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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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어지러울 정도로 빨라 산속에서 혼자 흙집을 짓고 사는 분을 알고 있다. 전화로 질문을 하면 편지로 답신을 보내오시는 분이고, 햇빛이 있을 때에만 활동하시기 때문에 저녁7시면 하루종일 가장 수고한 발을 정성스레 닦고 저녁식사를 한 후 백열등 아래 편지를 쓰거나 책을 읽으시고 9시면 잠자리에 드시는 분이다. 두달에 한번 전기세를 3천원 정도를 내신다고 하고, LPG 가스는 2년만에 처음 교체했다고 하신다. 난로에 천천히 밥을 하고 국을 끓이시는 그 분.. 나는 그 분이야 말로 느림을 몸소 실천하며 사시는 분이라고 생각해왔다. 모모를 읽으면서 이 분이 모모를 참 많이 닮아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모를 읽으면서 가장 와 닿았던 부분이 있다. 카시오페아와 모모가 호라 박사가 계신 곳을 가기 위해 이동하는 중에 빨리가면 느려지고 느리게 가면 빨라지는 구간이 있었는데  난 이 부분에서 미하엘 엔데가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느림, 여유, 더불어 삶 바로 이러한 것들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거다.

지금 잠시 숨을 고르고 뒤를 한번 되돌아 보면 세상이 얼마나 빠르게 지나가는지 알 수 있다. 불과 7-8년전만 해도 삐삐는 최첨단의 산물이였다. 그러나 지금 아직도 삐삐 사용하는 사람이 있느냐? 라고 물을 지경이다. 우리나라 인터넷 사용자들이 웹페이지가 넘어갈때 다시 클릭 안하고 참으며 기다릴 수 있는 한계가 3초에서 2초로 줄어 들었다고 한다.  우표값이 얼마인지 아는 사람도 드물고 e-mail의 영향으로 크리스마스면 북적이던 카드 코너도 예전에 비해 확연히 줄어든 모습이다. 무엇이 이토록 우리에게 빠르게 빠르게를 강요하는 것일까? 정말 회색신사들이 우리의 시간을 잡아 먹고 있는 것일까?

모모를 읽으며 숨을 고르게 되었다. 그리고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다. 느리게 산다는 것은 게을러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간을 자신에 맞게 잘 활용하며 사는 것이다.  타인이 시간을 이렇게 쓴다하여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이렇게 해서 성공했다! 하여 그 비결을 좇아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기준으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 그것이 바로 느리게 사는 진정한 비법인 것이다. 모모와 함께 미소짓고 행복해 하는 이들을 보면서 나의 삶도 너무 성공한 사람만 좇아가다가 가랭이 찢어질 짓 하지말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하며 행복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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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엄마는 길들여지지 않았다.
십시일反 - 10인의 만화가가 꿈꾸는 차별 없는 세상 창비 인권만화 시리즈
박재동 외 지음 / 창비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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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봄에 내가 만드는 잡지의 특집 주제는 ['대한민국'의 상처와 희망]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 땅에 살고 있는 50인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이 땅에 살면서 그것이 역사적 현실이든, 정치적 현실이든 간에 받은 고통과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자는 기획 취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는 대한민국의 국가 형성기로부터 시작된 역사적 상처들 -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제주4.3,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학살 피해자 등 - 과 현재 노동하는 대한민국의 슬픈 자화상들 - 외국인 이주노동자, 노동자, 농민, 비정규직 노동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등 - 인권과 복지에 결부된 사람들 - 에이즈 감염자, 성전환자, 동성애자, 도시 빈민,  장애인, 납북자 가족, 탈북자 등 - 이외에도 청년 백수 등등 많은 이들의 생생한 육성을 담았다.

이 이야기를 구태여 하는 까닭은 국가인권위원회의 기획으로 십인의 만화가들이 모여 우리 사회의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그 뜻이 비슷하다 여겨져서이다. 나는 이 책을 "평화박물관"에 갔다가 그야말로 십시일반으로 이 단체를 후원한다는 생각에서 구입했던 몇 권의 책 가운데 하나다. "평화박물관"은 서울 조계사 맞은 편 골목에 숨어 있으니 혹시 이 거리를 걷게 되시거든 한 번쯤 들러보는 일도 좋겠다. 이 책의 부제는 "10인의 만화가가 꿈꾸는 차별 없는 세상"이고, 이 책에 참여하고 있는 만화가들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박재동, 손문상, 유승하, 이우일, 이희재, 조남준, 홍승우 등을 비롯해 장경섭, 최호철, 홍윤표 등 아는 이들에겐 유명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에겐 아직은 낯선 이름들도 있다.

