 나뿐만 아니라 현대인들에게 각성하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책이라고 본다. 다들 한 번쯤 읽어봐야만 할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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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일까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공경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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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는 ‘사랑’을 하고 싶어 한다.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기도 하고 영화 속 장면처럼 근사한 미남이 자신에게 열렬한 사랑 고백하기를 상상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적당하다고 말할 만한 상대들은 모두 세상 어디론가 납치된 듯 그녀 주위에는 절대 나타나지 않는다. 그나마 간만에 누군가로부터 우호적인 쪽지를 받지만 상대는 마음에 안 드는 여드름 투성의 수줍은 빵집 직원이다. 물론 앨리스는 흥! 소리를 내며 과감하게 쪽지를 버리지만 연인을 기다리는 마음은 커져만 갈 뿐이다.

앨리스는 외로워도 주변 친구들이 남자를 소개시켜준다는 청을 거절한다. 그렇게까지 구차하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사랑이 그렇듯이 우연히 참석한 파티에서 우연히 멋진 남자를 만나는 것으로 사랑할 기회가 우연히 찾아온다. 남자의 이름은 에릭. 앨리스는 경계하면서도 에릭의 유혹에 넘어가고 마침내 에릭으로부터 집에 가서 이야기를 더 하자는 제안을 듣게 된다. 사랑이 그리운 앨리스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쉬운 여자로 보일까봐 거절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사랑을 찾는 대부분의 여자들처럼.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과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로 지적인 연애박사로 통하는 알랭 드 보통, 그의 탁월한 재주는 <우리는 사랑일까>에서 절정에 달한다. 앨리스와 에릭이라는 남녀를 통해서 ‘사랑하는 것’에 대해 유쾌하면서도 진지한 사랑 이야기를 펼쳐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똑같은 이야기라도 특별하게 들릴 수밖에 없는, 눈물콧물 쥐어짜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철학과 심리학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펼쳐지는 흥미진진한 사랑 이야기를 접할 수 있게 됐다.

에릭과 사귀기 시작한 앨리스는 에릭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귈수록 문제가 발생한다. 안다고 믿었건만 알아갈수록 에릭의 낯선 면모를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건 에릭도 마찬가지. 그렇기에 갈등이 숱하게 일어난다. <우리는 사랑일까>가 특별할 수밖에 없는 대목은 여기서부터 드러난다. 누구나 뻔히 예상할 수 있는 사랑이야기는 이런 경우 그 갈등이라는 것으로 다른 연인과의 과거사, 집안문제, 사회적 지위 문제 등으로 좁혀지는데 <우리는 사랑일까>는 현실감 넘치게 신변잡기적인 것까지 눈을 돌린다.

에릭은 고민하게 만드는 책은 싫어한다. 읽기 편한 책을 선호한다. 반면에 앨리스는 자기 계발을 해준다고 꾀하는 책을 좋아한다. 이런 경우 둘이 함께 독서를 할 때 둘은 서로를 향해 무슨 말을 하게 될까? 또한 앨리스는 에릭이 말 돌리는 걸 싫어한다. 하지만 에릭은 자주 그런다. 점차 갈등이 생겨나는데 이런 경우 이들은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 에릭은 앨리스와 섹스 중에 얼굴 보는 걸 꺼려한다. 앨리스는 그것을 원하지만 에릭은 싫다고 한다. 반면에 앨리스는 에릭이 사람들 몸을 두고 뚱뚱하다느니 잘 빠졌다느니 하는 식으로 말하는 취향을 싫어한다. 하지만 에릭은 계속 그런다. 이런 경우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우리는 사랑일까>의 에릭과 앨리스, 그리고 이들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갈등은 무언가를 닮았다. 무엇을 닮았을까? 바로 오늘날의 젊은 연인들과 그들이 갈등이다. 사랑이야기를 담은 소설을 보면 흔히 ‘소설에서나 가능할 법한 이야기’라고 치부한다. 읽고 나면 끝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랑일까>는 ‘이게 소설일까?’ 하는 궁금증을 자극할 정도로 현실을 꼭 빼닮았다. 그렇기에 이들이 벌이는 갈등들 하나하나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사랑을 하는 중이라면 혹시라도 알랭 드 보통이 자신의 이야기를 쓴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니 그 수준을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쯤 되면 궁금해지는 것이 생기기 마련이다. 쇼프로그램에서까지 언급할 정도로 유행하는, ‘사랑의 정의 내리기’가 <우리는 사랑일까>에서도 등장하느냐는 것이다. 현실을 고스란히 옮긴 듯한 특별한 연애서는 사랑을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선하고 덕이 있고 유사성이 있어야만 ‘완전한 사랑’이라고 말했고 생텍쥐베리는 사랑을 두고 ‘사랑은 둘이서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같이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했고 에리히 프롬은 ‘사랑은 기술’이라며 기술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인식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으며 사르트르는 사랑한다는 말은 의미가 없으며 이성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행동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걸 담아낸 <우리는 사랑일까>에서는? 일단 알아둘 건 사람마다 사랑은 아주 많이 다르다는 것.

