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명 : 아벨 콰르텟 베토벤 현악사중주 전곡연주 3

일시 : 2025년 11월 21일(금) 19:30

장소 : 예술의전당 IBK기업은행챔버홀

연주 : 아벨 콰르텟

  - 윤은솔 (바이올린)

  - 박수현 (바이올린)

  - 박하문 (비올라)

  - 조형준 (첼로)

프로그램

  - 베토벤, 현악사중주 3번 D장조 Op.18-3

  - 베토벤, 현악사중주 9번 C장조 Op.59-3 '라주모프스키 3번'

  - 베토벤, 현악사중주 15번 A단조 Op.132


* 세줄평

첫곡 3번이 예열이었다면, 9번 2악장에서 문득 좋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전범인 부다페스트 콰르텟과는 전혀 다른 아름다운 섬세함이 스며든다. 압권은 15번곡이다. 진부하지만 연주자간 완벽에 가까운 호흡, 제1 바이올린의 가냘프면서도 기도하는 듯한 울림. 깊은 여운은 2악장이 이대로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마저도 들 정도다. 음악회에서 이처럼 감동을 받는 연주를 경험하기란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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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명 : 박옥주가 그리는 오르간 세상 16 - Romance & Byzantin

일시 : 2025년 11월 19일(수) 19:30

장소 :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연주 : 박옥주 (오르간)

프로그램

  - 앙리 뮐레, 비잔틴 스케치 [전10곡]


* 세줄평

성공회 성당은 처음 와본다. 로마네스크 양식이라 특색 있고, 정면에 모자이크 성화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오르간은 회중석 뒤편 발코니에 위치하는데, 연주 감상하기에는 다소 불편하다. 청중 대부분이 의자를 반대로 돌려서 감상한다. 뮐레라는 작곡가와 작품이 워낙 생소하기에 사전 학습과 음원 청취를 해봤는데, 성당에서 울리는 오르간 사운드는 오디오와 확실히 차별된다. 공간을 풍요롭게 감싸울리는 음향이야말로 오르간의 최고 미덕이 아닐까. 작고 섬세함과 크고 웅장함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곡의 전개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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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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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어머니 얘기다. 딸의 관점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회상하고 추억하는 내용과 방향은 같지 않다. 아버지는 화자의 이십 대에 세상을 떠났으니 화자 개인은 물론 가족과 추억이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더하여 부녀간은 결국 성 차이에 비롯하는 이해의 한계에 봉착한다. 어머니는 화자가 사십 대에 죽음을 맞이하였으니 인생의 여러 국면을 경험한 화자에게는 더욱 할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더하여 모녀간은 가까웠다 멀어졌다 하지만 종국에는 이해와 화해가 불가피한 관계가 아니던가.

 

아들은 아버지와 불화하고 멀어지지만 나이 들어서는 자신이 결국 아버지와 별 차이가 없음을 발견한다. 딸도 어머니와 마찬가지다. 자신은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다고 벼르지만 뒤돌아보면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며, 자신이 가장 닮은 사람이 어머니다. 자식은 부모와 애증이 뒤섞인 유전 공동체다.

 

나는 울기 시작했다. 그녀가 나의 어머니였기 때문에, 내 유년기의 그 여자와 같은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P.99)

 

화자에게 어머니가 더욱 가슴 치밀게 다가오는 까닭은 그녀가 늙고 병들어 쇠약해져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화자가 오롯이 경험해서다. 아버지의 죽음 후 카페 겸 식료품점을 닫고 딸네 집에서 살다가 떨어져 지내기를 반복한 어머니는 좁지만 단칸 아파트에서 홀로 살아간다. 이대로 편안히 살다가 임종을 맞으면 좋으련만 어머니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린다.

 

노인들의 뇌가 서서히 쪼그라들면서 언어와 사고, 행동을 비롯한 온갖 뇌 기능이 조금씩 삐걱거리다가 끝내 결말에 이르는. 당사자는 오히려 인지하지 못하지만 가족과 자식에게는 씻을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을 안겨주는 불치병. 살아 있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모두에게 좋을 것으로 인정받는 서글픈 병. 화자는 비로소 어머니의 죽음을 피부로 느끼기 시작한다.

