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의 짧은 동거 - 장모씨 이야기
장경섭 지음 / 길찾기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국민학교, 그러니까 초등학교 1학년 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방학을 맞아 대구에 있는 친척집에 놀러가는 길이었다. 누구와 동행했는지는 생각이 안난다. 어린아이를 혼자 기차에 태워보내지는 않았을 텐데. 기차 안을 밝히는 형광등 불빛은 어두웠으나 그것이 차창이며 벽면 여기저기에 반사된 탓에 흔치않은 기차멀미까지 일으켰던 것같다. 해가 저물면서 엄마와 떨어져 한참을 있다와야 한다는 두려움이 비로소 실감나게 다가와서였는지도 모른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멀미와 싸웠는지 슬픔과 싸웠는지, 하여간 대구까지 가는 내내 자리를 뜨지 않고 버텼다. 아니, 그 말은 틀린 건지도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 시간 감각이며 공간 감각이 무뎌지더니 사실판단이고 뭐고 몽롱해져버렸기 때문이다. 그 순간 이후로 기억나는 건 오로지 하나뿐이다. 누군가를 향해 휘둘러야 했을지도 모를 주먹이 어느새 스르르 풀어져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는 것. 가위바위보를 할 때처럼 긴장된 손바닥이 아니라 손금이 골짜기로 보일 만큼 어정쩡하게 풀린 손바닥이 무심한 듯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던 기억.

아직도 그 손바닥은 내 팔끝에 붙어 있다. 그에 딸린 손가락으로 지금 이렇게 자판도 두들긴다. 맨 윗 손금이 검지를 타고 올라가는 선명한 세줄짜리 손금도 그대로다. 비록 잔재주는 부족하지만 그런대로 충실한 손이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는, 이것이 왜 여기 있는 것일까 하는 경악에 가까운 낯섦을 던져주었던 녀석의 과거가 생생하다. 창백하면서도 오만한 형광등 불빛 아래 펴져있던 내 손바닥. 목과 어깨와 팔을 거쳐 눈이 붙어있는 얼굴과 분명히 연결되어 있는 그 손이 내것같지 않고 손같지 않고 심지어는 그 무엇과도 같지 않다는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던 그 기억은 거창하게 말해 트라우마에 가깝다. 종종 그것은 불쑥불쑥 되살아나곤 하니까. 롤러 코스터를 타고 있는데도 지붕에 누워 하늘바라기를 하는 기분을 느끼게도 하고, 옆에 누운 사람에게 가끔씩 '누구세요?'라고 물어야할 것만 같은 생각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장경섭의 만화를 보면서 제일 먼저 떠올린 건 이런 '낯섦'에 대한 상념들이다. 그의 만화가 만화라고 보기엔 생경하게만 여겨지는 탓이 약간, 그리고 그가 끊임없이 자기 존재를 타자화하려는 미련퉁이인 탓이 절반, 자신의 미련함을 무심한 다수에게 어떻게든 적응시켜보려는 노력이 또한 얼마나 생뚱맞게 받아들여질 것인가 하는 생각이 또 찔끔, 하여간 리뷰를 쓸만큼 정리되지 않은 먼지덩어리같은 생각들이 그 낯섦의 실체다. 그러면서도 그 '낯섦'이 '기시감'과 쉴새없이 얽혀든다는 불편함 또한 잘못 먹은 냉모밀처럼 명치 언저리에 자리하고 있다. 장경섭의 내러티브가, 장면들이, 그의 생각들이 출구를 찾지 못하고 돌고 돌며 시간의 흐름을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있는 탓이고, 그것이 결국 풀릴 수 없는 숙제라는 체념에 공감하고 있는 탓이기도 하겠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바퀴벌레로, 겨울잠을 자는 곤충으로, 수십개로 분열된 똑같은 나로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정직하게 말해 '낯설게 하기' 혹은 자신의 타자화라고는 볼 수 없을 터이다. 내 손이 내 손이 아니었던 그 기억과는 달리, 장경섭의 타자는 결국 자아일 뿐이다. 그중 아무도 그에게 낯선 존재가 아니다. 자기 경계 밖의 진짜 '타자'는 물론, 자신의 수많은 분신의 타자화에도 실패한 작가에게 남은 것은 자기 존재에 대한 물음 뿐이다. 그는 끊임없이 되뇌인다 : 난 잘못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이리 살아서 될까.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그의 독백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존재'에 대한 물음이라 보기도 힘들다는 걸 알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분열된 자아들은 다소 생뚱맞다. 실제로 그것들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라는 물음을 해소하는데에는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늘상 반복되는 그 물음들의 구현체일 따름이다. 이런 상태의 출구란 결국 그 물음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분신들을 털어내고 창문을 열기 - 이것이 이 만화의 종결이다. 하지만 장경섭의 지병은 수이 낫는 게 아니라서, 뒤이어 나오는 단편들에는 여전히 우울하고 반복적인 분신들이 살아있다. 그러니 나는 그에게 말하고 싶다. 이제 그 물음을 그리는 일을 그만하라고. 해답을 찾을 수 없으면 묻는 일도 그만하라고. 그 해답이란 건 당신처럼 존재감이 희박한 사람에게 주어질만한 것이 아니라고.

