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과 불운에 대처하는 법 상냥한 지성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지음, 임희근 옮김 / 유유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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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가 다소간 상업적 처세술의 냄새를 풍기기에 시큰둥하지만, 어쨌든 페트라르카의 글이라고 하니 속는 셈 치고 읽어본다. 이게 웬걸, 페트라르카로서는 드물게 익살과 해학이 넘치는 작품이다. 표제도 원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에 의외로 충실하다고 하겠다.

 

형식이 독특하다. 2부 구성인데, 1부는 행운에 대처하는 법이며 2부는 불운에 대처하는 법이다. 모두 대화 형식을 취하고 있다. 1부는 기쁨 또는 희망과 이성 간 대화이며, 대화에 앞서 삶의 기쁨과 희망에 동요하지 않기 위하여라고 서론이 달려 있다. 2부는 고통 또는 두려움과 이성 간 대화이고, 역시 대화에 앞서 삶의 고통과 두려움에 좌절하지 않기 위하여라는 글로 시작한다.

 

이런 운명의 두 얼굴이 다 두렵다 해도 우리는 행운과 불운 모두를 받아들여야 하네. 한쪽은 제동이 필요하고, 다른 한쪽은 위안이 필요해. (P.31)

 

저자가 이 책에서 강조하는 점은 대체로 중용에 가깝다. 쉽게 말해서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에게 닥친 행운에 겨워 기쁨 또는 희망으로 가득한 사람은 이성으로 이를 조절하고 적절한 브레이크를 밟아야 한다. 반대로 불운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은 고통 또는 두려움을 이성의 힘으로 차분하게 견디고 좌절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일체유심조라는 원효 대사 해골물을 마음에 새기며. 결국 중요한 건 외부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의 중요성이다.

 

외모, 언변, 미덕, 지혜, 책이 많은 것, 작가라는 명성, 친구가 많은 것, 사랑과 연애, 평온, 권력, 영광, 행복한 마음, 더 좋은 시절, 끝없는 희망, 마음의 평온 등 누구라도 자신이 이런 행운을 지녔다면 기쁘고 행복하기 마련이다. 여기서 이성의 조언은 살벌할 정도로 직설적이고, 때로는 비꼬기조차 한다. 기쁨과 희망의 나래를 무참히 꺾어버리는 조언이 비일비재하다.

 

내 말을 믿게. 자넨 모르겠나, 친구라고 공언하는 사람이 모두 진짜 친구라면 이 세상은 지금보다 좀 더 순수하고 평온하리라는 것을 말이야. (P.75, ‘친구가 많은 것’)

 

기쁨 : 어떤 날이 온대로 난 사랑 없인 못 살 거야.

이성 : 맘대로 해! 즐기고, 미친 짓을 하고, 맘껏 꿈을 꾸라고! 꿈에서 깨어나면 엉엉 울게 될 테니. (P.80, ‘사랑과 연애’)

 

이승에서 휴식을 스스로에게 약속하지 말라고. 내 말을 믿게, 힘든 일을 마친 사람에게 유일한 휴식은 죽음이야. (P.83, ‘평온’)

 

특히 끝없는 희망’(P.106-109)은 익살조의 경구로 이어져 있어 한 편의 만담을 보는 듯하다.

 

2부 불운 편도 마찬가지다. 잃어버린 시간, 치욕, 형제와의 불화, 자식의 죽음, 속박과 구속, 원치 않은 이주와 망명, 자신과의 불화, 늙음, 역경과 슬픔, 무거운 영혼, 부족한 미덕, 몸의 고통과 통증, 죽음, 눈앞에 닥친 죽음 등 세상을 살다보면 마주치게 되는 온갖 불운. 우리는 불행에 슬퍼하고 상심하며 좌절과 고통에 몸부림치기 일쑤다.

 

여기서 이성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올 수 있도록 따뜻한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인생지사 새옹지마이고 순간의 역경이 다시 좋은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둥 말이다.

 

그렇지만 누구나 뜻하지 않게 남에게 돈을 빼앗길 때가 있는 반면, 시간은 빼앗기는 줄 알면서도 기꺼이 빼앗기지 않던가. 그래서 당하는 사람의 결함 때문에 상실이 증폭될 때 상실은 더욱 크게 느껴지지만, 자기가 좋아서 잃어버리고 잃었다고 불평하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P.132, ‘잃어버린 시간’)

 

고통 : 나는 비좁고 더러운 감옥에 갇혀 있어.

