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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 - 2015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작품 수록
한강 외 지음 / 문예중앙 / 2015년 11월
평점 :
작가 한강의 작품을 읽기 위해 구입하였다. 다른 글에서 적었듯이 이 책은 수상작 <눈 한 송이가 녹는 동안>을 포함하여, 수상소감, 자선작 <에우로파>, 연보와 인터뷰로 130면 가까이 할애하고 있어, 그의 신작 단편은 물론 작가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수상작 외에도 이 책에는 최종후보작 9편을 수록하고 있다. 이 중 김애란의 소설은 작품집 <바깥은 여름>에서 이미 술회하였으므로 여기서 따로 언급하지 않는다.
강영숙 「맹지」
권여선 「이모」
김솔 「피커딜리 서커스 근처」
김애란 「입동」
손보미 「임시교사」
이기호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정소현 「어제의 일들」
조해진 「사물과의 작별」
황정은 「웃는 남자」
<맹지 – 강영숙>
화자는 내심과 외면이 어긋난 인물이다. 내심으로는 세상과 타인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을 품고 있으면서도, 외면상 그는 타인에게 선한 언행을 내보인다. 지영과의 관계도 그렇다. 지영과 산업단지에서 만날 약속이 있는 듯이 행동하지만, 눈썰미가 있는 독자라면 그건 화자의 일방적 환상임을 알아차린다. 두 노인을 떨치지 못하고 연연해하다가 마침내는 창고 안에 처넣고 마는 장면도. 과연 사실일까 알 수 없다. 아마 화자 자신도 알지 못하리라.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P.152) 이처럼 작품은 어수선하며 화자 자신만큼이나 독자를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게 만든다. 해설은 이를 명료하게 정리한다.
소설가가 어떠한 논리를 통해서도 이해 불가능한 인간의 내면을 재현하고 있거나 인간의 정념이 어지럽게 뒤섞인 거대한 사회의 모습을 형상화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결코 명확한 문장으로 정리될 수도 없거니와 정돈된 서사의 형태로 제시되어서도 안 된다. (P.153, 해설)
<이모 – 권여선>
조카며느리와 시이모라는 흔치 않은 접점에서 풀어놓는 이모의 인생은 가족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전형적인 이야기에 속한다. 맹목적으로 한없이 희생적일 줄 알았던 그녀의 선택이 반전을 일으키는 장면은 속 시원하기조차 하다.
독자는 이모의 선택과 용기를 지지하고 공감하는데, 그것은 그녀의 선의에 대한 절대적 믿음에 근거한다. 이것이 흔들린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작가는 자신에게 호의를 가진 남학생의 손을 담뱃불로 지진 이모의 대학 시절 일화를 툭 던져놓는다. 이모의 참다운 모습은 무엇인가. 삶은, 인간성은 간단치 않음을 새삼 떠올리게끔 한다.
<피커딜리 서커스 근처 – 김솔>
루 첸과 드니의 생활양식과 행위 선택은 철저히 개인적 이득과 욕망에 충실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어설프기에 희극적이다. 이 블랙 코미디를 완성하는 인물이 바이 부레이다. 빈털터리 탈주민에서, 가짜 축구선수로, 노예와 보석상 점원으로 변신을 거듭하다 끝내는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남발하는 블랙 컨슈머로 파산하여 원점으로 회귀하는 바이 부레.
런던을 배경으로, 외국 사람이 인물로 등장하는 낯선 작품이다. 덕분에 우리네 것이 아닌 양 한 발짝 떨어져서 구경하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만약 배경이 서울이고, 익숙한 우리네 이름이 사용되었다면 우리가 쉽사리 피식거릴 수 있을까.
<임시교사 – 손보미>
자신과 타인의 삶을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는 무엇인가? 특히 빈부의 격차와 계층 간 차이가 극심해지는 현대사회의 요즘에서. 우리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욕심부리지 말라고 조언받는다. 그들을 올려다보고 부러워하며 한탄만 하다 보면 자신의 삶을 잃어버릴 수 있어서다. 그런 면에서 P부인의 마음가짐과 행동은 훌륭하다. 그녀는 주어진 역할을 최선을 다해 수행하지만 그것을 상대방이 알아주기를 굳이 기대하지 않는다. 거리두기와 평정심 유지를 좌우명으로 삼고 있듯이. 작가 또한 P부인에게 공명하여 대체로 냉소적이지만 P부인이 보모로 있는 가정의 상황을 그리 차갑지는 않게 기술한다.