그가 자신의 물음을 넘어서는 발언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가 '돈'에 대해서 말할 때, '먹고 사는 문제'를 토로할 때, 그리고 문명과 곤충에 대해 읽은 것을 들려줄 때이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생각에 머무적거리고 있는 사람에게 가난은 운명적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운명적인 가난이, 그가 겪어야 했던 어떤 사회적 부조리가 앞섰는지도 모르겠다. 여하간에 그도 먹고 살아야 한다. <도쿄타워>의 연인들처럼 궁상의 그림자 하나 없이 판타지 속을 헤엄치기엔 장모씨와 장경섭의 거리가 너무 짧다. 내가 이리 살건(바퀴벌레와 동거하건) 말건, "내가 뭐 어쨌다고 그래"라고 호기롭게 외쳐보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그는 고개를 숙인다. 이러고 산다고 돈이 들어오기를 하나...... "그러는 건 사는 걸 너무 우습게 여긴 건데"라고 제법 심각하게 생각해보기도 한다. 밥벌이란 엄연한 현실 앞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은 때론 사치가 된다는 걸(만화가 되어 돈으로 변신하기도 한다만) 그 자신도 아는 것이다. 인터뷰에서도 말하듯, 바퀴벌레와 동거하게 된 얘기보다는 그와 헤어지는 과정에 주안점을 두었다는 것은 그의 현실인식의 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그의 지병은 여전하지만.

'그', 바퀴벌레와, 인간과 공존하거나 심지어는 인간으로 변신한 벌레들이 장경섭의 카프카적 판타지의 영역에 놓여 있다면, 그가 인용하는 책 속의 벌레들은 보다 현실적이다. 지구상에서 제일 개체가 많다는 종족 곤충, 인간은 자연의 연쇄살인범답게 그들을 박멸하는데 힘을 쏟는다. 특히 바퀴벌레나 모기, 파리, 개미처럼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는 곤충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인류의 그런 행태에 대해 장경섭은 순하게 생긴 얼굴에 힘을 주고 열변을 토한다. 인간은 지금 이 순간에나 인간일 뿐 다른 존재일수도 있었다는 윤회론적 관점을 포함, 인간 역시 곤충이나 마찬가지로 이 지구상의 한 생명일 뿐이라는 인식과 인류가 자연에 대해 범하는 죄를 생각하면 사라져 마땅하다는 급진적인 사상마저 보인다. 인간과 문명에 대한  혐오증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이런 생각들이 그의 '어떻게 살 것인가'와 어떤 식으로 결부되는 것인지, 연결되어 있기나 한지 살짝 궁금하다. 그가 좀더 뻔뻔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으면 환경운동가라도 됐을텐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만화가다. 가끔씩 바깥일로 침을 튀기기는 하지만 그의 관심사는 늘 자기자신이고 자신의 삶이다. 그러면서 그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자위행위'라 표현하기도 한다. 자신과의 교미인지 자기에 대한 강간인지 그것조차 아리송한 자기탐닉이다. 그것이 차라리 자기애라면 편하기라도 했을 텐데. 그러지도 못하는 장경섭이 딱하다. 내가 가는 길이 어쨌든 옳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그는 또다시 묻곤 한다 : 어떻게 살아야 하나...... 정말 딱한 노릇이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고, 내 해석은 늘 틀려먹었다면, 그냥 그대로, 자기 잘난 맛에라도 살아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거, 나도 안다. 아직도 가끔씩은 손바닥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버릇이 있고, 내가 서 있는 곳에 대해 자신있게 말할 줄 모르는 사람이 그런 충고를 하는 건 모순이라는 것도 안다. 그런데 나는 내 손바닥을 보면서 어떤 질문을 하고 있는지, 문득 그게 궁금해졌다. 이게 나 맞아?라는 낯섦의 감정을 넘어선 그 어떤 질문이라도 해본 일이 있는지. 어떻게 살것인가,라는 물음속에서 뱅뱅돈다고 장경섭의 궁상을 타박하기 전에 나 자신은 삶에 대해 어떤 질문을 진지하게 해 본 적이 있는지. 십년을 붙들고 있었다고 했다. 문득 장경섭의 선 가는 얼굴 뒤의 고집같은 걸 느낀다. 미덥지는 않지만 감탄은 한다. 기대고 싶지는 않지만 존경만은 보내주고 싶다. 삶에 대해 질문할 줄 아는 사람조차 되지 못한 나의 손바닥에 드리웠던 형광등의 그림자를 걷어내야겠단 생각이 든다. 삶은 그리 만만한게 아니란 걸 온몸으로 보여주는 사람 앞에선 그 손바닥을 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발 아래가 흔들리는 느낌이다. 젠장.

 

ps. 별 하나가 빠진 이유에 대해서 : 별 다섯개를 주어야한다는 압력 같은 걸 받은 적은 없지만, 별을 더해나가기보다는 빼가는 습관이 있는 사람으로서 몇마디 덧붙인다(이것도 참 나쁜 습관이다. 흠을 잡으려고 리뷰를 쓰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장경섭이 철학자나 웅변가가 아닌 만화가로 자리잡기로 했다면, 내러티브 외에도 어떤 정도의 예술적 성취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예술적'이라는 말은 참 모호하지만, 그림을 빼놓고도 그의 말을 알아먹을 수 있다면 그는 왜 만화가여야 할까,라는 생트집과 관련지어 생각하면 되겠다. 다만, 트집의 다른 말은 기대라는 것만 알아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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