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를 드릴게요 - 정세랑 소설집
정세랑 지음 / 아작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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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 안은영을 처음으로 읽은 게 20187월이었는데, 이후 나는 정세랑의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궁금해하고 찾아보는 독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초기작들이 개정판으로 꾸준히 나온 것도 한몫을 했겠지만. 목소리를 드릴게요도 마찬가지여서 처음 출간되었을 때 구입하고 띄엄띄엄 읽다가 이제야 다 읽게 되었는데, 여느 작품과 마찬가지로 재미와 흡입력 있는 이야기가 모두 충족된 독서 경험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정세랑의 작품세계, 특히 SF나 판타지의 세계를 요약하면 상상력에서 발아하여 관계에 다다르는 이야기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전 소설에서도 정세랑의 독특한 발상은 작품에 재미를 주는 요소 중 하나였으며, “SF 소설집이라는 소개에 걸맞게 그녀의 상상력은 여전하다. 지렁이가 세상을 리셋해버리는 이야기부터(리셋) 살인 충동을 일으키는 목소리를 가졌다는 이유로 감금되어 살게 된 선생님의 이야기까지(목소리를 드릴게요). 다만 이 작품들은 상상력에서 출발한 세계를 구축하고 진행시키는 것엔 그리 관심이 없고,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할 이들의 관계에 초점을 둔다(리틀 베이비블루 필이 예외적이다). 이들이 서로의 차이와 감정을 받아들이고 함께 나아가는 연대가 작품의 주된 정서를 이루며(이는 정세랑의 다른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이를 그려내는 작가의 시선이 작품에 온기를 부여한다. 차갑고 냉정하게 서술하는 작품이 거의 없다는 것은 인물을 대하는 작가의 시선, 즉 그대로 마무리해도 좋을 결말에 헬기 하나를 보내는 따뜻함(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에 기인한다. 이러한 따뜻함이 때로는 군더더기나 작위적인 서술을 부르기도 하지만(피프티 피플), 인물들을 사랑스럽게 만들고 독자들을 끌어모으는 작품의 힘이 아닐까 싶다.

 

다채로운 상상력을 특장으로 지닌 작가이지만, 어떻게 우리는(또는 인류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지구를 포함한)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할까에 대체로 수렴하는 경향 탓인지 나는 단편을 읽으며 종종 정세랑의 다른 작품을 떠올렸다. 11분의 1을 읽을 때는 지구에서 한아뿐, 목소리를 드릴게요를 읽을 때는 보늬알다시피, 은열(옥상에서 만나요에 수록)을 떠올리는 식으로. 이는 작가가 지향하는 인간형을 뚜렷이 드러낸다는 측면에선 장점일 수도 있겠으나, 작품세계를 좁아지게 만든다는 한계점도 존재한다. 하지만 자신이 쓰고 싶은 상상력의 이야기가 있고, 우리가(또는 인류가)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 독자들이 생각해볼 수 있도록 그들 앞에 가볍게 쏘아올릴 수 있는 걸로 작가는 만족하지 않을까.

 

상대적으로 뒤쪽에 실린 단편들이 더 좋았고, 나는 정세랑의 작품에서 괴짜들이(너드(nerd)한 사람들이) 함께 우왕좌왕하며 함께하는 이야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차별, 환경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가볍고 재치 있는 이야기로 풀어내는 것 역시 작가의 필력일 것이다. 앞으로도 정세랑의 작품을 읽으면서 인간 존재의 치열한 투쟁이나 세계의 묵직함을 느끼게 될 일은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앞으로도 나는 그녀 특유의 재미와 발상, 그리고 따뜻함을 기대하며 책장을 펼치리라. 이는 나 역시 작가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며, 인물들 사이에 느껴지는 온기를 현실에서도 마주하길 바란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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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병‘이라는 가치 판단

본래 이 인용은 페이퍼의 아래에 적을 예정이었으나, 밑줄긋기 분량에 제한이 없는 북플과 달리 알라딘서재는 밑줄의 분량이 500자로 한정되어 있어 굳이 먼댓글 기능으로 올려둔다. 정리하는 입장에서 이래저래 난감한 상황이다...


