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굴 제국의 역사 - 인도를 지배한 마지막 거대 제국! 황금과 피로 쓴 제국의 역사, 세계를 압도한 찬란한 문명의 절정 더숲히스토리
마이클 피셔 지음, 최하늘 옮김, 이옥순 감수 / 더숲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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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수업에서 무굴 제국에 대해 배운 적 있다. 인도의 마지막 제국으로 악바르 대제 시절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대영 제국에 멸망한 나라. 훗날 무굴 제국이 몽골족의 후예가 세운 나라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무굴 제국에 대해 아는 전부다. 그리고 무굴 제국의 역사 개설서가 나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무굴 제국은 일정한 엘리트층과 거의 단일 종족으로 구성된 군대를 거느린 토착 제국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무굴 왕조는 다양한 문화권과 집단 중에서 취사선택했으며, 왕조 역사 내내 군주권이 어디에 있느냐에 긴장이 계속되었다. (P.24, 들어가며)

 

무굴 제국은 인도의 토착 제국이 아니라는 점이 이 나라의 운명과 사후 평가를 좌우한다. 인도인에게 무굴 제국은 외부세력이다. 본디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 지역에 거주하던 바부르 일족이 세력다툼에 밀려 남쪽으로 내려와 힌두스탄을 공략하였다. 대개의 유목 제국은 농경 문화를 약탈하고 물러나는 게 일반적이지만 바부르는 아예 힌두스탄에 자리 잡고 나라를 세웠으니 그게 바로 무굴 제국이다.

 

무굴 제국은 끊임없이 영토 확대를 도모하였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를 포함하여 북인도 전역을 손에 넣었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중인도를 지배하기 위해 수많은 희생을 치렀다. 이것은 그들의 선조인 칭기즈 칸과 티무르와도 흡사한데, 유목민족의 속성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통치 능력이 갖추어지지 않은 영토 확장은 사상누각에 불과한데, 끊임없이 생기는 반란을 다스리기 위하여 군주는 항상 국토를 종횡무진 누벼야 하기 때문이다.

 

무굴 제국의 황제들은 항상 사마르칸트를 마음의 고향으로 간주하였다. 제국의 힘을 더 키울 수만 있다면 언제라도 잃어버린 고향을 수복하리라 하는 마음은 바부르부터 최소한 샤 자한까지는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왜 자신들이 지배하는 인도에 온전한 마음을 주지 않았을까. 그런 까닭인지 무굴 제국의 지배층은 결코 인도 토착 문화를 수용하지 않는다. 그들의 종교는 이슬람 수니파이며, 언어와 문자는 페르시아를 받아들였다. 그들에게 인도인들은 그저 피지배층일 따름이다. 이것은 몽골과도 비슷한데, 몽골 지배층은 중화 문명에 동화되지 않았고, 뒤에 힘이 쇠락하여 중화에서 철수하였지 결코 민족이 패망한 것은 아니다.

 

어떤 학자들은 인도인의 불균등한 동화가 무굴 제국의 운명을 결정지었다고 강조한다. (P.415)

 

이러한 평가는 사실 선택의 문제다. 지배 세력이 피지배 세력과 차별적으로 남을 것인지 동화될 것인지. 몽골은 차별하였고, 만주족은 동화되었다. 그렇다고 청 제국이 영속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어떠한 정책이든 전성기 시절에는 잘 굴러가서 좋은 평가를 받기 마련이고 나라가 어지러울 땐 부정적 평가로 돌아서기 마련이다.

 

무굴 제국의 반복되는 왕위 계승권 분쟁을 보면, 이것만이라도 정리가 되었다면 제국이 좀 더 오래 유지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따른다. 분쟁에 따르면 어마어마한 혼란과 무수한 인명의 살상을 말할 나위도 없다. 적장자상속제가 최고의 제도는 아니지만 최소한 왕위 계승권 분쟁을 감소시키는 효과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역사적 예시가 바로 무굴 제국이 아닐까. 유목 전통의 강인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리라.

 

반세기를 재위한 악바르 황제는 무굴 제국의 최전성기로 일컬어진다. 그는 중인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강역을 점령하였고, 무엇보다 이 책의 서술에 따르면 제국의 튼튼한 토대를 구축하기 위한 계급, 군대, 행정, 세금 제도를 마련하였다.

