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의 짧은 동거 - 장모씨 이야기
장경섭 지음 / 길찾기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국민학교, 그러니까 초등학교 1학년 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방학을 맞아 대구에 있는 친척집에 놀러가는 길이었다. 누구와 동행했는지는 생각이 안난다. 어린아이를 혼자 기차에 태워보내지는 않았을 텐데. 기차 안을 밝히는 형광등 불빛은 어두웠으나 그것이 차창이며 벽면 여기저기에 반사된 탓에 흔치않은 기차멀미까지 일으켰던 것같다. 해가 저물면서 엄마와 떨어져 한참을 있다와야 한다는 두려움이 비로소 실감나게 다가와서였는지도 모른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멀미와 싸웠는지 슬픔과 싸웠는지, 하여간 대구까지 가는 내내 자리를 뜨지 않고 버텼다. 아니, 그 말은 틀린 건지도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 시간 감각이며 공간 감각이 무뎌지더니 사실판단이고 뭐고 몽롱해져버렸기 때문이다. 그 순간 이후로 기억나는 건 오로지 하나뿐이다. 누군가를 향해 휘둘러야 했을지도 모를 주먹이 어느새 스르르 풀어져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는 것. 가위바위보를 할 때처럼 긴장된 손바닥이 아니라 손금이 골짜기로 보일 만큼 어정쩡하게 풀린 손바닥이 무심한 듯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던 기억.

아직도 그 손바닥은 내 팔끝에 붙어 있다. 그에 딸린 손가락으로 지금 이렇게 자판도 두들긴다. 맨 윗 손금이 검지를 타고 올라가는 선명한 세줄짜리 손금도 그대로다. 비록 잔재주는 부족하지만 그런대로 충실한 손이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는, 이것이 왜 여기 있는 것일까 하는 경악에 가까운 낯섦을 던져주었던 녀석의 과거가 생생하다. 창백하면서도 오만한 형광등 불빛 아래 펴져있던 내 손바닥. 목과 어깨와 팔을 거쳐 눈이 붙어있는 얼굴과 분명히 연결되어 있는 그 손이 내것같지 않고 손같지 않고 심지어는 그 무엇과도 같지 않다는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던 그 기억은 거창하게 말해 트라우마에 가깝다. 종종 그것은 불쑥불쑥 되살아나곤 하니까. 롤러 코스터를 타고 있는데도 지붕에 누워 하늘바라기를 하는 기분을 느끼게도 하고, 옆에 누운 사람에게 가끔씩 '누구세요?'라고 물어야할 것만 같은 생각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장경섭의 만화를 보면서 제일 먼저 떠올린 건 이런 '낯섦'에 대한 상념들이다. 그의 만화가 만화라고 보기엔 생경하게만 여겨지는 탓이 약간, 그리고 그가 끊임없이 자기 존재를 타자화하려는 미련퉁이인 탓이 절반, 자신의 미련함을 무심한 다수에게 어떻게든 적응시켜보려는 노력이 또한 얼마나 생뚱맞게 받아들여질 것인가 하는 생각이 또 찔끔, 하여간 리뷰를 쓸만큼 정리되지 않은 먼지덩어리같은 생각들이 그 낯섦의 실체다. 그러면서도 그 '낯섦'이 '기시감'과 쉴새없이 얽혀든다는 불편함 또한 잘못 먹은 냉모밀처럼 명치 언저리에 자리하고 있다. 장경섭의 내러티브가, 장면들이, 그의 생각들이 출구를 찾지 못하고 돌고 돌며 시간의 흐름을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있는 탓이고, 그것이 결국 풀릴 수 없는 숙제라는 체념에 공감하고 있는 탓이기도 하겠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바퀴벌레로, 겨울잠을 자는 곤충으로, 수십개로 분열된 똑같은 나로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정직하게 말해 '낯설게 하기' 혹은 자신의 타자화라고는 볼 수 없을 터이다. 내 손이 내 손이 아니었던 그 기억과는 달리, 장경섭의 타자는 결국 자아일 뿐이다. 그중 아무도 그에게 낯선 존재가 아니다. 자기 경계 밖의 진짜 '타자'는 물론, 자신의 수많은 분신의 타자화에도 실패한 작가에게 남은 것은 자기 존재에 대한 물음 뿐이다. 그는 끊임없이 되뇌인다 : 난 잘못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이리 살아서 될까.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그의 독백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존재'에 대한 물음이라 보기도 힘들다는 걸 알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분열된 자아들은 다소 생뚱맞다. 실제로 그것들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라는 물음을 해소하는데에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늘상 반복되는 그 물음들의 구현체일 따름이다. 이런 상태의 출구란 결국 그 물음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분신들을 털어내고 창문을 열기 - 이것이 이 만화의 종결이다. 하지만 장경섭의 지병은 수이 낫는 게 아니라서, 뒤이어 나오는 단편들에는 여전히 우울하고 반복적인 분신들이 살아있다. 그러니 나는 그에게 말하고 싶다. 이제 그 물음을 그리는 일을 그만하라고. 해답을 찾을 수 없으면 묻는 일도 그만하라고. 그 해답이란 건 당신처럼 존재감이 희박한 사람에게 주어질만한 것이 아니라고.

