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명 : 피아니스트 강지은의 스토리 오브 라이프 4

일시 : 2025년 9월 29일(월) 19:30

장소 : 일신홀

연주 : 강지은 (피아노)

프로그램

  - 모차르트, 환상곡 C단조 K.475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 C#단조 Op.27-2 '월광'

  - 베르크, 피아노 소나타 Op.1

  - 슈베르트-리스트, 물레질하는 그레첸

  - 슈베르트-리스트, 셰익스피어의 세레나데

  - 베토벤-리스트, 아델라이데


* 세줄평

일신홀은 처음이다. 프로그램도 베토벤 소나타를 제외하면 대부분 생소하다. 자리도 거의 앞자리라 고개를 쳐들고 연주자를 바라봐야 한다. 공간과 자리 덕분에 음향도 낯설다. 그래도 소득은 있으니 모차르트의 환상곡과 리스트 편곡 작품을 새로이 접하게 된 까닭이다. 막간에 연주자가 만든 일종의 브이로그를 틀어준 점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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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명 : 피아니스트 이윤수의 슈만 전곡 시리즈 XII "FINALE"

일시 : 2025년 9월 27일(토) 20:00

장소 : 예술의전당 IBK기업은행챔버홀

연주 : 이윤수 (피아노)

프로그램

  - 슈만, 다비드동맹 무곡집 Op.6

  - 슈만, 유모레스크 Op.20


* 세줄평

슈만 작품 중 내게는 비교적 생소한 곡이다. 앞곡은 좀 더 노력이 필요하고, 그나마 <유모레스크>가 내가 알던 슈만다운 느낌이어서 더 마음에 든다. 두 곡 모두 대조가 특징적이다. 터치의 강약, 템포의 느리고 빠름, 감정의 격렬함과 온화함 등. 그래서 연주자는 프로그램을 구성했던 것일까. 무엇보다 연주에 완전히 쏟아붓는 연주자가 인상적이다. 특히 모든 감정을 표현하는 얼굴 표정은 한폭의 드라마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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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명 : 유미정 피아노 독주회

일시 : 2025년 9월 25일(목) 19:30

장소 : 예술의전당 리사이틀홀

연주 : 유미정 (피아노)

프로그램

  - 베토벤, 자작 주제에 의한 6개의 변주곡 F장조 Op.34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번 F단조 Op.74 '열정'

  - 슈베르트, 4개의 즉흥곡 Op.142 (D.935)


* 세줄평

좋아하는 레퍼토리다. 리사이틀홀 2층 좌석은 처음이다. 청취 위치 탓인지 영 집중이 안 되고, 음향도 낯설다. 베토벤의 열정 소나타가 유독 더하였다. 익히 알던 음악적 뉘앙스를 찾기 어렵다. 슈베르트의 곡은 훨씬 나아져서 그나마 다행이다. 모든 게 연주자와의 상성일 수도 있겠다. 하여튼 2층 좌석은 다음에는 무조건 피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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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작품 수록
한강 외 지음 / 문예중앙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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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한강의 작품을 읽기 위해 구입하였다. 다른 글에서 적었듯이 이 책은 수상작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을 포함하여, 수상소감, 자선작 <에우로파>, 연보와 인터뷰로 130면 가까이 할애하고 있어, 그의 신작 단편은 물론 작가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수상작 외에도 이 책에는 최종후보작 9편을 수록하고 있다. 이 중 김애란의 소설은 작품집 <바깥은 여름>에서 이미 술회하였으므로 여기서 따로 언급하지 않는다.

 

강영숙 맹지

권여선 이모

김솔 피커딜리 서커스 근처

김애란 입동

손보미 임시교사

이기호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정소현 어제의 일들

조해진 사물과의 작별

황정은 웃는 남자

 

<맹지 강영숙>

 

화자는 내심과 외면이 어긋난 인물이다. 내심으로는 세상과 타인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을 품고 있으면서도, 외면상 그는 타인에게 선한 언행을 내보인다. 지영과의 관계도 그렇다. 지영과 산업단지에서 만날 약속이 있는 듯이 행동하지만, 눈썰미가 있는 독자라면 그건 화자의 일방적 환상임을 알아차린다. 두 노인을 떨치지 못하고 연연해하다가 마침내는 창고 안에 처넣고 마는 장면도. 과연 사실일까 알 수 없다. 아마 화자 자신도 알지 못하리라.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P.152) 이처럼 작품은 어수선하며 화자 자신만큼이나 독자를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게 만든다. 해설은 이를 명료하게 정리한다.

