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깜악귀 > 산다는 것의 공포와 대면하기
'그'와의 짧은 동거 - 장모씨 이야기
장경섭 지음 / 길찾기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1. 95년, 장모씨 이야기로부터

아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95년 당시 인디만화 운동의 경향에 관심을 기울였던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혹은, 당시 5회 발간되고 폐간되었던 인디만화잡지 [화끈]을 보았던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그곳에 [장모씨 이야기]라는 평범해 보이지만 인상이 강력한 괴작이 있었다는 것을.

주인공은 컷 안에 혼자 덩그러니 놓여 있다. 자취방인 듯 하다. 컷 바깥으로 누군가에게 웃으며 말을 거는 주인공.

“에이~ 형은 꼭 그런 쪽으로만 상상하더라!”

그러나 그 바깥의 ‘누군가’는 한번도 컷 안에 들여와주지 않는다. 독자는 오직 주인공 ‘장모씨’만을 본다. 컷 바깥에는 누가 있는가. 독자가 있는가? 아니면 작가가 말을 거는 이름처럼 그냥 ‘수봉이 형’이 있는가? 아니면 그저 혼잣말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컷의 몸짓’으로 그려진 고독의 언어이고, 그 몸짓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시야 바깥의 빈 공간이 가진 바로 그 공포에 대한 것이다. 이 기묘한 스타일의 만화는, 평범한 얼굴을 한 초라한 외판원 같지만 알고 보면 한 없이 기괴한 물건으로 가득찬 홈쇼핑 카탈로그를 독자에게 펼쳐 보였다. 그 만화는 ‘장모씨 이야기’였다.


2. 10년 후, 2005년, ‘장모씨 이야기’ 혹은 ‘그와의 짧은 동거’

‘장모씨 이야기’ 중 ‘그와의 짧은 동거’ 편이 한 편의 장편으로 발간될 예정이다. 이것은 몇 번 연재하고 끊어져 미완성된 이야기로 가득찬 한국 인디가 힘겹게 내놓은 결실 중 하나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은 힘겹다. 10년이나 걸린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어, 우리는 이 작품이 ‘장편’의 형태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을 드디어! 알게 되었다.

만약, 단행본으로 출간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작품을 그저 단순히 고독한 내면을 그린 단편의 연쇄로만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0년 만에 드디어 온전한 작품을 받아본 순간의 감흥은 만만치 않다. 그리고 10년 전 ‘장모씨 이야기’는, 우리가 이전에 알던 것보다 훨씬 풍부한 작품이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자기 자신 밖에 없는 방의 빈 공간에 무엇이 있었는지도 우리는 좀 더 온전히 이해하게 된다. 보이지 않는 그늘에는 무엇이 숨어 있는가? 잔악한 인형 처키나 칼날이 달린 손가락의 프레디?

이 만화를 읽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것은 평범한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공포가 숨어 있는 공간이 아니었을까. 지금 자신이 잘못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 말이다. 그래서, 줄곳 아무런 설명 없이 행해지는 ‘컷의 몸짓’은 산다는 것이 너무도 무섭고 공포스럽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려는 노력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만화가 일상의 공포를 자신의 안으로 온전히 받아들이려는 인간의 몸부림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많은 것을. 드디어 10년 만에.
 

3. 분신(Double)과 변신(Metamophosis)라는 메타포

카프카의 [변신]이 보여준 변신(metamophosis)이라는 메타포는 문학팬들이라면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다음과 같이 유명한 구절로 느닷없이 시작된다.

"어느 날 아침, 잠자던 그레고르가 뒤숭숭한 꿈자리에서 개어나자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기 자신이 하나의 벌레가 되어 있는 것이다. 혹은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도 우리는 많은 변신이라는 메타포를 발견할 수 있다.

장경섭은 보다 애둘러 자기 자신을 유지한다. 그는 인간과는 영 다른 존재를 자취방의 빈 공간, 혹은 컷의 바깥으로부터 불러온다. 그것은 어느날 주인공이 우연히 밟아죽이고만 바퀴벌레의 형체를 하고 있다. 어쩌면 그건 순전히 우연이다. 하여튼 장모씨에게는 그런 형태인 것이 타당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이윽고 둘은 서로 말을 건다.