 

이것은 전기도, 물론 소설도 아니다. 문학과 사회학, 그리고 역사 사이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리라. (P.110)

 

화자에게 어머니의 삶 전체를 돌아보고 기술하고 묘사하는 과정은 문학적 치장이 아니다. 원초적 본능으로 연결된 감각을 최대한 억누르면서 개인적 감정을 배제하며 화자는 어머니에 대해 서술한다. 우리는 소설로 읽지만, 화자는 이 글을 소설로 간주하지 않는다. 소설의 허구성과 장식성이 부재한다면 어찌 소설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작품 속 어머니는 자상하고 부드러운 모성애로 가득한 어머니상과는 전혀 다르다. 훈육에서 폭력을 주저하지 않으며, 애정 발현과 지배 욕망 사이를 넘나들며, 자식은 통제하려 한다. 손님을 대할 때 어머니의 위선적 연기 장면을 서술하는 화자의 회상은 냉철하기조차 하다.

 

화자가 전작에서부터 보여 준 현실 비상의 꿈과 의지는 확실히 아버지보다 어머니의 영향을 깊게 물려받은 듯하다. 어린 시절부터 나타난 격렬한 의지와 현실 안주에 대한 강렬한 거부는 비록 자신은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자식이라도 탈출시키기 위한 맹목적 열망으로 분출하였고 화자가 사립학교에 이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비록 화자는 중산계층에 다가갈수록 부모가 가진 저열한 하층계급의 속성에 진저리치지만 말이다. 자신의 몸과 머리에 밴 저속함을 떨쳐내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할 정도로.

 

다른 세계로 옮겨 가고 있는 나는 내가 더 이상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 여전히 내 모습인 것에 대해서 어머니를 원망했다. (P.63)

 

자식은 부모의 청춘 시기를 알지 못한다. 활기차고 생명력이 분출하고 꽃다운 시절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고의 범위를 벗어난다. 어릴 때는 한없이 크고 높은 사람, 청소년 때는 자신을 억압하는 그래서 저항하고 언젠가 극복해야 할 기성세대, 중장년이 되어서는 어느덧 늙고 쇠약해져 보살핌의 대상이 되어버린 사람.

 

나이 들어 노망난 여자와 젊어서 힘차고 빛이 났던 여자를 글쓰기를 통해 합쳐 놓지 않고서는 내가 살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P.92)

 

한순간의 단면으로 인생을 깨닫거나 설명할 수 있다면 차라리 오만에 가깝다. 삶은 불가해한 것이며, 제각기 다르기에 섣부른 예단과 추측을 거부한다. 화자가 전작의 아버지와 여기의 어머니를 각각 대상으로 하여 전기와 행장에 가까운 글쓰기를 시도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부모의 삶을 온전하게 복원하면서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고 놓쳐버린 삶의 전일성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일지 모른다.

 

여자가 된 지금의 나와 아이였던 과거의 나를 이어 줬던 것은 바로 어머니, 그녀의 말, 그녀의 손, 그녀의 몸짓, 그녀만의 웃는 방식, 걷는 방식이다. 나는 내가 태어난 세계와의 마지막 연결 고리를 잃어버렸다.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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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명 :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제331회 정기연주회 - Romantic Voyage

일시 : 2025년 11월 14일(금) 19:30

장소 : 부천아트센터 콘서트홀

연주

  - 지휘 : 아드리앙 페뤼숑

  - 피아노 : 김송현

  - 연주 :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프로그램

  - 로시니, 윌리엄 텔 서곡

  -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C단조 Op.18

  - 베를리오즈, 로미오와 줄리엣 중 홀로 있는 로미오, 카퓰릿의 연회

  - 멘델스존, 교향곡 4번 A장조 Op.90 '이탈리아'


* 세줄평

왠지 그런 때가 있다. 남들은 다 좋다고 하는데, 나만 다르게 느끼는 경우. 피아니스트는 굉장히 뛰어난 연주를 하는데, 그의 반짝이는 음색이 라흐마니노프와 적합한지는 잘 모르겠다. 독주파트와 2악장이 유독 훌륭하다. 대체로 오케스트라의 중저음이 매우 강해서 총주 부분에서 피아노 소리는 묻혀 버린다. 앵콜곡인 레비츠키와 슈만 곡이 오히려 그의 강점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순관현악곡에서 부천필의 실력이 도드라진다. 다만 이전에 비해서 중저음이 부각되는 까닭을 모르겠다. 내 컨디션 탓인지 또는 좌석 위치 때문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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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리 - 개정판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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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 우리가 사진이나 영상 속 어린 자신을 보면 생소함과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내게 과연 그러한 때가 있었던가 하는 새삼스러운 의구심도. 부모님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동일한 감정을 품게 된다. 그네들도 어린 시기, 청춘의 때가 있었구나 하는 뜻밖의 발견도. 우리가 익히 아는 부모는 언제나 어른이거나 노인의 모습뿐이다. 우리랑 비슷한 또래 또는 더 어린 부모의 모습을 보는 경험은 자못 묘하다.