그가 자신의 물음을 넘어서는 발언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가 '돈'에 대해서 말할 때, '먹고 사는 문제'를 토로할 때, 그리고 문명과 곤충에 대해 읽은 것을 들려줄 때이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생각에 머무적거리고 있는 사람에게 가난은 운명적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운명적인 가난이, 그가 겪어야 했던 어떤 사회적 부조리가 앞섰는지도 모르겠다. 여하간에 그도 먹고 살아야 한다. <도쿄타워>의 연인들처럼 궁상의 그림자 하나 없이 판타지 속을 헤엄치기엔 장모씨와 장경섭의 거리가 너무 짧다. 내가 이리 살건(바퀴벌레와 동거하건) 말건, "내가 뭐 어쨌다고 그래"라고 호기롭게 외쳐보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그는 고개를 숙인다. 이러고 산다고 돈이 들어오기를 하나...... "그러는 건 사는 걸 너무 우습게 여긴 건데"라고 제법 심각하게 생각해보기도 한다. 밥벌이란 엄연한 현실 앞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은 때론 사치가 된다는 걸(만화가 되어 돈으로 변신하기도 한다만) 그 자신도 아는 것이다. 인터뷰에서도 말하듯, 바퀴벌레와 동거하게 된 얘기보다는 그와 헤어지는 과정에 주안점을 두었다는 것은 그의 현실인식의 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그의 지병은 여전하지만.

'그', 바퀴벌레와, 인간과 공존하거나 심지어는 인간으로 변신한 벌레들이 장경섭의 카프카적 판타지의 영역에 놓여 있다면, 그가 인용하는 책 속의 벌레들은 보다 현실적이다. 지구상에서 제일 개체가 많다는 종족 곤충, 인간은 자연의 연쇄살인범답게 그들을 박멸하는데 힘을 쏟는다. 특히 바퀴벌레나 모기, 파리, 개미처럼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는 곤충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인류의 그런 행태에 대해 장경섭은 순하게 생긴 얼굴에 힘을 주고 열변을 토한다. 인간은 지금 이 순간에나 인간일 뿐 다른 존재일수도 있었다는 윤회론적 관점을 포함, 인간 역시 곤충이나 마찬가지로 이 지구상의 한 생명일 뿐이라는 인식과 인류가 자연에 대해 범하는 죄를 생각하면 사라져 마땅하다는 급진적인 사상마저 보인다. 인간과 문명에 대한  혐오증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이런 생각들이 그의 '어떻게 살 것인가'와 어떤 식으로 결부되는 것인지, 연결되어 있기나 한지 살짝 궁금하다. 그가 좀더 뻔뻔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으면 환경운동가라도 됐을텐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만화가다. 가끔씩 바깥일로 침을 튀기기는 하지만 그의 관심사는 늘 자기자신이고 자신의 삶이다. 그러면서 그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자위행위'라 표현하기도 한다. 자신과의 교미인지 자기에 대한 강간인지 그것조차 아리송한 자기탐닉이다. 그것이 차라리 자기애라면 편하기라도 했을 텐데. 그러지도 못하는 장경섭이 딱하다. 내가 가는 길이 어쨌든 옳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그는 또다시 묻곤 한다 : 어떻게 살아야 하나...... 정말 딱한 노릇이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고, 내 해석은 늘 틀려먹었다면, 그냥 그대로, 자기 잘난 맛에라도 살아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거, 나도 안다. 아직도 가끔씩은 손바닥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버릇이 있고, 내가 서 있는 곳에 대해 자신있게 말할 줄 모르는 사람이 그런 충고를 하는 건 모순이라는 것도 안다. 그런데 나는 내 손바닥을 보면서 어떤 질문을 하고 있는지, 문득 그게 궁금해졌다. 이게 나 맞아?라는 낯섦의 감정을 넘어선 그 어떤 질문이라도 해본 일이 있는지. 어떻게 살것인가,라는 물음속에서 뱅뱅돈다고 장경섭의 궁상을 타박하기 전에 나 자신은 삶에 대해 어떤 질문을 진지하게 해 본 적이 있는지. 십년을 붙들고 있었다고 했다. 문득 장경섭의 선 가는 얼굴 뒤의 고집같은 걸 느낀다. 미덥지는 않지만 감탄은 한다. 기대고 싶지는 않지만 존경만은 보내주고 싶다. 삶에 대해 질문할 줄 아는 사람조차 되지 못한 나의 손바닥에 드리웠던 형광등의 그림자를 걷어내야겠단 생각이 든다. 삶은 그리 만만한게 아니란 걸 온몸으로 보여주는 사람 앞에선 그 손바닥을 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발 아래가 흔들리는 느낌이다. 젠장.