에이즈는 체제 전복에 대한 공포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환경 오염이나 제3세계에서 끊임없이 들어오는 이민자들을 향한 공포처럼 최근에 표면화된 공포처럼 수세대에 걸쳐 계발되어 왔던 친숙한 대중적 공포를 조성하기에 쉬운 도구인 까닭에, 에이즈가 이 사회의 문명을 총체적으로 위협한다는 식의 망상을 품는 것도 당연하다. 더군다나, 에이즈의 확산이 일촉즉발에 있으며 감염되기도 아주 쉽다는 식의 공포를 계속 조장해 이 질병을 은유로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인다고 할지라도, 에이즈를 불법 행위(또는 경제적·문화적 퇴행)의 귀결로 보는 견해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에이즈는 비정상적인 행위에 내려진 심판이라는 관념, 에이즈는 무고한 사람들을 공격한다는 관념에이즈를 둘러싼 이 두 관념이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역병이라는 은유의 놀라운 능력이자 효험이다. 역병이라는 은유는 어떤 질병이 (실질적으로) 모든 이들의 질병인 동시에, 병에 걸리기 쉬운 타인들이 초래한 그 무엇이라고 여겨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201-202)


우리는 끔찍하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그렇지만, 사람들이 꽤 일어날 만한 일이라고 말하는재앙을 주기적으로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현대의 삶에 익숙하다. 이미지(카메라가 발명된 1839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지금의 현실을 꼭 닮은 옛날의 망령)는 대부분의 주요 사건들을 재현할 뿐만 아니라 사로잡는다. 사진이나 전자 기술을 통해 사건들을 모의해볼 뿐만 아니라, 그 사건이 가져올 결과를 산출하기도 한다. 현실은 실제의 것과 실제를 대신하는 변형물로 두 번 이상 분기된다. 사건이 있고, 사건의 이미지가 있는 셈이다. 게다가, 사건과 사건의 투영(投影)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흔히 사람들에게는 실제의 사건이 이미지처럼 현실적으로 보여지지 않을뿐더러, 사건의 이미지를 통해 사건을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정신에 각인된 윤곽을 적절히 사용해, 즉 우리의 정신에 투영된 가장 오래된 사건의 형상을 통해 현재의 사건을 확인하려는 반응을 보인다. (232-233)


물론, 질병이나 질병을 치료하는 과정을 가리키는 모든 은유가 도덕적으로 불미스럽고 왜곡되어 있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없어지는 꼴을 보고 싶은나는 에이즈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랬으면 하고 생각해 왔다은유는 군사적 은유이다. 군사적 은유가 뒤바뀐 형태, 즉 공공의 행복을 운운하는 의학적 모델이 아마 군사적 은유보다 훨씬 더 위험스럽고, 훨씬 더 심각한 결과를 빚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모델은 권위주의적인 법률을 강제적으로 정당화해 줄 뿐만 아니라, 국가 주도의 억압과 폭력(정체(政體)라는 신체의 불건전한부위와 해가 된다는 부위를 마치 외과수술하듯이 제거하거나, 화학 약품으로 통제하려는 것과 같은 행위)을 은연중에 수반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질병과 위생 상태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군사적 이미지가 가져올 결과가 전혀 중요치 않다는 것은 아니다. 군사적 이미지는 지나치게 선동을 일삼고, 상황을 지나치게 왜곡하며, 환자들을 고립시키거나 환자들에게 낙인을 찍는 데 단단히 한몫을 한다. (239)


절대화되는 것은 의학을 위해서도, 심지어는 전쟁을 위한 것일지라도 전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에이즈가 야기한 위기도 절대화같은 것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우리는 침략을 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의 육체는 전쟁터가 아니다. 환자는 어쩔 수 없이 생길 수밖에 없는 사상자도 아니고, 적군도 아니다. 우리의학, 사회는 어떤 상대가 됐을지라도……모든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맞서싸울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지 못했다. 다음과 같은 식으로 루크레티우스의 말을 바꿔 쓸 수 있다면, 나는 저 은유, 저 군사적인 은유에 대해서 한 마디 하고 싶다저 따위 군사적인 은유는 전쟁광에게나 돌려줘라. (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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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와 그 은유는 수전 손택이 인터뷰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은유로서의 질병의 후속작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다. 질병에 가해진 해석을 겨냥하고 은유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은 은유로서의 질병과 비슷하나, 에이즈에 가해진 은유와 해석은 도덕적 판단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는 에이즈가 성관계로 인한 감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¹