이성 : 자네의 가엾은 육신보다 더 더럽고 비좁은 감옥은 없네. 그런데 자네는 그 육신에서 행여 벗어나게 될까 두려워하지. (P.166, ‘속박과 구속’)

 

만약 죽음에 나쁜 점이 있다면 죽음이 더욱 두려워지기만 할 거야. 하지만 아무 나쁜 점도 없다면 두려워해야 할 단 하나의 나쁜 점은 죽음에 대한 공포 자체뿐이야! (P.229, ‘죽음’)

 

가톨릭 사제의 신분인 페트라르카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 책을 썼을지 궁금하다. 언뜻 봐서 가벼운 유희 같은 심정으로 집필하였을 것이지만 얄팍한 처세서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누구나 살다보면 여러 행과 불행을 겪게 마련이다. 저자가 오롯이 중시하는 바는 되풀이하지만 결국 마음의 문제다. 인간의 의지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면 무엇이 대수이겠는가마는, 운명의 장난은 대개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다.

 

현상의 원인과 본질이 무엇인지 이성의 엄정한 시각으로 헤아린 후 그에 대한 적합한 마음의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면 비록 외풍은 나의 겉을 흔들 수 있지만 나의 속은 건드리지 못하리라. 그것은 처세를 넘어 삶의 철학이기도 하다.

 

옮긴이에 따르면 전체 254개 대화 중에 59개를 추려서 수록했다고 하며, 또한 번역한 항목의 경우도 종교적 주장이나 전거를 담고 있는 내용은 삭제했다고 한다. 이로써 원본을 완역한다면 상당히 두툼한 책이 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그래도 원전에 근거한 완역본을 제대로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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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 안은영 오늘의 젊은 작가 9
정세랑 지음 / 민음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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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자체보다도 동명의 넷플릭스 드라마 이름을 먼저 들어보았다. 물론 보지는 않았지만, 표제가 신기하네 하는 정도의. 나중에 학교 소식지를 통해 작가에 대한 정보를 알고 비로소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후 드디어 드라마도 시청하였다. 원작과는 닮은 점도 다른 점도 있지만 무난하게 보기에는 나쁘지 않다.

 

작가 정세랑은 판타지 장르의 소설을 주로 쓴다. 이 작품도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 소설이다. 민음사의 오늘의 젊은 작가시리즈에 올라올 정도로 판타지물의 위상도 매우 높아졌다. B급으로 취급받던 시절에 비하면 격세지감이다. 소설은 허구지만, 현실에 기반하여 그럴듯함을 추구한다. 환상소설은 다르다, 환상 즉, 그렇지 않음을 기반으로 그럴듯함을 지향한다. 이성과 상식으로 납득되지 않은 상상의, 환상의 인물, 사건, 배경 등을 독자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볼 수 있고 나쁜 존재들과 싸워 물리친다. 이른바 유령이나 심령적 존재들과. 작가는 잔혹하고 공포스러운 미스터리물로 이 작품을 끌고 갈 생각이 없다. 안은영의 무기가 깔때기 칼과 비비탄 총이라는 점이 그렇다. 웃기지 않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사악한 괴물과 싸우는데 고작 어린이들 장난감이라는 게.

 

사립 M고는 수수께끼를 지닌 학교다. 수많은 청춘이 목숨을 던진 연못을 메운 자리에 왜 굳이 학교를 세웠을까. 그 음산한 기운의 존재를 승권의 조부는 알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압지석과 정기적인 소독만으로 언제까지나 예방할 수 있었다고 믿었던 걸까. 은영 못지않은 능력자 메켄지는 다른 학교도 아닌 여기 사립 M고 영어교사로 왔을까. 역시 학교의 비밀을 알고 있는 건지 아니면 은영이 감탄한 승권을 둘러싼 강력한 기운을 빼앗아가기 위한 치밀한 노림수였던가.

 

은영은 슈퍼맨이 아니다. 그녀가 악령과 싸우는데 에너지가 필요하다. 탑이나 성당 등에서 에너지 충전을 해야 하는데, 승권은 그야말로 에너지 덩어리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게 된 것은 사실상 비즈니스 파트너로서다. 승권은 보이지 않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지만.