사는 건 그런 거지. 그녀는 생각했다. 아, 괜찮을 거야. 언젠가, 마치 끈 하나를 잡아당기면 엉킨 끈이 풀어지듯이 잘못된 일들이 고쳐질 거야. (P.280)
정말 괜찮을까. 임시교사로, 보모로 일하였지만 그녀의 미래는 불확실하다. 차라리 불안과 염려를 솔직히 토로한다면 후련하겠지만 괜찮은 듯이 스스로를 다잡는 P부인의 모습에서 오히려 더욱 불안감이 느껴진다. 착하기만 해서는 삶이 더욱 퍽퍽해지기에 씁쓸하다.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 – 이기호>
여기 또 착한 사람들이 있다. 지나치게 착한 사람 권순찬과, 한 뼘만큼 적당히 착한 주민들. 지방대학 교수인 화자도 후자에 포함된다. 이따금 가족을 만나러 상경하고 돌아올 때 화자는 주체할 수 없는 화를 표출하지 않기에 애쓴다. 작가는 화자가 갖는 화의 원인이 무엇인지 드러내지 않는다. 화자만이 갖는 예외적인 성향이 아니기에 그럴 수 있다는 듯이.
권순찬은 억울한 피해자다. 그가 가해자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주소지로 등록된 곳에서 천막을 치고 피켓 시위를 하는 것밖에. 처지를 바꾸어 우리가 그의 처지에 놓였다면 별다른 뾰족한 방안이 있을 것인가. 까짓거 날린 셈 치고 훌훌 턴 채 자기 삶을 살아가든지 또는 주민들의 특별 모금을 감사한 마음으로 모른 체하고 받아들여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의 호의가 거부당하자, 주민들은 표변한다. 권순찬은 동정을 받는 피해자에서 아파트의 질서와 평화를 깨뜨리는 훼방꾼으로 폄하된다. 화자와 주민들이 애꿎은 사람에게 오히려 화를 내는 현상은 과연 누가 애꿎은 사람인지 반문하게 된다. 노숙인 쉼터로 끌려가는 권순찬과, 나중에 고급 외제차를 타고 등장하는 사채업자의 대조가 씁쓸한 뒷맛을 드리운다.
너나없이 공감을 말할 때, 사람의 선의가 아니라 구조적 적대를 성찰한다는 점에서 각별한 작품이다. (P.313, 해설)
<어제의 일들 – 정소현>
단편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상당히 구조적이고 복잡한 설정을 지닌 작품이다. 이용객이 거의 없는 주차장을 관리하는 심신이 불편한 장애인 화자. 그가 어머니라 부르는 사람은 진짜 가족이 아니며, 연을 끊고 산다는 사실. 우연히 화자를 찾아온 학교 동창을 통해 기억 저편에 방기했던 불편한 진실을 조금씩 깨우치는 화자. 왕따와 교사를 향한 사랑, 그리고 투신 시도와 그 후유증. 심심풀이로 그린 그림을 통해 알게 된 친구와 새로운 희망 등등.
차마 다 기억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그것들은 명백히 지나가버렸고, 기세등등한 위력을 잃은 지 오래다. 살아 있어 다행이다. 다행이라 말할 수 있어 정말 다행이다. (P.356-357)
작가는 과거와 현재, 기억과 현실 간 화해를 시도한다. 오랜만에 이별한 가족과 선생님을 찾아가며. 자기 돈으로 매상을 메꾸면서까지 주차장을 놓지 않으려고 애쓰던 화자는 어머니에게 사실을 밝힌다. 주차장은 사실상 텅 빈 채였고, 자신이 거짓말을 하였음을. 아픈 과거를 힘겹게 되새기고 고통 속에 함몰하기보다는 과거는 과거대로 묻어두고, 불편한 몸이나마 현실을 인정하고 긍정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모습은 분명 바람직한 모습이다. 다만 개인적으로 갑작스럽고 작위적이지 않나 우려스럽다.