 

물론 손택이 질병을 둘러싼 모든 은유를 배격하는 것은 아니다. 서두에 밝히고 있듯이, 은유는 오래 전부터 과학적 지식과 표현력을 포함해 각종 이해 방식을 낳은 기초(129)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과의학의 발전과 세균의 발견은 질병을 다루는 언어를 공격적인 군사적 은유로 바꾸어 놓았고, 이는 사람들에게 질병을 어느 정도의 희생(구체적으로 말하면, 환자의 희생)이 따르더라도 물리쳐야 할 실체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군사적 은유는 에이즈에도 똑같이 작용하지만, 에이즈는 방탕한 성행위를 한다고 여겨지는 특정 집단에 내려진 역병이라는 은유를 떠안는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는 질병에 대한 종교적 은유가 성행하던 시기에 나타났던 은유/해석이었지만, 에이즈에 대해서는 이러한 전근대적인 은유가 횡행하고 환자들에게 수치심을 안긴다.


죄를 저지른 개인에게 내려진 징벌이 매독이라는 이런 생각은 사실상 음탕한 짓을 저지른 공동체에게 내려진 천벌이 매독이라는 생각오늘날의 산업국가에서는 에이즈가 이런 대접을 받고 있다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은 매독을 쉽게 치료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 실질적으로 오랫동안 유지됐다. 개인이 초래한(그리고, 악화시킨) 질병이라는 식의 현대적인 방식으로 이해되고 있는 암과 대조적으로, 에이즈는 개인은 물론이고 위험 집단의 구성원이 초래한 질병이라는 식의 전()현대적인 방식으로 이해되고 있다이처럼, 마치 중립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지극히 관료주의적인 이 위험 집단이라는 범주는 질병이 타락한 공동체를 심판해 왔다는 낡아빠진 생각을 재탕하고 있을 뿐이다. (178-179)


정상적인 집단과 그들을 분리하는 사고방식, 외래의 산물(또는 경멸받고 있는 사람들이나 공포를 안겨줬던 소수자들)과 결부(189)시키는 19세기적인 사고가 역병이라는 은유에 잠재되어 있다. 콜레라나 나병, 매독이 유행할 때마다 부상했던 도덕적 천벌, 재앙으로서의 은유가 다시 등장하는 건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공포를 이용해 과거의 가치로 회귀하려 하고, 자신이 원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과감한 조치도 불사하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에이즈는 자신들의 정치적 의제를 집단심리의 문제, 즉 국가적 자부심과 자신감의 문제로 해석하려 드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건이다. 이런 추악한 감정을 다루는 전문가 나리들이 에이즈는 비정상적인 성 관계에 내려진 천벌이라고 제 아무리 우긴다 할지라도, 이들을 움직이는 것은 전혀, 또는 특히 동성애 공포증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에이즈를 활용해 이른바 신보수주의자들의 주요 활동 가운데 하나를 추진하는 것, (좀 부정확한 표현이긴 하지만) 1960년대부터 진행되어 왔다고 말해지는 만인에 대한 문화전쟁을 추진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이 질병에는 의지의 정치즉 편협, 과대망상증, 정치적 유약함을 둘러싼 공포의 정치 일체가 들러붙어 있는 것이다. (201)


이러한 공포는 편견과 모순되는 의학적 사실마저 포용해 양립 가능한 것처럼 포장하고, 신체와 의식의 해방에 전근대적인 도덕(이를테면 순결과 같은)이라는 수갑을 채우며, 장기간 공연되는 연속극으로서의 종말론, 오늘날부터 계속되는 종말(232)을 부추긴다. 하지만 이러한 수사학은 재앙을 성찰하려는 노력을 마비(230)시킬 뿐만 아니라, 환자들을 고립시키고 낙인을 찍는 데 보탬이 될 뿐이다.에이즈를 둘러싼 공포는 발달된 사회가 가져온 주목할 만한 여러 재앙들(237) 중 하나일 뿐이라는 손택의 말에는, 그릇된 은유를 걷어내고 질병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듯이, 전 지구적인 위기(환경오염, 인구 과잉 등)에도 말세의 수사학을 걷어내고 제대로 보아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말세의 언어는 군사적 은유를 대동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어떤 과감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우리를 선동하기 때문이다.

