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명 :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제331회 정기연주회 - Romantic Voyage

일시 : 2025년 11월 14일(금) 19:30

장소 : 부천아트센터 콘서트홀

연주

  - 지휘 : 아드리앙 페뤼숑

  - 피아노 : 김송현

  - 연주 :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프로그램

  - 로시니, 윌리엄 텔 서곡

  -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C단조 Op.18

  - 베를리오즈, 로미오와 줄리엣 중 홀로 있는 로미오, 카퓰릿의 연회

  - 멘델스존, 교향곡 4번 A장조 Op.90 '이탈리아'


* 세줄평

왠지 그런 때가 있다. 남들은 다 좋다고 하는데, 나만 다르게 느끼는 경우. 피아니스트는 굉장히 뛰어난 연주를 하는데, 그의 반짝이는 음색이 라흐마니노프와 적합한지는 잘 모르겠다. 독주파트와 2악장이 유독 훌륭하다. 대체로 오케스트라의 중저음이 매우 강해서 총주 부분에서 피아노 소리는 묻혀 버린다. 앵콜곡인 레비츠키와 슈만 곡이 오히려 그의 강점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순관현악곡에서 부천필의 실력이 도드라진다. 다만 이전에 비해서 중저음이 부각되는 까닭을 모르겠다. 내 컨디션 탓인지 또는 좌석 위치 때문인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남자의 자리 - 개정판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른이 된 우리가 사진이나 영상 속 어린 자신을 보면 생소함과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내게 과연 그러한 때가 있었던가 하는 새삼스러운 의구심도. 부모님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동일한 감정을 품게 된다. 그네들도 어린 시기, 청춘의 때가 있었구나 하는 뜻밖의 발견도. 우리가 익히 아는 부모는 언제나 어른이거나 노인의 모습뿐이다. 우리랑 비슷한 또래 또는 더 어린 부모의 모습을 보는 경험은 자못 묘하다.

 

어릴 때는 절대적 존재감을 지닌 부모이지만, 늙고 약해진 부모는 보살핌의 대상이자 구시대의 유산이다. 귀가 닳도록 되풀이하는 옛날 타령과, 개인적 경험에서 우러나온 무용한 습관과 말투, 태도 등. 비교적 짤막한 이 작품을 읽는 소회는, 한국이나 프랑스나 자식은 참으로 부모를 이해하기 어렵구나 하는 유사성이다.

 

나는 예전처럼 울고 싶다. <<그러니까 그는 절대 달라지지 않는다니까!>> (P.90)

 

잘난 부모라면, 물려받고 따를 것이 많겠지만 화자처럼 시골, 소시민 계층에서 자라난 경우 당사자의 일차적 목표는 탈출이다. 촌스럽고 수준 낮은 집안과 동네를 떠나 대도시의 세련되고 고상한 사회에 진입하는 것. 화자의 아버지로서는 아내와 함께 소박하나마 카페 겸 식료품점을 운영하게 된 것 자체도 장족의 발전이자 성공이다. 중세 시대나 다름없던 시골에서 자라 공장에서 일하다가 자영업을 시작하며 노동자에서 사장님으로 변신하였으니까. 배운 것 없고, 부유하지 못한 처지이지만, 그는 그 자리를 얻고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했다. 노동자보다는 상인으로 보이고 싶어 했다. (P.39)

 

화자의 어린 시절은 카페 겸 식료품점을 드나드는 술꾼과 가난한 이웃의 허름한 삶으로 기억한다. 친구들처럼 적당히 학교 다니다가 청소년기에 일자리를 구해서 부모와 비슷한 삶의 패턴을 반복하는 것, 그게 화자에게 비친 자신의 미래이다. 화자가 그들과 달랐던 점은 똑똑하여 공부를 잘하였고, (아버지가 어렵사리 확보하고 안주하는) 처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하여서다. 격려하고 상찬할 만한 선택이다.

 

어떤 낯선 이의 시선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의 세계에 들어간 것은, 그 세계가 내게 열렸던 것은 내가 살던 세계의 방식과 생각, 취향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P.86)

 

학력이나 직업 등에서 이미 화자는 부모 수준을 뛰어넘었다. 그녀가 고향에 커다란 애정을 지닌 것도 아니다. 그녀가 접하는 사회는 대도시의 고상하고 지적인 소위 부르주아다. 화자가 가끔이나마 고향을 되돌아보는 까닭은 부모가 사는 곳이기에 그러하리라. 그런 부모의 존재도 본능적이고 윤리적인 최소한일 뿐 엄청난 사랑과 존경을 품고 있어서도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화자와 아버지 간 단절과 불통은 일견 정상적이면서도 안타까움을 갖게 만든다. 우리는 부모들이 어릴 때부터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며 관심도 없다. 우리가 바라보는 부모의 모습은 현재에 국한될 따름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그네들을 온전히, 그리고 온당히 이해할 수 없다.