 

어릴 때는 절대적 존재감을 지닌 부모이지만, 늙고 약해진 부모는 보살핌의 대상이자 구시대의 유산이다. 귀가 닳도록 되풀이하는 옛날 타령과, 개인적 경험에서 우러나온 무용한 습관과 말투, 태도 등. 비교적 짤막한 이 작품을 읽는 소회는, 한국이나 프랑스나 자식은 참으로 부모를 이해하기 어렵구나 하는 유사성이다.

 

나는 예전처럼 울고 싶다. <<그러니까 그는 절대 달라지지 않는다니까!>> (P.90)

 

잘난 부모라면, 물려받고 따를 것이 많겠지만 화자처럼 시골, 소시민 계층에서 자라난 경우 당사자의 일차적 목표는 탈출이다. 촌스럽고 수준 낮은 집안과 동네를 떠나 대도시의 세련되고 고상한 사회에 진입하는 것. 화자의 아버지로서는 아내와 함께 소박하나마 카페 겸 식료품점을 운영하게 된 것 자체도 장족의 발전이자 성공이다. 중세 시대나 다름없던 시골에서 자라 공장에서 일하다가 자영업을 시작하며 노동자에서 사장님으로 변신하였으니까. 배운 것 없고, 부유하지 못한 처지이지만, 그는 그 자리를 얻고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했다. 노동자보다는 상인으로 보이고 싶어 했다. (P.39)

 

화자의 어린 시절은 카페 겸 식료품점을 드나드는 술꾼과 가난한 이웃의 허름한 삶으로 기억한다. 친구들처럼 적당히 학교 다니다가 청소년기에 일자리를 구해서 부모와 비슷한 삶의 패턴을 반복하는 것, 그게 화자에게 비친 자신의 미래이다. 화자가 그들과 달랐던 점은 똑똑하여 공부를 잘하였고, (아버지가 어렵사리 확보하고 안주하는) 처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여서다. 격려하고 상찬할 만한 선택이다.

 

어떤 낯선 이의 시선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의 세계에 들어간 것은, 그 세계가 내게 열렸던 것은 내가 살던 세계의 방식과 생각, 취향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P.86)

 

학력이나 직업 등에서 이미 화자는 부모 수준을 뛰어넘었다. 그녀가 고향에 커다란 애정을 지닌 것도 아니다. 그녀가 접하는 사회는 대도시의 고상하고 지적인 소위 부르주아다. 화자가 가끔이나마 고향을 되돌아보는 까닭은 부모가 사는 곳이기에 그러하리라. 그런 부모의 존재도 본능적이고 윤리적인 최소한일 뿐 엄청난 사랑과 존경을 품고 있어서도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화자와 아버지 간 단절과 불통은 일견 정상적이면서도 안타까움을 갖게 만든다. 우리는 부모들이 어릴 때부터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며 관심도 없다. 우리가 바라보는 부모의 모습은 현재에 국한될 따름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그네들을 온전히, 그리고 온당히 이해할 수 없다.

 

식사를 하던 중에 아무것도 아닌 일로 싸움이 터지고는 했다. 그가 대화를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나는 늘 내가 옳다고 믿었다. 나는 그가 음식을 먹는 태도 혹은 말하는 방식을 지적했다. (P.75)

 

화자의 글쓰기는 서술적이며, 건조하다. 내용상 과장이나 수식을 극도로 배제한다. 표현에서도 감정개입을 조심하고 담담한 태도를 끝까지 견지한다. 때문에 이 작품을 소설로 보는 게 타당한지 의구심이 든다. 전기라고 하긴 그렇고 수기 또는 행장에 가깝다. 그럼에도 작가가 이런 글쓰기를 선택한 이유는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삶을 그리는 게 가장 확실해서다. 그렇지 않은 삶은 잘 알지 못할뿐더러 허구나 과장이 개입될 것임을 피할 수 없어서가 아닐까.

 

이 작품에서 어떠한 극적인 사건 흐름과 감동적인 장면을 기대한다면 낭패다. 20세기 후반기에 여전하였던 자식과 부모 세대 간 소통 단절과 부재, 시골과 도시, 하류 계층과 중상류 계층 간 뚜렷한 계층 차이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을 읽는 21세기 전반기에 그것이 단지 과거의 유물에 불과한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지 아닌지를 우리 각자는 비교하여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글을 쓰며 하류라 여겨지는 삶의 방식에 대한 명예회복과 그에 따른 소외를 고발하는 일 사이에서 좁다란 길을 본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우리의 것이었고 심지어 행복하기도 했으며, 우리가 살던 환경의 수치스러운 장벽들(<<우리 집은 잘살지 못한다>>는 인식)이기도 했으니까.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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