먼저 한겨레 그림판으로 한동안 우리들의 만성 변비 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해주는 통쾌함을 선사했던 박재동의 낯익은 카툰 형태의 그림들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 사회의 피라미드 구조를 잘 보여주는 "삶의 무게"는 현실의 먹이사슬 구조를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그는 중산층 화이트 칼라 남성을 떠 받치고 있는 중산층 여성을 다시 받쳐들고 있는 가난한 여성, 그리고 다시 이 여성을 떠받들고 있는 여성이자 가난하고, 외국인 노동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종종 우리들은 일제의 조선 침탈을 만행이라 손쉽게 규정지으면서도 미국의 이라크 침략이나 우리의 이라크 파병에 대해선 손쉽게 눈감는다. 멀리 파키스탄과 인도의 아동 노동에 대해, 아프리카 소년 용병에 대해서는 아무런 편견없이 분노하면서도 스타벅스 커피 한 잔은 개인의 취향 문제로 가볍게 넘어갈 수 있다. 물론, 이런 발상 자체가 옹졸한 짓인지도 모르겠다. 빈곤의 피라미드가 저와 같을 진대 그 피라미드로부터 뉘라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욕망이 발가벗고 달릴 때, 여기에 슬쩍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양심의 가책이라는 제동 장치마저 없이 자유로울 때 우리의 폭주는 무한을 질주하게 된다.

난 개인적으로 홍승우의 애독자 가운데 하나다. 그가 좋은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가 적당히(?) 건강하다는 것, 이것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여성문제에 대해 그나마 양심적인 반성을 하고 있는 남성이자 동성애에 대해서도 비교적 관대한 시선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적당히(?)라는 수식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겨져 있으며 여기에는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그가 진출한 지점 이상 인식하고 있지 못함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책의 42-45쪽에 담긴 작품 "Power of Love"는 서로 사랑을 느끼는 두 남녀가 있다. 다음 컷에서 남성은 제주도 신혼 여행지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기념사진 같은 포즈로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러나 여성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발목에 죄수처럼 커다란 족쇄가 채워져 있는 것이다. 그러자 남성은 톱과, 절단기, 화공약품 등 온갖 것을 이용해서 여성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를 떼어내려 한다.

결국 성공하지 못하자 이번엔 남성이 여성의 무거운 족쇄를 부둥켜 안고 다시 한 손으로 아까의 그 손가락 포즈를 취한다. 방향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의 남성 화자는 계몽자의 위치를 갖는다. 그런데 이 포즈는 과연 바른 것일까? 아마도 여성주의적 시각에 대한 이해가 조금 더 깊었다면 이런 포즈, 이런 성역할 분담은 쉽게 나오지 않을 것이다. 물론 결론부에 가면 지쳐버린 남성을 헐크처럼 인상을 쓴 여성이 자신의 족쇄와 남성까지 들쳐메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물론 작가 홍승우가 여성주의의 눈치를 봐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쩐지 남성과 족쇄까지 엎고 걸어가는 여성의 걸어가는 방향이 마음에 걸린다. 여성주의 혹은 여성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표명하는 것은 남성, 혹은 남성 작가의 입장에서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한 번도 진지하게 여성(역할)이 되어 본 적이 없으며, 그들과 시선을 일치시켜 보려는 경험이 부족한 탓이리라.(혹, 어떤 이는 그러면 어떻게 하잔 말이냐고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글쎄, 어쩌면 좋을까... 나라면 그녀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부터 먼저 물었을 것 같다. 쫌 그런가? ^^;;; 하긴 이런 이야기는 홍승우의 작품이니까 할 수 있는 투덜거림인지도 모르겠다.)

