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생각해 봐! - 세상이 많이 달라 보일걸
홍세화 외 지음 / 낮은산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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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으로 다수 의견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비판적 사고를 할 줄 알아야 하는 필요성이다. 아무 생각 없이 사회 추세를 무작정 따라가다 보면 자신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부정의를 확립하고 유지하는데 이바지하는 씁쓸함과 후회를 맛볼 수 있다. 간혹 일단 정지한 후 주위를 둘러보고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이 책의 기획 의도가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7개 주제로 각각의 필자가 기존 주류적 사고방식에 딴지를 걸면서 청소년 독자를 대상으로 뒤집어 생각해 볼 것을 권유한다. 각 장의 표제만 보더라도 매우 도발적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경제이념, 공정무역, 과학기술, 생명윤리, 문학, 공동체, 전쟁은 인생과 사회 대부분을 포괄하는 광범한 주제이지만 필자들은 독자의 수준을 고려하여 친근한 어조로 평이하게 서술하고 있다. 얼핏 지루하고 딱딱하게 보이지만 의외로 술술 책장을 넘기는 재미가 있다.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 개인의 자유와 재산권 보장이 금과옥조처럼 떠받들어짐은 불가피한 현실이나 절대시할 때 빚어지는 문제점 또한 도외시할 수 없다. 승자독식을 당연시하면 사회적 부는 극소수에게 편중되고 대다수 국민은 하층계급으로 전락하게 된다. 부의 지나친 쏠림을 개선하는 노력은 사회적 안정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관점에서 더욱 중요하다.

 

승자독식의 상황을 완화시키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많은 사회구성원들이 조금씩이라도 그런 정신을 나누어 가질 수 있을 때에만 이미 형성된 승자독식 사회가 완화될 수 있다. (P.38)

 

공정무역이 갖는 의의를 여기서는 정의의 경제, 건강의 경제, 연대의 경제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커피 원두를 사례로 공정무역의 효과와 한계를 살펴보는데, 상품의 생산과 유통 과정에서 발생하는 거대자본의 착취와 불공정을 개선하려는 좋은 의도는 분명하다. 다만 자본주의 체계의 근본적 개선이라기보다는 부분적, 지엽적 측면에 국한되는 것처럼 보인다. 필자도 공정무역에 대한 비판적 의견도 있음을 밝히고 있다.

 

과학기술의 오남용에 대한 우려는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그만큼 현대사회에서 과학기술이 갖는 중요성과 영향력이 지대함을 모두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과학기술이 인간사회에 기여하기보다 이윤추구를 우선시할 경우의 사례로서 유전자조작 먹을거리(GMO)의 심각한 위험성을 제기한다. 같은 맥락에서 다국적 제약회사들의 사실상의 대량학살을 비판한다. 의약품은 상품이지만 생명의 관점도 지닌다. 흔히들 생명의 가치는 돈으로 헤아릴 수 없다고 하지만, 이윤 앞에서 생명의 무게는 너무나 가볍다. 약값이 비싸 속수무책으로 쓰러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본의 논리는 냉혹하다. 소아마비 백신을 공개한 소크 박사가 더욱 고결해 보이는 까닭이다.

 

여러분은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은가?

생명보다 이윤이 앞서는 세상에서 살고 싶은가?

이윤보다 생명이 우선 되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은가? (P.99)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 문학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십분 공감한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배부른 돼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비단 문학만이겠는가. 음악, 미술과 같은 예술 전반은 생존과 생활이라는 동물적 삶과 인간의 그것과를 구별하는 커다란 차이점이다. 필자는 문학을 향유하는 행위는 세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시와 소설을 읽고 쓴다는 것은 어찌 보면 아주 개인적인 사소한 일 같지만, 아닙니다. 내 삶을 돌아보고 그를 바탕으로 세상에 적극 참여하는 사회 행위인 것입니다. (P.125)

 

공동체의 이상은 아름답다. 구성원들이 내것 네것을 가리지 않고 함께 더불어 나누는 삶이란 하나의 이상향이다. 인류의 가장 초창기에 이런 삶의 모습이 존재하였을 테지만 역사의 흐름은 공유에서 사유로 삶의 방식이 변해왔음을 알려준다. 내 것을 가지려 하고 그것을 우선시하는 인간의 속성이 거의 본능적임을 여러 연구 결과는 드러낸다. 우리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그럼에도 경제적 약자와 사회적 소수자를 존중하고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정신은 의미를 지닌다.