 

손택은 인터뷰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은 우리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줍니다(252)라고 말한다. 질병을 향한 우리의 이분법과 외국인 혐오증도 마찬가지이며, 이런 사유에 젖어있을 때 우리는 현실을 왜곡하고 극단의 언어에 선동되기 쉬운 상태가 된다. 질병을 차별과 혐오의 언어로 불러온 역사를(매독을 프랑스 발진’, ‘독일 질병’, ‘나폴리 질병’, ‘중국 질병으로 불렀던 광신적 애국주의의 역사), 질병을 가리키는 군사적 은유가 파시즘과 나치즘의 선동 수단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언제나 신중하게 의심해야 할 것이다. 질병은 성적, 도덕적 타락을 보여주는 징표도 아니며, 어떤 희생이든 무릅쓰고 맞서야할 적군도 아닌 그저 질병일 뿐이다. 환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공격이나 반격’, 자책감과 수치심의 낙인이 아닌 '치료'다. 손택의 마지막 문장으로 마무리하자면 이렇다. “저 따위 군사적인 은유는 전쟁광에게나 돌려줘라.”(240)


¹ "HIV 감염인과 한 번의 성관계로 감염될 확률은 0.1~1%인 반면에 감염된 혈액으로 수혈을 받을 때 감염될 확률은 90%나 된다."("에이즈에 대한 오해와 진실 5가지", 메디칼업저버, 2012.11.28. http://www.mo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3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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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밑줄긋기의 난감함
    from 아무님의 서재 2020-03-09 01:40 
    본래 이 인용은 페이퍼의 아래에 적을 예정이었으나, 밑줄긋기 분량에 제한이 없는 북플과 달리 알라딘서재는 밑줄의 분량이 500자로 한정되어 있어 굳이 먼댓글 기능으로 올려둔다. 정리하는 입장에서 이래저래 난감한 상황이다...에이즈는 ‘체제 전복’에 대한 공포─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환경 오염이나 제3세계에서 끊임없이 들어오는 이민자들을 향한 공포처럼 최근에 표면화된 공포─처럼 수세대에 걸쳐 계발되어 왔던 친숙한 대중적 공포를 조성하기에 쉬운 도구인 까
 
 
 















국내에 출간된 수전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은 두 편의 독립된 작품인 은유로서의 질병(1978)에이즈와 그 은유(1989)를 한 권으로 묶었다. 앞에 실린 은유로서의 질병까지 읽은 상태인데, 이 책에서 손택은 주로 결핵과 암이라는 질병을 둘러싼 은유와 신화를 다양한 예술 작품을 통해 파헤친다. 손택의 의도는 질병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해석에 반대하며 그러한 해석이 낳는 질병에 대한 오해와 왜곡을 타파하고 투명성을 회복시키려는 것일 테다. 한데 이와 별개로 읽으면서 종종 들었던 생각은, 사회학자 또는 역사가의 입장에서, 사람들이 질병과 연결시키는 이미지나 은유가 당대 사회의 분위기와 대중 심리를 분석하는 데 유용한 자료일 수도 있겠다는 점이었다. 감정 표현을 자제하는 전근대적인 사회 분위기가 감정 표현을 질병으로 은유화했다면, 18세기 이후 사회 계층의 변동과 낭만주의는 결핵을 내적 자아의 표출또는 개성화의 한 방식으로, 감수성과 정념의 표출(또는 소모)로 해석하는 데(바꿔 말하면, 은유화하고 이미지화하는 데) 이바지했다. 결핵의 발병 원인과 치료 방법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암을 둘러싼 은유는 “20세기의 경제적 인간이 저지르는 부정 행위, 즉 비정상적인 성장, 에너지의 억제, 그러니까 소모하거나 소비하기를 거부하는 행위를 요약해 놓은 듯한 상상을 통해 묘사(95쪽)되며 전쟁의 언어에서 나온 은유가 지배적이다.