평생을 다르게 살아온 두 사람이 만나서 서로 사랑을 하고 그런 이유를 함께 살다보면 사랑이야기라는 것도 언제나 환상적이고 아름답게 펼쳐질 수는 없을 테다. 언제까지 ‘사랑의 힘으로!’를 외칠 수는 없는 노릇. 그런데도 사랑을 말하는 수많은 책들은 해결 방안을 주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일까>도 마찬가지. 다만 ‘사랑하는 자신’을 생각하는 기회를 준다. 연인과 함께 읽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연인이 될 준비를 하는 사람에게도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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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서연사랑 > 사랑을 위한 철학 소설
우리는 사랑일까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공경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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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에 관련된 소설이라고 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부터 최근의 ‘불안’까지,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리고 그의 책에는 리뷰도 겁나게 많이 달리는 작가인 ‘알랭 드 보통’의 책이라고 했다.

이상하게도 소설 쪽으로는 고개가 기울어지지 않고 게다가 천재적인 작가라는 사람들의 책은 꼭 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사람이 지나가고 난 뒤에야 읽어보곤 하는 내가 갑자기 읽고싶어져 버린 책.

참 내.

결혼도 했고 도대체 연애를 했었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한 내가 연애 소설은 읽어 뭘 해.

그러면서도 소설 속의 앨리스를 보며 감정이입이 되는 이유는 뭘까.

 

‘앨리스는 사랑을 이런 실용적인 의미로 생각하기 싫었다...........그녀는 시인들과 영화인들이 미학의 마법 공간에서 아릅답게 그려낸 영혼의 결합 같은 관계가 아니면 타협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맞아, 그랬던 적도 있어. 사랑은 현실적인 무엇인가를 다 초월하는 거라고 생각했었던 적.

첫 만남에서부터 상대방을 압도하는 레이저 광선같은 것이 눈에서 쏟아져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도저히 다른 사람에게는 눈 돌릴 수 조차 없는 그런 사랑.

앨리스, 그런 면에서 볼 때 당신도 철이 덜 들었군 그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이야기에 관심이 가는 이유는.......24살 때의 나와 너무 똑같기 때문이야.


‘사람을 사랑하는 연인은 단순히 X가 멋지다고 여기지 않고, ’X'처럼 멋진 사람을 찾아냈다니 대단하지 않아?‘하는 생각을 먼저 한다’


‘앨리스가 에릭에게 연어 카르파초가 맛있다. 레스토랑이 근사하다고 감탄했기 때문에. 그녀의 쾌감은 음식과 분위기에서 나온 것처럼 보인다(욕망의 두 가지 형식 - 자율 판단) 하지만 첫 코스를 먹는 그녀를 지켜보면, 명백히 그녀는 그 주에만 영화 ․ 패션 ․ 음악계의 유명 인사들이 수십 명이 다녀갔으며 장안이 떠들썩하게 인구에 회자되는 레스토랑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음식을 먹고 있다는 생각(욕망의 두 가지 형식 - 모방 심리)에 열광한 것이었다...앨리스는 두 가지 형식 중 언제나 후자 쪽을 따르는 편이었다. 자율적인 욕망보다는 모방을 선호했다. 갖고 싶은 옷, 구두, 레스토랑, 애인에 대한 취향이 다른 사람들의 말과 인상에 맞춰지곤 했다.’


세상에, 사랑에 빠진 - 아니 ‘사랑’을 사랑하는 것에 빠져버린 이 복잡하고도 미묘한 심리를 어떻게 이리도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사랑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하는 앨리스. 그에 비해 자신만만하고 이성적이고 완벽한 에릭.

그런데 이들을 설명하는 작가의 입장은 소설의 중반에 이르러 점점 변화한다. 사랑도, 삶도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계획의 한 요소라고만 생각하는 그 자신만만한 남자 에릭은 그 균형이 파괴되는 것을 못 견뎌하며 그런 이유에서 자신의 나약함을 용납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인격의 소유자로, 그런 반면 자기애가 부족하고 최소한도 자기 중심적이지 못했던 앨리스는 서서히 스스로도 존재감있게 빛나는 영혼을 가진 독립적인 여성으로.

앨리스가 사랑의 과정을 통해 이 세상 어느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자존감을 느끼게 되는 과정을 보며 단순히 장편 할리퀸 로맨스일거야 했던 생각이 점차 사라지고 하나의 철학 소설로 보아도 좋겠다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앨리스와 다를 바 없던 생각을 하던 나는....(이미 한참전에 지나가버렸지만) 그 ‘연애’라는 과정을 통해 어떤 존재로 변화하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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