 

소설가가 어떠한 논리를 통해서도 이해 불가능한 인간의 내면을 재현하고 있거나 인간의 정념이 어지럽게 뒤섞인 거대한 사회의 모습을 형상화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결코 명확한 문장으로 정리될 수도 없거니와 정돈된 서사의 형태로 제시되어서도 안 된다. (P.153, 해설)

 

<이모 권여선>

 

조카며느리와 시이모라는 흔치 않은 접점에서 풀어놓는 이모의 인생은 가족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전형적인 이야기에 속한다. 맹목적으로 한없이 희생적일 줄 알았던 그녀의 선택이 반전을 일으키는 장면은 속 시원하기조차 하다.

 

독자는 이모의 선택과 용기를 지지하고 공감하는데, 그것은 그녀의 선의에 대한 절대적 믿음에 근거한다. 이것이 흔들린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작가는 자신에게 호의를 가진 남학생의 손을 담뱃불로 지진 이모의 대학 시절 일화를 툭 던져놓는다. 이모의 참다운 모습은 무엇인가. 삶은, 인간성은 간단치 않음을 새삼 떠올리게끔 한다.

 

<피커딜리 서커스 근처 김솔>

 

루 첸과 드니의 생활양식과 행위 선택은 철저히 개인적 이득과 욕망에 충실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어설프기에 희극적이다. 이 블랙 코미디를 완성하는 인물이 바이 부레이다. 빈털터리 탈주민에서, 가짜 축구선수로, 노예와 보석상 점원으로 변신을 거듭하다 끝내는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남발하는 블랙 컨슈머로 파산하여 원점으로 회귀하는 바이 부레.

 

런던을 배경으로, 외국 사람이 인물로 등장하는 낯선 작품이다. 덕분에 우리네 것이 아닌 양 한 발짝 떨어져서 구경하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만약 배경이 서울이고, 익숙한 우리네 이름이 사용되었다면 우리가 쉽사리 피식거릴 수 있을까.

 

<임시교사 손보미>

 

자신과 타인의 삶을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는 무엇인가? 특히 빈부의 격차와 계층 간 차이가 극심해지는 현대사회의 요즘에서. 우리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욕심부리지 말라고 조언받는다. 그들을 올려다보고 부러워하며 한탄만 하다 보면 자신의 삶을 잃어버릴 수 있어서다. 그런 면에서 P부인의 마음가짐과 행동은 훌륭하다. 그녀는 주어진 역할을 최선을 다해 수행하지만 그것을 상대방이 알아주기를 굳이 기대하지 않는다. 거리두기와 평정심 유지를 좌우명으로 삼고 있듯이. 작가 또한 P부인에게 공명하여 대체로 냉소적이지만 P부인이 보모로 있는 가정의 상황을 그리 차갑지는 않게 기술한다.

 

사는 건 그런 거지. 그녀는 생각했다. , 괜찮을 거야. 언젠가, 마치 끈 하나를 잡아당기면 엉킨 끈이 풀어지듯이 잘못된 일들이 고쳐질 거야. (P.280)

 

정말 괜찮을까. 임시교사로, 보모로 일하였지만 그녀의 미래는 불확실하다. 차라리 불안과 염려를 솔직히 토로한다면 후련하겠지만 괜찮은 듯이 스스로를 다잡는 P부인의 모습에서 오히려 더욱 불안감이 느껴진다. 착하기만 해서는 삶이 더욱 퍽퍽해지기에 씁쓸하다.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이기호>

 

여기 또 착한 사람들이 있다. 지나치게 착한 사람 권순찬과, 한 뼘만큼 적당히 착한 주민들. 지방대학 교수인 화자도 후자에 포함된다. 이따금 가족을 만나러 상경하고 돌아올 때 화자는 주체할 수 없는 화를 표출하지 않기에 애쓴다. 작가는 화자가 갖는 화의 원인이 무엇인지 드러내지 않는다. 화자만이 갖는 예외적인 성향이 아니기에 그럴 수 있다는 듯이.