 

식사를 하던 중에 아무것도 아닌 일로 싸움이 터지고는 했다. 그가 대화를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나는 늘 내가 옳다고 믿었다. 나는 그가 음식을 먹는 태도 혹은 말하는 방식을 지적했다. (P.75)

 

화자의 글쓰기는 서술적이며, 건조하다. 내용상 과장이나 수식을 극도로 배제한다. 표현에서도 감정개입을 조심하고 담담한 태도를 끝까지 견지한다. 때문에 이 작품을 소설로 보는 게 타당한지 의구심이 든다. 전기라고 하긴 그렇고 수기 또는 행장에 가깝다. 그럼에도 작가가 이런 글쓰기를 선택한 이유는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삶을 그리는 게 가장 확실해서다. 그렇지 않은 삶은 잘 알지 못할뿐더러 허구나 과장이 개입될 것임을 피할 수 없어서가 아닐까.

 

이 작품에서 어떠한 극적인 사건 흐름과 감동적인 장면을 기대한다면 낭패다. 20세기 후반기에 여전하였던 자식과 부모 세대 간 소통 단절과 부재, 시골과 도시, 하류 계층과 중상류 계층 간 뚜렷한 계층 차이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을 읽는 21세기 전반기에 그것이 단지 과거의 유물에 불과한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지 아닌지를 우리 각자는 비교하여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글을 쓰며 하류라 여겨지는 삶의 방식에 대한 명예회복과 그에 따른 소외를 고발하는 일 사이에서 좁다란 길을 본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우리의 것이었고 심지어 행복하기도 했으며, 우리가 살던 환경의 수치스러운 장벽들(<<우리 집은 잘살지 못한다>>는 인식)이기도 했으니까. (P.4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리스트 : 파가니니 대연습곡 & 사랑의 꿈
리스트 (Franz Liszt) (1811-1886) 작곡, 박종훈 (Chong Park) / 비타민엔터테인먼트 / 2011년 9월
평점 :
절판


유명한 ‘라 캄파넬라‘를 포함한 대연습곡 6곡은 모두 파가니니를 롤 모델로 추구했던 리스트의 전심전력이 깃든 뛰어난 작품이다. <사랑의 꿈>은 사랑을 노래한 야상곡답게 은근한 서정미가 물씬 풍긴다. 박종훈은 리스트가 갖는 힘, 기교, 서정성을 고루 잘 발휘한다. 녹음도 우수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연명 : 라인 피아노 듀오 창단 연주회 - 김민영, 송민혁 피아노 듀오 리사이틀

일시 : 2025년 11월 11일(화) 19:30

장소 : 금호아트홀 연세

연주 : 라인(Rein) 피아노 듀오

  - 김민영 (피아노)

  - 송민혁 (피아노)

프로그램

  - 모차르트, 네 손을 위한 피아노 소나타 D장조 K.381

  - 슈베르트, 네 손을 위한 환상곡 F단조 D.940

  - 아렌스키, 2대의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 1번 Op.15

  - 차이코프스키, 호두까기인형 모음곡 Op.71a (2대의 피아노를 위한 편곡)


* 세줄평

전반부는 비교적 생소하고, 후반부는 상대적으로 친숙한 프로그램이다. 창단 연주회라고 하는데, 두 연주자가 수시로 아이컨택을 하면서 호흡을 잘 맞추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모차르트의 곡은 피아노적이기보다는 쳄발로적 울림을 연상시킨다. 슈베르트의 환상곡은 집중 감상이 처음인데, 아련한 선율과 진중함이 대비를 이루는 멋진 곡이며, 좋은 연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잔인한 입맞춤 - 누가 유다에게 ‘배신자’라는 누명을 씌웠는가
박진희 지음 / 파람북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제 : 누가 유다에게 배신자라는 누명을 씌웠는가

 

얼마 전부터 <성경>을 통독하고 있다.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도 서양 문화를 이해하려면 교양서로서 <성경>을 외면할 수 없다. 신약을 끝내고 지금은 구약 중 모세 오경 대목을 읽는 중이다. 기독교 신자라면 정통 성경으로 만족하겠지만, 나로서는 외경 및 위경도 관심 대상 중의 하나다. 게다가 성경 해석의 정통주의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 대목에 대한 호기심도 있다. 이 책의 독서는 그런 호기심의 발현이다.