<사물과의 작별 – 조해진>
화자가 고모와 서 군을 만나게 해주기로 결심한 건, 고모의 가슴 깊숙하게 맺힌 응어리를 풀어주기 위해서다. 알츠하이머로 서서히 스러져 가는 고모가 평온한 삶을 마무리할 수 있게 하려고. 아픈 현대사를 배경으로 하는 고모와 서 군의 엇갈린 삶의 행보는 고모에게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을 품게 했고, 이제 노년의 해후와 용서로 아름답게 해소되길 기대함은 조카로서 당연한 수순이다.
고모의 쇼핑백은 화자가 근무하는 지하철 유실물센터에 자리 잡는다. 서 군이 고모를 어떻게 기억하고 추억할지 알 수 없지만, 고모에게 서 군은 영원한 청년으로 각인되었기에 엉뚱한 이에게 쇼핑백, 그 안에 교도소 영치물을 담은 그것을 전달함으로써 과거와 정리를 할 수 있었다. 유실물센터에는 하나의 유실물이 추가되었다. 센터에서 보관하는 수많은 분실물은 타인의 눈에는 주인을 잃어버린 단순한 사물에 불과하다. 고모의 쇼핑백이 화자에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듯이, 유실물의 주인들에게 그 물건은 단순한 사물이 아닌, 깊고 넓은 의미를 담고 있는 인생의 한 단면일지 우리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으리라.
고모가 유기한 쇼핑백이 이곳에 있는 한, 유실물센터는 세계의 그 어떤 곳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공간으로 남게 되리란 걸 나는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이 세계를 구성하는 데 없어도 무방한 덧없는 조각일 뿐이란 것도, 내가 분명하게 그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슬펐다. (P.384)
<웃는 남자 – 황정은>
엄혹한 자책감을 지닌 채 과거를 곱씹는 화자에게는 삶도 중요치 않다. 보잘것없는 화자를 사랑해 주고 삶의 기쁨과 보람을 안겨주었던 디디의 죽음. 자체로서도 크나큰 타격일 텐데, 디디의 죽음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귀결이라는 더할 수 없는 자책감으로 화자는 세상과 단절된 채 틀어박혀 스스로 짐승이 되는 길을 택한다.
잘못이 있었다. 뭔가 잘못되었다. 그 잘못에 내 잘못이 있었다. 내 잘못인가. 잘못이다. 그게 잘못이 아니라면 뭐가 잘못인 걸까. 나 자체가 잘못인 걸까. 나는 어쩌면 총체적으로, 잘못된 인간은 아닐까. 어떤 인간인가, 나는. (P.400)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반복적 질문을 하며,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의문을 품은 채 하염없이 자책감에 시달리는 화자는 자연스레 작가가 이 작품을 쓰던 시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수많은 어린 학생들이 영문 모른 채 배 안에 갇힌 채 서서히 수장되어야만 했던 그 사고. 제아무리 후회하고 반성해봤자 벌어진 사고는 되돌릴 수 없다. 비극을 가져온 그들이 무슨 악의가 있었던가, 아니다 그들은 단지 평소에 하던 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화자가 결정적 순간에 디디가 아니라 자신의 가방을 붙들었던 것처럼.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있어. 컴컴한 모퉁이에서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이 사람이 이해할 수 있다는 나를, 나는 왜 이해할 수 없는가. (P.387)
화자가 자신의 인간성을 믿지 못하는데, 누가 그를 믿고, 그가 누구를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가 세상을 피해 은거하고 반인반수의 생활을 하는 행동은 인간성에 의심과 부정을 보여준다. 화자는 죽음에 이르는 길을 선택하였는가. 아니다, 비록 회한에 허덕이고 당장은 세상이 무의미하게 보일지라도 화자는 죽기 싫어한다. 어디 화자뿐인가, 죽을 듯이 아프고 괴롭더라도 우리는 어쨌든 살아가야 한다. 앞으로는 후회할 일이 더 생기지 않도록이라도. 그래서 화자가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구차하나마 생곡을 씹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작가는 한 줄기 빛을 남겨놓는다.
내가 여기 틀어박혔다는 것을 아는 이 누구인가.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나를 구하러 오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내 발로 걸어 나가야 할 것이다. (P.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