 

권순찬은 억울한 피해자다. 그가 가해자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주소지로 등록된 곳에서 천막을 치고 피켓 시위를 하는 것밖에. 처지를 바꾸어 우리가 그의 처지에 놓였다면 별다른 뾰족한 방안이 있을 것인가. 까짓거 날린 셈 치고 훌훌 턴 채 자기 삶을 살아가든지 또는 주민들의 특별 모금을 감사한 마음으로 모른 체하고 받아들여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의 호의가 거부당하자, 주민들은 표변한다. 권순찬은 동정을 받는 피해자에서 아파트의 질서와 평화를 깨뜨리는 훼방꾼으로 폄하된다. 화자와 주민들이 애꿎은 사람에게 오히려 화를 내는 현상은 과연 누가 애꿎은 사람인지 반문하게 된다. 노숙인 쉼터로 끌려가는 권순찬과, 나중에 고급 외제차를 타고 등장하는 사채업자의 대조가 씁쓸한 뒷맛을 드리운다.

 

너나없이 공감을 말할 때, 사람의 선의가 아니라 구조적 적대를 성찰한다는 점에서 각별한 작품이다. (P.313, 해설)

 

<어제의 일들 정소현>

 

단편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상당히 구조적이고 복잡한 설정을 지닌 작품이다. 이용객이 거의 없는 주차장을 관리하는 심신이 불편한 장애인 화자. 그가 어머니라 부르는 사람은 진짜 가족이 아니며, 연을 끊고 산다는 사실. 우연히 화자를 찾아온 학교 동창을 통해 기억 저편에 방기했던 불편한 진실을 조금씩 깨우치는 화자. 왕따와 교사를 향한 사랑, 그리고 투신 시도와 그 후유증. 심심풀이로 그린 그림을 통해 알게 된 친구와 새로운 희망 등등.

 

차마 다 기억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그것들은 명백히 지나가버렸고, 기세등등한 위력을 잃은 지 오래다. 살아 있어 다행이다. 다행이라 말할 수 있어 정말 다행이다. (P.356-357)

 

작가는 과거와 현재, 기억과 현실 간 화해를 시도한다. 오랜만에 이별한 가족과 선생님을 찾아가며. 자기 돈으로 매상을 메꾸면서까지 주차장을 놓지 않으려고 애쓰던 화자는 어머니에게 사실을 밝힌다. 주차장은 사실상 텅 빈 채였고, 자신이 거짓말을 하였음을. 아픈 과거를 힘겹게 되새기고 고통 속에 함몰하기보다는 과거는 과거대로 묻어두고, 불편한 몸이나마 현실을 인정하고 긍정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모습은 분명 바람직한 모습이다. 다만 개인적으로 갑작스럽고 작위적이지 않나 우려스럽다.

 

<사물과의 작별 조해진>

 

화자가 고모와 서 군을 만나게 해주기로 결심한 건, 고모의 가슴 깊숙하게 맺힌 응어리를 풀어주기 위해서다. 알츠하이머로 서서히 스러져 가는 고모가 평온한 삶을 마무리할 수 있게 하려고. 아픈 현대사를 배경으로 하는 고모와 서 군의 엇갈린 삶의 행보는 고모에게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을 품게 했고, 이제 노년의 해후와 용서로 아름답게 해소되길 기대함은 조카로서 당연한 수순이다.

 

고모의 쇼핑백은 화자가 근무하는 지하철 유실물센터에 자리 잡는다. 서 군이 고모를 어떻게 기억하고 추억할지 알 수 없지만, 고모에게 서 군은 영원한 청년으로 각인되었기에 엉뚱한 이에게 쇼핑백, 그 안에 교도소 영치물을 담은 그것을 전달함으로써 과거와 정리를 할 수 있었다. 유실물센터에는 하나의 유실물이 추가되었다. 센터에서 보관하는 수많은 분실물은 타인의 눈에는 주인을 잃어버린 단순한 사물에 불과하다. 고모의 쇼핑백이 화자에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듯이, 유실물의 주인들에게 그 물건은 단순한 사물이 아닌, 깊고 넓은 의미를 담고 있는 인생의 한 단면일지 우리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으리라.

 

고모가 유기한 쇼핑백이 이곳에 있는 한, 유실물센터는 세계의 그 어떤 곳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공간으로 남게 되리란 걸 나는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이 세계를 구성하는 데 없어도 무방한 덧없는 조각일 뿐이란 것도, 내가 분명하게 그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슬펐다. (P.384)

 

<웃는 남자 황정은>

 

엄혹한 자책감을 지닌 채 과거를 곱씹는 화자에게는 삶도 중요치 않다. 보잘것없는 화자를 사랑해 주고 삶의 기쁨과 보람을 안겨주었던 디디의 죽음. 자체로서도 크나큰 타격일 텐데, 디디의 죽음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귀결이라는 더할 수 없는 자책감으로 화자는 세상과 단절된 채 틀어박혀 스스로 짐승이 되는 길을 택한다.