 

실연을 경험한 아이들을 홀리는 괴물을 물리쳤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용과 같은 훨씬 더 막강한 괴물과 맞닥뜨리는데, 의도적으로 승권에게 접근하고 은영의 눈을 흐리게 하기 위해 교묘한 장치를 만들어놓을 정도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그런 행위를 하였는지 작품에서는 명확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만두지 말아요. 다른 데 가지 말아요.”

안 그래도 몇 년 더 있으려고요. 이 학교는 잠잠하다 싶으면 더 위험한 게 꼬여서.”

그런 의미가 아니라 나랑 있어요.” (P.271)

 

그리고 위기를 함께 넘긴 두 사람은 달라진다. 역시 이래야 독자의 얄팍한 감정을 기쁘게 한다. 자고로 청춘남녀 주인공은 짝으로 맺어줘야 온당하므로.

 

작가는 은영과 승권이 학교를 지키고 사랑을 키워나가는 기본 틀을 중심으로 자잘한 사건과 이야깃거리를 배치한다. 두 친구 럭키와 혼란, 래디 어머니의 유령, 온건한 역사 교사 등. 특히 역사 교사 사건에서는 역사교과서 왜곡을 유령의 등장으로 해결하는 기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흥미로운 동시에 가슴 아픈 이야기는 옴잡이 여학생과 은영의 옛친구 김강선이다.

 

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수술 후에도 혜민의 눈에 옴이 보일 때가 있었지만 점점 희미해졌고 드물어졌다. 어쩌면 다른 옴잡이가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옴 때가 사그라들었을 수도 있다. (P.216)

 

사람이 아니면서 긴 시간을 반복하여 사람으로 태어나 짧은 생을 살아가는 옴잡이의 사연은 누구라도 연민을 느낄만하다. 당사자가 슬픔과 연민의 감정을 모르기에 더더욱. 완전한 인간으로 만들기 위한 은영의 노력이 아름답다. 위 결과를 보면 옴이 창궐하니 옴잡이가 태어나는지, 반대로 옴잡이가 있기에 옴이 나타나는지 헤아리기 어렵다.

 

은영의 친구 강선을 통해 작가는 영혼이 소멸하는 현상을 독자가 관찰할 수 있게 한다. 학창 시절 서로가 왕따로 힘겹게 지내던 때, 강선의 도움으로 은영은 자신의 능력을 비로소 정면으로 마주 볼 수 있게 되었다. 엉뚱하지만 명랑한 보건교사 캐릭터 설정도 그의 조언을 따른 것이 아니던가. 자신의 출생을 극복하고자 정직한 땀으로 살아가고자 했던 강선의 죽음은 그래서 더더욱 은영이 받아들이기 힘들었으리라. 악귀의 작용이 아닌 순전한 인재(人災)이기에.

 

-부서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조금만 더 있어, 말하고 싶었지만 은영은 칙칙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은영은 웃는 얼굴을 유지하려 애썼는데 잘되지 않았다. 강선이 방충망에 등을 기댔다. 천천히 망 사이로 조그만 입자가 되어 흩어졌다. 그러고 나선 금방이었다. (P.193)

 

역사를 공부한 작가답게 역사적 배경을 끌고 와 접목하고,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를 다루며, 학교와 사회 문제도 슬쩍 건드리며 소설을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유령과 귀신 이야기를 다루자면 끝도 없고, 깊숙이 다루자면 한도 없다. 작가는 여기서 에로에로 파워야말로 세상을 끌어가는 원동력으로 보는 듯하다. 에로라고 하니 단순히 에로틱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사랑의 힘이야말로 생명의 근원적인 힘 아니겠는가.