 

ps. 별 하나가 빠진 이유에 대해서 : 별 다섯개를 주어야한다는 압력 같은 걸 받은 적은 없지만, 별을 더해나가기보다는 빼가는 습관이 있는 사람으로서 몇마디 덧붙인다(이것도 참 나쁜 습관이다. 흠을 잡으려고 리뷰를 쓰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장경섭이 철학자나 웅변가가 아닌 만화가로 자리잡기로 했다면, 내러티브 외에도 어떤 정도의 예술적 성취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예술적'이라는 말은 참 모호하지만, 그림을 빼놓고도 그의 말을 알아먹을 수 있다면 그는 왜 만화가여야 할까,라는 생트집과 관련지어 생각하면 되겠다. 다만, 트집의 다른 말은 기대라는 것만 알아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깜악귀 > 산다는 것의 공포와 대면하기
'그'와의 짧은 동거 - 장모씨 이야기
장경섭 지음 / 길찾기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1. 95년, 장모씨 이야기로부터

아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95년 당시 인디만화 운동의 경향에 관심을 기울였던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혹은, 당시 5회 발간되고 폐간되었던 인디만화잡지 [화끈]을 보았던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그곳에 [장모씨 이야기]라는 평범해 보이지만 인상이 강력한 괴작이 있었다는 것을.

주인공은 컷 안에 혼자 덩그러니 놓여 있다. 자취방인 듯 하다. 컷 바깥으로 누군가에게 웃으며 말을 거는 주인공.

“에이~ 형은 꼭 그런 쪽으로만 상상하더라!”

그러나 그 바깥의 ‘누군가’는 한번도 컷 안에 들여와주지 않는다. 독자는 오직 주인공 ‘장모씨’만을 본다. 컷 바깥에는 누가 있는가. 독자가 있는가? 아니면 작가가 말을 거는 이름처럼 그냥 ‘수봉이 형’이 있는가? 아니면 그저 혼잣말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컷의 몸짓’으로 그려진 고독의 언어이고, 그 몸짓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시야 바깥의 빈 공간이 가진 바로 그 공포에 대한 것이다. 이 기묘한 스타일의 만화는, 평범한 얼굴을 한 초라한 외판원 같지만 알고 보면 한 없이 기괴한 물건으로 가득찬 홈쇼핑 카탈로그를 독자에게 펼쳐 보였다. 그 만화는 ‘장모씨 이야기’였다.


2. 10년 후, 2005년, ‘장모씨 이야기’ 혹은 ‘그와의 짧은 동거’

‘장모씨 이야기’ 중 ‘그와의 짧은 동거’ 편이 한 편의 장편으로 발간될 예정이다. 이것은 몇 번 연재하고 끊어져 미완성된 이야기로 가득찬 한국 인디가 힘겹게 내놓은 결실 중 하나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은 힘겹다. 10년이나 걸린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어, 우리는 이 작품이 ‘장편’의 형태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을 드디어! 알게 되었다.