 

마지막으로 전쟁이다. 요즘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책이 쓰인 당시는 이라크 전쟁이 현안이었다. 전쟁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 모두가 동의하지만 전쟁은 과거에도 언제나 발발하였고 향후에도 쉽게 종식되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이라크 전쟁의 시각에서 전쟁 일반을 고찰한다. 이 책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공감하기 어려운 대목이 이곳이다. 이라크 전쟁은 미국의 경제적 탐욕을 실현하기 위해 교묘하게 위장한 전쟁이다. 따라서 이를 통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논조는 옳다. 그러면 현재의 우크라이나 전쟁 역시 마찬가지인가?

 

전쟁의 목적을 순전히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차원에서만 설명할 수 없다. 전쟁은 전쟁 발발자의 이익 실현을 위한 행위다. 여기서 이익은 자본이 될 수 있고, 종교와 이념 등도 가능하다. 이라크 전쟁에 경도되어 조급한 결론과 일반화는 경계해야 한다. 거꾸로 생각해 보자는 이 책의 의도는 자본주의에 대한 무조건적 비판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정의로운 전쟁이란 어불성설이다. 전쟁은 죽음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어떤 거창한 명분도 개인의 목숨 앞에서 힘을 잃는다. 전쟁 일반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전쟁을 벌이는 이들은 부수적 피해라는 말을 쓰면서 더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한 작은 희생쯤으로 그들의 목숨과 삶을 가벼이 말하곤 하지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세상에 부수적 목숨이라 말해지는 목숨이라는 것이 있기나 한지 되묻고 싶은 심정이에요.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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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키
존 윈덤 지음, 정소연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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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피드의 날>의 작가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작품이다. 국내에 존 윈덤의 소설은 이렇게 딱 두 편만 나와 있다. 일단 분량이 두껍지 않고 내용과 문체가 평탄하여 읽어나가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머릿속에 인간 아닌 존재가 들어와 원래와는 다른 인간이 되는 현상, 이것을 이 책에서처럼 귀신들림이라고 지칭하든 아니든 간에 여러 심령 소설의 주된 소재이다. 지구상의 인간 아닌 외계의 다른 존재가 지구를 방문하여 인간과 접촉하는 설정 역시 숱한 공상과학 장르의 단골 소재이다. 이 작품이 발표된 게 1968년이니 아마도 이런 유형의 작품에서는 선구자 격이라고 할 것이다.

 

초반부의 낯설고 당혹스러운 예감, 그것은 심장을 쫄깃하게 하는 공포스러운 요소가 뒤따를 것이라는 불안 섞인 전망에 기인한다. 초반의 불안한 압박감을 견뎌내면 이후 작가가 제시하는 방향이 뜻밖에도 완전히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되는데, 이때부터 독자는 혼란스럽다. 이 소설의 지향점에 대해서, 초키라는 존재의 정체와 작가의 의도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짐작하기가 어렵다.

 

혼자 중얼거리는 점만 제외하면 주인공인 평범한 열두 살 매튜는 초키에게 여러 혜택을 받는다. 갑작스러운 지적 능력의 제고, 예술적 안목과 솜씨의 향상, 무엇보다 물속에서 맥주병 신세였던 그가 동생의 목숨마저 구할 정도로 선수급 수영 실력을 발휘한다. 매튜의 관심은 넓어지고 사회 인식과 책임감도 증가한다. 한마디로 초키는 인간을 해치려는 의도를 갖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다는 점이 이 소설의 색다른 특징이다.

 

이 대화가 끝난 후에 나는 돌아와서는 안 되기 때문에, 당신과 말하고 싶었다. 이 말을 들으면 당신은 기쁠 것이다. 매튜 부모의 다른 부분, 즉 엄마, 즉 당신의 아내는 더 기뻐할 것이다. 그것은 나를 두려워하고 내가 매튜에게 해롭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나를, 즉 당신을, 즉 매튜를 다치게 하려는 의도가 없으므로 유감이다. (P.229-230)

 

예나 지금이나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말은 미친 사람이라는 꼬리표다. 이 한마디에 수많은 사람이 화형을 당하거나 정신병원에 감금된 역사적 기억이 그리 멀지 않다. 미친 사람은 사회 내 정당한 일인으로 존중받지 못한다. 폴리가 피프를 만들어내고 함께 지냈던 것은 아직 아이 때였기에 가능하였다. 매튜는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나이다.

