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 여신의 바보 예찬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지음, 차기태 옮김 / 필맥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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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만 보고는 도무지 무슨 책인지 감을 잡을 수 없다. 저자를 확인하기 이전까지는. 옮긴이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한다. 한글세대에 한글식으로 제명을. 하나 교과서가 고쳐지지 않는 한 우리는 <우신예찬> 또는 <광우예찬>에 더 익숙하다. 비록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세계사 수업에서 달달 외운다.

 

너무나 유명한 고전은 잘 안 읽게 된다. 읽지 않아도 마치 읽은 듯한 기독감(旣讀感) 때문이거나, 아니면 고전이라는 무게감에 짓눌려 지레 겁먹고 펴볼 엄두도 내지 않는다. 게다가 고전은 대체로 낯설고 딱딱하며 재미가 없는 편이 사실이다. 그래도 중압감을 무릅쓰고 고전을 펼치면 의외로 많은 수의 작품들이 그리 어렵지 않으며 오히려 호기심을 유발할 정도임을 알게 된다. 에라스무스의 이 책도 마찬가지다. 어떠냐 하면 이런 재미나고 흥미진진한 책을 이제야 보게 되다니 하며 후회가 물밀 듯 몰려올 정도다.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의 마르틴 루터, <유토피아>의 토머스 모어 등과 동시대를 살아간 인물이다.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가톨릭과 중세 봉건 영주 체제가 여전히 굳건히 위세를 떨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두면 당대의 종교 세력과 정치 세력을 풍자하는 것의 어려움과 위험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에라스무스는 바보 여신을 화자로 내세웠다. 바보 여신이니만치 그의 어조와 주장 등은 신랄해서는 안 된다. 어리숙하게 보여야 하며, 내용도 우스꽝스럽고 해학적으로 비쳐야 한다. 그 속에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날카로운 비수로 드러나지 않게 당대를 파헤쳐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기도 하다.

 

전체적 구성은 바보 여신이 자신이야말로 정말로 칭송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며 자화자찬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하여 온갖 그리스 로마의 전거를 들먹이는 동시에 엄숙하고 도덕적인 체 하는 속물들의 실체를 우회적으로 까발린다. 그네들의 위선적인 생활과 언행에 매우 비판적인 반면, 평민들에 대해서는 우호적이다. 그들은 삶에 충실하며 간혹 발생하는 잘못도 어리석음과 본능에 충실한 데서 비롯한다고 본다.

 

이쯤에서 표제를 되돌아본다. 에라스무스는 표제에서 이미 반어법을 사용하였다. 중세 사회에 대한 풍자라는 표면적 이해만 가지고 볼 때, 그가 당대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바보 여신으로 의인화하여 풍자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이는 완전한 착각과 오해다. 그는 바보 여신의 입을 빌려 오히려 바보 여신의 주장에 가깝게 사는 것이 인간의 행복에 도달하는 길이라고 역설한다.

 

바보 여신은 종교적 엄숙주의, 경건주의 및 철저한 도덕주의를 배격한다. 인생이 슬프고 지루하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으며, 어리석음이 가미될수록 인간의 삶은 유쾌하고 즐거워진다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의 삶에 있어 유희의 필요성, 사랑과 우정에 있어 맹목적 요소가 차지하는 비중 등 자신의 영역이 발휘하는 힘을 과시한다. 부부 관계나 처세술에 있어 때로는 환상과 아첨이 중요하다는 것도. 이것의 절정은 바로 자기 사랑일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이성과 종교와 도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본능 자체이다.

 

이렇게 전반부는 바보 여신의 자기 예찬으로 전개되는데, 후반부는 다소 지향점이 다르다. 본격적으로 풍자와 비판에 나서는 것이다. 그는 학문은 행복을 위해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본성에 맞게 사는 것이므로 불행하지 않으며, 상식은 어리석음과 통하므로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학문에는 결코 가까이 가지 않고 자연이 인도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P.104)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현인 티를 내는 위선자를 일일이 열거하면서 그 허위를 사정없이 까발린다. 문법학자, 웅변가, 책을 쓰는 사람들, 법률가, 철학자, 신학자, 수도사들. 특히 마지막 두 유형에 대해서는 인정사정없다. 예수의 사도들조차 신학자와 신학상의 문제에 관해 논의를 한다면 다른 영혼의 도움을 필요로 할 것이라며(P.181), 그리고 수도사들은 누구에게나 혐오의 대상이 된다고 하며(P.193). 이 점에서 당대에 종교의 해악이 얼마나 지대하였으며, 종교개혁 운동의 발생이 불가피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바보 여신은 왕과 제후들, 귀족들도 빠뜨리지 않는다. 하지만 곧바로 교황, 추기경, 주교 등 성직자에게로 넘어간다. 이는 세속 권력자에 대한 은연중 눈치 보기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세속권력을 교황이 움켜쥐고 있기에 성직자들의 부정과 부패가 그만큼 극심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마지막 단락에서 그는 각종 전거를 들먹이며 어리석음이야말로 모든 축복과 행복의 근원임을 밝히고 있다. 그리스 로마의 고전은 말할 나위도 없고 성서도 다채롭게 인용하고 있다. 정리해서 말하기를 기독교는 어떤 형태로든 어리석음과 일종의 혈연관계를 맺고 있는 게 분명해요. 그렇지만 지혜와는 거의 관계가 없고요.”(P.263)라고 하면서 가장 큰 바보는 그리스도의 경건함에 대한 열정에 완전히 사로잡힌 사람들이라고 언급한다. 당대에 진실한 신앙인이 얼마나 적은지와 아울러 역설적으로 참된 신앙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언명이다. “경건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보상은 광기”(P.270)라는 것이다.

 

에라스무스가 살아가던 시절은 과도기이자 혼란기였다. 공고한 중세 체제는 많은 균열이 있음에도 여전히 종래의 권력 끈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치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마르틴 루터를 위시한 종교개혁 운동이 각지에서 발생하여 세속권력자들과 연합하여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종교와 이념의 갈등은 세속적 욕망의 충돌보다 훨씬 더 위력적이며 무자비한 유혈사태를 불러옴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극단이 춤추는 곳에서 중용은 자리 잡기 어렵다. 중용은 자칫 공공의 적으로 치부되기 십상이며 섣부른 오해의 대상이 되기에도 딱 알맞다. 그럼에도 정의와 진리를 주장하면서 극단적 충돌도 마다하지 않는 것은 그 주장의 가부와 진위 여하를 떠나서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에라스무스는 당대 사회현실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판의 메스를 날렸지만 결코 직설적이지 않다. 바보 여신의 어리석고 우스움을 전면에 내세워 해학 속에 깃든 진실을 은연중에 알게 하였던 것이다. 그런 그로서는 낡은 체제의 허위도 새로운 체제의 위선도 용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참된 지식인의 자세와 고뇌가 엿보인다면 억측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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