만약, 단행본으로 출간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작품을 그저 단순히 고독한 내면을 그린 단편의 연쇄로만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0년 만에 드디어 온전한 작품을 받아본 순간의 감흥은 만만치 않다. 그리고 10년 전 ‘장모씨 이야기’는, 우리가 이전에 알던 것보다 훨씬 풍부한 작품이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자기 자신 밖에 없는 방의 빈 공간에 무엇이 있었는지도 우리는 좀 더 온전히 이해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그늘에는 무엇이 숨어 있는가? 잔악한 인형 처키나 칼날이 달린 손가락의 프레디?

이 만화를 읽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것은 평범한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공포가 숨어 있는 공간이 아니었을까. 지금 자신이 잘못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 말이다. 그래서, 줄곳 아무런 설명 없이 행해지는 ‘컷의 몸짓’은 산다는 것이 너무도 무섭고 공포스럽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려는 노력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만화가 일상의 공포를 자신의 안으로 온전히 받아들이려는 인간의 몸부림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많은 것을. 드디어 10년 만에.
 

3. 분신(Double)과 변신(Metamophosis)라는 메타포

카프카의 [변신]이 보여준 변신(metamophosis)이라는 메타포는 문학팬들이라면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다음과 같이 유명한 구절로 느닷없이 시작된다.

"어느 날 아침, 잠자던 그레고르가 뒤숭숭한 꿈자리에서 개어나자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기 자신이 하나의 벌레가 되어 있는 것이다. 혹은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도 우리는 많은 변신이라는 메타포를 발견할 수 있다.

장경섭은 보다 애둘러 자기 자신을 유지한다. 그는 인간과는 영 다른 존재를 자취방의 빈 공간, 혹은 컷의 바깥으로부터 불러온다. 그것은 어느날 주인공이 우연히 밟아죽이고만 바퀴벌레의 형체를 하고 있다. 어쩌면 그건 순전히 우연이다. 하여튼 장모씨에게는 그런 형태인 것이 타당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이윽고 둘은 서로 말을 건다.

안녕? / "난 너를 항상 지켜봐왔어"

그래서, 어떻게 둘이 같이 살게 되었는가는 중요치 않다. 우리가 어떻게 산다는 것 자체에 대한 공포와 동거하게 되었는가, 그 기원이 중요하지 않듯이 말이다. 당신의 경우를 봐도 그건 어느 순간에 그냥 등 뒤에 달라붙어 있지 않던가?

바퀴벌레와 장모씨는 친구가 되어 동거하기 시작한다. 둘이 여행도 가고 스타크레프트도 한다. 자신이 벌레가 되어버리는 카프카에 비해 어느 정도 만화적이고 해학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더욱 현실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아는 바, 자기 자신에 대한 지독함보다 자신에 대한 나태함이 보다 현실논리에 가깝기 때문이다. 지독한 자는 죽지만 나태한 자는 살아남는다. 작가는 계속 살고자 한다.

작가는 이 ‘타자’와 함께 공간을 같이 감수하기로 한다. 그러나 빈 공간으로부터 불리어져 온 이 존재는 주인공의 고독과 외로움을 재확인시켜준다. 또한, 그것은 주인공 장모씨의 ‘산다는 것에 대한 공포’로부터 불리어온 요물이므로, 당연히 장모씨 자신의 내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공포’를 견디어 내려는,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다시 태어나려는 자신의 무의식적인 노력이 구현된 것이다.

때문에 바퀴벌레는 자신의 ‘분신(double)’이다. (따라서 여기에 등장하는 바퀴벌레를 실제 바퀴벌레의 의인화라고 보는 것은 너무 표면적인 해석일 것이다) 호프만의 [악마의 묘약]이나 에드거 앨런 포의 [윌리엄 윌슨] 등에서 표현된 대로, ‘자신과의 대면’이라는 테마는 초역사적으로 기능하는 일종의 신화적인 메타포이다. 그것은 ‘그와의 짧은 동거’에 나오는 바대로, 나르시스가 호수에서 발견한 또 다른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

자신을 마주하는 것은 가장 커다란 매혹이면서, 동시에 자신에 대한 가장 잔혹한 단죄이기도 하다.


4. 기나긴 잠, 그리고 수태

어떠한 결실도 맺지 못하고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싸운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는 자신을 뜯어고치는 일만은 하고 싶지 않다. 솔직하지 않게 살고 싶진 않다. 그건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단순하게 "그건 아니기" 때문이다.