18세기에 가능해진 새로운 인구 이동(사회적이고 지리적인) 덕택에, 재산과 신분은 그냥 주어지지 않게 됐다. 그것들은 드러내야만 하는 무엇인가가 됐다. , 사람들은 의복(‘패션’)을 둘러싼 새로운 관념, 질병을 대하는 새로운 태도를 통해 자신의 재산과 신분을 드러냈던 것이다. 의복(신체 밖을 둘러싸는 외피)과 질병(신체의 내부를 감싸는 일종의 장식)은 자아를 대하는 새로운 태도의 비유가 되기 시작했다. (46-47)


이처럼 결핵이 낭만화됐다는 사실은 자아를 하나의 이미지로 드러내는 독특한 현대적 행위가 만연하게 됐음을 알려주는 최초의 사례이다. 결핵 환자 같은 용모가 혈통을 구별해주는 표식이라고 여겨지게 되자, 결핵 환자의 용모도 매력적이라고 여겨지게 됐다. () 결핵 환자 같은 용모가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연약함이나 뛰어난 감수성의 상징이 되어가자19세기 중엽과 말엽에 산업 제국을 건설했고, 수백 권의 소설을 써냈으며, 전쟁을 일으켜 대륙을 약탈했던 위인들이 점차 뚱뚱해진 것과 대조적으로, 이런 용모는 점차 여성이 갖춰야 할 이상적인 용모가 되어갔다. (48-49)


그러나 이러한 은유와 이미지 때문에 사람들은 미지의 질병이라는 유령을 더욱 두려워하고 현실을 왜곡하기도 했으며, 질병을 가진 자들에게 낙인을 찍어 쉽게 비난할 수 있게 만들어 재활의 의지를 꺾기도 했다. 암을 질병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악마 같은 적으로 취급하는 관습 때문에, 암은 치명적인 질병이 아니라 수치스러운 질병이(88) 되고, 질병의 이미지가 인과응보의 성격을 띠게 되면서 사람들은 암 환자를 감정을 표현하지 못해 생기는 병(75)을 가진 사람으로 비난했다. 질병에 대한 이런 공포는 심리학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욕구를 자극하고 이로 인해 질병에 대한 오해를 낳기도 했다(많은 사람들이 결핵이나 암을 유발하는 특정 성격이 있다고 믿었으며, 어느 영국 의사는 암 예방법으로 지나치게 힘을 쏟지 말고, 삶의 고난을 마음의 평정으로 견뎌내고, 무엇보다 그 어떤 슬픔에도 굴복하지 말라(81)고 말했다!). 손택은 질병에 씌워진 언어와 이미지의 신화를 파헤치고 내쫓으려 하며, 이러한 은유를 이용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나아간다.


암에 대한 우리의 관점, 그리고 우리가 암에 부여하는 은유들은 상당 부분 우리의 문화가 지닌 거대한 결점을 퍼뜨리는 수단이다. , 죽음을 대하는 천박한 태도, 감정 드러내기를 두려워하는 우리의 불안, 우리가 실제로 직면한 성장의 문제를 앞뒤 가리지 않고 대하는 우리의 무모함, 소비를 적절히 규제하는 선진 산업사회를 건설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무능력, 점차 가중되고 있는 역사의 폭력을 둘러싼 공포를 정당화하는 우리의 태도 같은 결점을 말이다. 예상컨대, 암의 은유가 생생하게 반영해 주고 있는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기 훨씬 이전에, 그런 은유가 곧 진부해질 것이다. (124)