 

매튜는 초키와의 공생이 익숙해짐에 따라 그를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반면 매튜의 부모는 초키의 존재를 한사코 부정하려 애쓰고 노심초사하기에 급급하다. 특히 매튜 엄마는 비이성적으로 보일 만큼 현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기에 더욱 애틋하다. 아니기를 믿고 싶은 마음은 눈앞의 현실을 외면하려 들고, 진실을 드러내는 발언을 하는 이, 즉 랜디스에게 거부감마저 일으킨다.

 

다행하게도 공포소설이 아니기에 우여곡절 후에 초키는 매튜에게서 떠나간다. 그가 매튜의 아빠에게 자신의 정체와 강신 목적 등을 매튜의 입을 통해 밝히는 제11장은 이 작품의 가장 두드러지는 대목이다. 여기서 매튜의 안전을 위해 그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된 사유와 더불어 초키는 예언자적 풍모를 보인다.

 

모든 지성체를 양성하는 것은 신성한 의무이다. 이성의 가장 단순한 불꽃도 횃불이 되리라는 기대로 키워야 한다. 좌절한 지성의 굴레를 풀어야 한다. 생각이 좁은 지성에게는 넓힐 힘을 주어야 한다. 높은 지성은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 머물렀다. (P.234)

 

인간 지성에 대한 찬사, 한층 높은 차원의 지성 고양을 위할 필요성과 사명, 매튜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겠다는 다짐. 조금씩 나아가기에 비록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언젠가 퍼즐이 풀리는 날이 오리라는 확신을.

 

이제 다른 방식으로 해야겠지. 여기저기에 힌트를 하나씩 뿌리고, 한 사람에게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에게는 순간적인 영감을, 어느 날 모여서 하나가 되기 전까지는 해롭지 않을 점점 더 작은 조각으로. 퍼즐은 언젠가 풀리리라. 비밀은 밝혀지고 은폐되지 않으리라...오랜 시간이 걸린다. 네가 살아 있는 동안은 아마 아니리라. 그러나 그런 날은 온다...온다... (P.247)

 

작가의 집필 의도를 헤아려 보고 싶다. 심령현상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작가는 랜디스와 토르비 경에게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작중에서 그들은 초키가 확실하게 실재하는 존재임을 증빙하는 역할을 맡았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역시 제11장의 예언자로서의 초키가 핵심인가? 그의 예언은 갑작스럽다. 후반부까지 여유롭고 굴곡 없이 진행되던 흐름에서 작가는 서둘러 결말을 내리고 작품을 끝맺으려고 한다. 초키의 예언 대목이 작품 전체에서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지 않고 겉도는 듯한 느낌을 갖는 게 비단 나뿐인지 궁금하다. 오직 작가만이 진실을 알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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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괄량이 길들이기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셰익스피어 전집 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도해자 옮김 /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지식출판원(HUINE)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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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괄량이 길들이기>는 한바탕 우당탕하는 셰익스피어 초기의 희극이다. 한 성질 사나운 여성을 바람직한 사회 질서의 틀 내로 교화하는 내용은 당대에 지극히 당연하고 정당한 의미로 수용되었을 것이다. 문학작품은 시대 풍조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부여받는다. 이 희극은 오늘날 변화된 인권 및 페미니즘 관점에서 전혀 새로운 의미로 논의되고 있다. 이 책의 옮긴이의 말작품 해설은 변화된 의미 부여를 잘 나타낸다.

 

비단 페미니즘이 아니더라도 이 작품의 몇 가지 내용은 비판받기에 충분하다. 당사자가 원치 않는 결혼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사회의 보편적 결혼관습이기에 그렇다 하자. 페트루치오가 밝힌 결혼의 목적은 비단 개인 차원에 그치는 게 아니라 사회적 담론이 필요한 사안이다.

 

(페트루치오) 돈만 많으면 페트루치오의 / 신붓감으로 충분해. 내 구애의 춤에서 / 장단을 맞춰 줄 수 있는 건 재산이지. (P.49, 12)

 

페트루치오에게 결혼은 순전히 재산 증식의 수단일 뿐이다. 여기에 남녀 간의 진정한 사랑이라는 오늘날 통용되는 보편적 의미가 개입될 여지는 없다. 21장에서 그가 카테리나의 아버지에게 결혼 지참금의 액수를 요구하는 장면 또한 이를 명확히 한다.