 

악바르의 측근들은 토지세.자기르.지방 행정 제도를 하나로 묶은 체제를 개발하는 한편, 최고위 장령과 관리를 위한 10진법식 계급 구조인 만사브 제도를 만들어 냈다. (P.183)

 

악바르에게 있어 특이한 점은 그의 종교적 관용이다. 그는 순니파 이슬람을 신봉하였지만, 자신의 라지푸트 아내들의 힌두교 신앙을 인정하였다. 지배층에 일정 부분 라지푸트를 허용하기도 하는 등 악바르의 관용 정책은 무굴 제국을 단순한 침략 외세가 아니라 제국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위력을 수용하는 환경을 조성하였다. 이는 그의 증손으로 무굴 제국의 마지막 전성기를 누렸던 황제였던 알람기르(아우랑제브)와는 전혀 다른 방침이었다. 알람기르는 이슬람의 순수성을 강조하고 힌두교도에게 불리한 조치를 강제하였다. 그의 여러 실책 중 이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과오에 해당한다. 알람기르의 사후 무굴 제국이 급격하게 무너지게 된 배경은 결국 피지배층의 격렬한 반발에 있다.

 

인도의 대표적 볼거리로 타지마할을 꼽는다. 황제가 죽은 자기 아내를 기념하기 위한 건축물로 알고 있는데, 그 황제가 무굴 제국의 샤 자한임은 잘 인식하지 못한다. 이것은 엄연히 페르시아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받은 영묘, 즉 무덤이다. 무굴 제국은 여러 영묘를 건설하였는데 타지마할이 가장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알람기르(아우랑제브)의 죽음은 곧 무굴 제국의 쇠망기로 이어진다. 그는 중인도를 정복하여 무굴 제국의 최대 영토를 이루어냈지만 그건 속 빈 강정이었다. 저자는 무굴 제국 황제들의 데칸 지방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손실과 정치적 불안정을 지적한다. 알람기르는 샤 자한을 유폐시키고 황제 자리에 올랐으며, 힌두교를 박해하여 사회 불안을 야기하였고, 무엇보다 자식들의 힘을 빼앗아 섭정들이 황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기초를 놓았다. 알람기르의 조치로 왕위 계승권 전쟁을 벌이기 위한 단독적 힘이 왕자들 가운데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무굴 제국의 삼백 년 역사를 반분하면 전반기는 개국과 발전, 전성기인 반면 후반기는 쇠망과 멸망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추락의 시기다. 명목뿐인 황제는 섭정의 꼭두각시에 불과하였고, 지방은 제각기 독립국을 자처하였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벵골에서부터 야금야금 인도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우리네 조선 왕조 말기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오백 면에 달하는 분량 가운데 부록을 제외한 본문은 약 사백 면 정도다. 주석, 참고문헌, 찾아보기, 계보도 목록, 황제 가계 연표, 핵심 개념들의 부록이 풍성하다. 왕조사 또는 정치사에 치중한 탓에 문화, 경제 관련 내용은 상대적으로 빈약함이 이 책의 아쉬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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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트의 규칙서 KIATS 기독교 영성 선집 8
누르시아의 베네딕트 지음, 권혁일 외 옮김 / KIATS(키아츠)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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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트 전기>를 읽은 후 자연스럽게 그의 <규칙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타인의 기록이 아닌 베네딕트 자신이 기록한 수도 생활의 규칙. 이로써 우리는 베네딕트 자신의 수도 생활의 실질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에.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규칙서>는 대략 삼종이 있다. 분도출판사의 이형우 역본은 <베네딕도 전기>와 같은 형식의 라틴어 원문 수록에, 충실한 해제에 추가된 연구서 느낌이다. 들숨날숨의 허성석 역본은 본문 외에 상세한 해설이 추가되어 분량이 두툼하다. 나로서는 종교적 목적보다는 베네딕트라는 인물에 대해 궁금한 것이므로 제일 작고 가벼운 이 책을 골랐다.

 

이 책은 서론과 73 개장으로 구성되었는데, 각 장의 분량이 간략한 편이므로 읽기에 그리 부담되지 않는다. 내용 자체도 심오한 종교와 철학적 성격보다는 수도 생활의 실체적 규율에 있으므로 난해하지 않고 직접적, 구체적이다. 73개나 되는 규칙이 있다면 골치 아플 수 있겠지만, 기도와 찬송의 순서, 수도원 내의 위계질서, 주방과 식사, 손님 영접, 입회 절차 등 수도 생활의 전반적인 부분을 두루 다루고 있기에 때로는 이걸 규칙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할 정도의 항목도 들어있다.