전에도 몇 번 이야기한 바있지만 내가 요근래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조남준이다. 이번 작품집 "십시일반"의 뛰어난 작품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 역시 조남준의 것이었다. 그는 촌철살인의 위트와 날카로운 현실감각 그리고 문학적 내러티브 구조를 잘 버무려내는 능력이 특히 뛰어난 작가다. 이번 작품집에는 모두 두 편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하나는 "1단지 60평 이상, 2단지 40평 이상, 3단지 20평 이상"이란 식으로 계층서열화된 아파트 단지에서 겪게 되는 차별과 배제의 문제를 잡종견인 누렁이에 빗대어 유머러스하나 날카로운 현실풍자를 담은 작품이고, 두 번째 작품인 "누렁이2"는 가부장적 폭력 앞에 무차별로 노출된 어머니와 딸의 당당한 가출을 그리고 있다.

첫 장면에서 우리는 한 시골 '소년'이 울먹이며 누렁이를 애타게 부르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리고 개울가 저 멀리서 개의 신음소리를 듣게 된다. 달려간 나는 아버지가 몇몇 남자들과 더불어 개 한 마리를 그야말로 복날 개패듯이 늘씬하게 패주는 장면을 발견한다. 누렁이는 나('소년')의 개였다. 정둘 곳 없던 내가 주워 밥을 주고, 운동시켜 보살핀 누렁이를 아버지가 친구들과 보신탕을 끓여 먹기 위해 그렇게 매 타작을 가하고 있었던 거다. 아버지의 친구가 묻는다. "성희가 알면 어쩔려구 그래?" "무슨 상관이야?" "그건 그렇구 개 패는 솜씨는 따로 있구만." "평소에 북어대가리하고 마누라 패던 솜씨지. 여자와 북어는 삼일에 한번씩 패야 길들일 수 있다구!"

나는 누렁이를 도와줄 수 없었다. 홀로 죄책감에 사로 잡혀 울고 있는데 누렁이가 줄을 끊고 도망가고 있었다. 다리 하나가 부러진 듯 세 다리로만 기어서 도망치고 있었다. 아버지 친구가 누렁이를 잡으러 가려 하자, 아버지가 막아선다. "봐라, 개새끼가 달리 개새끼여? 개새끼들은 주인이 오라면 다시 오게 돼 있어" 아버지는 몽둥이를 뒤에 숨긴 채 누렁이를 부른다. 작가 조남준은 컷 분할을 통해 점점 누렁이의 눈을 클로즈업해 보여준다. 눈물이 질질 흘러내려 공포에 질린 누렁이의 눈. 그러나 누렁이는 주인의 부름을 거절하지 못하고 주인을 향해 되돌아간다. 그리고 결국 누렁이는 아버지에게 잡혀 죽고 만다. 그 날밤 아버지는 술에 만취해 돌아왔고, 언제나처럼 엄마에게 매질을 가했다. 다음 장면에서 잠이 든 아버지를 버려두고 엄마는 짐을 챙긴다. 엄마는 나(성희)에게 같이 가겠느냐고 물어본다. 성희는 당연히 어머니를 따른다. 아버지가 달려나와 엄마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한다. "여보, 내가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럴께. 응, 죽을 죄를 졌어." 그러나 어머니는 아버지를 뿌리치고 길을 나선다. 등 뒤로 아버지의 고함 소리가 들린다. "그래, 잘 되나 두고 보자! 사내 아이 하나 제대로 낳지도 못하는 거 가버려라!"

조남준은 자유롭게 달려나가는 어린 나(성희)를 그려놓고, 옆에 이런 지문을 삽입한다.

이제 사내아이처럼
행동 안해도 된다는 생각에
아주 즐거웠다.

그동안 엄마와 내가
구박에서 벗어나는 길은
내가 사내아이처럼
행동하는 것인 줄 알았다.