 

페트루치오가 아내 카테리나를 이른바 길들이는 방식 또한 논란이 될 만하다. 그는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이용하여 신체적, 정신적 학대를 자행한다. 음식 안 주고, 잠 못 자게 하며 친정에 못 가게 하는 등 일련의 행위는 요즘이라면 제아무리 가정 내라고 할지라도 가정폭력으로 고발당하기에 십상이다. 페트루치오가 카테리나를 길들이는 방식은 그가 스스로 내뱉듯이 매를 길들이는 방식이다. 동물을 대하는 방식을 자신의 아내에게 스스럼없이 적용했다는 점에서 그가 아내를 바라보는 시각이 드러난다.

 

(페트루치오) 나는 내 소유물의 / 주인 노릇을 할 거니까. 신부는 내 물건이자 재산이죠. / 신부는 내 집, 내 가재도구, 내 들판, 내 창고, 내 말, / 내 황소, 내 당나귀, 그 무엇이 되었든 내 것이죠. / 이런 신부가 여기 있는데, 누구든 건드려 봐요. (P.101, 32)

 

남편이 아내에 대한 절대적 소유권을 주장하고 이 주장이 인정되는 분위기가 바로 당대 사회이다. 아내는 남편의 소유물이자 일개 재산에 불과하다. 아내가 남편과 대등하게 맞선다는 생각은 용납될 수 없기에 교화가 필요하고 교화의 궁극적 목적은 차라리 본능이라고 할 정도의 절대적 복종이다.

 

(카테리나) 당신이 / 저것을 뭐라고 부르든 옳은 말이에요. / 카테리나에게도 항상 옳은 말일 거예요.

(호르텐시오) 페트루치오, 하고픈 대로 하게. 자네가 승리했군. (P.141, 45)

 

지적으로 뛰어나고 자존심 강하고 고집 센 카테리나는 남자를 우습게 여기며 비혼주의자임을 선언한다. 그런 그녀가 별다른 저항 없이 페트루치오가 결혼하게 되는 까닭이 궁금하다. 그녀의 고집 정도라면 아버지의 강요쯤은 가뿐히 물리쳤을 텐데. ‘작품 해설에서는 페트루치오의 능력이 다른 남자들보다 그나마 우수하기 때문에 그녀가 타협책으로 받아들였다고 해석하는데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건 이미 카테리나의 주체성에 한계가 있음을 자인하는 꼴에 불과하다. 그녀의 능력이라면 페트루치오와 결혼하면 앞날이 평탄하지 않을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며, 어차피 결혼할 거라면 한때나마 성질을 죽여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더욱 뛰어난 인물을 고르는 전략을 택할 수도 있다.

 

동생인 비앙카를 보라. 그녀는 극 중에서 여러모로 비앙카와 대비되는 빼어난 신붓감으로 칭송되며 여러 남자의 구혼을 받고 자신이 남편감을 선택한다. 비앙카는 환경을 직시하고 결혼 시장에서 자신이 우위에 설 수 있는 방안을 완벽히 실현한 얌전한 고양이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자매 중 더 성공적 결혼에 도달한 사람은 비앙카이며, 이 점에서 그녀는 카테리나보다 뛰어나다.

 

남편에게 순종하게 길들여진 카테리나가 다른 여성들에게 남편에 대한 도리를 장문의 대사로 설파하는 52장은 이 희극의 일대 하이라이트다. 11장과 52장의 카테리나는 전혀 다른 여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대목을 두고 옮긴이는 카테리나의 표면적 복종이 전략적 선택이므로 페트루치오의 외견상 승리도 환상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표면적 굴복 후 카테리나의 대사들에서 드러나는 과장과 익살, 그리고 남성 인물들을 겨냥한 조롱 때문이다. 카테리나의 복종은 오히려 전략적 선택으로 보인다. (P.5)

 

따라서 이 작품은 여성의 복종을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절대적 순종은 남성의 환상에 불과한 허구임을 보여준다. (P.6)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초기작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가 페미니스트가 아님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옮긴이의 말작품 해설은 기본적으로 이 희극을 심오한 후기작과 동일하게 해석하고 있다.