 

개개의 에피소드들도 충분히 한 권으로 다룰만하며, 기본 틀을 이루는 사건도 너무 간단히 쑥쑥 넘어가는 느낌이 있다. 빠른 전개는 장점이지만 독자는 깊은 재미도 느껴보고 싶은데. 한 권으로 마무리하기엔 아쉽다. 작가 스스로 쾌감과 즐겁게 쓴 이야기라고 하였으니, 작가 후기처럼 후속작이 나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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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리스 BLISS - 내 안의 찬란함을 위하여
임현정 지음 / CRETA(크레타)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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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세 번째 책이며, 자전적 내용으로는 <침묵의 소리>에 이어 두 번째에 해당한다. 앞서 두 권을 모두 읽은 나로서는 이 책도 손에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자전적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이전과 비교하면 개인사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물론 개인적 경험도 언급하지만 이는 저자의 의견 또는 주장을 입증하거나 강화하는 예시로서 기능한다.

 

저자는 피아니스트로서 성공에의 지름길인 유명 콩쿠르 입상자 출신이 아니다. 유명 음반사의 눈에 띄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 녹음으로 이름을 알렸다. 이후 저자의 행보는 독특하다. 편하고 안정된 길이 아닌 자신만의 길을 추구하는데 음악원 교수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음악 기획사를 차려 틀에 박힌 음악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고 있다. 작년에 나는 비록 가보지 못했지만,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전곡 독주회는 보기 드문 대담한 도전이 아니겠는가.

 

이 책에서 저자가 다루고 강조한 것은 음악에의 순수한 헌신이다. 어린 나이에 홀로 프랑스에서 유학 생활을 견디며 저자가 절실하게 깨우친 것은 음악의 순수성과 사회의 비순수성이다. 인종적, 음악적 차별에 주저앉지 않고 극복하였기에 오늘날 피아니스트 임현정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침묵의 소리>에서 상세히 접한 바 있다.

 

성공을 위한 콩쿠르에 내 소중한 시간을 투자하느니, 다시 말하자면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오로지 음악 자체에만 몰두하고, 음악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결심이다. (P.41)

 

콩쿠르는 음악도에게 있어 양날의 검과도 같다. 저자는 더욱더 비판적인데, 특히나 음악계에 판치고 있는 부조리 사례와 마주쳤기 때문일 것이다. ‘국제콩쿠르의 심사위원 직을 내려놓으면서 공식적으로 발표했던 사임서’(P.42)는 이에 대한 저자의 강렬한 반응이다.

 

이 책에 담긴 음악을 향한 사랑과 음악을 대하는 헌신적 태도는 물론 저자 자신에게서 비롯하겠지만, 같을 길을 따르는 후배들이 엉뚱한 길에서 방황하거나 잘못될 길로 향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일념도 담고 있다. 워낙 특이한 저자의 이력을 통해 유형화된 경력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음악가로서 살아남고 성공할 수 있는 예시를 보여주면서.

 

그렇기에 이 책은 곳곳에 후배들을 향한 절절한 조언과 지침을 담고 있다. 추상적 도덕과 훈계 문구가 아닌 것은 오로지 저자 체험의 산출물인 탓이다. 붉은색 글자 배경의 문장을 유심히 숙독해야 할 이유이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유명한 것존경스러운 것에 대한 차이도 알려주지 않은 채 무조건 성공만 재촉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볼 때다. (P.162)

 

또한 무대를 앞두고 겪게 되는 압박과 긴장, 초조를 극복하기 위한 아홉 가지 방법(P.120)은 연주자들도 공연에 앞서 이렇게나 긴장함을 알 수 있는 동시에 저자의 효과적인 경험담을 공유할 수 있어 후배 연주자들 또는 음악계가 아니더라도 강연, 발표를 앞둔 사람들에게도 유익할 것이다.

 

음악은 자체로 순수하고 아름답고 고상하지만, 음악인은 다르다. 그 또한 사람이기에 생활인으로서 여러 부침을 겪게 마련이다. 특히 직업 연주자라면 더하다. 무대공연 실패는 경력의 나락으로 이어질 수 있고, 더 좋은 기회를 얻기 위해 그럴듯한 간판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모험보다는 안정을 추구하고, 사교 관계에 애쓰기도 한다. 그럴수록 음악의 순수성은 퇴색하기 마련이다. 아름다움은 몇 개의 음악으로만 한정되고 만다. 저자는 과감한 도전을 외친다.

