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chaire > 그래도 해피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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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의 짧은 동거 - 장모씨 이야기
장경섭 지음 / 길찾기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독특한 은유와 암시로 가득한 이 책을 읽는 동안, 머릿속에는 두 사람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하나는, '거북이'를 "내 새끼..."라고 호칭하며 오매불망 사랑하는 내 친구. 또 한 사람은 창조를 꿈꾸지만 대개는 자기 한계에 부닥쳐 갇힌 일상을 사는 '나'라는 사람. 두 사람 중에 아무래도 나는 후자에 더 신경이 쓰였다. 외로움에 지쳐본 경험이 여러 번이기는 해도, 내게는 '어머니'라는 이름의, 그 누구도 대신 줄 수 없는 행복을 주는 동거인이 존재하기 때문일 터. 그런데 어쩌면, 만화가가 제시한 외로움의 한계치, 즉 '치약'을 밟는 일이 그리 핍진하고 절절하게 다가오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치약이 밟힌다는 것은, 화자 張謀씨가 바퀴벌레와 동거한다는 이야기만큼이나 다원적인 알레고리를 품고 있다. 치약을 밟는 순간, 장모씨는 자신이 혼돈과 불편, 불안과 동거하는 중임을 깨닫기 때문에 극심한 두통과도 닮은 통증을 느꼈을 테고, 아마도 그것을 '외로움'이라는 암증으로서 (내러티브에 숨결을 불어넣는 장치로서) 진단내린 것 같다. 내 경험상, 외로움에도 층위가 있어서, 마치 지옥으로 가는 계단처럼, 처음에는 그저 감상적인 감정이었던 것이 점점 아래로 내려밟아갈수록 진짜 지옥처럼 '피부에까지 감지되는 아픔'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그래서 초기에 잡아야 한다). 그 지경이 되어버리면, 이성은 자기 살길을 도모하게 되고, 살아야 한다는 본능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이어서, 바퀴벌레 아니라 악마하고라도 '살 수 있다면' 동거를 하고 싶게 될지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서도 외로움의 정체는 여전히 모호하다는 생각.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장모씨는 아는 여자도 있었고, 수봉이형도 있었는데, 왜 저렇게 외로움에 치를 떨었을까 의문스럽기도 했으니(물론, 누가 옆에 있다고 해서 나의 외로움이 사그라지는 것은 아니다만), 바퀴벌레와 동거를 하느니 아는 여자에게 '작업'을 한번 걸어보거나, 수봉이 형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을 텐데?(물론 이상한 인간과의 동거보다는 이상하지 않은 바퀴벌레와의 동거가 나을 것이다만) 게다가 장모씨가 막상 바퀴벌레와 동거하며 '편안해하는' 지점은, 대체로 바퀴벌레가 장모씨의 영혼을 위무하거나 구체적으로 육체를 쓰다듬어줄 때보다는, 바퀴벌레가 '집안청소'를 말끔히 해주고, '설거지'를 도맡아주며, 제때 밥을 챙겨줄 때였다는 점에서, 장모씨가 묘사하려는 인간의 고통은 '혼자라는 외로움'에서 그치지 않고, 그것과 결부된 '혼자 해야 하는 일'의 괴로움에서 잉태된 게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장모씨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는 삶 자체로 작품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그것은 철저히 혼자서 해야 하는 작업이다. 그에게 외로움은 병이자 약인 거다). 아마 그래서 이 작품이 '그림으로 말하는 만화'라는 경계에 매인 컨텐츠 상품이 아니라 '장경섭'이라는 실존하는 만화가의 다큐멘터리로 읽힌 모양이다. 현실에서, 그리고 작품 속에서 장모씨는 끊임없이 고통스러워하는데, 그것은 그가 혼돈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화가로서 그는 세상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 할 이야기가 많다. 아니 많아야 한다. 그런데, 해야 할 이야기 가운데 정말 할 이야기는 무엇일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그 지점에서 장경섭이라는 작가는, 함부로 접근하지 않는 것 같다. 그는 아무 말이나 세상에 던져버리고 싶지 않다. 그는 세상과 아주 그럴듯한 방식으로 소통하고 싶어하는데, 세상은 기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기괴해서 소통 불가일 때가 많다. 작가는 고민스럽다. 그러한 '창조자로서의 고통'이 바로 '외로움'을 낳은 것이고, '그와의 아주 짧은 동거'를 가능하게 한 게 아닐지. 결국 그는 자신의 몸으로, 삶으로 이 만화를 완성했다. 그래서 해피엔드로 마무리된 장경섭의 십 년 세월에 나는 고개숙이며 끄덕거렸고, 진심으로 기뻤다. 그 기쁨 속에는 '산다는 것은 곧 창조하는 것'이라는 평범한 깨달음이 있다. 우리는 대체 왜 태어난 것일까. 그렇다, 우리는 제각각의 삶을 '창조'하기 위해 태어난 거다(제대로 창조가 안 되어 매일매일 헤매며 살지라도!).
시를 쓰든, 소설을 쓰든, 혹은 그것들을 읽는 사람이든 간에, 자기 자신과의 대면에서 날마다 피 흘리며 분투하는 자의 이야기를 보면 어쩔 수 없이 경외감을 갖게 된다. 그 철저한 나르시슴. 장경섭은 그런 면에서 투철하고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다. 자기에의 몰두, 거기에서 창조성은 발휘되는 것이니 그는 옳다. 문을 열면 거기에 죽어 있는 내가 있고, 죽어 있는 나를 보는 내가 또 있고, 죽어 있는 나를 보며 울부짖는 나를 장례치르는 내가 있듯이(이 단편의 제목이 '즐거운 나의 방'인 것에 나는 울컥했다), 삶에서는 우리 모두 '나'를 들고 고민하지 않는가. 내 문제는 무엇인지, 나는 과연 살아 있는지, 정말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 그리고 진실하게 '나'를 고민한다면, '타자'에 대한 이해도 가능해진다는, 뜬금없는 결론을, 나는 얻었다.
덧붙여, 바퀴벌레가 등장할 때마다 나는 자주 '이반'들이 떠올랐다. 이 책에서 '바퀴벌레'가 대역해주는 우리 사회의 그림자적 존재들은 많다. 자연이든 사람이든 '소외되는 존재'들은 모두, 우리가 동거해야 할 '바퀴벌레'들일 터이니. 허나, 그 가운데서도 유독 성적 정체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곧잘 차별받는 그들이 맴돈 것은 왜일까. 이반을 인정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요사이는 만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나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 중 하나다. 만화 속의 군중들 역시 '바퀴벌레'의 존재(혹은 동거)를 전혀 이상하지 않게 받아들이고는 있듯이... 문제는 그 다음이다. 받아들이는 거, 인정하는 거, 그것을 넘어서 그들과 '함께 사는' 것, 그들의 몸과 내 남편 혹은 내 아내의 몸을 동일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손잡고 사는 일은 아직 쉽지 않다. 일말의 의혹 없이, 그들에게 손 내미는 일을 연습하는 데 이 책은 매우 유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