 

셰익스피어 극작품들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인간 내면의 복합적 성격을 보여주며 사건과 인물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다는 것이다. (P.173)

 

이 작품을 <맥베스><햄릿> 등과 동등한 수준에서 해석하는 데 동의할 수 없다. 복합적 성격과 다양한 해석이라는 심화된 의미 부여는 과잉 해석의 우려가 크다. 카테리나의 불복종의 근거로 제시되는 마지막 대사의 과장과 익살은 당대 희곡의 전형적 특징이다. 이를 두고 내심 조롱한다고 볼 근거는 미미하다. 외형적 꾸밈이든 내면적 순종이든 카테리나가 페트루치오에게 굴복하였음은 사실이다.

 

작품 해설에서 슬라이와 카테리나를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한 대목에서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양자 모두 당대의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공통성을 지니며, 이들에 대한 사회적 교화 역시 정당하다. 교화의 주체는 당연히 각각 영주와 남편이 될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당시 청교도들처럼 자신의 연극에 엄격한 윤리적 잣대를 대거나 심각한 교훈이나 삶의 진리를 찾으려 하지 말고, 트라니오가 루첸티오에게 충고하듯, 지치고 긴장된 일상 삶에서 기분 전환을 위해 그리고 활기를 되찾기 위해 연극이 필요하며, 그런 마음으로 자신의 극을 즐겨 주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P.178)

 

옮긴이는 작품 해설결말에 가서 갑자기 기존의 견해와 상치되는 해석을 내놓는다. 너무 심각하고 진지하게 따지지 말고 희극으로서 극 자체를 즐기라는 게 작가의 의도일 수 있다고. 서막의 슬라이가 재등장하지 않는 이유 또한 작품의 희극성에 충실한 작가의 의도적 설정이라는 해석을 다른 곳에서 인용하여 기술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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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피드의 날 미래의 문학 7
존 윈덤 지음, 박중서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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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도서관에 이 책이 있을 줄 예상 못 했다. 이 소설의 아동용 축약판의 효과 덕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원작이 아동용처럼 흥미진진할 활극일 것이라는 섣부른 판단은 완벽히 오판이다. 이 작품은 진지하다, 그것도 대단히. 서문에서 언급되었듯이 이 작품은 명상적이고 논설적인 특징”(P.9)이 작품 전반을 두드러지게 지배한다.

 

전반기의 작품은 전반적으로 스페이스 오페라 계열이었지만, 후반기의 작품은 작가 스스로가 논리적 환상소설이라고 지칭한 것처럼 더 진지하고 현실적인 내용을 다루었다. (P.521)

 

작품해설에서는 작가 존 윈덤의 작품세계를 이렇게 정리한다. ‘아늑한 파국의 대가라는 호칭은 그에 대한 비난인 동시에 칭찬이다. 20세기 중반 양 이념 체제 사이에 놓인 영국인의 불안 반영은 중산층이 최적이다. 하류층은 먹고사는 일에 당장 관계없으면 관심 두지 않으며, 상류층은 이따위 고민을 하기엔 너무 고상하고 남의 일에 불과하다. 오직 중산층이야말로 당대 사회의 불안과 모순에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이 작품에는 인류에게 치명타를 가하는 위협적 존재가 연달아 세 건이 나타나는데, 혜성(으로 인한 시력상실)과 전염병이 먼저 영향을 미친다. 천재지변으로 인한 괴멸적 파국은 당혹스럽기는 하지만 철저히 절망적이지는 않다. 시력상실에 자포자기하여 목숨을 내던지는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 살아남은 누군가는 있을 것이며, 그네들이 어떤 식으로든 생존을 영위할 것이기에.

 

저 끔찍하고 낯선 괴물들이야말로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어찌어찌 만들어 낸 것이었고, 또 우리 나머지가 무분별한 탐욕으로 인해 전 세계 각지에서 기르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 저놈들의 존재 때문에 자연을 비난할 수조차도 없는 일이었다. 저건 인간이 길러 낸 것이었기 때문이다. (P.382)

 

반면 트리피드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내고 활용을 위해 대규모로 인공 재배를 하는 식물이다. 사람은 산업적 목적을 위해 과학기술을 활용하여 그것을 생산했는데 그것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암암리에 외면하였다. 당시에는 충분히 통제 가능할 것으로 판단하였으므로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인간은 항상 그렇게 오판한다. 자신이 모든 상황을 조절할 수 있다고, 신이 아님에도 신처럼 행동하며 신이 하지 않는 잘못을 저지른다.