암을 둘러싼 은유가 대부분 전쟁의 언어를 반영한다는 사실, 나치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등의 정치 세력이 은유를 독점하려 했다는 사실은 은유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암의 은유가 폭력을 선동하는 것이자,숙명론을 조장할 뿐이며, ‘가혹한조치를 정당화해 줄 뿐(119)이라는 사실은 달리 말하면 공포심을 조성하고 어떤 조치든 정당화하려는 그들의 의지가 은유를 부추겼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현대 사회의 문제를 진단하는 데 있어 이라고 지칭되는 사회 현상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라고 지칭하는 정치세력의 의도까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함을 의미한다. 이것을 질병의 사회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손택은 암이 이해되고 완치되는 비율이 높아진다 해도, 다시 말해 암이 탈신비화된다 해도 끔찍한 그 무엇인가를 암과 더 이상 비교하려 들지 않을 , 온통 신비로움으로 뒤덮여 있고,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는 환상을 짊어지고 있는 질병(124)에 다시금 은유가 이용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책을 읽는 시점이 이러한바, 현재 우리 사회의 모습에 비추어 이 책을 읽으며 우리는 어떠한지 돌아보게 된다. 빅데이터 분석도 가능해진 시대이므로, 시간이 지난 뒤 COVID-19(‘코로나19’로 지칭하지 않은 건 손택의 투명성을 지지하기 때문이다)를 두고 발화된 우리의 언어들을 분석하고 2020년을 진단하는 새로운 은유로서의 질병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병명이 바뀌는 과정, 끝없이 증폭되는 공포와 그것을 부추기고 이용하는 세력, 그리고 질병과 환자를 향했던 이미지와 은유들도 함께. 그 시점의 우리는 2020년의 우리를 자랑스러워할 것인가, 부끄러워할 것인가. 많은 일이 있은 뒤에 적어도 우리는 냉철하고 냉정하게 진단했다라고 말할 수 있길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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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스 캐롤 오츠의 그들을 읽던 중 연도의 오류가 눈에 띄어 짤막하게 적는다. 이 작품은 거칠게 정리하자면 1950~60년대 디트로이트를 배경으로 줄스와 모린이 겪는 이야기인데, 210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19667. 줄스는 북쪽으로 돌아온 것이 아직 몹시 기뻤기 때문에 삼촌이 있는 병원으로 매주 어머니를 차로 데려다주는 일이 전혀 싫지 않았다.”(470) 13장까지 줄스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말미에 어떤 극적인 사건을 줄스가 겪는 것으로 2부가 끝난다. 그리고 31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19664. 사랑에 빠진 소녀가 거울 앞에 서 있다. 꼼짝도 않고. 그녀의 시선은 자신의 모습에 고정돼 있다. ‘모린 웬들이라는 이름이 그 모습에 붙어 있다.”(563) 그런데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19664의 모린은 ‘19667이후의 줄스가 겪은 사건을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뒤에 이어지는 줄스의 이야기를 보았을 때 ‘19664‘19674인 것으로 짐작된다. 이것이 작가의 오류인지 아니면 출판사의 오류인지는 원서를 갖고 있지 않으므로 확인하기 어렵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은 14(2016).

 

일주일이 넘는 기간 동안 읽었는데, 700페이지가 넘는 분량임에도 이야기에 몰입하도록 만드는 전개와 문체, 구성은 대가의 솜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가족의 구성원들이 겪는 이야기라는 점은 최근 번역된 카시지와 유사하나, 69년에 출간된 그들 더 높은 성취를 이룬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많은 이유가 있지만 비참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토록 참혹했던(혹은 여전히 참혹한) 무형태의 현실에 문학은 형태를 부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말이다. 챕터의 말미에 총잡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전형적이었지만.¹ 카시지를 읽은 후에도 정리를 하고 싶었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하지 못했는데, 그들에 대해서도 전체를(그러니까 717페이지를) 아우를 수 있는 글로 정리했으면 싶다. 하지만 미루지 않고 할 수 있을지?















¹ When in doubt how to end a chapter, bring in a man with a gun. (This is Raymond Chandler's advice, not mine. I would not try this.) 조이스 캐롤 오츠가 트위터에 공개한 글쓰기를 위한 10가지 조언(tip) 중 다섯 번째. 해석은 이렇다. "어떻게 한 챕터를 끝내야 할지 망설여질 땐, 총을 든 남자를 등장시켜라(이건 내가 아니라 레이먼드 챈들러의 조언이다. 나는 이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10개의 조언 전체는 다음 링크에서 찾을 수 있다.

원문: https://www.huffpost.com/entry/joyce-carol-oates-writing_n_3617152

번역(은행나무 출판사): http://ehbook.co.kr/24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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