끝없는 불안과 싸우며 견뎌내기 위해서는 지독함이 필요하다. 뚜렷하게 무엇을 하는 것 같지 않아도 그는 책상 밑에, 침대 밑에 도사린 공포와 기나긴 겨울의 전투를 벌여 나간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과 싸워서 결과를 본 인간은 결국 무엇인가의 마력을 얻는다. 작은 불안이 작은 불씨가 되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아무런 쓸모도 없고 돈이 되질 않는 마력이지만, 그는 그렇게 마법의 소유자가 된다.

우리가 얻은 장편은 그 전투의 산물이다.

그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스스로 회복하길 기다리며 몇 년이고 버티겠노라고 결심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입 밖으로 소리내어 이야기 해 본 적도 없거니와 스스로에게 다짐한 적도 없다. 그에게 그런 것은 그만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까닭이다. 그러나 10년이라는 세월은 결심하거나 하지 않거나 하는 것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그는 그냥 인고해 낸 것이다. 그냥 그래야만 했기 때문이다.

인고한 자에게 복이 있으라. 10년 후의 그는 이제 컷 바깥으로 독자에게 말을 건다. 바퀴벌레는 죽고, 그는 살았다. 그는 자신의 외롭고 불쌍한 동거인을 기억한다. 공포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분신을 불러내고 그것의 죽음을 감내함으로서 드디어 그것을 내화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이제 그의 힘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10년을 하나의 장편으로, 10년 전의 작품에 이어서 그려나간다.

그것이 ‘그와의 짧은 동거’이다. 이 장편이 당신에게 들려주는, 소심한, 아주 소심하고 평범한 이야기이다. 10년 만에. 한 작가가 하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끝내는데 걸리는 시간 치고는 그다지 길지 않다. 그렇지 않은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urblue > 함께 살았던 바퀴벌레를 기억하기
'그'와의 짧은 동거 - 장모씨 이야기
장경섭 지음 / 길찾기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내 얘기를 좀 해 보자. 나는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다. 인간인 이상 희로애락을 모를 리 있을까마는, 감정의 진폭이 크지 않다고 해야 할까. 자외선과 적외선의 영역을 배제한, 가시광선 정도의 감정의 파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기쁨과 슬픔과 행복과 고독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볼 수 없을 정도로 한계를 넘어본 일이 없다. 그래서일 것이다, 스무 살부터 10년 가까운 세월을 혼자 사는 동안 도가 지나친 외로움을 단 한 번도 맛 본 적이 없는 것은.

 

혼자인 것이 자연스럽지만, 반면 타인과 함께 생활하는 것도 내게는 별다른 결심이나 준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일이다. 어느 눈발 흩날리는 저녁 남동생이 가방 두 개를 들고 올라왔을 때도, 올케 될 사람에게 사정이 생겨 몇 달 간 같이 지내야겠다고 동생이 느닷없이 통보했을 때도, 사촌들, 친구들, 동생 친구들이 며칠씩 묵어간다 할 때도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그러라고 했다. 동생과 같이 살던 3~4년 동안 다툼 한 번 없었고, 올케가 집에 머물 때에도 불편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한때는 문학 소녀를 꿈꾸었으나 감수성/창의성 없음을 일찌감치 깨닫자마자 미련 없이 포기했고, 공부를 해볼까 하던 생각은 호기심 제로에 지구력 꽝인 성질이므로 바로 접었으며, 직장에서는 성공해 보리라 다짐했으되 투지나 의욕보다는 게으름이 앞서는 인간인지라 다시 포기. 지금은 그저 잘 먹고 잘 놀면서 최대한 즐겁게 사는 것이 목표이며, 그래도 가급적 (정치적/경제적/생태적 등등으로) 올바른 삶을 살아야겠다고 (느슨하게나마) 생각하고 있다.

 

스스로를 정의하자면 강철 신경의 소유자라고 할까. 혼자면 혼자인대로 누군가와 같이라면 또 그대로,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않으면서/못하면서 상처 받는 일도 없고 아쉬울 것도 없이 지금껏 살아온 것이다. 방바닥에 치약이 밟힐 일도, 외로움을 이기기 위한 방법으로 바퀴벌레와의 공존을 덜컥 인정할 일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삶이다.