 

다만 한 가지만큼은 분명히 확신하고 있는데, 그건 바로 저놈들이 위험해질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는 거야. (P.103)

 

눈멀고 전염병에 겨우 살아난 사람들은 더듬더듬 생존의 길을 모색하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들의 눈앞에 트리피드가 등장한다. 작중의 트리피드는 영리하다는 점에서 매우 지능적이다. 그들은 사람의 약점이 어딘지 알며, 공격 기회를 노리며 엄폐할 줄도 안다. 그들이 돌기를 두드리며 의사소통을 하는 모습, 그리고 메이슨네 농장을 포위 공격하는 장면은 충격과 공포를 자아내는 압도적 실체를 드러낸다.

 

우리가 그놈들보다 더 우월한 특징은 단 하나뿐이지. 바로 시력이야. 우리는 눈으로 볼 수 있지만, 그놈들은 볼 수가 없지. 우리가 시력을 빼앗기고 나면, 그런 우월함도 사라져 버리는 거야. 아니, 오히려 더 나쁜 상황이 되겠지. 우리는 그놈들보다도 더 열등한 신세가 될 거야. 왜냐하면 그놈들은 시력 없는 생활에 적응되어 있는 반면, 우리는 그렇지 않을 테니까. (P.101)

 

전통적 법 규범과 사회체제가 송두리째 무너진다. 평화와 안전의 보장은 더는 불가능하다. 남은 식량을 두고 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 전개되고, 정상인과 맹인 간 지위의 우열과 역할 분담이 불가피하다. 과거와의 이별. 고통스럽지만 낯선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으므로. 이런 당혹감과 자괴감, 고통스러운 현실 인식은 작품 내에서 반복적으로 표현된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본 것들이 모조리 현실임을, 그리고 결정적임을 비로소 시인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었다. 결코 말이다. 내가 이제껏 알던 모든 것이 끝나 버렸던 것이고... (P.125)

 

아니에요. 이 세계는 끝장났어요. 그리고 우리만 남았어요...이제는 우리 나름대로의 삶을 도모해야만 해요. 도움의 손길이 결코 오지 않을 거라고 가정하고 계획을 세워야만 해요... (P.436)

 

사람은 어차피 혼자 살 수 없다. 살아남고 세대를 영속하기 위한 집단 형성이 필수다. 과거에 너무나 당연시하던 물자들을 이제는 없이 살거나 하나하나 직접 만들어내야만 한다. 이렇게 하지 못하는 집단은 서서히 소멸할 것이다. 작품 내에서 윌프레드 코커와 듀런트 여사의 집단은 미래에 대한 전망을 거부한다. 그들은 단지 일정 시간 버티기만 하며 만사가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다. 마이클 비들리 일행의 논리는 충격적이고 비도덕, 비윤리적으로 보인다. 그들의 주장은 코커와 빌의 귀에 낯설고 터무니없으며 부정의 하게 들린다. 코커는 이 집단을 깨뜨려버리며(나중에는 자신의 오판을 인정한다.) 빌은 현실적 타당성을 마지못해 받아들인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당신네 무리가 애초부터 옳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거요. 다만 옳지 않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고, 옳지 않은 것처럼 들렸을 뿐이지. (P.309)

 

인간화된 식물과 비인간화된 인간의 접점은 셔닝 농장을 접수하고자 하는 전체주의 집단에게서 확연히 드러난다. 누가 봐도 명백한 군사 독재적이며 봉건적인 농노제 발상은 인류가 기껏 수천 년 동안 힘겹게 쌓아 올린 인간 존중의 정신을 근본에서부터 전복한다. 오죽하면 차라리 트리피드가 낫다고 작중 인물이 토로하겠는가.

 

화자이자 주인공인 빌 메이슨은 틈나는 대로 생각과 사고에 빠져든다. 그는 졸지에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혼자가 되었고 막무가내식 행동을 멈추고 생각을 정리해야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다. 작품의 서두 또한 앞이 안 보이는 그가 주위 상황을 탐지하고 생각하고 추론하는 과정으로 시작한다.