 

존재의 감각까지 마비시키는 예술의 아름다움은 어린 생명체, 어둠을 눈부시게 수놓은 별, 하늘을 적시는 황혼, 사랑스러운 이의 얼굴과 같이 시공간의 흐름과 몸의 고통까지도 망각하게 한다. 뇌와 심장도 모르는 사이, 입술 사이로 아름답다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새어나온다. (P.142)

 

아름답지 않은가. 이러한 사고를 품을 수 있고 이런 순간을 함께 할 수 있다면. 작곡자의 영감을, 연주자를 통해 청중과 교감을 이루어낼 때 우리는 음악에서 지고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세속의 명예에 연연하지 않고 홀로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을 우리는 구도자라고 하지 않던가.

 

아무것도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오로지 영혼의 숨결만으로도 충만감을 느낄 수 있는가. 어떤 것도 없이,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하고 온전하며 완전하다는 것을 느끼는가. (P.187-188)

 

익숙한 에세이로 가볍게 생각하면 오산이다. 전작의 후반부에서 영적인 충만을 갈구하던 것과 맥을 같이한다. 저자의 지향점은 단순히 기교로서, 흥미로운 예능의 단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음악이야말로 언어가 끊긴 곳에서 비로소 의미를 발하는 매체다. 이성과 지성을 넘어선 감성과 영성의 순간. 음악의 아름다움이 자체로 아름다운 나 자신과 만나 찬란함을 이루는 때. 그것을 위해 저자는 음악적 완성을 위해 노력할 것이고, 우리는 음악을 제대로 향유할 수 있도록 애쓰는 것 아니겠는가.

 

개인적으로 피아니스트 임현정의 연주를 아직 좋아하지 못한다. 이전에 층층이 쌓인 수많은 연주에 너무나 익숙해진 탓일까 아니면 그의 연주관에 공감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기 때문일까. 다만 저자의 책들을 읽으면서 새삼 그가 음악과, 음악을 표현하기 위해 진지한 고민을 꾸준히 하고 있다는 점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저자는 음악 연주만큼이나 글을 잘 쓴다. 그리고 책 뒷부분의 십여 장은 저자의 연주 화보를 흑백으로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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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2025년 3월 1일(토) 15:00

장소 : 금호아트홀 연세

연주 : 윤아현 (피아노)

프로그램

  - 바흐, 프랑스 모음곡 4번 E flat 장조 BWV 815

  - 브람스, 6개의 피아노 소품 Op.118

  - 월터 사울, 야상곡 (2012)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1번 B flat 장조 Op.22


* 세줄평

바흐의 프랑스 모음곡은 개인적으로 글렌 굴드를 애호하기에 연주자의 피아니스틱한 접근이 와닿지 않는다. 마지막 지그는 괜찮았지만. 이어지는 브람스 곡의 연주도 좋았지만 이곡은 대체로 아직은 친해지기 어렵다. 월터 사울은 연주자의 이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음향은 현대적이지만 곡자체는 다가가기 어렵지 않다. 그리고 큰 스케일로 이지와 감성 양면에 호소하는 베토벤의 음악은 역시 좋다.
첫곡의 실수로 긴장이 풀어지지 않은 까닭일까 연주 내내 피아니스트의 표정이 굳어 있다. 청중의 성의어린 박수에도 연주자는 앙코르 없이 음악회를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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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애거서 크리스티 에디터스 초이스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김남주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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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서 크리스티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읽고 나면 과연 그렇구나 하고 공감하게 되는데, 작가가 설계한 예측 불가능한 함정에 누구라도 빠질 수밖에 없어서다. 다만 작가의 말처럼 이런 수법은 거의 전적으로 한 번만 써먹을 수 있다는 한계를 지닌다.

 

작가는 여기서 탐정 푸아로의 다채로우면서도 뛰어난 역량을 한껏 드러내 보인다. 애초 초반부터 그를 포로토 씨라는 낯선 영국식 발음으로 주변 인물이 동일인임을 연상시키지 않도록 한다든지, 그의 직업을 은퇴한 원예가로 하여 방심토록 하는 데서 출발한다. 중반부에는 탐정으로서 의기양양한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푸아로의 유능함을 화자와 함께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푸아로는 고개를 내젓고는 가슴을 활짝 편 다음 우리에게 눈을 깜박이며 서 있었다. 대단한 인물인 양 으스대는 그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그가 정말로 훌륭한 탐정일까 하는 의혹이 내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의 대단한 명성이 혹시 요행의 결과는 아니었을까? (P.138)

 

화자인 의사 셰퍼드와 독자와 주변 인물은 그의 명성에 회의적 견해를 품는다. 제아무리 명성 높은 탐정이라도 이 사건 자체가 너무나 명명백백해서 행방불명된 랠프 페이턴의 소재를 파악하고 그를 체포하면 그것으로 끝날 것으로 말이다.