 

가룟 유다가 누군가. 예수를 유대인에게 팔아넘긴 배신의 아이콘이다. 소위 신약 사대 복음에서 유다는 예수 자신의 저주를 받는 동시에 배신의 자책으로 영원한 파멸에 빠지는 인물이다. 기독교 신자라면 질타와 비난과 저주를 아끼지 않고 반면교사로 삼아 교리에서 외면해야 함에도 기독교의 성립에 있어 유다는 대체 불가한 이바지를 하였다. 예수는 자신이 유대인에게 넘겨져 십자가 형벌에 처해 죽음을 맞아야 비로소 자신의 소명을 완수한다고 여러 차례 천명한다. 성경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예수란 인물이 정확히 누군가인지 판별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예수가 스스로 그들 앞에 나아가지 않는 한 누군가가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지목해야 비로소 체포할 수 있다.

 

예수를 배신한 가룟 유다의 계획은 인간의 영역에서 이루어졌던 셈이고 예수를 배신한 척한 가룟 유다의 계획은 신의 영역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래야만 예수의 죽음에 대한 절대적 계시가 성립할 수 있다. (P.238)

 

이 대목에서 저자는 일부 종교학자의 의견과 함께한다. 즉 유다는 실제로는 예수를 배반한 게 아니라는 주장이다. 예수가 이루어야 할 천명을 수행하기 위해 예수를 유대인들에게 넘겨줄 악역을 담당하는 불가피한 소명을 이해하는 유일한 제자가 유다였다고 한다. 예수의 설득에 유다는 후세에 길이 남을 역사적 배반을 감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기독교에서 유다를 무차별적으로 비난함은 부당하다는 요지다.

 

비신자 입장으로서는 흥미로운 의견이다. 저자는 사대 복음의 유다와 예수의 죽음에 이르는 대목을 꼼꼼히 독해한다. 여기서 나로서는 사대 복음의 저작 순서 관계를 주목하게 되었고, 요한복음이 다른 복음과는 달리 공관복음이 아니라는 점도 인식하게 되었다. 저자가 주장한 대로 분명히 사대 복음 간의 기술에는 불일치가 자주 드러남도 확연하다. 다만 이러한 불일치가 곧 유다 오해의 타당한 근거로 이어지지는 않기에 설득력 여부는 별개라는 생각이다.

 

저자는 예수와 유다 간 묵계의 유사한 예를 구약에서 근거한다. 후새는 다윗의 친구임에도 다윗을 배반하고 압살롬 편에 합류한다. 절체절명의 순간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계책을 따르지 않고 후새의 제안에 동조함으로써 다윗은 결정적 파멸을 모면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후새는 외견상 다윗의 배반자이지만, 그것은 다윗의 복귀를 위한 의도적 배반이었다. 그럴듯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저자의 일방적 해석일 따름이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명확한 근거 제시보다는 추정의 문구만을 나열하고 있다.

 

예수는 유다에게 그들의 함정을 역이용해서 이를 거룩한 사건으로 승화시켜야 한다고 그 속내를 털어놨을 것이다. [......] 예수는 유다에게 우리가 도모하는 사건을 기필코 명절에 일으켜서 한 번쯤은 세상이 천지개벽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강변했을 텐데, 그러려면 유다가 배신자의 역할을 떠맡아야 한다고 덧붙인 듯하다. (P.221-222)

 

후반부에서 <유다 복음>이 소개되고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도 유다의 역할에 대한 의문 제기는 뿌리 깊었던 모양이다. 이 복음이 저작의 근본 동인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저자가 영지주의자 관점을 따르고 있지 않아서이다. 오히려 그는 오늘날의 기독교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목회자와 교회의 일탈은 충분히 비난할 수 있는데, 그것이 뜬금없는 장면에서 자주 등장하니 당혹스럽다. 저작 목적이 배신자 유다의 누명을 벗겨주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변질한 현대 기독교를 향한 예리한 비판인지 애매하다.

 

인류역사에서 돌이킬 수 없는 일대의 사건이었던 개교회주의자 처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작금의 민낯을 보라. 저마다 교회는 목사라는 각자의 교황을 추대한 교회교가 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모르긴 몰라도 세속사회보다 훨씬 더 세속화되어버린 교회가 지금 당신이 몸담고 있는 교회는 아닌지, 부디 발끈하지만 말고 돌아보길 바란다. (P.139-140)

 

결론적으로 저자의 문제 제기 자체는 괜찮았지만, 주장 전개와 입증에서 개연성과 설득력이 약하고 산만한 자기주장에서 멈추었다는 생각이다. 때로는 원래 저작 목적에서 벗어나 다른 곳에서 헤매고 있는 인상마저 든다. 독서 목적으로만 보자면 전체적으로 썩 만족스러운 경험은 아니다. 그럼에도 분명 유익한 점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덕분에 예수의 고뇌와 기도, 유다의 배신, 십자가의 예수와 같은 특정 단락을 사대 복음을 비교하여 반복해서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성경 기술에 함몰되지 않고 예수의 소명 완수와 유다의 배신에 관한 통념적 견해에 새로운 관점을 도입해 볼 수 있는 경험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