 

이 사람 장모씨는, 어느 날 외로움의 정도가 지나쳐서, 방바닥에서 밟힌 치약을 보며 서러워져서 바퀴벌레라는 이질적인 존재와의 동거를 시작했다고 한다. 예민하고 지치기 쉬운 자아는 틀에 박힌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만나는 계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혼자 밥 먹고, 혼자 거리를 걷고, 혼자 쇼핑하고, 혼자 잠드는 게, 뭐 어때서? 맘이 내키면 하고 안 내키면 마는 거지, 그만한 일로 지치고 고민하고, 도와줄 누군가/무언가를 필요로 한단 말이야? 하기야, 나처럼 무딘 감수성과 무(쇠)신경으로 무장한 채 의외성이라고는 전혀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만 세상에 우글거린다면 문학이든 그림이든 예술 자체가 존재할 수 없었을 터다.

 

장모씨는 바퀴벌레와의 생활을 제법 즐긴다. 그(것)는 일상을 나누고 대화를 들어주는 상대니까. 그(것으)로 인해 더 이상 외롭지 않으니까.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염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에게 바퀴벌레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와는 별개로 바퀴벌레는 인간의 영역에 속하지 않은, 다른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경계를 나누어 스스로를 안쪽에 가둔다. 처음엔 야생으로부터 떨어져 나왔고, 다음엔 농촌으로부터 도시를 분리했으며, 그리고는 같은 인간 안에서도 온갖 구분을 만들어냈다. 다른 존재를 배제함으로써 자신을 규정하려는 부단한 노력의 끝자리에 지금 우리들이 서 있다. 장모씨가 공존을 인정한 바퀴벌레는, 그렇게 수없이 구분된 다양한 존재로 읽힌다. 바퀴벌레를 포함한 생태계 내의 다른 생명체 / 여성 / 외국인 노동자 / 장모씨의 또 다른 자아 등등. 그래서 처음 읽었을 때 작가가 과욕을 부린 것이 아닌가 의아했다. 지나치게 많은 얘기들, 넘쳐 흐르는 의미들. 

 

다시 읽으면서, 여러 가지 얘기들을 결국 두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온갖 경계’에 대한 문제 제기와 끝끝내 장모씨의 머리 속에서 떨쳐지지 않은 난 잘못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 장모씨의 여자친구는 그가 경계를 구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 주변 사람들은 장모씨가 그렇게 구분 없이 다른 영역을 넘나드는 것을, 그리하여 그 쪽 영역의 어둠이 자기들에게 전해질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장모씨는 자신의 삶의 방법이 딱히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내가 뭐 어쨌다고 그래.라고 소리쳐 보기도 하지만, 역시 한편으로는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에 일말의 불안함을 지울 수 없고, 그래서 끊임없이 난 잘못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것은 심지어 나처럼 둔하고 속 편한 사람에게조차 낯설지 않은 상황이다. 이 지점에서 비로소 장모씨와 나의 공통분모를 알아본다. 장모씨가 던지는 그 많은 얘기들은 실은 내 생활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문제들이다. 비록 강철 신경을 가진데다 잘 먹고 잘 노는 게 목표라지만 내 주위에도 엄연히 여러 가지 경계가 존재하고, 그 안/밖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고민할 수 밖에 없다.

 