 

잘못이 있었다. 뭔가 잘못되었다. 그 잘못에 내 잘못이 있었다. 내 잘못인가. 잘못이다. 그게 잘못이 아니라면 뭐가 잘못인 걸까. 나 자체가 잘못인 걸까. 나는 어쩌면 총체적으로, 잘못된 인간은 아닐까. 어떤 인간인가, 나는. (P.400)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반복적 질문을 하며,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의문을 품은 채 하염없이 자책감에 시달리는 화자는 자연스레 작가가 이 작품을 쓰던 시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수많은 어린 학생들이 영문 모른 채 배 안에 갇힌 채 서서히 수장되어야만 했던 그 사고. 제아무리 후회하고 반성해봤자 벌어진 사고는 되돌릴 수 없다. 비극을 가져온 그들이 무슨 악의가 있었던가, 아니다 그들은 단지 평소에 하던 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화자가 결정적 순간에 디디가 아니라 자신의 가방을 붙들었던 것처럼.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있어. 컴컴한 모퉁이에서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이 사람이 이해할 수 있다는 나를, 나는 왜 이해할 수 없는가. (P.387)

 

화자가 자신의 인간성을 믿지 못하는데, 누가 그를 믿고, 그가 누구를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가 세상을 피해 은거하고 반인반수의 생활을 하는 행동은 인간성에 의심과 부정을 보여준다. 화자는 죽음에 이르는 길을 선택하였는가. 아니다, 비록 회한에 허덕이고 당장은 세상이 무의미하게 보일지라도 화자는 죽기 싫어한다. 어디 화자뿐인가, 죽을 듯이 아프고 괴롭더라도 우리는 어쨌든 살아가야 한다. 앞으로는 후회할 일이 더 생기지 않도록이라도. 그래서 화자가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구차하나마 생곡을 씹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작가는 한 줄기 빛을 남겨놓는다.

 

내가 여기 틀어박혔다는 것을 아는 이 누구인가.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내 발로 걸어 나가야 할 것이다. (P.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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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나의 개미 언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33
치누아 아체베 지음, 이소영 옮김 / 민음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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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체베의 마지막 장편소설을 읽으면서 아프리카 신생 독립국 캉안과 절묘하게 오버랩하는 우리네 현대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다소 희화조인 작가의 문체는 이 모든 게 한바탕의 희극인 양 기술하고 있다. 전반부에서 크리스가 증언하는 캉안 내각 각료들의 행동은 절대권력 앞에 무릎 꿇고 생존과 영달에 급급한 지식인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이제 좋은 날인가 나쁜 날인가는 각하가 잠자리에서 어떤 기분으로 일어나는가에 달려 있다. (P.10)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각하와, 크리스와 이켐은 소년 시절에 같은 학교에 다니며 수십 년간 서로 친구 사이였다. 이제 이켐은 국영 잡지의 편집장으로서 정부를 비판하는 날카로운 논조의 글을 기고한다. 크리스는 공보장관으로서 각하와 이켐 사이를 중재하려고 하나 성공하지 못한다.

 

각하가 처음부터 무지막지한 독재자로 변모한 건 아니다. 단순한 군인으로서 뜻하지 않게 권력을 움켜잡게 되었고, 막강한 경쟁자를 제거하자 그는 절대권력의 맛을 느끼게 된다. 최고 권력자는 신비감을 주어야 하며, 누구보다도 우월한 지위에 있어야 한다. 이제 측근의 조언은 용납할 수 없다, 각하의 우월성을 인정하지 않는 행위이므로. 토사구팽. 개국공신의 말로가 대체로 비참한 까닭은 한때 군주가 자신과 비슷한 신분에 있었기 때문이다. 군주와 신하라는 절대적 신분 차이를 깊게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의 목숨은 칼날에 스러지기 마련이다.