 

빌과 조젤라를 포함한 사람들이 가장 당혹스러워한 사실은 인간이 만들어낸 안정적인 사회체제가 회복할 수 없을 지경으로 일거에 무너져버렸다는 점이다. 만물의 영장이 발달시켜온 수준 높은 문명의 기반은 시력상실이라는 재앙 하나로 존속 여부가 불투명할 정도로 취약하였다는 점. 그래서 트리피드의 창궐에 변변한 대응도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그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할 위험에 놓이게 되었다는 점. 이것들이 겹쳐 드리운 짙은 절망감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번 일에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이거예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안전하고 확실해 보였던 세상을 우리가 너무나도 손쉽게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거예요.”

조젤라의 말이 맞았다. 바로 그런 단순성이야말로 이번 일이 준 충격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P.222)

 

이런 처지에 대해 하늘을 원망할 수 없음이 후반부에 빌의 입을 통해 언급된다. 이 모든 게 천재지변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자초한 운명이라는 것을. 눈앞에 뻔히 위험이 닥쳐옴에도 모래에 머리를 파묻는 타조와 같이 우리들이 행동 하였음을.

 

정확히 어떤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지는 이제 아무도 모를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내가 분명히 확신하는 게 하나 있어요. 어떻게 해서이건 간에, 이건 우리가 스스로 자초한 운명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전염병도 있죠. 그건 장티푸스가 아니었어요. 당신도 알다시피... (P.472)

 

작품의 결말은 일변 전망적이다. 코젤라와 빌은 전략적 후퇴라는 표현으로 와이트섬으로의 자신들의 퇴각을 정당화한다. 언젠가는 다시 준비를 갖추고 돌아와 빼앗긴 땅을 되찾을 것이기에. 자신들이 못한다면 아이들이 아니면 아이들의 아이들이 대대적인 십자군 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믿는다. 아마 믿고 싶을 것이다. 그래야 살아갈 의미와 희망이 남아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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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 신은 고양이와 10편의 옛이야기 - 논장 전래동화 3, 프랑스편
샤를 페로 지음, 구스타브 도레 그림, 김경온 옮김 / 논장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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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숲 속의 공주, 빨간 모자, 장화 신은 고양이, 신데렐라. 모두가 동화책에서 또는 아동 만화영화로 친숙하게 접하여 이제는 진부하기조차 할 정도의 이야기들이다. 이런 동화들의 원작 원본이 바로 이 책이라고 한다. ‘이솝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후대의 각색된 동화와 원작의 내용과 뉘앙스는 비교해 볼 여지가 충분하다.

 

페로가 쓴 11편의 이야기 중 전반부 8편은 산문, 후반부 3편은 운문이다. 작가는 산문 동화의 각 이야기를 교훈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동화 장르의 세속적 필요성에 부합하는 태도인데, 그 교훈이 항상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일치하지는 않음이 흥미롭다. 예컨대 푸른 수염에서 작가는 이 동화에 나오는 무서운 남편은 현실 세계에는 불가능하다, 지금은 오히려 부인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밝힌다. ‘신데렐라에서는 신데렐라의 매력을 마법으로 현실화하는 은인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빨간 모자의 내용이 일반적인 결말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어 의외다. 비극으로 끝나는 빨간 모자도 그렇지만, ‘잠자는 숲 속의 공주는 식인귀 출현이라는 전혀 뜻밖의 상황으로 흘러가 우리는 기껏 전반부에 밖에 알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아 물론 공주를 잠에서 깨우는 왕자의 입맞춤도 없다.

 

내용의 신비성, 다의성 못지않은 잔혹성으로 주목받은 푸른 수염은 여러 의문을 제기한다. 푸른 수염이 자신의 전처들을 죽인 이유는 무엇인지? 부인에게 열쇠를 주면서도 열어보지 말라는 푸른 수염의 의도는 무엇인지? 이브와 판도라를 상기시키는 유혹에 약한 여성에게 다시 유혹의 시험을 통해 그는 무엇을 기대하는가?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서와 마찬가지로 장화 신은 고양이에서 우리는 당대의 엄격한 계급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공주가 잠에서 깨면 외로울까 염려되어 성안의 모든 사람을 거리낌 없이 함께 잠재우는 요정. 막내아들을 드카라바 후작으로 만들기 위해 농부들에게 무서운 위협을 자행하는 고양이. 양자 모두 사회적 하층민에 대한 경시 풍조가 암암리에 배어 있다. 그들이 아무 잘못도 없는데.