 

이 학교의 규정을 정할 때, 우리는 가혹하거나 부담스러운 것은 그 어느 것도 세우길 원하지 않는다. (P.18, 서론)

 

베네딕트는 이러한 규칙이 절대로 가혹하거나 무거워서는 안 된다고 새삼 강조한다. 규칙은 어디까지나 수도 생활의 도움을 위한 것이지 그것 자체가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리라. 어쨌든 수도원이라는 단체 생활을 영위함에 있어 기초적인 규율은 불가피하다. 개인 생활에서도 필요할진대 단체 생활은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게다가 베네딕트는 은수자보다는 수도원 생활을 보다 권장하는 삶으로 인정하고 있으므로.

 

우리가 이 모든 일에 충성스럽게 매진해야 하는 작업장은 수도원의 울타리 안과 공동체 안에서 정주하는 삶이다. (P.34, 4)

 

4선한 일을 위한 도구들에 보면 준수해야 할 세부적 지침이 너무 많아 깜짝 놀라게 된다. 설마 이 모든 걸 수도사들이 다 지킬 것을 요구하고 기대하는 건가? 그렇다면 지나친데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기만 보면 어렵겠구나 하다가도 현실 타협을 보이는 사례도 있으니 제40장의 수도사의 포도주 과음을 자제하는 대목이 그러하다.

 

수도 생활은 세속을 떠나 오롯이 생활 전부를 영적 깨달음을 추구하는데 바치는 삶이다.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조화 속에 규율을 통한 자기 규제와 상호 권면의 각오. 그러하기에 어떤 경우든 하나님의 일이 최우선시되어야 한다. 새벽기도, 낮기도, 저녁기도와 마지막기도를 포함하여 하루에 7차례의 기도 의식을 행하는 동시에 휴식과 독서, 노동을 병행하는 생활은 결코 간단치 않다. 자칫하면 의지가 약해지거나 규율이 무너질 수 있기에 외부인과의 접촉은 최대한 피해야 하며, 아무나 쉽게 수도자로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고 강조하는 이유이다.

 

베네딕트는 수도 생활의 가장 큰 덕목을 겸손과 순종으로 강조한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한없이 낮음을 깨닫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7장에서 겸손의 열두 단계를 차근차근 제시하는 것은 그만큼 겸손이 갖는 중요성을 뜻한다. 수도원장은 가장 덕목이 높은 수도사를 추대해야 한다. 수도원장을 압바스 또는 압빠스라고 하는데, 이는 그가 지위상으로 아버지와 같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 하나님의 대리인이라는 의미다. 그러기에 수도원 운영과 규율 유지에 있어 그에 대한 순종은 곧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동격으로 강조한다.

 

순종은 모든 자들이 수도원장에게뿐만 아니라 또한 형제들 서로서로에게 나타내야 할 덕목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순종의 길을 통해서 하나님께 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P.126, 71)

 

베네딕트는 모든 수도원에 공통적인 규범을 만들기 위해 이 <규칙서>를 저술한 게 아니다. 그는 그저 자신과 동료 수도사들이 생활하는 수도 생활이 공공선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그가 강조하는 제반 규칙은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규칙과 자신이 수도 생활을 하면서 터득한 지혜가 결합한 것이다. 그의 규칙들을 통해 우리는 베네딕트 자신의 수도 생활의 모습이 어떠한지 역으로 상상할 수 있다.

 

이탈리아 산속의 한 평범한 수도사인 베네딕트가 작성한 <규칙서>의 영향력은 후대에 매우 커다란 파장을 미쳤다. 오늘날 베네딕트 수도회라는 모임은 베네딕트가 조직한 수도회가 아니다. 그가 제시한 수도 생활의 규칙을 준수하는 수도회들의 자발적인 모임이라고 한다. 세속과 종교의 물질적 욕망의 세계와 인연을 끊고, 오로지 영적인 깨달음과 성취만을 간구하는 그들의 절실함과 진지함은 점점 더 욕망으로 넘쳐나는 현대 사회일수록 더욱 빛을 발한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이 규칙을 기록한 까닭은, 수도원에서 이 규칙을 준수함으로써 우리가 어느 정도의 덕목을 갖추고 있으며 수도생활의 시작점에 있다는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P.128,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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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5년 7월 5일(토) 14:00

장소 : 예술의전당 IBK기업은행챔버홀

연주 : 아벨 콰르텟

       - 윤은솔 (바이올린), 박수현 (바이올린), 박하문 (비올라), 조형준 (첼로)