동면에 빠져든 장모씨에게 여자친구는 봄이 다가온다고, 봄은 전투의 계절이라고 얘기한다. 무엇을 위한, 어떤 전투일까. 잊지 않기. 함께 살았던 바퀴벌레를 기억하기, 그로 인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을 기억하기, 해답을 찾기 위한 고민을 기억하기. 나에게도 올 봄은 전투의 계절이 될 듯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chaire > 그래도 해피엔드
'그'와의 짧은 동거 - 장모씨 이야기
장경섭 지음 / 길찾기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독특한 은유와 암시로 가득한 이 책을 읽는 동안, 머릿속에는 두 사람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하나는, '거북이'를 "내 새끼..."라고 호칭하며 오매불망 사랑하는 내 친구. 또 한 사람은 창조를 꿈꾸지만 대개는 자기 한계에 부닥쳐 갇힌 일상을 사는 '나'라는 사람. 두 사람 중에 아무래도 나는 후자에 더 신경이 쓰였다. 외로움에 지쳐본 경험이 여러 번이기는 해도, 내게는 '어머니'라는 이름의, 그 누구도 대신 줄 수 없는 행복을 주는 동거인이 존재하기 때문일 터. 그런데 어쩌면, 만화가가 제시한 외로움의 한계치, 즉 '치약'을 밟는 일이 그리 핍진하고 절절하게 다가오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치약이 밟힌다는 것은, 화자 張謀씨가 바퀴벌레와 동거한다는 이야기만큼이나 다원적인 알레고리를 품고 있다. 치약을 밟는 순간, 장모씨는 자신이 혼돈과 불편, 불안과 동거하는 중임을 깨닫기 때문에 극심한 두통과도 닮은 통증을 느꼈을 테고, 아마도 그것을 '외로움'이라는 암증으로서 (내러티브에 숨결을 불어넣는 장치로서) 진단내린 것 같다. 내 경험상, 외로움에도 층위가 있어서, 마치 지옥으로 가는 계단처럼, 처음에는 그저 감상적인 감정이었던 것이 점점 아래로 내려밟아갈수록 진짜 지옥처럼 '피부에까지 감지되는 아픔'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그래서 초기에 잡아야 한다). 그 지경이 되어버리면, 이성은 자기 살길을 도모하게 되고, 살아야 한다는 본능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이어서, 바퀴벌레 아니라 악마하고라도 '살 수 있다면' 동거를 하고 싶게 될지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서도 외로움의 정체는 여전히 모호하다는 생각.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장모씨는 아는 여자도 있었고, 수봉이형도 있었는데, 왜 저렇게 외로움에 치를 떨었을까 의문스럽기도 했으니(물론, 누가 옆에 있다고 해서 나의 외로움이 사그라지는 것은 아니다만), 바퀴벌레와 동거를 하느니 아는 여자에게 '작업'을 한번 걸어보거나, 수봉이 형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을 텐데?(물론 이상한 인간과의 동거보다는 이상하지 않은 바퀴벌레와의 동거가 나을 것이다만)  게다가 장모씨가 막상 바퀴벌레와 동거하며 '편안해하는' 지점은, 대체로 바퀴벌레가 장모씨의 영혼을 위무하거나 구체적으로 육체를 쓰다듬어줄 때보다는, 바퀴벌레가 '집안청소'를 말끔히 해주고, '설거지'를 도맡아주며, 제때 밥을 챙겨줄 때였다는 점에서, 장모씨가 묘사하려는 인간의 고통은 '혼자라는 외로움'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과 결부된 '혼자 해야 하는 일'의 괴로움에서 잉태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장모씨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는 삶 자체로 작품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그것은 철저히 혼자서 해야 하는 작업이다. 그에게 외로움은 병이자 약인 거다). 아마 그래서 이 작품이 '그림으로 말하는 만화'라는 경계에 매인 컨텐츠 상품이 아니라 '장경섭'이라는 실존하는 만화가의 다큐멘터리로 읽힌 모양이다. 현실에서, 그리고 작품 속에서 장모씨는 끊임없이 고통스러워하는데, 그것은 그가 혼돈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화가로서 그는 세상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 할 이야기가 많다. 아니 많아야 한다. 그런데, 해야 할 이야기 가운데 정말 할 이야기는 무엇일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그 지점에서 장경섭이라는 작가는, 함부로 접근하지 않는 것 같다. 그는 아무 말이나 세상에 던져버리고 싶지 않다. 그는 세상과 아주 그럴듯한 방식으로 소통하고 싶어하는데, 세상은 기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기괴해서 소통 불가일 때가 많다. 작가는 고민스럽다. 그러한 '창조자로서의 고통'이 바로 '외로움'을 낳은 것이고, '그와의 아주 짧은 동거'를 가능하게 한 게 아닐지. 결국 그는 자신의 몸으로, 삶으로 이 만화를 완성했다. 그래서 해피엔드로 마무리된 장경섭의 십 년 세월에 나는 고개숙이며 끄덕거렸고, 진심으로 기뻤다. 그 기쁨 속에는 '산다는 것은 곧 창조하는 것'이라는 평범한 깨달음이 있다. 우리는 대체 왜 태어난 것일까. 그렇다, 우리는 제각각의 삶을 '창조'하기 위해 태어난 거다(제대로 창조가 안 되어 매일매일 헤매며 살지라도!).

시를 쓰든, 소설을 쓰든, 혹은 그것들을 읽는 사람이든 간에, 자기 자신과의 대면에서 날마다 피 흘리며 분투하는 자의 이야기를 보면 어쩔 수 없이 경외감을 갖게 된다. 그 철저한 나르시슴. 장경섭은 그런 면에서 투철하고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다. 자기에의 몰두, 거기에서 창조성은 발휘되는 것이니 그는 옳다. 문을 열면 거기에 죽어 있는 내가 있고, 죽어 있는 나를 보는 내가 또 있고, 죽어 있는 나를 보며 울부짖는 나를 장례치르는 내가 있듯이(이 단편의 제목이 '즐거운 나의 방'인 것에 나는 울컥했다), 삶에서는 우리 모두 '나'를 들고 고민하지 않는가. 내 문제는 무엇인지, 나는 과연 살아 있는지,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그리고 진실하게 '나'를 고민한다면, '타자'에 대한 이해도 가능해진다는, 뜬금없는 결론을, 나는 얻었다.

