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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한 입맞춤 - 누가 유다에게 ‘배신자’라는 누명을 씌웠는가
박진희 지음 / 파람북 / 2024년 11월
평점 :
부제 : 누가 유다에게 ‘배신자’라는 누명을 씌웠는가
얼마 전부터 <성경>을 통독하고 있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도 서양 문화를 이해하려면 교양서로서 <성경>을 외면할 수 없다. 신약을 끝내고 지금은 구약 중 모세 오경 대목을 읽는 중이다. 기독교 신자라면 정통 성경으로 만족하겠지만, 나로서는 외경 및 위경도 관심 대상 중의 하나다. 게다가 성경 해석의 정통주의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 대목에 대한 호기심도 있다. 이 책의 독서는 그런 호기심의 발현이다.
가룟 유다가 누군가. 예수를 유대인에게 팔아넘긴 배신의 아이콘이다. 소위 신약 사대 복음에서 유다는 예수 자신의 저주를 받는 동시에 배신의 자책으로 영원한 파멸에 빠지는 인물이다. 기독교 신자라면 질타와 비난과 저주를 아끼지 않고 반면교사로 삼아 교리에서 외면해야 함에도 기독교의 성립에 있어 유다는 대체 불가한 이바지를 하였다. 예수는 자신이 유대인에게 넘겨져 십자가 형벌에 처해 죽음을 맞아야 비로소 자신의 소명을 완수한다고 여러 차례 천명한다. 성경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예수란 인물이 정확히 누군가인지 판별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예수가 스스로 그들 앞에 나아가지 않는 한 누군가가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지목해야 비로소 체포할 수 있다.
예수를 배신한 가룟 유다의 계획은 인간의 영역에서 이루어졌던 셈이고 예수를 배신한 척한 가룟 유다의 계획은 신의 영역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래야만 예수의 죽음에 대한 절대적 계시가 성립할 수 있다. (P.238)
이 대목에서 저자는 일부 종교학자의 의견과 함께한다. 즉 유다는 실제로는 예수를 배반한 게 아니라는 주장이다. 예수가 이루어야 할 천명을 수행하기 위해 예수를 유대인들에게 넘겨줄 악역을 담당하는 불가피한 소명을 이해하는 유일한 제자가 유다였다고 한다. 예수의 설득에 유다는 후세에 길이 남을 역사적 배반을 감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기독교에서 유다를 무차별적으로 비난함은 부당하다는 요지다.
비신자 입장으로서는 흥미로운 의견이다. 저자는 사대 복음의 유다와 예수의 죽음에 이르는 대목을 꼼꼼히 독해한다. 여기서 나로서는 사대 복음의 저작 순서 관계를 주목하게 되었고, 요한복음이 다른 복음과는 달리 공관복음이 아니라는 점도 인식하게 되었다. 저자가 주장한 대로 분명히 사대 복음 간의 기술에는 불일치가 자주 드러남도 확연하다. 다만 이러한 불일치가 곧 유다 오해의 타당한 근거로 이어지지는 않기에 설득력 여부는 별개라는 생각이다.
저자는 예수와 유다 간 묵계의 유사한 예를 구약에서 근거한다. 후새는 다윗의 친구임에도 다윗을 배반하고 압살롬 편에 합류한다. 절체절명의 순간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계책을 따르지 않고 후새의 제안에 동조함으로써 다윗은 결정적 파멸을 모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후새는 외견상 다윗의 배반자이지만, 그것은 다윗의 복귀를 위한 의도적 배반이었다. 그럴듯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저자의 일방적 해석일 따름이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명확한 근거 제시보다는 추정의 문구만을 나열하고 있다.
예수는 유다에게 그들의 함정을 역이용해서 이를 거룩한 사건으로 승화시켜야 한다고 그 속내를 털어놨을 것이다. [......] 예수는 유다에게 우리가 도모하는 사건을 기필코 명절에 일으켜서 한 번쯤은 세상이 천지개벽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강변했을 텐데, 그러려면 유다가 배신자의 역할을 떠맡아야 한다고 덧붙인 듯하다. (P.221-222)
후반부에서 <유다 복음>이 소개되고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도 유다의 역할에 대한 의문 제기는 뿌리 깊었던 모양이다. 이 복음이 저작의 근본 동인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저자가 영지주의자 관점을 따르고 있지 않아서이다. 오히려 그는 오늘날의 기독교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목회자와 교회의 일탈은 충분히 비난할 수 있는데, 그것이 뜬금없는 장면에서 자주 등장하니 당혹스럽다. 저작 목적이 배신자 유다의 누명을 벗겨주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변질한 현대 기독교를 향한 예리한 비판인지 애매하다.
인류역사에서 돌이킬 수 없는 일대의 사건이었던 개교회주의자 처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작금의 민낯을 보라. 저마다 교회는 목사라는 각자의 교황을 추대한 교회교가 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모르긴 몰라도 세속사회보다 훨씬 더 세속화되어버린 교회가 지금 당신이 몸담고 있는 교회는 아닌지, 부디 발끈하지만 말고 돌아보길 바란다. (P.139-140)
결론적으로 저자의 문제 제기 자체는 괜찮았지만, 주장 전개와 입증에서 개연성과 설득력이 약하고 산만한 자기주장에서 멈추었다는 생각이다. 때로는 원래 저작 목적에서 벗어나 다른 곳에서 헤매고 있는 인상마저 든다. 독서 목적으로만 보자면 전체적으로 썩 만족스러운 경험은 아니다. 그럼에도 분명 유익한 점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덕분에 예수의 고뇌와 기도, 유다의 배신, 십자가의 예수와 같은 특정 단락을 사대 복음을 비교하여 반복해서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성경 기술에 함몰되지 않고 예수의 소명 완수와 유다의 배신에 관한 통념적 견해에 새로운 관점을 도입해 볼 수 있는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