엄마는 길들여지지 않았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기획한 이 작품집에는 이외에도 외국인 이주노동, 학력, 빈부, 성 차별 등 다양한 차별의 문제들이 감동적인 이야기들과 함께 담겨 있다. "십시일반"이란 본래 열 숟가락으로 한 그릇의 밥을 만든다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 말이 어쩐지 "行百里者半於九十"이나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란 실천 논리처럼 들렸다. 앞의 말이 백리를 가고자 하는 이는 구십리를 갔을 때 반을 왔다고 한다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라면 뒤엣말은 말 그대로 천리를 가는 걸음도 그 시작은 한 걸음부터란 말이라 굳이 뜻을 따지자면 서로 매우 먼 말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이 이유야 어찌됐건 간에 '실천'이 중요하단 말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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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아픔과 슬픔을 극복하는 냉혹?!
쥐 I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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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무렵 뉴욕 레고 파크. 여름이었다고 기억된다. 내가 열 살인가 열 한 살이었을 때…. 난 하우이, 스티브와 어울려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는데 그만 스케이트 끈이 끊어지고 말았다.
“야! 얘들아! 기다려.”
“꼴찌다! 꼴찌! 하하하”
“같이 가! 얘들아.”
아버진 마당에서 뭔가를 고치는 중이셨다.
“마침 들어오는구나. 이리 와서 이것 좀 잠깐 잡아주렴.”
“훌쩍, 네?”
“아티, 그런데 너 왜 우는 거니? 나무를 잘 붙들려무나.”
“제가 넘어졌는데요. 친구들이 절두고 가버리잖아요.”
아버진 톱질을 멈추셨다.
“친구? 네 친구들?”
“그 얘들을 방 안에다 먹을 것도 없이 일주일만 가둬놓으면….”
“…그 땐 친구란 게 뭔지 알게 될 거다.…”
<1권 본문 5-6쪽>

아트 슈피겔만의 『쥐(Muas)』는 모두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은 아버지 블라덱 슈피겔만의 청년기인 1930년대 중반부터 1944년 폴란드의 유대인 게토에 머물던 시기를 다루고, 2권은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작가는 ‘마우슈비츠’란 익살을 부리기도 하지만) 수용소에서 극적인 생존에 이르는 시기를 다룬다. 그러나 아트 슈피겔만의 『쥐(Muas)』는 과거사를 연대기적으로 구성하는 단순한 회상투로만 구성되진 않는다. 우리는 『쥐(Muas)』를 통해서 작가인 아들 아트 슈피겔만이 아버지 블라덱 사이에 놓인 경험의 차이, 감정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그 이유는 작가가 『쥐(Muas)』를 통해 일정하게 의도하는 바가 성공적이었음을 뜻한다.

무엇보다 아트 슈피겔만의 『쥐(Muas)』가 홀로코스트를 다룬 수많은 작품들과 다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이 작품이 과거와 현대를 번갈아 가며 대비시키고 있는 구조를 취하는데서 발생한다. 즉,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나(작가)와 과거 아우슈비츠에서 생환한 아버지 블라덱 사이의 현재적 갈등 구조는 끝내 해결되지 않지만, 작가는 『쥐(Muas)』의 작업을 위해 사이가 결코 좋을 수 없는 아버지를 정기적으로 방문해야만 한다. 두 사람의 사이가 좋을 수 없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궁극적인 원인은 앞서 인용하고 있는 『쥐(Muas)』의 첫 도입부에서 이미 극명하게 드러난다.

유대인 강제수용소의 체험을 나에게 최초로 각인시켜준 인물은 우리에게도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빅토르 프랑클(Viktor E. Frankl) 박사였다. 그는 이 책에서 죽음의 유대인 강제수용소(실제로는 가스처형실을 갖춘 유대인 최종해결시설)에 갇힌 수인들에 대해 외부인들은 선입견을 가지기 쉽다고 말한다. 그들은 “죄수들 사이에 불붙는, 생존을 위한 격렬한 투쟁”에 관해 거의 모르고 있으며, 매일 끼니와 자기 자신을 위한, 친구를 위한 무자비한 투쟁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수용소에 갇힌 모든 사람들이 한 사람이 구원받으면 다른 한 명의 희생자가 채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의 이름이나 자기의 친구를 희생자 명단에서 지우려고 아우성을 쳤다는 사실 말이다. 빅토르 프랑클은  결국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수년간 끌려 다닌 끝에 삶을 위한 투쟁에서 도의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수인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고, 이들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잔혹한 폭력, 도둑질, 심지어는 친구까지도 팔아 넘겼다.