덧붙여, 바퀴벌레가 등장할 때마다 나는 자주 '이반'들이 떠올랐다. 이 책에서 '바퀴벌레'가 대역해주는 우리 사회의 그림자적 존재들은 많다. 자연이든 사람이든 '소외되는 존재'들은 모두, 우리가 동거해야 할 '바퀴벌레'들일 터이니. 허나, 그 가운데서도 유독 성적 정체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곧잘 차별받는 그들이 맴돈 것은 왜일까. 이반을 인정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요사이는 만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나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 중 하나다. 만화 속의 군중들 역시 '바퀴벌레'의 존재(혹은 동거)를 전혀 이상하지 않게 받아들이고는 있듯이... 문제는 그 다음이다. 받아들이는 거, 인정하는 거, 그것을 넘어서 그들과 '함께 사는' 것, 그들의 몸과 내 남편 혹은 내 아내의 몸을 동일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손잡고 사는 일은 아직 쉽지 않다. 일말의 의혹 없이, 그들에게 손 내미는 일을 연습하는 데 이 책은 매우 유용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욕망의 응달 박완서 소설전집 5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1993년 9월
평점 :
절판


 

 박완서의 소설은 끝까지 읽게 만드는, 읽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흡입력이 있다.

게다가 박완서 특유의 메스를 들이 대는 듯한 미묘한 감정의 묘사와 서술은, 읽는 이의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이것이 아마 박완서 소설의 흡입력의 한 중요한 원인이 되리라.

 

이 이야기를 공 굴리는데 가장 중요한 소재는 ‘호기심’이다. 어떤 것을 목적으로 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나, 그 결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그런 호기심이 아니라, 단순히, 거의 본능적으로 느끼는 호기심. 그래서 그 호기심에 이끌린 행동에 대한 책임을 염두 하지 않는, 유아기적 사고에 바탕을 둔 호기심이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소재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모두 이런 것을 보지 않았는가? 왜, 공포영화에서 주인공이 이상한 소리가 나면 무서워서라도 나가면 안 되는데 최면 걸린 듯 그것에 이끌려 나가다 꼭 변을 당하곤 하는 것 말이다. 그런 심리가 이 소설의 핵심이다.

 

이 이야기의 여주인공 미혼모인 ‘자명’의 성격이 이러한 것이었다. 그래서 앞으로 펼쳐질 일에 대한 대단한 숙고가 없이 거의 마음이 이끌림, 호기심에 따라 행동하고, 그렇게 전개되어갈 인생이 사회적 통념에 비추어 보면 매우 불행한, 굴곡 많은 삶일 지라도 거의 관조하는 듯 한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래서 그러한 굴곡 많은 인생을 경험했지만 그 특유의 성격에 의해 전체적인 이미지는 불행해 보이거나 더럽게 때 탄 것 같지도 않고 오히려 순수해 보인다.

 

이 이야기는 이러한 주인공과 계곡을 막은 큰 저택을 둘러싸고 전개가 된다.

제목처럼 전체적으로 암울한 느낌을 주는 저택의, 막내아들 ‘민우’ 결혼하게 되는 자명.

소설 내내 암울한 느낌을 줌에도 자명의 성격 때문인지 밝음을 느낄 수 있다.

한 편의 추리 소설과 같은 이 이야기는 결국에는 거짓 사랑으로 접근 했었던 민우의 자명과 아들 윤명에 대한 사랑의 확인, 그리고 소희 부인과 배다른 9남매와 저택을 둘러싸고 있던 암울한 응달이 걷혀지면서 이야기는 막을 내리게 된다.

 

난 솔직히 이 스토리 보다는 거기서 풍기는 명암과 인물 성격의 묘사에 더 관심이 있다. 그 느낌을 읽는 것이 더 즐겁고 재미있다.

특유한 감정의 묘사가 탁월한 박완서의 소설.. 내가 안 좋아할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