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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운과 불운에 대처하는 법 ㅣ 상냥한 지성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지음, 임희근 옮김 / 유유 / 2020년 3월
평점 :
원제가 다소간 상업적 처세술의 냄새를 풍기기에 시큰둥하지만, 어쨌든 페트라르카의 글이라고 하니 속는 셈 치고 읽어본다. 이게 웬걸, 페트라르카로서는 드물게 익살과 해학이 넘치는 작품이다. 표제도 원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에 의외로 충실하다고 하겠다.
형식이 독특하다. 2부 구성인데, 1부는 행운에 대처하는 법이며 2부는 불운에 대처하는 법이다. 모두 대화 형식을 취하고 있다. 1부는 기쁨 또는 희망과 이성 간 대화이며, 대화에 앞서 ‘삶의 기쁨과 희망에 동요하지 않기 위하여’라고 서론이 달려 있다. 2부는 고통 또는 두려움과 이성 간 대화이고, 역시 대화에 앞서 ‘삶의 고통과 두려움에 좌절하지 않기 위하여’라는 글로 시작한다.
이런 운명의 두 얼굴이 다 두렵다 해도 우리는 행운과 불운 모두를 받아들여야 하네. 한쪽은 제동이 필요하고, 다른 한쪽은 위안이 필요해. (P.31)
저자가 이 책에서 강조하는 점은 대체로 중용에 가깝다. 쉽게 말해서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에게 닥친 행운에 겨워 기쁨 또는 희망으로 가득한 사람은 이성으로 이를 조절하고 적절한 브레이크를 밟아야 한다. 반대로 불운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은 고통 또는 두려움을 이성의 힘으로 차분하게 견디고 좌절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일체유심조라는 원효 대사 해골물을 마음에 새기며. 결국 중요한 건 외부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의 중요성이다.
외모, 언변, 미덕, 지혜, 책이 많은 것, 작가라는 명성, 친구가 많은 것, 사랑과 연애, 평온, 권력, 영광, 행복한 마음, 더 좋은 시절, 끝없는 희망, 마음의 평온 등 누구라도 자신이 이런 행운을 지녔다면 기쁘고 행복하기 마련이다. 여기서 이성의 조언은 살벌할 정도로 직설적이고, 때로는 비꼬기조차 한다. 기쁨과 희망의 나래를 무참히 꺾어버리는 조언이 비일비재하다.
내 말을 믿게. 자넨 모르겠나, 친구라고 공언하는 사람이 모두 진짜 친구라면 이 세상은 지금보다 좀 더 순수하고 평온하리라는 것을 말이야. (P.75, ‘친구가 많은 것’)
기쁨 : 어떤 날이 온대로 난 사랑 없인 못 살 거야.
이성 : 맘대로 해! 즐기고, 미친 짓을 하고, 맘껏 꿈을 꾸라고! 꿈에서 깨어나면 엉엉 울게 될 테니. (P.80, ‘사랑과 연애’)
이승에서 휴식을 스스로에게 약속하지 말라고. 내 말을 믿게, 힘든 일을 마친 사람에게 유일한 휴식은 죽음이야. (P.83, ‘평온’)
특히 ‘끝없는 희망’(P.106-109)은 익살조의 경구로 이어져 있어 한 편의 만담을 보는 듯하다.
2부 불운 편도 마찬가지다. 잃어버린 시간, 치욕, 형제와의 불화, 자식의 죽음, 속박과 구속, 원치 않은 이주와 망명, 자신과의 불화, 늙음, 역경과 슬픔, 무거운 영혼, 부족한 미덕, 몸의 고통과 통증, 죽음, 눈앞에 닥친 죽음 등 세상을 살다보면 마주치게 되는 온갖 불운. 우리는 불행에 슬퍼하고 상심하며 좌절과 고통에 몸부림치기 일쑤다.
여기서 이성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올 수 있도록 따뜻한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인생지사 새옹지마이고 순간의 역경이 다시 좋은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둥 말이다.
그렇지만 누구나 뜻하지 않게 남에게 돈을 빼앗길 때가 있는 반면, 시간은 빼앗기는 줄 알면서도 기꺼이 빼앗기지 않던가. 그래서 당하는 사람의 결함 때문에 상실이 증폭될 때 상실은 더욱 크게 느껴지지만, 자기가 좋아서 잃어버리고 잃었다고 불평하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P.132, ‘잃어버린 시간’)
고통 : 나는 비좁고 더러운 감옥에 갇혀 있어.
이성 : 자네의 가엾은 육신보다 더 더럽고 비좁은 감옥은 없네. 그런데 자네는 그 육신에서 행여 벗어나게 될까 두려워하지. (P.166, ‘속박과 구속’)
만약 죽음에 나쁜 점이 있다면 죽음이 더욱 두려워지기만 할 거야. 하지만 아무 나쁜 점도 없다면 두려워해야 할 단 하나의 나쁜 점은 죽음에 대한 공포 자체뿐이야! (P.229, ‘죽음’)
가톨릭 사제의 신분인 페트라르카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 책을 썼을지 궁금하다. 언뜻 봐서 가벼운 유희 같은 심정으로 집필하였을 것이지만 얄팍한 처세서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누구나 살다보면 여러 행과 불행을 겪게 마련이다. 저자가 오롯이 중시하는 바는 되풀이하지만 결국 마음의 문제다. 인간의 의지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면 무엇이 대수이겠는가마는, 운명의 장난은 대개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다.
현상의 원인과 본질이 무엇인지 이성의 엄정한 시각으로 헤아린 후 그에 대한 적합한 마음의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면 비록 외풍은 나의 겉을 흔들 수 있지만 나의 속은 건드리지 못하리라. 그것은 처세를 넘어 삶의 철학이기도 하다.
옮긴이에 따르면 전체 254개 대화 중에 59개를 추려서 수록했다고 하며, 또한 번역한 항목의 경우도 종교적 주장이나 전거를 담고 있는 내용은 삭제했다고 한다. 이로써 원본을 완역한다면 상당히 두툼한 책이 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그래도 원전에 근거한 완역본을 제대로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