아버지 블라덱이 바로 그런 경험들을 통해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생존자였다. 전후 세대인 아들 아트와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아버지 블라덱 사이에는 이렇게 경험하지 않으면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커다란 간극이 있었고, 이 두 사람의 간격을 회복하기 어렵게 만든 것은 아트 슈피겔만이 스무 살 때 겪은 어머니 안나(아냐)의 자살이었다. 물론 어머니의 자살이 블라덱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을 묶어주던 하나의 울타리가 무너진 것이다. 우리는 이 작품 『쥐(Muas)』가 단순히 히틀러의 만행을 그림으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홀로코스트에 대해 반성을 촉구하는, 좋은 의도를 지니고 있으나 그만큼 그저 그런 교훈적인 유형의 만화가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작품은 그런 의도(그런 의도도 있겠지만)로 그려진 것이기 보다는 아트 슈피겔만이 아버지 세대와의 일정한 단절과 소통, 이해를 위해, 다시 말해 스스로의 정리를 위해 그린 작품이란 느낌이 더욱 강렬하다.

그는 자신과 다른 체험을 가지고 있는 부모 세대와 대화함으로써 끝끝내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았던 아버지 블라덱을 이해하게 되고, 단절을 경험한다. 추측컨대 아마도 그는 이 작업을 통해 성장했을 것이다. 사실 나는 아버지 블라덱의 삶에 대한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 살아온 과정이 너무나 각박했던 이들 가운데 블라덱이 거쳐 온 극단적인 체험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이와 흡사한 태도를 지닌 이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당장 우리의 조부모 세대, 부모 세대 혹은 앞으로 우리들도 우리의 아이들에게 이와 흡사한 이야기를 할지 모른다.

나 역시 생활보다는 생존을 우선해야 했던 체험이 있었고, 이 무렵 내가 즐겨 입에 담던 경구 “강한 자이기 때문에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았기 때문에 강한 것이다.”란 경구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말이었다. 일단 살아남는다는 것, 그것은 어떤 비굴이나 치욕, 폭력도 감내할 만한 가치 있는 일로 여겼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와 같은 태도만이 현실적이고, 어른스러운 자세라고 여겼던 것이다. 아픔과 슬픔을 극복하는 냉혹함만이 삶의 진정한 자세라고 여기는 동안, 나는 주변에서 순수나 소박한 낭만을 이야기하는 이들을 얕잡아 보았고 경멸했다. 그들은 삶의, 현실의 냉혹함을 모르는 철부지 어린애 같은 존재들이라 여겼고, 결국엔 삶의 과정에서 도태될 것이라 믿었다. 아버지 블라덱이 어린 아들 아트에게 했던 말 “친구? 네 친구들? 그 얘들을 방 안에다 먹을 것도 없이 일주일만 가둬놓으면…. 그 땐 친구란 게 뭔지 알게 될 거다.…”와 같이 말이다.

그러나 아트 슈피겔만의 『쥐(Muas)』는 공개할 필요 없을, 어찌 보면 아우슈비츠를 드러내는데 도리어 군더더기 같은 대목들에서 도리어 진실을 보여주는 미덕을 지니고 있다. 아버지와 자식의 갈등, 아버지가 청년기에 했던 연애 이야기, 어머니의 자살, 그리고 아버지 블라덱 자신이 유대인이란 이유로 가스실에 보내질 뻔 했던 경험에도 불구하고 흑인종에 대해 지닌 편견들, 마트에 가서 이미 개봉한 음식물을 바꿔오는 인색함 등등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우리는 블라덱과 아들의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로, 그들의 이야기가 지난 한 시대의 과거사가 아닌 오늘에도 이어지는 이야기일 수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더 깨우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잔혹한 시대를 살더라도 “인간의 구원은 사랑으로, 그리고 사랑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빅토르 프랑클이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까닭,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해서 존립하는 것이다. 나의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러한 사실을 알았다는 것에 조금도 구애되지 않고 그녀의 모습을 관조함에 여전히 내 자신을 송두리째 바쳤을 것이며, 그녀와 나의 정신적 대화는 전과 다름없이 생생했을 것이며 만족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그대의 가슴에 새겨주소서. 그러면 사랑은 죽음과 같이 강해지리다.” 그는 F. 니체의 말을 인용해 (비록 강제수용소에서의 삶과 죽음의 과정이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긴 했으나)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그 말은 “살아갈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어떠한 상황에서도 견뎌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삶이 우리에게 거는 기대다. 그렇기에 우리가 삶의 도상(途上)에서 받게 되는 가장 중요한 질문들은 대개 “어떻게”가 아닌 “왜”이다.