프로그램

  - 베토벤, 현악사중주 1번 F장조 Op.18-1

  - 베토벤, 현악사중주 6번 B flat 장조 Op.18-6

  - 베토벤, 현악사중주 11번 F단조 Op.95 '세리오소'

  - 베토벤, 현악사중주 12번 E flat 장조 Op.127


* 세줄평

전곡연주회 공지를 보고 망설임없이 일괄 예매하였다. 자주 접할수 있는 기회가 아니므로. 음원이 아닌 현장에서 듣는 베토벤의 현악사중주는 어떨지 무척 궁금하였다. 결론적으로 내몸 컨디션만 괜찮았으면 최고였을텐데. 약기운에 비몽사몽을 헤매는 가운데도 뛰어난 앙상블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일부러 연주자를 잘 바라볼 수 있는 자리를 고른 덕택이기도 하다. 후반부로 갈수록 좀더 치밀하고 아름다운 화음에 감탄하게 된다. 앞으로 연주회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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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5년 6월 27일(금) 19:30

장소 : 경동교회

프로그램 및 연주

  1) 송은주 (하프시코드)

     - 스카를라티, 키보드 소나타 C장조 Kk.420

  2) 강주호 (하프시코드)

     - 스카를라티, 키보드 소나타 D단조 Kk.213

     - 스카를라티, 키보드 소나타 D장조 Kk.443

  3) 조남수 (하프시코드)

     - 스카를라티, 키보드 소나타 F장조 Kk.437

     - 스카를라티, 키보드 소나타 F장조 Kk.438

  4) 이경희 (하프시코드)

     - 리게티, 헝가리풍 파사칼리아 (1978)

     - 리게티, 헝가리안 록 (샤콘느) (1978)

  5) 우지안 (포르테피아노)

     - 스카를라티, 키보드 소나타 E장조 Kk.380

     - 스카를라티, 키보드 소나타 A장조 Kk.533

  6) 황문희 (하프시코드)

     - 스카를라티, 키보드 소나타 A단조 Kk.149

     - 스카를라티, 키보드 소나타 A장조 Kk.39

  7) 하연우 (하프시코드)

     - 스카를라티, 키보드 소나타 D단조 Kk.9

     - 리게티, 연속체(Continuum) (1968)

  8) 윤철희 (포르테피아노)

     - 스카를라티, 키보드 소나타 C장조 Kk.132

     - 스카를라티, 키보드 소나타 F장조 Kk.17

     - 스카를라티, 키보드 소나타 D단조 Kk.141

  9) 강은수 (하프시코드), 송은주 (포르테피아노)

     - 라모, 무언극(La Pantomime)

     - 라모, 이방인(Les Sauvages)


* 세줄평

실연으로 처음 듣는 하프시코드와 포르테피아노 사운드다. 두 번 놀랐는데, 하프시코드 소리는 예상보다 작아서 포르테피아노 소리는 의외로 풍성해서이다. 아기자기한 맛은 하프시코드가 낫지만 포르테피아노가 더 친숙하게 다가온다. 우지안과 윤철희 연주가 기억에 남는 까닭이다. 두 악기의 특성은 마지막 라모의 곡 이중주에서 두드러진다. 리게티의 작품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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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도 전기 - 그레고리오 대종 교부문헌총서 11
그레고리오 교황 지음 / 분도출판사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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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안토니우스>와 마찬가지로 페트라르카의 저작집을 읽다가 문득 호기심이 생긴 인물이 이 책의 저자인 그레고리오 대종, 즉 대교황 그레고리오 1세다. 평생 은수자로 살아가길 바랐으나 불가피하게 교황이 된 인물이다. 서양음악의 원류인 그레고리오 성가의 주인공과 동일인임을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하였다.

 

그레고리오 대종은 <대화집>이라는 네 권의 저서를 남기고 이탈리아의 종교 성인과 그들의 일화를 두루 소개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여 소개한 사람이 바로 베네딕도[베네딕토, 베네딕투스]이다. 솔직히 베네딕도가 누구인지 몰랐는데, 베네딕트 수도회는 들어본 기억이 있다.

 

아타나시우스로 인해 이집트의 안토니우스가 기독교 세계에서 유명해졌듯이, 그레고리오 대종의 저작은 이탈리아 산속의 일개 수사에게 불후의 명성을 갖게끔 하였다. 비록 표제는 전기라고 되어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전기는 아니다. 베네딕도의 출생과 죽음을 다루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그가 수사로서 겪는 영적 시련과 깨달음을 통해 기적을 행하는 사례 모음집이다.