 

여기서 푸아로의 유명한 회색 세포론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는 용의선상에 오른 주변 인물 모두를 향해 질타한다. 그들 모두가 자신에게 숨기는 게 있으며, 아무리 자그마한 거라도 솔직히 자신에게 털어놓으라고 요구한다. 용의자들을 안심과 긴장 사이에서 쥐락펴락 분위기를 일변하는 푸아로의 능력에 화자인 의사 셰퍼드는 새삼 탄복한다. 푸아로는 셰퍼드에게 이렇게 말한다.

 

제일 처음 할 일은 그날 저녁 일어난 일을 명료하게 알아내는 겁니다. 상대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면서 말입니다.” (P.218)

 

푸아로는 잠시 그를 쳐다보더니 재빨리 웃음을 띠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답니다. 증명된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말입니다!” (P.308-309)

 

작중에서 의사 셰퍼드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는 소설의 전개를 이끄는 중요한 화자인 동시에, 푸아로의 조수 역할도 맡는다. 셜록 홈즈의 왓슨처럼, 푸아로의 헤이스팅스처럼 말이다. 살해된 애크로이드 경의 친구이자, 랠프 페이턴과 플로라를 비롯한 집안 사람의 전적인 신뢰를 지닌 인물. 마을에서 거의 유일하게 이성에 기반을 둔 합리적인 사고를 할 줄 알며, 가십과 본능에 의존하는 누이 캐롤라인과는 차별되는.

 

저는 진실을 원해요.”

플로라가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모든 진실을 말입니까?”

모든 진실을요.” (P.116)

 

진실은 모두가 바라 마지않는 궁극의 가치인가. 이렇게 푸아로를 개입시킨 플로라마저 진실하지 않은데 누구에게 진실을 기대할 수 있는가. 살해당한 애크로이드 본인마저 진실을 숨기지 않았는가. 애크로이드 양과 애크로이드 부인, 관리인 러셀 양, 랠프 페이턴, 블런트 소령, 비서 레이몬드, 파커 집사, 하녀 어슐러 본 등 모두가 진실을 은폐한다. 이 정도는 숨겨도 사건 해결에 영향을 없을 거라 판단하면서. 이것을 푸아로는 수면 위로 드러내게 만든다. 아주 사소한 사실의 불일치에서 그는 단서를 찾고 파헤치고 연결하고 확장한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로.

 

이 작품에는 여러 가정이 등장한다. 만약 애크로이드가 랠프 페이턴과 플로라의 결혼을 강제하지 않았다면, 애크로이드가 집안 씀씀이를 구두쇠처럼 가혹하게 통제하지 않았다면 사건은 다르게 전개되었으리라. 러셀 양, 파커, 어슐러 본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개인사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애크로이드가 앞서 독살된 애슐리 페러스 부인과 우정 이상의 관계로 나아가지 않았다면.

 

또 하나 인간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반추하게 만든다. 진범이 처음부터 애크로이드를 살해할 의도를 갖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개인적 금전 사정의 어려움, 한번 잘못된 선택에 따른 벗어날 수 없이 연속된 패착, 친절과 위선의 일상적 가면을 뒤집어쓴 그는 막다른 골목에 몰리자 은닉했던 본성의 가면을 비로소 꺼낸다. 그는 페러스 부인의 죽음에 연민을 느끼지 않는다고 한다, 애크로이드를 살해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연민을 느낄 수 없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애거서 크리스티의 함정을 피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그다지 유감스럽지 않다. 이걸 맞췄다면 나 자신이 너무나 비인간적이므로. 그럼에도 푸아로가 결정적인 의구심을 품게 된 단서에 나 역시 약간은 의아한 낌새를 가졌다는 점에서 다소간 뿌듯한 마음도 있다. 다만 스포일러가 될까 봐 전반적으로 자유로운 감상문 기록이 못 되어 이 점이 유감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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