안녕? / "난 너를 항상 지켜봐왔어"

그래서, 어떻게 둘이 같이 살게 되었는가는 중요치 않다. 우리가 어떻게 산다는 것 자체에 대한 공포와 동거하게 되었는가, 그 기원이 중요하지 않듯이 말이다. 당신의 경우를 봐도 그건 어느 순간에 그냥 등 뒤에 달라붙어 있지 않던가?

바퀴벌레와 장모씨는 친구가 되어 동거하기 시작한다. 둘이 여행도 가고 스타크레프트도 한다. 자신이 벌레가 되어버리는 카프카에 비해 어느 정도 만화적이고 해학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더욱 현실적인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아는 바, 자기 자신에 대한 지독함보다 자신에 대한 나태함이 보다 현실논리에 가깝기 때문이다. 지독한 자는 죽지만 나태한 자는 살아남는다. 작가는 계속 살고자 한다.

작가는 이 ‘타자’와 함께 공간을 같이 감수하기로 한다. 그러나 빈 공간으로부터 불리어져 온 이 존재는 주인공의 고독과 외로움을 재확인시켜준다. 또한, 그것은 주인공 장모씨의 ‘산다는 것에 대한 공포’로부터 불리어온 요물이므로, 당연히 장모씨 자신의 내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공포’를 견디어 내려는,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다시 태어나려는 자신의 무의식적인 노력이 구현된 것이다.

때문에 바퀴벌레는 자신의 ‘분신(double)’이다. (따라서 여기에 등장하는 바퀴벌레를 실제 바퀴벌레의 의인화라고 보는 것은 너무 표면적인 해석일 것이다) 호프만의 [악마의 묘약]이나 에드거 앨런 포의 [윌리엄 윌슨] 등에서 표현된 대로, ‘자신과의 대면’이라는 테마는 초역사적으로 기능하는 일종의 신화적인 메타포이다. 그것은 ‘그와의 짧은 동거’에 나오는 바대로, 나르시스가 호수에서 발견한 또 다른 자기 자신이기도 하다.

자신을 마주하는 것은 가장 커다란 매혹이면서, 동시에 자신에 대한 가장 잔혹한 단죄이기도 하다.


4. 기나긴 잠, 그리고 수태

어떠한 결실도 맺지 못하고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싸운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는 자신을 뜯어고치는 일만은 하고 싶지 않다. 솔직하지 않게 살고 싶진 않다. 그건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단순하게 "그건 아니기" 때문이다.

끝없는 불안과 싸우며 견뎌내기 위해서는 지독함이 필요하다. 뚜렷하게 무엇을 하는 것 같지 않아도 그는 책상 밑에, 침대 밑에 도사린 공포와 기나긴 겨울의 전투를 벌여 나간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과 싸워서 결과를 본 인간은 결국 무엇인가의 마력을 얻는다. 작은 불안이 작은 불씨가 되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아무런 쓸모도 없고 돈이 되질 않는 마력이지만, 그는 그렇게 마법의 소유자가 된다.

우리가 얻은 장편은 그 전투의 산물이다.

그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스스로 회복하길 기다리며 몇 년이고 버티겠노라고 결심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입 밖으로 소리내어 이야기 해 본 적도 없거니와 스스로에게 다짐한 적도 없다. 그에게 그런 것은 그만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까닭이다. 그러나 10년이라는 세월은 결심하거나 하지 않거나 하는 것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그는 그냥 인고해 낸 것이다. 그냥 그래야만 했기 때문이다.

인고한 자에게 복이 있으라. 10년 후의 그는 이제 컷 바깥으로 독자에게 말을 건다. 바퀴벌레는 죽고, 그는 살았다. 그는 자신의 외롭고 불쌍한 동거인을 기억한다. 공포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분신을 불러내고 그것의 죽음을 감내함으로서 드디어 그것을 내화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이제 그의 힘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10년을 하나의 장편으로, 10년 전의 작품에 이어서 그려나간다.

그것이 ‘그와의 짧은 동거’이다. 이 장편이 당신에게 들려주는, 소심한, 아주 소심하고 평범한 이야기이다. 10년 만에. 한 작가가 하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끝내는데 걸리는 시간 치고는 그다지 길지 않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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