 

<대화집>의 전체 구조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그레고리오는 성 베네딕도를 부각시키기 위해 다른 성인들을 들러리로 세우는 형식을 취한 것은 이탈리아의 성 베네딕도를 이집트의 성 안토니우스나 갈리아의 성 마르띠누스와 필적할 인물, 아니 그 이상의 인물로 소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P.77, 해제)

 

장문의 해제를 제외하면 180면 남짓한 본문인데, 본문은 라틴어 원문과 우리말 번역문의 대역 구조로 이루어진다. 분량으로도 수록 내용으로도 읽기에 부담될 수준은 아니다. 저자 그레고리오와 수사 베드로 간의 대화 형태로 진행된다.

 

저자가 강조하는 점은 수사로서 베네딕도의 불멸의 모범성과 위대성이다. 그는 이미 수비아꼬 시기에 각종 시련을 극복하고 영적으로 완성되어 있었다. 이전에도 이적을 행하였지만 그를 질시하는 다른 수사들을 피하여 몬떼까시노에 정착한 이후 기록은 방대한 이적의 기록이다. 때로는 저자가 베네딕도를 너무 신성시할 정도로 띄우는 게 아닐까 의구심이 들 정도다. 그에 따르면 베네딕도는 제자에게 물 위를 달릴 수 있도록 하였다. 사탄과의 잇따른 대결은 가뿐히 제압할 정도며 예언의 능력마저 갖추게 되었다. 사도들의 소관이라고 손사래 치던 죽은 이를 살리는 이적마저 이루어냄으로써 베드로와 같은 사도와 동격으로 추앙한다. 35장에 이르면 거의 천상의 경지에 도달하고 있을 정도다.

 

하느님 안으로 이끌려 올라간 그분은 하느님 이하의 모든 것을 (아무) 어려움 없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분 눈에 비춰졌던 외적 빛 안에는 영혼의 내적 빛이 있었다. (P.231, 35)

 

그레고리오가 유독 베네딕도를 높이 평가하는 사유는 무엇일까? 이탈리아에도 위대한 성인이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 의도가 전부는 아니라고 본다. 거의 동시대 인물로서 훗날 베네딕도 수도회가 크게 발전하였음을 내다봐서도 아니리라. 그레고리오 대종이 교황에 재위하던 시기는 이탈리아에서 일대 혼란기였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동로마 제국이 한때 이탈리아를 수복하였으나 다시 세력을 잃고 이탈리아반도는 주인 없는 땅으로 여러 게르만족이 횡행하여 법과 사회 질서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레고리오는 윤리적, 종교적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대중의 눈높이에 맞는 전범을 내세우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게다가 베네딕도가 몬떼까시노에 세운 수도원은 로마 신전의 자취에 자리 잡았으니 이교도 선교의 상징적 사건이기도 하다. 그레고리오는 현실을 인정하고 게르만족을 포교 대상으로 삼는 정책을 폈는데, 그들에게 멀리 있는 그리스도와 사도들보다 베네딕도가 훨씬 현실적으로 소구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저자의 집필 목적이 어떠하고, 기독교인이 베네딕도를 어떤 존재로 존경하는지와 상관없이 나와 같이 비신도들에게도 흥미로운 인물이다. 일단 그의 무수한 이적은 흥미로운 일화, 즉 옛날이야기로 생각하면 된다. 중요한 건 그가 육신적, 정신적 유혹을 물리치고 치열한 수도를 거쳐 차근차근 완덕을 향해 나아가고 마침내 도달하였다는 점이다.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는 풍요로운 물질로 넘쳐 나고 있기에 오히려 정신적으로 빈곤하고 타락할 위험이 크다. 베네딕도의 삶에서 어떤 교훈이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자체로서 큰 보람이 아니겠는가.

 

베네딕도는 <규칙>이라는 책을 유일하게 남기고 있다. 이는 수도원과 수사들이 올바른 수도 생활을 위해 지켜야 할 규칙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를 따르는 수도원들의 연합체가 베네딕트 수도회라고 한다. 단순히 규칙서라면 내게는 관심 밖일 터인데, 그레고리오는 여기서 솔깃한 발언을 하고 있다. 조만간 이 규칙서도 대강이나마 훑어봐야겠다.

 

만일 누가 그분의 생활방식을 더 자세히 알고자 하면, 그분이 제정한 규칙서 안에서 지도하신 그분의 모든 행적을 찾아볼 수 있다. 실상 성인께서는 당신이 사신 것과는 다른 어떤 것도 도무지 가르칠 수 없는 분이셨기 때문이다. (P.233.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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