아버지 블라덱의 냉정하고, 각박한 심성과 삶의 자세를 우리는 『쥐(Muas)』의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그를 둘러싸고 있었던 여러 조건들 속에서 그의 기대를 배신했거나 믿음을 버림받았던 무수한 경험들이 그를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었음을 알게 된다. 아우슈비츠의 유대인들이 숱한 배신과 희망의 박탈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것을 어찌 과거의 일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 임금 노예로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 채 살아가길 강요당하는 현실에서도 역시 배신과 희생은 반복된다. 그러나 블라덱이 끝끝내 살아남을 수 있었고, 살아남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던 까닭은 바로 그의 사랑하는 아내 ‘아냐’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물론 블라덱의 이런 태도를 지긋지긋한 가족주의의 발현이라고 간단히 치부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오로지 인간만이 자신이 아닌 타인(가족을 포함해서)과 공동체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타인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자만이 타인의 종이 되기를 거부할 수도 있는 법이다. 지금은 비록 아우슈비츠가 인류에게 별다른 교훈을 주지 못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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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으로 느끼지 않은 시간은 모두 없어져 버리지. 장님에게 뮤지개의 고운 빛깔이 보이지않고, 귀머거리에게 아름다운 새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과 같지. 허나 슬프게도 이 세상에는 쿵쿵 뛰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눈 멀고 귀 먹은 가슴들이 수두룩하단다.   21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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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으로 느끼지 않아 버려진 나의 시간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귀먹은 가슴... 난 오늘도 그런 가슴을 가지고 산 것은 아닐까..

지금 바로 이 순간, 이 순간이 참 소중하게 느껴지는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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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9시만 되면 여지없이 꿈나라로 가시는 울 시어머니께서 10시가 다 되어 전화를 하셨다. 내일이 음력 2월 1일인데 콩 볶아 먹는 날이란다. 콩이 없으면 잡곡이라도 볶아서 한 움큼 먹고 출근시키라는 것이다 생전 듣도 못한 풍습인지라 네이버 백과 사전에게 물어 봤다

●볏가릿대 풍속

농가에서 정월 보름날 하루 전에 볏짚단의 밑 부분을 묶고 그 안에 벼·보리·조·기장·수수·콩·팥 등 갖가지 곡식을 이삭채 싸서 긴 장대 끝에 매달아 안채 한 귀퉁이나 외양간 옆에 높이 세운다. 이것을 볏가릿대라 하는데 곡식을 넣어 묶은 짚단 밑에 목화송이가 주렁주렁 달린 목화를 매달기도 하고 또 새끼줄을 여러 개 늘어뜨려 놓기도 하며,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가지 많은 나무에 여러 곡식이삭과 목화송이를 장식하여 세우기도 한다. 정월 대보름날이 되면, 새벽 일찍이 집안 아이들로 하여금 볏가릿대 주위를 돌면서 풍년을 기원하는 노래를 해가 뜰 때까지 부르게 한다. 볏가릿대는 음력 2월 1일 농사를 시작하는 머슴날에 거두는데. 이때 짚단 안에 넣었던 곡식으로 떡을 만들어 먹는다. 이 볏가릿대 풍속은 한강 이북에서는 볼 수 없고 한강 이남의 영호남 지방에서만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것은 우리민족의 고대 생활에서 유래된 고유의 풍속인 것을 알 수 있다.
---------------------출처 : 네이버 http://blog.naver.com/voreva1027?Redirect=Log&logNo=120021328035

음... 음력 2월 1일이 머슴날이란다.. 볶아 먹는건 아니고 떡을 해먹는 날이네. 어쨋든..아니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이런것까지 다 챙겨야 하는가..이궁.. 그래도 군말 없이 네~ 라고 대답했고 좀전에 콩을 볶아 잘 두었다. 내일 아침 태양님 출근할때 먹일 요량으로... 이공..늘 생각하는 바이지만 아는것은 힘이 아니라 병이 될때가 더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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