 

지금까진 여기 있는 이 보스가 자네나 다른 사람들이 보스 노릇하는 걸 허용해 주었기에 이 말이 자네한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더 이상은 안 되네, 크리스. 앞으로는 내가 보스 노릇을 할 거야. (P.247)

 

독재자일수록 표면상 법을 준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입법을 입맛에 맞게 하며, 법적으로 처리하기 곤란한 건을 처리해 주는 더러운 손을 신뢰한다는 점이 다르다. 크리스가 말했듯이 진짜 각료는 바로 그들이다. 모든 독재 권력이 처음부터 장기 집권을 획책하지 않는다. 나라의 혼란을 가라앉히고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권력을 이양하겠다고 밝힌다. 그리고 선거에 나서서 합법적으로 권력을 쟁취한다. 이어서 장기 집권을 위한 수순을 밟는다. 자의반 타의반. 그들의 논리는 항상 비슷하다.

 

각하는 저희의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큰 스승이십니다. 저희는 항상 배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P.35)

 

국민들은 의사 표명을 했고, 그들이 바라는 바는 아주 명백합니다. 각하는 운명적으로 국민을 위해 평생 봉사하셔야 합니다.” (P.14)

 

이켐과 크리스는 비록 서로 다른 행보를 보이지만, 정권에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다. 공보장관으로서 권력의 핵심에 머물 수도 있던 크리스의 고뇌는 이켐과 달리 한층 복합적이다.

 

하지만 내 관점에서는 전통 사회와 똑같이 오늘날의 여자들에게도 다른 모든 조처가 실패했을 때에만 참여할 수 있는 그런 역할을 맡기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그러니까 상벤의 영화에서 패배한 남자들이 내버린 창을 집어든 여자들처럼 말이다. (P.157)

 

크리스의 여자 친구 비어트리스는 또 다른 주요 인물이다. 고등교육을 받은 인재로서 그녀는 전반부에 크리스와의 관계에서 주목받았지만, 크리스와의 생이별 후 정신적 각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일찍이 이켐에게 캉안 전통 사회의 남성 우위적 인식을 비판하는 지적 면모를 보이지만 대체로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그녀였다. 각하의 부름에서 받은 모욕이 촉발한 오조 의식 등 전통문화와의 연계와, 하녀 애거서와 죽은 이켐의 연인 엘레와와의 유대감. 그리고 엘레와의 갓난아기를 위한 명명식 개최 등. 이제 비어트리스는 혼자서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

 

역사상 명군이라 칭송받는 군주는 반대의견 개진을 장려하였다. 절대권력자의 뜻을 거스르는 발언은 누구나 조심스럽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이견을 표할 수밖에 없는 신하와 참모의 뜻은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각하를 지지하지 않는 아바존 지역에 대한 박해와 차별, 이켐과 같이 정권의 치부를 드러내는 언론에 대한 탄압. 그것은 절대적인 오만함에 근거한 것이므로 쿠데타로 일거에 무너지게 되었던 것이다. 다만 쿠데타가 현상의 해결일지 또 다른 문제의 원인일지 작가는 말하지 않는다.

 

그건 끔찍하게 신랄한 농담이었어요. 자기 자신을 조롱하고 있었던 거지요. 그렇지만 바로 그런 점 때문에 그 두 사람, 크리스와 이켐이 훌륭한 거예요. 그들은 자신을 비웃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고 종종 그랬어요. 뭔가를 장악한 거만한 바보들은 스스로의 실수에 대해 자조적이지 못하죠.” (P.390)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더 이상 평안은 없다>, <신의 화살>은 이보 족의 전통문화가 서구 식민 세력의 침입으로 무너지는 역사적 과정을 객관적이며 장엄하게 기술하였다. 서구 식민체제의 유산으로 독립 후에도 여전히 아프리카는 표류하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서구에게 책임을 전가할 것인가? 각하와 각료들은 모두 서구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서구의 민주적 가치는 등한시하고 외려 눈감는다. 헌신적인 독립 투사가 정권을 잡은 이후 무자비한 독재자로 전락하는 사례를 우리는 많이 겪었다. <사바나의 개미언덕>은 작가가 이제 그들 자신에 던지는 엄정한 질문이 아니겠는가. 비아프라 공화국 투쟁에 참여하였고, 나이지리의 정치 상황에 대한 반발로 훈장을 거부한 작가로서.

 

전작과 유사하게 나이지리아 전통문화에 대한 소개가 있지만, 이전처럼 그 자체가 목적이거나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식민 지배를 벗어나 독립을 이룬 때이므로 시기적으로도, 지향적으로도 이 작품은 과거와 현재보다는,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민주적이고 발전적인 국가체제를 어떻게 구축해 나갈 것인지, 지역 차별적이고 남성 지배적인 전통문화의 부정적인 측면을 어떻게 해소하고 바람직한 사회 가치를 쌓아 올릴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담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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