 

백 년 후에 공주가 깨어날 때 낡은 성 안에서 홀로 얼마나 놀랄까 하고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요정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아세요?

요정은 마법의 요술봉으로 성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건드려서 마술을 걸었답니다. (P.18)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러분 모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내 손에 조각조각 토막날 줄로 아시오. (P.73)

 

똑똑하지만 못생긴 리케가 잘 생기게 변하고, 아름답지만 멍청한 공주가 똑똑해지면서 이른바 흠잡을 데 없는 한 쌍으로 결합하는 고수머리 리케의 결론에 모두가 흡족하지는 않다. 사랑의 힘의 위대함을 찬미할 수 있지만 껄끄러움이 남는다. 왜 우리는 동생 공주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가? 동생 공주는 애초 리케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지만, 언니 공주의 극적인 변모와 행복한 미래가 두드러질수록 동생 공주의 존재감은 왜소해지고 이내 사라져버린다. 현실 세계의 독자 시각에는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눈물 흘리고 있을 동생 공주의 슬픔과 원망이 더욱 커다랗게 다가온다.

 

꼬마 엄지의 전반부는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와 유사하다. 원래 비슷한 이야기인지 그림 형제가 이 이야기를 모방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자식을 죽이려는 꼬마 엄지네 부모와 꼬마 엄지 형제를 잡아먹으려는 식인귀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생존이라는 절실한 문제에 직면할 때 더 이상 가식은 불필요하다. 꼬마 엄지가 꾀로써 식인귀의 재산을 훔쳐 오는 장면 또한 윤리적으로 바람직하지만 이것 또한 현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젤리디스당나귀 가죽은 모두 고통받는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고통을 가하는 주체가 남편 임금과 아빠 임금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그리젤리디스를 괴롭히는 남편의 태도는 이율배반적이다. 요새로 보면 전형적인 의처증에 해당하는데, 이를 묵묵히 견뎌내는 그녀의 모습은 보는 관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그리델리디스의 순수하고 변함없는 마음은 물론 감탄스럽지만 사랑과 미움, 행복과 고통은 언제라도 한순간에 표변될 수 있다는 씁쓸한 진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당나귀 가죽신데렐라와 비슷한 전개 구조를 지닌다. 여주인공의 어려운 생활, 지저분하고 더러운 취급을 받는 외모, 그녀를 애타게 찾는 왕자, 그들의 사랑을 매개하는 유리 구두와 운명의 반지. 여기에는 가족관계의 근본적 결함도 내포한다. 전자는 계모와 전처소생 자녀의 갈등, 후자는 아빠의 딸에 대한 근친상간적 욕망. 그나저나 그렇게나 사랑하던 아내를 잃자마자 무슨 연유로 미친 듯이 재혼에 목매었던 아빠 임금의 속내가 궁금하다.

 

마법의 요정우스꽝스러운 소원들역시 그림 동화집에 볼 수 있는 해학적 소재의 얘기로서 양자 모두 말의 소중함과 신중함을 강조하는 공통점을 지닌다.

 

옮긴이의 말처럼 페로 동화들은 친밀함과 생소함의 상반되는 느낌을 독자에게 안겨준다. 대중적 동화와 만화의 서사의 원형으로서 오늘날은 자칫 진부하고 전근대적-특히 페미니즘 시각에서는-이지만 17세기 페로가 쓸 당시의 관점에서는 전혀 새로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작가 자신의 서문은 재미와 교훈이라는 동화의 기본 정신을 강조한다. 요즘은 후자를 많이 경시하지만 전자만 가지고 오래 살아남는 동화는 없다. 부모의 입장에서 그런 동화는 필요가 없으므로.

 

구스타브 도레는 서사의 기저에 드리워진 어둡고 뒤틀린, 그러나 진실에 가까운 핵심을 본능적으로 파악하는 재주를 지녔다. ‘꼬마 엄지에서 실수로 자기 자식을 죽이려는 순간의 식인귀의 얼굴은 압권이다. 다만 그의 음산하고 충격적인 삽화는 이게 과연 동화책에 적합한지 근본적 의문점을 제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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